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차정혁의 책임 (49/114)


49화 차정혁의 책임
2023.01.19.



“……코, 콩떡아! 내 말 좀 들어봐. 응?”

“콩떠억? 콩, 떠어―억?”

사근사근하기만 하던 콩떡이 도끼눈을 치떴다.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을 부릅뜨자 안광에 맺힌 서슬이 퍼렇게 희번덕거렸다.


“오, 오해야! 다정 씨가 상황을 잘 몰라서 오해한 모양인데, 내가 다 설명할게. 응?”

다정이 목격한 일을 어떻게든 무마하려 윤두중이 횡설수설 변명을 늘어놓았다.

허우대 멀쩡해서 여자 등이나 쳐 먹고 다니는 시시하고 찌질한 놈팡이. 운명의 상대라고 떠벌리고 다녔던 남자의 실체는 고작 그랬다.

그 진실은 충격을 넘어 견딜 수 없는 분노를 유발했고 솔이는 이성을 상실했다.


“야아아―!”

솔이가 고함을 빽 내질렀다. 동시에 원반처럼 날아간 쟁반이 타당 소리를 내며 아깝게 벽을 맞고 튕겨 나왔다.

근육질 남자가 반사신경 좋게 냅다 머리를 감싸고 웅크리지 않았다면 안면에 보기 좋게 명중했을 거다.

못내 아쉬웠던지 솔이가 까득 이를 물고 돌아선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이번엔 계산대 위에 있던 묵직한 물체를 집어 들었다. 아담한 커피콩 나무가 자라고 있던 토분이었다.

펄럭이는 리본에 새겨진 궁서체 문구가 선명했다.

「축 이전! 싸장님 대박 나요! 너의 영원한 짝꿍 다정이♥」


“이 나쁜 자식아! 당장 꺼져―엇!”

토분이 허공으로 떠오른 순간 두중이 놀란 숨을 학 집어삼켰다. 묵직해 보이는 게 명중했다간 상당한 타격이 있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이쯤 되자 더는 재고의 여지가 없음을 깨달았는지 두중은 냉큼 카페 밖으로 줄행랑을 쳐 버렸다. 겁을 집어먹고 내빼는 게 영 덩칫값을 못 하는 남자였다.


“이 자식아! 다시 한번 내 눈에 띄면 죽을 줄 알아!”

이미 사라지고 없는 두중을 향해 솔이는 방방 뛰며 악을 내질렀다.

* * *



“흐아아아아아아앙!”

요란한 대성통곡이 카페 안을 휩쓸었다. 출입문에 Closed 표지판이 붙은 지도 한참이었다.

좀처럼 오열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솔이에게 다정이 조심스레 물었다.


“솔이야. 혹시 보증…… 같은 거 서 주거나 돈 안 줬지?”

이런 걸 확인하기 전에 위로가 먼저라는 걸 알지만 현실적인 문제부터 짚고 넘어가야 했다.


“허엉…… 엉! 안 해 줘써어어어헝!”

오열과 통곡을 쏟는 중에도 대답은 한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커다란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이 안타까워 가슴이 미어졌다.

덩달아 입술을 비죽이던 다정은 흐느끼는 솔이의 어깨를 보듬어 안고 다독였다.

마침내 인생의 동반자를 만났다며 좋아하던 모습을 보던 게 엊그제인데 다시 이렇게 상처만 남고 말았다.

겉으로만 괄괄하지 한없이 물러터지고 마음 여린 아이였다. 눈물은 또 어찌나 많은지.


“으하하항―! 다정아항! 너도 알지? 내가 우리 시우 키운다고 그동안 연애도 못 하고오―! 흐아아앙.”

이 대목쯤 되면 다정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진다. 힘을 주고 꾹 견디던 다정의 눈시울이 달아올랐다.


“알지, 잘 알지. 내가 미안해. 내가 정말 미안해.”

