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가족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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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가족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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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가족 여행
2023.01.22.
소파에 기댄 선영은 초조한 듯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박 회장 댁 저녁 초대에 간 현아가 혹여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노심초사였다. 세상 물정 모르고 순진하기만 해서 늘 물가에 내놓은 애처럼 불안하니 원.
그나저나 할망구 노여움이 오래가지 않아 다행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귀한 산삼이 귀한 값을 톡톡히 한 게지. 어쨌든 약혼을 재추진키로 확답을 들었으니, 마음을 놓아도 될 터다.
골치를 앓던 일이 해결되자 미뤄놨던 불만이 스멀스멀 밀려 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괘씸하다는 듯 선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회장님, 정혁이 말이에요. 정말 너무하는 거 같아요. 이제쯤이면 인사라도 한번 왔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요.”
제아무리 박 회장의 금쪽같은 손자라도 가족으로 엮이면 명색이 장인 장모였다.
혼담이 정해진 게 언제인데 인사는커녕 안부 한번 묻는 일이 없으니, 무성의하기 짝이 없었다.
이번 일만 해도 그랬다. 동영상 때문에 제 할머니가 혼담을 물리겠다며 엄포를 놓는데도, 나 몰라라 손을 놓고 있던 게 못내 괘씸했다.
원체 정 없고 살갑지 않은 성정은 둘째 치고라도, 이리 무심해서야 장차 장모 대접이나 제대로 받을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그렇잖아요. 대체 우릴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그래요? 사위로 들이면 회장님이 따끔하게 버릇 좀 고쳐놓으세요.”
“…….”
계속 보채는데도 대꾸 한마디가 없자 선영의 눈길이 소파 상석으로 향했다.
그녀의 남편 오철중 회장은 저녁을 먹은 지가 언제라고 소파에 앉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선영은 도리질을 쳤다. 낼모레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 반쯤 벗겨진 이마며 툭 튀어나온 배까지.
젊을 땐 분명 이러지 않았는데, 나이가 들수록 점점 추레해지는 남편을 보면 한숨만 나왔다.
총기는 흐려지고 젊어 기세 좋게 밀어붙이던 결단력과 추진력도 더는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이러니 하나뿐인 딸의 결혼문제도 제가 발 벗고 뛰어다닐 수밖에.
「끝나자마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
메시지를 보내고 얼마나 되었을까, 현아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결과가 궁금했던 참이라 냉큼 전화를 받은 선영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딸은 거의 이성을 잃고 울부짖고 있었다.
곧장 집을 나서 현아의 오피스텔로 들어서자 통화 때 들었던 울음바다가 이어지고 있었다.
“흐어므하아아아! 하아아앙!”
선영을 보자마자 현아의 오열이 더 거세졌다. 선영은 침대에 쓰러져 통곡하는 딸에게 달려갔다.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이 엉망진창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엄마한테 말을 해야 알지.”
“어므아항! 어쁘하가 나랑 겨런 아난대에에! 흐아아앙……!”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여차여차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선영은 이를 까득 짓물었다.
박 회장, 이 망할 할망구!
* * *
귀에 붙인 휴대폰에서 짱알짱알 시끄러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회장님! 오늘 아침까지만 하더라도 철석같이 약속하셨잖아요!』
선영이 맹렬한 기세로 따지고 들었다. 그랬음에도 박 회장의 반응은 의외로 덤덤했다.
현아가 눈물 바람이 되어 돌아갔으니, 선영이 어떻게 행동할지는 짐작한 바였다.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어요?! 손자 단속을 어떻게 했길래!』
이쯤 되자 평온하기만 하던 박 회장도 눈살이 가늘어진다.
염치가 없다거나 미안해서 되바라지게 선을 넘는 선영을 보아준 게 아니다. 혼란스럽기로 말하자면 박 회장도 못지않았다.
당혹스러웠고, 머리가 지끈거릴 만큼 생각이 많아 선영의 투정을 귀담아들을 여력조차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선을 넘으면 참으려야 좋은 소리가 나갈 리 없다.
“고얀! 네깟 년이 감히 내 손자 단속을 운운해?! 네 딸년 행실이 방정치 못해 우리 정혁이가 정을 못 붙이는 걸 뉘에게 따져 물어, 묻긴!”
잠잠하기만 하던 노인이 기염을 토하자 아차 싶던 선영이 즉각 꼬리를 말았다.
『따, 따지는 게 아니라요, 회장님……. 차 서방, 아니 차 전무가 그런 말을 한 게…….』
“네년도 귓구멍이 있으면 들었을 거 아니냐! 내 손자가 네 딸년이 싫다지 않아! 알아먹었으면 닥치고 끊어!”
뚝 끊은 휴대폰을 사납게 노려보던 눈길이 매섭게 올라섰다.
“정혁이 놈 전화 넣었냐?”
“휴대폰을 안 받으십니다.”
기류가 심상치 않다 보니 항시 나긋나긋하던 윤 비서의 목소리에도 절도가 담겼다.
