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대형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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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대형사고
2023.01.12.
거실 소파를 지키며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형숙이 대각선 자리로 힐끔 눈길을 들었다. 그녀의 남편은 펼쳐 든 신문을 묵묵히 읽어 내려갈 뿐이었다.
이 와중에 태연하게 신문이나 읽고 있는 남편을 보자 형숙은 울화가 치밀었다.
“여보! 정말 이렇게 나 몰라라 하고 있을 거예요?!”
아내의 잔소리에도 그녀의 남편은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대신 느긋하게 신문을 한 장 넘겼다.
“여보! 내 말 듣고 있어요?!”
다시 한번 보채자 펼친 신문 너머로 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당신이 이렇게 닦달을 하니 저러는 거 아니오. 다 큰 자식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맙시다.”
아버지란 사람이 자식 일에 어쩜 이렇게도 무심한지 원! 진저리를 친 형숙은 결국 참지 못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쿵쿵 밟고 올라가 활짝 열린 방문 앞에 멈춰 서자 아들의 싸늘한 등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등을 괘씸하게 노려보던 그녀가 앙칼진 목소리를 질렀다.
“권도준! 너 정말 이럴 거야?!”
아들은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그저 제 짐들을 차곡차곡 상자에 담아 나갈 뿐이었다.
며칠 전 둘째는 집을 나가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적당한 오피스텔을 구했다며 지금 저렇게 짐을 꾸리고 있었다.
형숙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무엇이 반듯하고 착한 아들을 저렇게 반항적으로 만든 걸까.
“그 계집애가 이러라고 시키든? 고깟 뺨 한 대 맞은 게 억울해 죽겠대?”
들은 체도 않던 도준의 어깨가 경직된 채 돌아섰다. 형숙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충격과 혐오가 차올랐다.
“……때리기까지 하셨어요?”
제 무덤을 팠다는 낭패감에 형숙이 뜨끈한 이마를 쥐었다.
“넌 엄마 심정 이해 못 해.”
“어머니 심정 이해하고 싶지 않아요.”
“도준아, 네가 엄마한테 어떻게 이래?!”
“어머니는 저한테 왜 그러셨어요!”
잠잠하기만 하던 도준의 음성이 날카롭게 울렸다.
“어머니를 존경했어요. 그런데 어머니는 절 천하에 못나고 비겁한 놈으로 만드셨죠. 그래서 전 비참해졌고요. 아시겠어요?”
“도준아…….”
형숙의 목소리가 한풀 꺾여 들어갔지만, 도준의 태도는 냉랭하기만 했다.
“건강하세요.”
단정히 고개를 숙여 보인 도준은 그대로 형숙을 등졌다.
* * *
이른 저녁 솔이 모녀가 다정을 찾아왔다. 전날의 사건에 대해 대강 사정을 전해 들은 두 사람은 충격에 잠시간 말을 잇지 못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솔이가 버벅버벅 말문을 열었다.
“어, 어어, 어떻게 그런 일이! 와, 서남식…… 이 쳐 죽일 놈! 어쩐지, 지난번부터 알짱거리는 게 예사롭지 않다 했어!”
뒷북을 치던 솔이가 별안간 다정을 향해 눈을 삐쭉하게 떴다.
“넌 그런 일이 있었으면 나한테 먼저 말을 했어야지!”
“미안. 휴대폰도 고장 나고 경황이 없어서 아무 생각도 못 했어.”
즉각 사과한 다정은 거짓말이 아니라는 듯 곧장 새 휴대폰을 내보였다.
“으휴! XXX!”
솔이가 걸쭉하게 욕을 지껄였다. 그러자 숙희가 정색하며 딸의 머리통을 퍽 쥐어박았다.
“기집애가 말 곱게 안 해? 그러니까 여직 시집을 못 가지!”
“엄마는 그런 놈한테 말이 곱게 나와?!”
“허긴! 똥물에 튀겨 죽여도 시원찮을 놈! 에라이, XXX!”
한마디씩 욕을 주고받은 모녀가 시근덕거렸다. 어딘지 심각한 상황인데도 다정은 어쩌지 못하고 웃고 말았다.
한동안 씩씩거리던 숙희가 여기저기 다정의 몸을 살폈다.
“그래서 넌? 어디 다친 데는 없고?”
“네, 괜찮아요.”
분위기를 살피던 다정이 넌지시 숙희의 손을 잡았다. 누구보다 믿는 사이지만, 못내 걱정스러운 게 있었다.
“엄마, 이번 일 우리 엄마 귀에 안 들어가게 해 줘요……. 무슨 말인지 알죠?”
