51화 그 남자의 할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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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그 남자의 할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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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그 남자의 할 말
2023.01.26.
해안도로를 달리던 친환경 전기자동차가 멈춰 선 곳은 뜻밖에도 길가에 방치된 돌하르방 앞이었다.
찰칵, 찰칵.
휴대폰 카메라 셔터가 쉴 새 없이 눌러졌다.
“시우야. 김치 해 보세요, 김치!”
“어…… 김, 치이…….”
“시우야. 돌하르방 코코 해 보자. 코를 만지면 복이 온대요.”
“어, 음…….”
극성스러운 요구에도 그런대로 잘 버티던 시우가 이번만큼은 입술을 물고 고민했다.
땡볕에 무쇠처럼 달궈진 구멍 난 돌의 감촉이 그다지 좋을 것 같지 않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우는 엄마를 좋아하는 속 깊고 착한 아이였다. 그래서 내키진 않지만, 엄마가 원하는 대로 돌하르방의 코를 슬쩍 만져 주었다.
예상대로 엄마는 좋아했고, 카메라 셔터는 신나게 눌러졌다.
길바닥의 돌하르방,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해변, 흔해 빠진 풀밭 등 시우에게 하나라도 더 많은 추억을 남겨 주고 싶은 다정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앙증맞은 차에 기대어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정혁의 눈길이 새파란 하늘로 향했다.
제주의 날씨는 바람 한 점 없이 맑고 화창했다. 일을 치고 잠시 몸을 피하기에 이만한 장소도 없을 거다.
서울로 돌아갈 때쯤이면 노인도 일의 전말을 대충 파악하고 있을 테니, 며칠 이곳에 숨어 지내며 노인네 애를 태우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때까지 쉬고, 또 웃고 유시우랑 실컷 놀 생각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먹긴 했는데, 아무래도 유다정이 저러는 건 조금 너무하지 싶다.
“시우야! 여기 너무 예쁘다. 브이 해야지, 브이!”
셀카봉을 쭉 뻗은 다정이 시우에게 브이를 강요했다. 더위에 지친 애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참 혹사였다.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나 뭐라나.
햇살에 찌푸린 눈으로 극성스러운 여자를 보는데 절로 한숨이 흘렀다. 저러다가 제 아들을 죽이지 싶어 보다 못한 정혁이 한 소리 질렀다.
“유다정, 그만 가!”
“가긴 어딜 가요? 차정혁 씨나 가세요.”
칼같이 돌아온 대답에 정혁의 인상이 떫게 구겨졌다.
“그만 가자니까. 유시우 배고파!”
“헉!”
그 순간 다정은 놀란 숨을 집어삼켰다. 호텔 체크인 전에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식당을 예약한 사실을 그제야 떠올렸기 때문이다.
“시우야! 우리 늦었어요. 빨리빨리.”
애를 마구 못살게 굴더니 이제 와 부랴부랴 재촉한다. 그 모습을 보며 정혁은 긴 한숨을 몰아쉬었다.
차로 20여 분을 달려 도착한 곳은 제주의 명물 갈치조림 전문점이었다.
“갈치 해물 조림 소짜…….”
주문을 하다 말고 다정의 눈길이 정면으로 향했다. 형광 연두색 티셔츠를 입은 남자가 당연하단 듯이 맞은편을 차지하고 있었다.
다정은 불만스럽게 입술을 꾹 다물다가 다시 주문을 이어 나갔다.
“……대짜로 할게요. 갈치구이도 주세요.”
잠시 후 갈치 살점을 능수능란하게 발라내는 직원의 숟가락 쇼를 보며 다정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우리 시우 많이 먹어요.”
“잘 먹겠습니다!”
엄마가 아닌 앞접시를 향해 꾸뻑 인사한 시우가 숟가락을 쥐었다. 숟가락 위에 갈치 살점을 얹어 주자 배가 고팠던지 잘 먹는다.
흐뭇하게 바라보던 다정도 갈치 한 토막을 덜어 앞접시에 내려놓았다. 촉촉하게 양념까지 끼얹자 더 먹음직스러웠다.