그간 인연을 만들지 못한 게 시우 때문이라고 확답할 순 없지만, 솔이가 친구 아들을 제 자식처럼 헌신적으로 돌보아 준 건 사실이었다.

머리를 끊어 신을 삼아도 갚지 못할 은혜였다.

그랬기에 다정은 이번 일에 큰 책임과 미안함을 느꼈다. 윤두중이 다른 여자와 시시덕대는 꼴을 목격했을 때 이성을 잃을 만큼 분노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내가 정말 미안해. 미안해. 솔이야…….”

“결혼할 줄 알아찌이잉!”

“응응! 세상에 나쁜 놈. 천하에 죽일 놈!”

“흐하하항! 나도 결혼해서 시우처럼 예쁜 애기 낳고 알콩달콩 살고 싶었단 말이야!”

소박하기만 한 바람에 다정은 울컥한 마음을 누르지 못하고 결국 눈시울을 적시고 말았다.


“그럴 거야. 넌 꼭 좋은 사람 만나서 예쁜 애기도 낳고 사랑받으면서 살 거야. 꼭…….”

쪼로로롭, 쫍, 쪼롭.

초상집처럼 침울한 공간에 경박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울먹이던 다정의 눈이 대번에 뾰족해진 채 맞은편에서 빨대를 물고 있는 남자에게 날아갔다.

늘 그렇듯 정혁은 별다른 말도 없이 특유의 삐딱한 자세로 앉아 속 편하게 공짜 커피를 쫍쫍거리고 있었다.

언젠 바쁜 척을 하더니 쓸데없이 졸졸 따라와서는 참 한가롭기도 하다.

얄밉다는 듯이 노려보며 분위기 파악 좀 하라고 눈으로 으르지만, 그럴 눈치가 있으면 애당초 저러고 있지도 않을 거다.

빤히 쏘아보자 동그래진 눈을 하고 왜? 라고 입 모양으로 묻는데, 표정이 너무 천진해서 더 기가 막혔다.

눈치가 없는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하여간 시우만도 못할 때가 많아 종종 복장이 터졌다.

솔이를 달래 놓고 카페를 나서자 정혁이 강아지처럼 다정을 졸졸 따라나섰다.

앞장서 걷던 다정이 팩 돌아서며 눈을 흘겼다.


“지금 누구 약 올려요? 애 속상한데 왜 여기까지 쫓아와서 그래요?”

책망하는 말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던 정혁의 눈길이 불현듯 먼 곳으로 향했다.


“내가 두 번째로 감명 깊게 읽은 동화가 뭔지 알아?”

다정은 헛숨을 뱉었다. 도무지 뜬금이 없어서 이젠 신기하지도 않았다.

한동안 먼 하늘을 말끄러미 바라보던 그의 입꼬리가 픽 미끄러진다.


“은혜 갚은 까치.”

 

 

* * *

본가로 불려온 정혁은 언제나처럼 잘 차려진 식탁에 앉아 얌전히 밥을 먹었다.

익숙했다. 박 회장과 단 둘뿐인 단출한 자리, 그러나 지나치게 화려한 음식들로 채워진 식탁.

그 익숙한 것들이 오늘따라 불편하게 느껴지는 건 아마도 딱따구리처럼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이 애 때문일 거다.


“할머니. 불고기가 너무 맛있어요.”

감탄하는 현아의 말에 박 회장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입에 맞으면 됐다. 여주댁이 손맛이 좋긴 해.”

정오쯤 박 회장이 비서실을 통해 용건을 전했다. 지난번 동영상 사건으로 잠시 보류했던 현아와의 약혼을 다시 추진하기로 했다는 거다.

현아를 동석시켜 함께 저녁을 들자는 부름을 받고 정혁은 고민하지 않았다. 마침내 기다리던 판이 마련되었을 뿐이니까.


“결혼하면 애부터 가져라.”

