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강아지풀이 화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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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강아지풀이 화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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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강아지풀이 화났다
2023.01.15.
침대 끝에 걸터앉은 수경은 눈앞의 남자를 퉁명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이수경 씨…….”
슬립 차림인 그녀와 달리 권도준은 중무장하듯 꼼꼼히 옷을 갖춰 입은 채였다.
그것도 마음에 안 드는데, 무슨 죄라도 지은 양 고개까지 풀 떨구고 있는 꼴을 보자 수경은 은근히 속이 뒤틀렸다.
어쩌다 보니 인사불성인 남자를 집까지 데려다주게 되었고, 침대에 눕히고 돌아서려는데 손목이 잡혔다.
‘가지 마.’라며 애절하게 붙잡기에 붙잡혀 주었을 뿐인데.
“제가 이수경 씨께 입에 담기도 어려운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수경의 눈동자가 뒤룩 굴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마치 조선 시대로 타임슬립이라도 한 듯한 착각이 일었다.
싱글 남녀가 눈맞아 하룻밤 잘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그런데 그걸 굳이 실수였다고 짚어 주는 태도가 썩 유쾌하진 않았다.
간밤에 다른 여자의 이름을 부르며 제게 입을 맞출 때도 지금처럼 자존심이 상하진 않았던 것 같다.
권도준이 원하는 여자가 자신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뿌리치고 싶지 않았다. 동정심이었대도 좋고, 사심이었대도 좋다.
자존심 상하는 고백이긴 하지만, 대타로라도 곁에 있어 주고 싶었던 게 수경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무슨 말로 사과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남자의 문제 해결 방식은 조금 고리타분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눈앞에 있는 남자가 권도준이다 보니 수경은 전에 없을 관대한 아량이 생겨났다.
“그러네요. 어마어마한 실수였죠. 그래서 권도준 씨는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 생각이에요?”
“…….”
흘끔 눈길을 들어 올리다가 수경과 눈이 마주치자 도준의 시선이 다시 아래로 곤두박질친다.
짧은 사이 기억을 헤집어 보지만 결과는 같았다. 어렴풋한 장면들이 스치긴 했으나 결정적인 장면은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정황상 사고를 친 것만은 분명해 보이는 지금의 상황을 발뺌할 생각은 결코 없었다.
교육자 집안에서 나고 자라 배운 만큼 도준에겐 엄격하고 보수적인 사고가 확립되어 있었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매사에 지나치게 반듯한 점들을 납득 못 할 이유 또한 없었다.
그래도 설마 이런 대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
“원하신다면…… 이수경 씨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꾸역꾸역 게워 내는 목소리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가여울 지경이었다. 수경은 결국 참지 못하고 깔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권도준 씨, 조선 시대 살다 왔어요?”
“예……?”
“그러니까, 나랑 결혼이라도 하겠다는 말이에요?”
“수경 씨가 원하신다면…….”
도준의 목소리가 한없이 기어들어 갔다. 그런 그를 딱하게 바라보던 수경이 다시금 웃음을 머금었다.
“와, 권도준 씨랑 결혼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네요. 근데 어쩌죠? 나한테 흥미 없는 남자한테 구질구질하게 매달려서 결혼하고 싶진 않거든요.”
“…….”
“책임지는 건 됐어요. 대신 다른 조건이 있어요.”
수경의 너그러운 눈길이 어리둥절한 도준을 똑바로 주시했다.
“나랑 정식으로 열 번만 데이트해요. 그러고도 권도준 씨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내가 깔끔하게 포기할게요. 어때요?”
얼뜬 표정이 된 도준의 입술이 몇 번이나 머뭇거렸다.
“정말…… 그걸로 되겠습니까? 이수경 씨가 원하는 결과는 얻지 못하실 텐데요.”
“저런, 장담하지 말아요.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고요.”
* * *
놀이터에서 실컷 놀고 돌아온 이른 오후였다.
“시우 간식 먹을까?”
다정의 물음에 곰곰 생각하던 시우가 짹 입을 벌렸다.
“엄마! 어…… 간식 안 먹고 이따가 피자 먹을래요.”
패스트푸드나 배달 음식에 까다로운 엄마가 어쩐 일로 점심에 피자를 먹자고 해서 기대하는 중이었다.
“그럴까? 그럼 엄마는 지금부터 일해야 하는데 우리 시우는 뭐 할까요?”
“시우! 어, 음……. 시우는 책 읽을래요.”
다정은 기특한 아들의 뺨을 마구 주물렀다.
“착해라, 엄마 아들. 그럼 시우 책 읽는 동안 엄마 후딱 일하고 피자 먹자.”
“네에!”
기쁜 듯 만세를 부르며 자기 방으로 달려간 시우는 책장 앞에 쪼그려 앉아 좋아하는 동화책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다정은 식탁 위에 노트북을 펼쳤다. 회사를 나올 때 매듭을 짓지 못한 도면 작업의 완성이 코앞이었다.
신중한 눈동자가 모니터에 떠오른 설계도를 꼼꼼히 점검했다. 큰 작업은 벌써 마무리가 되어 넘겼고, 세부 설계의 점검만이 남아 있었다.