양념 밴 살점을 듬뿍 떠 막 입으로 가져가려던 찰나였다. 밥이 수북이 담긴 숟가락이 코앞으로 불쑥 다가오더니 당당히 요구했다.
“나도.”
어이없게 바라보던 다정이 볼멘소리를 씹어 뱉었다.
“차정혁 씨는 손 없어요?”
“유시우도 손 있어.”
제 이름이 언급되자 오물거리던 시우의 천진한 눈이 도르르 굴렀다.
“시우는 애잖아요. 차정혁 씨가 애예요?”
“남자는 다 애란 말도 몰라?”
“…….”
너무 진지하니까 말문이 다 막혔다.
뚱하게 노려보던 다정은 결국 하는 수 없이 갈치 살점을 그의 밥숟가락 위에 얹어 주었다. 그제야 얌전히 숟가락을 되돌리곤 군소리 없이 먹는다.
어쩜 5년 전하고 달라진 게 하나 없는지.
시우와 제 여행에 끼어든 불청객 아닌 불청객이 얄미워 핀잔이 튀어 나갔다.
“차정혁 씨 피난 왔다면서요. 언제 갈 거예요?”
“밥 먹고.”
천연덕스러운 대꾸와 함께 다시 내밀어지는 밥숟가락을 보며 다정은 한숨이 깊었다.
* * *
체크인 시간에 맞춰 도착한 호텔에서 다정은 어이없는 상황과 마주했다.
“예약이…… 안 됐다고요?”
“그렇습니다, 손님.”
“그럴 리가 없어요. 분명 예약했다고요. 여기 보세요.”
다정이 황급히 휴대폰을 뒤져 예약 확인 메시지를 내보였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프런트에서도 작은 혼란이 빚어졌다.
얼마 후 진상을 파악한 직원이 다정에게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손님,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 실수로 이중 예약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예약한 객실은 이미 다른 분이 체크인한 상태라…….”
“그럼 다른 객실을 줘야지 이렇게 세워 두면 어떡해요?”
“그럼 좋겠지만 성수기라 남는 객실이 없어서요…….”
다정은 난감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불뚝 화가 치밀었지만, 사과하는 이들에게 분풀이를 하는 건 의미가 없었다.
다른 숙소를 알아보려면 한시라도 서두르는 게 현명할 테지만, 이런 피크에 빈 객실이 있을 리 만무했다.
몸 둘 바를 몰라 하던 직원이 재차 허리 숙여 사과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가 예약금은 2배로 환불하겠습니다.”
예약금이 문제가 아니다. 집도 절도 없는 제주에서 시우까지 데리고 길바닥에서 노숙을 할 수도 없을 노릇이라 눈앞이 캄캄했다.
그때 로비에 돌고래 소리가 꺄륵 울렸다. 돌아보자 시우를 어깨에 들쳐 멘 정혁이 호텔 입구를 향해 돌아서고 있었다.
깜짝 놀란 다정이 냉큼 그를 쫓았다.
“차정혁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짐 챙겨.”
아차 싶었던 다정의 눈길이 프런트 앞에 덩그러니 버려진 트렁크로 향했다. 퍼뜩 돌아가 좌우로 트렁크를 질질 끌며 다시 정혁을 뒤쫓았다.
“차정혁 씨. 시우 데리고 어디 가냐고요!”
“내 호텔로 가.”
“싫어요! 내가 왜 차정혁 씨 호텔엘 가요?”
다정이 소리치자 성큼 걸어 나가던 정혁의 발이 멈춰 섰다.
“그럼 유다정은 길바닥에서 자. 근데 유시우는 안 돼.”
더 말할 필요 없다는 듯 정혁은 냉정하게 돌아섰다. 휙휙 방향이 바뀔 때마다 비행기처럼 팔을 펼친 시우가 즐거워 꺄륵 웃는다.
“이봐요! 차정혁 씨! 시우 내놔요!”
“싫어.”
단칼에 자르며 정혁은 따라잡힐세라 보폭을 넓혔다. 고집 센 여자를 뜻대로 조종할 때는 유시우만 한 미끼도 없었다.