마뜩잖게 인상을 구긴 박 회장의 눈꺼풀이 지그시 내리 감겼다.
현아와의 결혼이 문제가 아니다. 이러쿵저러쿵 말은 많아도 할미 말이라면 순순히 따르던 녀석이었다.
그런데 그런 손자가 난생처음 반항을 했다. 박 회장으로선 세상이 지각변동을 일으킨 것만큼이나 큰 이변이 아닐 수 없었다.
* * *
오전 9시 10분.
김포발 비행기가 제주 국제공항에 착륙했다.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기도 전부터 기내가 분주해졌다. 한국인 특유의 성미대로 안전띠를 풀어헤친 탑승객들이 좌석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웅성대는 사람들을 보며 덩달아 마음이 바빠진 다정의 눈길이 옆좌석으로 향했다.
이륙할 때만 하더라도 비행기를 탄다며 방방 신이 났던 시우는 세상 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이른 아침 집을 나서 공항으로 이동하고 낯선 곳을 두리번거리느라 피곤할 만도 했다.
다정은 한숨 같은 웃음을 흘렸다. 깨워 봤자 조는 아이 손을 잡고 걷느라 시간만 지체될 게 뻔해 하는 수 없이 잠든 시우를 들쳐 품에 안았다.
성수기를 맞아 북적이는 제주 공항은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수화물 라인에는 이른 아침부터 제주를 찾은 관광객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었다.
목을 빼고 확인하자 아직은 빈 레일만 돌아가고 있었다. 다정은 반대편 벤치에 앉아 시우의 등을 도닥여 깨웠다. 찌뿌둥하게 눈을 뜬 시우가 잠이 가득한 눈을 비볐다.
“유시우. 그만 일어나야 하는데.”
“어……. 엄마…… 비행기.”
아직도 비행기를 타고 있는 모양이었다.
제법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퉁탕대는 소리가 귀에 잡혔다. 냉큼 일어난 다정이 시우에게 당부했다.
“엄마 가방 찾아올게요. 시우는 여기서 꼼짝 말고 기다려요.”
“어, 네에…….”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간 다정의 눈이 바빠졌다. 4박 5일 일정에 아이까지 있어 커다란 것과 중간 사이즈 트렁크가 두 개나 되었다.
커다란 트렁크 하나를 찾고 나머지 하나를 기다리는 중에도 종종 눈길은 뒤쪽 벤치로 향했다.
시우는 벤치에 얌전히 앉아 졸린 눈을 하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이윽고 다정의 눈이 반짝 뜨였다. 이번 여행을 위해 새로 장만한 트렁크의 새빨간 컬러가 눈에 확 띄었다.
머지않아 짐들을 찾아 벤치로 돌아온 다정은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텅 빈 벤치를 바라보는 눈에 당황이 어렸다.
나름 신속히 짐을 찾아 돌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그사이 시우는 사라지고 없었다.
사태가 파악되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바삐 주위를 돌아보지만, 인파로 북적이는 곳에서 아이의 형체는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다정은 뭐부터 해야 할지 몰라 허둥거리다가 근처에 있는 등산복 차림의 아주머니 무리로 다가갔다.
“저기! 혹시 이거랑 같은 티셔츠 입은 요만한 남자아이 못 보셨어요?”
발목까지 떨어지는 쉬폰 드레스와 레이어드 된 형광 연두색의 티셔츠를 가리키며 물었다. 시우와 함께 입으려고 지난번 백화점에서 구입한 커플 티셔츠였다.
다급한 목소리에 아주머니들도 호들갑스레 입을 열었다.
“난 못 봤는데. 이를 어째? 애기 잃어버렸나 보네.”
“애기 엄마, 얼른 찾아봐요. 무슨 일이야 있겠어?”
꾸뻑 머리를 숙이고 돌아선 다정은 허둥지둥 공항 시설 안내 표지판 앞으로 달려갔다.
최근 들어 어째 툭 하면 애를 잃어버리고 마는지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자책을 하는 것도 시우를 찾은 다음이었다.
안내 표지판을 살피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미아보호소……. 아, 아니, 방송실?”
어디부터 가야 할지 몰라 발을 구르던 차였다.
“엄마아!”
넓은 공간에 명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꺄륵 거리는 돌고래 소리가 뒤따랐다.
시우다.
다정의 눈길이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움직였다. 형광 연두색 티셔츠를 입은 아이의 모습이 단번에 눈에 잡혔다.
뜻밖에도 시우가 발견된 곳은 공중이었다. 새카만 사람들의 머리 위로 비죽 솟은 아이가 다정을 향해 해맑게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두 고사리손이 무언가를 꽉 붙잡고 있다. 이윽고 제 아들의 작은 손이 움켜쥔 형상을 발견한 순간 다정의 목으로 놀란 숨이 삼켜졌다.
“엄마아! 호랑이 아저씨! 호랑이 아저씨!”