그렇게 두어 시간이 더 걸려 완성된 설계도는 다정의 업무를 인계받은 희주에게 메일로 전송되었다.
이로써 한빛 건축 사무소와의 관계도 마침내 종지부가 났다.
희주와는 종종 연락을 나누고 있었다. 대개는 인수인계한 업무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해 사소한 잡담으로 마무리되곤 했다.
새로 입사한 직원은 성실하고 수더분한 성격이라 말이 잘 통한다고 했다. 대신 아직은 손발이 맞지 않아 우여곡절이 많은 모양이었다.
희주는 맡은 바 업무를 거뜬히 소화했고, 현장도 그럭저럭 순조로운 듯했다. 다정의 부재에도 회사는 문제없이 잘 돌아가고 있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섭섭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제가 없어 회사가 굴러가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면 조금 위안이 되었을까.
멍하니 상념에 잠겨 있던 다정의 눈이 돌연 반짝하고 떠졌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시계를 보자 짧은 바늘이 숫자 3에 닿아 있었다.
늦은 점심으로 피자를 먹자고 했지만, 피자가 배달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고려하면 이른 저녁이 될 판이었다.
우리 시우 배고프겠다.
걱정스러워 시우의 방으로 향하던 다정의 눈이 의아하게 커졌다. 활짝 열려 있던 방문이 어느샌가 꼭 닫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우의 방으로 다가간 다정은 살그머니 문을 열었다. 점심때를 놓친 게 미안해 목소리도 기어들어 갔다.
“시우야, 피자 어떤 거 먹을…….”
그 순간 사각의 묵직한 물체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둔탁한 소리를 울렸다.
“어…….”
순진무구한 눈이 동그래진 채 지진이라도 난 듯이 흔들렸다. 방금까지 손에 쥐고 있던 물건을 놓쳐 버린 고사리손은 허공에서 멋쩍게 꼼지락거렸다.
알록달록 화려한 그래픽들이 화면 안에서 요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두 눈에 의구심을 가득 품은 채 다정은 주인 모를 휴대폰만 멀뚱멀뚱 응시했다.
* * *
카페 안은 제법 어수선하고 소란스러웠다.
막 점심시간을 넘기기도 했거니와 회사와 학원이 밀집한 대로변에 위치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할 부분이었다.
“할 말이 있어서요. 물론…… 바쁜 거야 잘 알죠. 시간 많이 뺏지 않을게요.”
왁자지껄한 소음을 견디며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다정의 눈길이 통유리 밖으로 향했다.
“네, 건너편에 있는 카페요.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요? 아, 1시간이요…….”
길 건너 저만치에 우뚝 서 있는 명한유통 본사 건물을 보며 그녀는 뒷말을 이었다.
“아, 아뇨. 괜찮아요. 기다릴 수 있으니까 천천히 와요. 네, 그럼.”
전화를 끊고 얼마나 지났을까. 뚜벅뚜벅 존재감 어린 발소리를 알아챌 무렵 맞은편 자리에 웬 남자가 풀썩 몸을 앉혔다.
그를 발견하고 놀란 눈을 하던 다정이 곧 뚱한 표정을 지었다.
바쁘다며 비싸게 굴더니, 전화를 끊고 채 10분도 되기 전에 나타난 남자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심지어 이마엔 약간의 땀이 배어나 있고 숨은 조금 가쁜 게 막 뛰어온 모양이었다.
이럴 것 같으면 너니까 특별히 시간을 내주는 거라며 으스대지나 말든가.
뭐 상황이 어떻든 간에 깔끔한 슈트 차림의 차정혁은 오늘도 근사했다.
“회사로 오라니까.”
나른한 말투는 명백히 귀찮다는 투인데 입가에 번진 웃음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의 말처럼 직접 사무실로 찾아가도 되었겠지만, 다정은 이미 한빛을 나온 몸이었다.
“업무 얘기도 아닌데 사적으로 회사에 드나드는 건 좀 그래서요.”
쉽게 수긍한 정혁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불쑥 거리를 좁히자 다정의 당황한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아니, 보고 싶어서 왔다며. 닳는 것도 아닌데 실컷 보라고.”
다정의 귀뿌리가 화르르 달아올랐다.
“내, 내가 언제 보고 싶어서 왔댔어요. 용건 있다고 말했잖아요!”
“사적인 용건이 그거 말고 또 있어?”
하, 기막혀. 능청스러움에 다정이 혀를 내두르던 그때,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잡혔다.
“이 자식이 형님을 뭐로 보고. 이번엔 달라.”
카페로 들어선 남자가 호탕한 투로 통화하며 걸어와 다정의 뒤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아 글쎄 걱정하지 말라니까. 걔 은근 알부자야.”
의도치 않게 남의 통화 내용을 듣게 된 다정은 귀를 더 쫑긋 세웠다. 그 모습에 정혁이 그녀의 주의를 불러들였다.
“유다정?”