“차정혁 씨!”
땡볕 아래 트렁크를 질질 끌며 다정은 허둥지둥 그를 뒤쫓았다.
* * *
목적지에 차가 멈추자마자 정혁은 시우부터 꺼내 안았다. 유다정에게 줘 버리면 도망치려 들지도 몰랐기에 유시우를 선점하는 건 필수였다.
뒤이어 차에서 내린 다정은 도착지의 전경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여기가 호텔이라고?
빌라형 호텔이 각광을 받는 추세라지만, 유럽풍 전원주택 같은 외관은 호텔이라기엔 너무나 생소했다.
“마음에 안 들어?”
무심한 물음에 다정은 얼이 반쯤 나간 채 도리질을 쳤다.
“아, 아뇨. 그게 아니라…… 차정혁 씨 혼자 왔는데 이렇게 큰 델 예약한 거예요?”
“왜 혼자야? 유다정이랑 유시우도 있잖아. 애들 뛰어놀기 좋은 데로 알아보랬는데, 마음에 안 들면 지금이라도 다른 데 알아보고.”
다정의 눈이 가늘어졌다.
“우연이라면서요.”
“그치. 우연이지.”
모자를 염두에 두고 예약했다고 방금 제 입으로 실토해 놓고 뻔뻔하게 우긴다.
이쯤 되자 의심이 확신으로 굳어졌다. 내통자가 있는 게 분명했다. 배솔이, 아니면 제 아들이다.
비행 이착륙 시간까지 정확히 알고 공항에 나타난 걸 보면 배솔이가 유력했다. 아니, 어쩌면 저만 빼고 모두 한통속일지도 모른다.
배신자들.
“마음대로 써. 여기 있는 동안 전부 유다정 거니까.”
딴전을 피우던 정혁이 어느새 다가와 우쭐한 투로 말했다.
가뜩이나 부담스러운데, 하필 또 이렇게나 호화로운 곳이라니.
4박 5일 일정에 다른 숙소를 알아보는 건 글렀고,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다정의 심란한 고민은 계속되었다.
그때 시우의 해맑은 외침이 귀에 잡혔다.
“엄마아! 수영장! 수영장 있어요! 시우 풍덩!”
“어어, 시우야. 수영장이 있네. 너무 좋다. 그치?”
“우와!”
다른 걸 떠나 시우가 이렇게나 좋아한다.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다정은 체념해 버리고 말았다.
정혁이 어딘가로 전화를 걸고 얼마 후, 골프장에서나 볼 법한 카트가 진입로를 거슬러 올라오는 게 보였다. 이윽고 유니폼 차림의 남녀 한 쌍이 카트에서 내려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정중히 머리를 숙이며 자신을 호텔의 총지배인이라 소개한 40대 남자는 직접 가지고 온 서류에 깍듯하게 체크인 수속을 밟아 주었다.
“저희 호텔 펜트하우스는 VVIP 고객을 위한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게스트룸과 다이닝룸, 주방과 서재 그리고 야외풀이 갖추어져 있고, 산책로와 이어진 숏 코스 골프장을 포함해 250여 평에 달하는 구역을 개별적으로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쪽은 투숙하시는 동안 객실 서비스를 전담할 김명순 씨입니다.”
지배인이 소개하자 역시나 40대로 보이는 단정한 여자가 허리를 굽혔다.
“전담 메이드 김명순입니다. 안락하고 편안하게 모시겠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즉시 호출해 주십시오.”
김명순 씨가 친절한 미소를 머금고 다정에게 명함을 건네었다. 얼렁뚱땅 받아 든 다정의 얼굴에 어색한 웃음이 어렸다.
이 넘치는 위화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 * *
2층 구조의 객실은 넓기도 넓은 데다 전망이 확 트여 발코니 창을 통해 바다가 한눈에 담겼다.
거실과 인접한 다이닝룸에는 와인셀러와 냉장고 같은 집기들이 갖추어져 있고 중앙엔 멋스러운 마호가니 식탁이 배치되어 있었다.