다정의 부탁에 숙희는 속상한 얼굴로 한숨을 뱉었다.
눈만 뜨면 제 엄마 귀에 들어갈까 전전긍긍. 그 마음 알고도 남는다.
세상에 어느 엄마가 그런 일을 겪은 걸 알고 억장이 안 무너질까. 그걸 걱정하는 다정이 기특하면서도 한편으론 딱했다.
다정의 손을 꼭 맞쥔 숙희의 목소리가 너그럽게 흘러나왔다.
“걱정 말어. 그리고 다정아. 네 잘못 아니야. 알지?”
“맞아! 넌 하나도 잘못한 거 없어.”
솔이가 보탰다. 갑자기 눈시울이 시큰해진 다정은 애써 웃음기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14년 전 그때도 엄마에게 알려지는 걸 극도로 꺼리는 다정을 위해 솔이 부모님과 이모가 나서 일을 처리했었다.
‘네 잘못이 아니야. 그냥 길 가다 돌부리에 걸려서 넘어진 거랑 같아. 넘어져서 까진 덴 약 바르면 되고, 훌훌 털고 일어나서 다시 걸으면 그만이야.’
차마 엄마에게도 말하지 못한 일을 두고 솔이의 부모님은 그렇게 다정을 일으켜 세워 주었다.
훌훌 털고 일어나서 다시 걸으면 그만이다.
그 한마디가 지금껏 다정을 굳세게 버틸 수 있도록 지지해 준 것만 같았다.
엉덩이 무겁게 눌러앉아 있던 모녀는 식사 때를 한참 넘겨서야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해. 알았지? 꼭.”
“알았다니까. 어서 가.”
신신당부하는 말에 다정이 몇 번이나 그러마 대답을 한 뒤에야 솔이는 마음을 놓고 돌아섰다.
다정이 두 사람을 배웅하고 돌아왔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 위로 저장하지 않은 번호가 떠올라 있었다.
“여보세요?”
『유다정 씨 휴대폰 되십니까?』
“그런데요. 어디시죠?”
자신을 이번 사건의 담당 형사라고 말한 남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다른 게 아니라 서남식 사건과 관련해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유다정 씨와 유시우 군에 관한 내용으로 금전적인 추가 피해가 있나 해서 확인차 전화했습니다.』
“금전이요?”
『네, 서남식 소지품에서 유다정 씨와 유시우 군에게 접근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2천만 원이 지급된 서류가 발견돼서요.』
“2천만 원……. 누가요?”
다정이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권도준 씨라는 분입니다만, 아는 사람입니까?』
* * *
시간을 확인한 다정은 반쯤 남은 커피를 한 모금 더 삼켰다. 괜스레 밀려드는 초조함에 목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헐레벌떡 달려와 카페 문을 밀고 들어서는 도준의 모습이 눈에 잡혔다.
다정을 발견하고 입구에 멈춰 서서 숨을 고르는 그의 얼굴이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무료하게 흐르는 시간을 일러 주듯 유리잔 속 얼음이 달그락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도준은 말없이 제 앞에 놓인 유리컵 표면만 만지작거렸다.
다정이 먼저 연락을 주었다는 사실이 내심 기쁘면서도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도준은 겸연쩍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지루할 만큼 침묵이 이어진 뒤에야 마침내 그의 입이 열렸다.
“……잘 지냈어?”
“네, 선배도 좋아 보여요.”
형식적으로 인사를 돌려준 다정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하얀 봉투를 꺼냈다. 그것을 테이블 위로 내밀자 뿔테 안경 너머로 도준의 눈이 의아하게 커졌다.
“이게…… 뭐야?”
“선배가 서남식에게 줬던 2천만 원이에요.”
“…….”
도준의 입술이 지그시 깨물렸다. 울컥 치받는 감정을 눌러 삼키며 다정은 애써 목소리를 차분하게 했다.
“왜 그랬어요? 선배가 이러면 내가 고마워할 줄 알았어요?”
다정도 알고 있다. 도준이 했던 모든 게 자신을 위해서였다는 걸. 하지만 이런 방식은 결코 고마운 처사가 아니었다.
“난 네가 그 사람 때문에 힘들어 보여서…….”
“2천만 원으로 해결될 것 같았으면 진작 줬죠. 그런 인간들 습성 몰라요? 한 번 주면 계속 요구한다고요. 적어도 나한테 말은 했어야죠.”