그의 목소리에 잠시 정신이 팔렸던 다정의 눈길이 원위치했다. 그를 만난 용건을 떠올린 다정은 서둘러 테이블 위에 묵직한 물체를 내려놓았다.
“오늘은 이거 돌려주려고 온 거예요.”
무심한 눈동자가 덩그러니 놓인 휴대폰으로 향했다.
“어린애한테 왜 멋대로 이런 걸 주고 그래요?”
시우가 가진 휴대폰을 보았을 때 그간 풀지 못한 다정의 의문도 말끔히 해소되었다.
서남식이 침입했을 당시, 그가 무슨 수로 잠긴 문을 열고 때마침 들이닥쳤나 내내 의문이었더랬다.
경황도 없고 마주칠 때마다 다른 화두로 대화가 흘러가 흘러가는 바람에 제대로 묻지 못한 채 잊을 뻔했는데, 그 비밀이 여기에 있었다.
다정의 용건을 파악한 그의 표정이 언제 그랬냐는 듯 떨떠름해졌다.
“이거 유시우 거야. 유다정 마음대로 뺏으면 어떡해?”
“시우 고작 다섯 살이에요. 너무 과분해요.”
정혁의 눈가가 눈에 띄게 구겨졌다.
“과분? 이게 없었으면 그날 무슨 일이 벌어졌을 것 같아?”
“…….”
다정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한숨을 삼켰다.
반박하고 싶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날 시우에게 휴대폰이 없었더라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다섯 살 애한테 백만 원이 넘는 물건이 과하다는 뜻이에요.”
“돈 자랑하려고 준 것 같아? 내 아들 안전 때문에 준 거야. 유시우 돌려줘. 아빠가 준 거니까 가지고 있어도 돼.”
늘 그렇듯 시우의 안전을 들먹이면 다정으로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지기 마련이었다.
다정은 부루퉁한 얼굴을 하고 청각을 곤두세웠다. 눈앞에 있는 남자와 대화를 해야 하는데, 신경은 자꾸만 뒷자리에서 통화 중인 남자의 목소리로 향했다.
은연중에 여자의 구두 굽 소리가 스쳤다. 동시에 통화 중인 남자의 목소리도 다급해진다.
“야야, 끊어. 미진이 왔다.”
서둘러 전화를 끊은 남자가 반기는 목소리를 냈다.
“우리 미진이 오느라 안 힘들어쪄요?”
“오빤 그 멀대 같은 여자나 만나지 난 왜 불러?”
여자의 새초롬한 말투에 신경질이 묻어났다.
“아이, 미진아. 오빤 너처럼 앙증맞은 스타일 좋아하는 거 알면서.”
여자가 피, 하고 입바람 소리를 냈다.
“유다정?”
정혁이 테이블을 똑똑 두드려 재차 다정의 주의를 끌지만, 심각한 표정의 다정은 뭔가에 골똘할 뿐이었다.
“미진아. 오빠가 몇 번 말해. 걔는 그냥 사업에 써먹는 것뿐이라니까. 좀만 기다려. 오빠가 이번에 한탕 하면 지난번에 너 갖고 싶다던 백 하나 사 줄 테니까.”
“꺄! 정말 정말?”
까르르거리는 웃음이 어수선한 공간을 맴돌다가 흩어졌다.
다정의 호흡이 급격히 느려졌다. 작게 그러쥔 두 주먹도 부들부들 떨렸다.
쾅!
불현듯 테이블을 내리치는 소리에 공기가 싸하게 가라앉았다.
평소 같지 않은 다정의 돌발 행동에 정혁은 얌전히 숨을 죽였다. 이 여자가 왜 이러나 싶어 가만히 주시하는데, 뒤이어 들려온 말에는 그만 숨이 멎고 말았다.
“이 개자식아!”
눈앞의 여자가 뱉었을 거라곤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단어였다. 동시에 다정이 핸드백을 콱 움켜쥔 순간에는 실제로 어깨가 움찔하기까지 했다.
공중으로 번쩍 솟구친 핸드백이 날아든 곳은 의외롭게도 뒷자리에 앉은 남자의 머리통이었다.
가속을 실은 핸드백이 도토리 같은 남자의 뒤통수를 뻑뻑 후려 깠다.
“이런 씨―발라먹을 새X!”
퍽퍽!
정혁의 경직된 눈이 작게 들썩였다. 동요 없는 척 고요한 눈길을 유지하지만, 제가 지금 뭘 보고 있나 싶어 찰나 어지럼증이 밀려들었다.
“아악! 뭐, 뭐야! 누구야 당신!”
갑작스러운 봉변에 허우적거리던 남자가 뒤통수를 감싸 쥐었다.
“나다! 조카 18색 크레파스야!”
다정이 씩씩거린다. 흡사 성난 황소처럼.
“엇! 다, 다정 씨? 다정 씨가 여긴 어떻게…… 윽!”
“씩빵새X야! 네가 감히 내 친구를 농락해?! 너 오늘 내 손에 디질 줄 알아!”
퍽퍽퍽.
강아지풀이 화났다.
숨을 멎은 채 굳어 있던 정혁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 입술로 약간 흥분에 젖은 호흡이 밀려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