고상하게 식사를 이어가던 박 회장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에 현아의 입가에 수줍은 웃음이 물렸다.


“그럼요, 할머니. 전 오빠랑 결혼하면 아기부터 가질 거예요.”

“암, 그래야지. 남자는 후계가 든든해야 바깥일도 평탄한 게야.”

“명심할게요. 할머니.”

현아는 평소보다 부쩍 예의 바르고 공손한 말씨를 사용했다. 공식적으로 과오를 용서받고 약혼을 공고히 하는 자리다 보니 강선영이 철저히 준비를 시킨 모양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흘려들으며 정혁은 무심히 밥을 먹었다.

이 식탁에 앉을 때면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고작 네 살. 네 살이었다. 정혁이 이 집에 온 나이가.

아버지를 병원에 입원시키고 돌아온 박 회장은 배고픈 손자를 위해 식탁을 차리게 했다.

작은 아이는 거대한 식탁에 잘 차려진 진수성찬을 보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버지 없이 홀로 앉은 식탁은 너무 낯설고 커다래서 무섭기까지 했다.

휘황찬란한 음식들 앞에서 주눅이 들어 쉽게 먹지 못하는 손자를 보며 박 회장은 못마땅한 투로 중얼거렸다.


‘까다롭기도 하지. 천박한 어미나 닮지 않으면 다행이겠구만.’

처음 본 손자에게 정이 없어 뱉은 그 한마디를 정혁은 아직도 뼛속 깊이 기억했다.

병실에서 헤어지기 전 아버지는 정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했다.


‘혁아. 할머니랑 가. 가서 할머니 말씀 잘 들어야 해.’


‘어…… 아빠는……?’

정혁의 작은 손이 환자복 소매를 꼭 움켜쥐지만, 아버지는 그 손을 떼어 내며 당부하고 또 당부했다.


‘아빤 아픈 거 나으면 금방 가. 그때까지 할머니 말씀 잘 듣고 있으면 더 빨리 갈 거야.’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는데 초췌하고 병색이 짙어 웃는 얼굴이 웃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어린 정혁은 꺼져 가는 불씨처럼 흐릿해져 가는 아버지의 눈동자를 주시했다.

거짓말 같았다. 그렇게 저를 버리려는 것만 같았다. 제게 전부인 아버지마저.


‘혁아. 키워주신 보답으로라도 넌 절대 할머니 실망시키면 안 돼. 알겠지?’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이후로 의식이 없는 채 6개월이나 버텼던가. 그도 돈이 있어 가능했던 것 같다.

아버지 사후 정혁은 철저히 혼자 남겨졌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그리고 곧 깨달았다. 할머니에게 버림받아선 안 된다는 걸. 판단보다 생존 본능에 가까운 깨달음이었다.

몹시 어린 나이였지만 알았던 것 같다. 험난한 세상에 홀로 남겨진 네 살배기 사내아이가 괜찮은 어른으로 자라기 위해선 대단한 할머니의 보호가 필요하다는 걸.


‘할머니 말씀 잘 들어야 해.’

어린 아들을 홀로 남겨 두고 떠나야 했던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이 어째서 사랑한다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아닌 그 말이었는지도.

자신의 생명이 연기처럼 흩어지는 동안에도 아버지는 오직 홀로 남겨질 아들의 안녕을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는 것도.

어린 나이에 깨달은 진리는 정답이었다. 엄한 할머니가 무섭고 어려웠지만, 스스로 살아남는 법을 터득했다.

단 한 번도 박 회장을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천박한 어미를 닮았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원하는 대로 살아 주었다.

원하는 대로 우수한 성적을 받았고 원하는 대학에 진학해 주었다. 원하는 대로 회사 일을 익혔고, 원하는 대로 정해진 여자와 결혼도 순순히 받아들였다.

할머니는 만족했고, 제 역할은 그거면 된다고 믿었다.