“그래…… 내 생각이 짧았어. 미리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
도준은 순순히 사과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미리 말했다면 다정이 과연 그의 도움을 받았을까. 돕고 싶었을 뿐인데, 언제나 형편없는 인간이 돼 버리는 결과에 도준은 다시금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치솟은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다정은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순간의 감정을 누르지 못하고 그를 몰아세웠다는 사실에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미안해요, 선배. 이러려던 건 아니었는데, 늘 도움만 받으면서 고맙다는 말은 못 할지언정. 나는 늘 선배한테 나쁜 사람이네요.”
“아니, 아니야. 그런 말 하지 마. 넌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얼마간의 불편한 침묵이 지나고 도준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다정아. 회사로 돌아오면 안 될까?”
“선배…….”
“너 불편하게 안 해. 그냥 예전처럼 일하자. 너 없인 안 돼. 너랑 나, 우리가 함께 만든 회사잖아.”
간절한 부탁의 말에 다정은 마음이 뭉클해지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나오긴 했지만, 회사에 애정이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지난 5년간 누구보다 열정을 가지고 도준과 함께 성장시킨 회사였다.
그만큼 애정이 각별하니 언젠가는 다시 회사로 돌아갈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가 지금은 아니었다.
다정은 간절함이 깃든 도준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미안해요, 선배. 나 아직 선배 보는 거 불편해요.”
* * *
관능적인 색소폰 연주가 흐르는 공간. 연주자에게 집중된 조명 덕에 바텐의 구석진 공간은 상대적으로 눈길을 끌지 못했다.
그 음침한 구석의 한 자리를 차지한 도준은 연신 술잔을 기울였다. 고립된 듯한 분위기가 좋았고, 진열장 거울이 반사해 내는 반짝거림이 시야를 지우는 느낌도 좋았다.
문득 알코올에 젖은 입술 새로 실소가 흐른다. 귀를 적시는 재즈의 처량한 선율이 제 한심함을 대변하는 것만 같아서.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사랑이길 바랐다.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발견하는 순간들을 제법 자주 꿈꾸기도 했더랬다.
그 꿈속에는 늘 다정이 있었는데, 그저 혼자만의 상상이고 망상이었다니. 그 사실을 인지할수록 한심하고 초라한 제 모습만 더 또렷이 각인될 뿐이었다.
지독한 상실을 달래려 술잔을 기울여 보지만, 신체 일부분이 떨어져 나간 것 같은 헛헛함만은 채울 길이 없었다.
고독한 유리병 안에 갇힌 양 도준은 그렇게 비참하고 또 비참한 기분만 곱씹었다.
“권도준 씨?”
멍멍한 귓가로 낯설지 않은 음색이 파고들었다. 고개를 돌린 도준은 가물가물한 눈에 힘을 주었다.
하얀 민소매 블라우스 위로 오렌지빛 긴 생머리를 늘어뜨린 여자는 도회적이고 세련된 느낌을 물씬 풍겼다.
특히나 웃을 때 자신 있게 드러나는 새하얀 치아가 예쁜 그런 여자였다.
“아……. 이수경 씨를…… 여기서, 또 만났네요…….”
얼얼한 혀가 제멋대로 어눌한 발음을 만들어냈다. 그런 도준의 모습을 수경이 유심히 살폈다.
“권도준 씨. 취했나 봐요?”
“아, 네…… 조금 마셨습니다. 그런데 이수경 씨는, 여기 무슨 일로…….”
“술집에 술 마시러 왔지 뭐 하러 왔겠어요.”
진지한 농담을 들은 양 수경은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다 내 잘못이에요. 지켜 주고 싶었는데…… 오히려 상처만 준 것 같아요…….”
어느새 나란히 합석한 수경에게 도준은 신세 한탄을 늘어놓고 있었다.
“아하! 권도준 씨가 사랑한다고 했던 그 여자분? 차였나 보죠?”
“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요. 그런데 어디서부터 어긋나 버렸는지…… 잘 모르겠어요.”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가슴은 무너져 내렸다. 하느작대는 도준을 보며 수경을 찌푸려 웃었다.
정확한 사연은 모르겠지만 늘 빈틈없이 굴던 남자의 무방비한 모습이라니. 제법 봐 줄 만한 모양새였다.
“힘내요, 권도준 씨! 내가 술친구 해 줄게요.”
그의 어깨를 팡팡 때리며 수경이 기운을 북돋웠다. 도준의 뇌리에서 재생되는 기억은 딱 거기까지였다.
다시 눈을 뜬 곳은 독립해 나온 자신의 오피스텔이었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짐들이 상자째 쌓여 있고 대체로 어수선했다.
길게 한숨을 내쉰 도준은 욱신거리는 머리를 쥐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이건 대형사고라고.
숙취를 느끼는 중에도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왜 자신이 수경과 한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는 건지.
심지어 이런 몰골을 하고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