호기심에 냉장고를 열어 본 다정은 혀를 내둘렀다. 냉장고엔 갖은 음료가 빼곡했고 냉동실도 이탈리아산 젤라또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다정은 고개를 잘잘 흔들었다. 이런 건 절대 먹으면 안 된다고 배웠다.
“어? 아이스크림!”
이런, 시우가 봤다. 다정은 냉큼 냉장고 문을 닫고 돌아섰다.
“시우야, 아이스크림 나가서 먹자.”
“어, 음……?”
바로 저기 있는데 왜 그래야 하냐는 듯 시우의 동그래진 눈은 냉장고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때 냉동실 문이 다시 열리고 정혁이 아이스크림 통을 꺼내 들었다. 놀란 다정이 가로채려 하지만 철통같은 수비에 턱도 없다.
“차정혁 씨 뜯지 말아요!”
“유시우가 먹고 싶다잖아.”
“이런 거 막 꺼내 먹으면 추가 요금 나온다고요.”
정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렇게나 알뜰살뜰한데 왜 한숨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돈 벌어서 뭐 해? 애 먹고 싶은 거 하나 못 사 줄 거면.”
타박을 던지고 돌아선 그는 밀봉된 아이스크림 뚜껑을 가차 없이 뜯어 발겼다.
울며 겨자 먹기로 비싼 아이스크림을 먹던 중 잔잔한 목소리가 울렸다.
“나 할 말 있어.”
“뭔데요?”
체념의 연속이라 다정의 목소리가 맥 빠지게 흘러나왔다. 잠시 기다려도 말이 없자 다정의 눈길이 그의 얼굴로 향했다.
할 말이 있다더니 머뭇거리는 눈치기에 다정이 핀잔을 주었다.
“뭐예요? 싱겁게.”
곧이어 다정의 앞으로 뭔가가 툭 굴러왔다. 동그랗게 구긴 메모지였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펼쳐 보란 듯이 눈짓한다.
늘 거침없이 뱉고 보는 남자가 무슨 할 말이기에 이렇게 뜸을 들이는지 의아했다.
미심쩍게 보다가 꼬깃꼬깃한 종이를 펼쳐 본 다정은 화들짝 놀라 퍼뜩 종이를 움켜쥐었다. 그러곤 아무것도 못 봤다는 듯 허둥지둥 아이스크림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자 툭. 공처럼 말린 메모지가 다시 굴러왔다. 무시하는 게 답이란 생각에 이번엔 보지 않고 한쪽으로 슥 밀었다.
그러자니 또다시 툭, 투둑. 툭. 굴러와 쌓인 메모지가 대여섯 개나 되었다.
“차정혁 씨. 뭐 하는 거예요!”
“할 말 있댔잖아.”
“네, 그래서 봤잖아요!”
다정의 귓바퀴가 불이 붙은 것처럼 새빨갰다. 되레 성을 내자 정혁의 눈썹이 역으로 꼿꼿하게 일어섰다.
“여섯 번이나 말했는데, 할 말이 그게 다야?”
“그럼 무슨 할 말이 더 필요해요? 그리고 어린애도 아니고 종이 아깝게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괜히 화끈거려 꾸짖자 정혁의 손가락이 살그머니 구부러지더니 테이블 위를 꼼지락꼼지락 덧그렸다.
전에 없을 낯간지러운 모습이 어딘가 수줍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한다는 말이.
“유시우가 들으면 창피하잖아.”
이번에도 제 이름이 나오자 아이스크림을 먹던 시우의 천진한 눈이 두 사람을 오갔다.
구겨진 메모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손가락 틈에서 더 바짝 조여졌다. 여섯 번이나 말했으면 다 같은 내용일 거다.
「유다정, 좋아해.」
「좋아한다고! 왜 암말 안 해?」
「좋아한다잖아. 무슨 말이라도 해 보지?」
「반응이 그게 뭐야? 좋아한다고 했는데.」
「내가 좋아한다니까 너무 좋아서 말문이 막힌 거야?」
온갖 부끄러운 말로 채워진 메모지가 다정의 손바닥을 간지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