감흥도 없고 성취감 따윈 더더욱 없었다. 그저 아버지의 당부대로 할머니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노력했다.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견뎠다.


‘아가, 보렴. 다 네 거란다.’

박 회장이 거대한 빌딩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어린 손자에게 말했다.

다 가졌다. 돈도 땅도 건물도 지분도. 그리고 명한을 짊어져야 한다는 막중한 사명 같은 책임까지.

제 삶은 그것들을 지키는 것 말고는 아무 가치가 없는 것처럼 그렇게 길러졌고, 그게 맞다 믿었다.

당연한 듯이 살아온 삶. 그렇다 보니 특별히 즐거울 것도 없고 딱히 불만도 없었다.

그렇게 살아온 삶인데. 정혁은 최근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인생의 대부분을 인형처럼 살았구나 하는. 유다정과 유시우를 볼 때면 그 결론은 너무도 명확해졌다.

웃고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그 평범하고 일상적인 감정과 기분들을 지난 시간 동안 느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허탈했고, 조금은 한심하기까지 했다.

그것들이 제법 가치 있는 일이란 것도 알게 되었다.

아이가 있다. 저를 똑 닮은 아이가.

차정혁이 지키고 보호해야 마땅한 자신의 아이였다. 충동이 아니다. 이건 옳은 선택이고 세상 이치 중에 가장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결론이었다.

얌전히 젓가락을 내려놓은 정혁의 눈길이 정면을 향했다.


“할머니.”

식탁에 앉아 처음 내는 목소리는 무거웠다. 너그러운 박 회장의 얼굴을 보며 정혁은 간결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나 결혼 안 해.”

 

 
지금의 발언으로 유다정이 힘들어질 걸 안다. 하지만 가위에 눌려 눈물을 떨구는 여자를 지켜보며 이미 먹은 마음이었다.

온화한 공기가 감돌던 식탁 위에 싸늘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박 회장은 별다른 동요 없이 정혁을 가만히 주시하다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와 달리 현아는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오, 오빠. 그게 무슨 말이야? 결혼을 안 하다니. 장난이지?”

현아의 채근에도 정혁의 눈길은 박 회장을 곧게 향했다.


“결혼은 내가 알아서 해. 그러니까 부탁인데, 아무것도 하지 마. 나 빈정 상하면 가만 안 있어.”

경고하듯 무겁게 지껄인 음성이 식탁 위로 내려앉았다.

드르륵, 의자를 밀고 일어나자 현아가 냉큼 그의 팔을 붙잡았다. 박 회장과 정혁을 번갈아 돌아보던 현아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아아…… 할, 할머니. 무슨 말이라도…….”

박 회장은 여전히 고요하고 차분한 상태를 유지한 채 식탁의 어느 한 지점을 물끄러미 응시할 뿐이었다.


“오빠. 현아가 뭐 잘못했어?”

“오현아. 네 집에 가서 알려. 이 결혼 깨졌어.”

“그게 무슨 소리야! 오빠아! 현아가 잘못한 거 있으면 말해. 다 고칠게. 현아 할 수 있어!”

현아, 현아. 다 큰 여자의 3인칭 화법이 갑자기 몹시 거슬렸다.

지금껏 현아의 이런 말투가 신경 쓰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관심이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할 거다.

문득 거슬리는 이유는 전혀 귀엽지 않다는 거다. 유시우가 하면 되게 귀여운데.


“오빠! 현아한테 왜 이러는데? 응?”

“놔.”

“못 놔! 이유라도 말해 줘야 현아가 알지! 흐아앙!”

현아는 결국 어린애처럼 울음보를 터트리고 말았다.


“그걸 몰라서 물어?”

“몰라! 모르니까 그러지!”

불현듯 현아를 향한 그의 두 눈에 짜증이 담겼다. 집요하게 들러붙는 손을 툭 뿌리친 그가 뱉었다.


“정혁이는 너 싫다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