말고삐처럼 정혁의 머리카락을 꼭 움켜쥔 시우가 넓은 어깨 위에서 궁둥이를 풀썩대며 소리쳤다. 왜인지 비행기를 탈 때보다 더 신이 난 모양새였다.
다정은 황당한 표정으로 눈앞에 나타난 남자를 바라보았다.
제주 공항에 등장한 남자는 늘 보던 슈트 차림이 아니었다. 반바지 차림에 플립플랍을 대충 발에 꿰어 신고, 손에는 크지 않은 짐가방 하나 달랑 든 게 다였다.
더 충격적인 건 그의 미끈한 상체를 감싸고 있는 게 다른 것도 아닌 형광 연두색의 티셔츠라는 거다.
사이즈만 다를 뿐 다정과 시우가 입은 것과 같은 티셔츠였다. 지난번 선물한 거였는데, 하필 입어도 왜 저걸 입고 나타났는지 모를 일이다.
다정은 어안이 벙벙해 중얼거렸다.
“차정혁 씨가 왜 시우를…….”
“주웠어. 누가 버렸길래.”
버리긴 누가 버렸다고!
잃어버린 줄 알고 놀란 가슴을 생각하면 한 대 때려 줘도 시원찮았다. 그런 심정을 담아 노려보는데, 별안간 손뼉이 짝 마주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애기 엄마, 애기 찾았나 봐! 다행이다.”
갑자기 등장한 등산복 차림의 아주머니 무리가 세 사람을 에워싸고 부산스럽게 소란을 떨었다.
“애 아버지가 데리고 있었나 보네. 그런 줄도 모르고 애 엄마만 까무러칠 뻔했지 뭐야.”
“아이고. 옷도 예쁘게 맞춰 입었지. 애랑 신랑이랑 어디 가서 잃어버릴 일은 없겠다.”
호호거리는 웃음이 다정을 에워쌌다.
“세상에. 붕어빵이네, 붕어빵이야. 인물도 좋다.”
“어쩜, 판박이가 따로 없지. 애기 엄마 좋겠어.”
큰 남자와 작은 남자의 얼굴을 오가는 아주머니들의 얼굴에 흐뭇한 웃음이 물렸다. 이어서 부러움에 사무친 눈빛이 일제히 다정에게 날아들었다.
“애기 엄마, 복도 많아.”
“그러게! 전생에 나라라도 구했나 봐? 난 전생에 뭐 했나 몰러. 역적이었나? 호호호.”
하하, 어쩌지 못하고 하하 웃는 다정의 웃음이 몹시 어색했다.
* * *
공항 앞에서 인계받은 렌트카에 짐이 실렸다.
친환경 전기 자동차는 시우와 단둘이 타기 딱 안성맞춤이었다. 미리 추가한 옵션대로 카시트도 꼼꼼히 부착되어 있었다.
시우를 카시트에 앉히고 곧장 제주 해안을 따라 드라이브가 시작되었다.
여행 1일 차의 첫 일정이었다.
시속 50킬로로 질주하던 다정이 창문을 활짝 내리고 차창 밖으로 팔을 뻗었다.
손끝을 스치는 바람의 감촉이 좋았다. 파란 하늘, 눈 부신 햇살, 미세먼지 없는 청정한 공기. 그야말로 가슴이 확 트이는 기분이었다.
“시우야. 저기 하늘 좀 봐. 너무 예쁘다. 그죠?”
“어…….”
엄마의 목소리에 거의 감겨 있던 시우의 눈이 반짝 떠졌다가 다시 스륵 감겼다.
시우는 잠이 와 해롱대기 바빴다. 첫 비행의 여독이 덜 풀린 모양이다. 혼자 들떴다가 겸연쩍어진 다정의 눈길이 괜히 조수석을 향해 뾰족해졌다.
“근데 차정혁 씨는 왜 여기 타고 있는 거예요?”
시우한테 하늘 좀 봐! 라고 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말투였다. 작은 차에 대충 몸을 구겨 넣고 차창 밖을 응시하던 그가 잠꼬대처럼 중얼거렸다.
“그냥, 한가해서.”
“우리 제주도 오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잠깐 피난 왔더니 유다정이랑 유시우가 여기 있었을 뿐이야.”
6.25도 아니고 피난은 무슨.
“우연이라고요? 하필 그 옷을 입고 나타나서?”
다정은 형광 연두색이 쨍한 정혁의 티셔츠를 못마땅하게 쏘아보았다. 덕분에 꼼짝없이 가족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시우와 자신의 커플티가 가족티가 되어 버린 건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우연 싫으면 필연 하든가.”
제가 말해 놓고도 우스운지 그의 입가에서 피식거리는 웃음이 샜다. 그러더니 못내 불만이라는 듯 투덜거린다.
“휴가 가면 간다고 말을 하지 그랬어.”
“말을 안 해도 이런데, 말을 했으면요?”
“진작 말했으면, 지중해 쪽으로 한 바퀴 돌고 오고 좋잖아.”
“뭐래.”
다정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헛숨을 뱉었다.
얼렁뚱땅 성사된 첫 가족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