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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아기호랑이 (46/114)


46화 아기호랑이
2023.01.08.


잠에서 깼을 때 넓은 침실은 텅 비어 있었다.

낯선 공간을 보며 어리둥절하기도 잠시, 이곳이 정혁의 레지던스라는 사실을 떠올린 다정은 이마를 찰싹 짚었다.

서남식이 가택을 침입했다. 그 일로 경찰들이 다녀갔고, 시우와 함께 이곳으로 피난 아닌 피난을 와야만 했었다.

그 모든 게 불과 어제 있었던 일인데, 한바탕 폭풍우가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모든 게 흐리멍덩했다.

가만, 지금 몇 시지?

협탁 위 디지털시계로 눈길을 돌린 다정은 그만 멍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오후 3시?

세상에나! 남의 집에서 이 시간까지 잠들어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나저나 어젯밤 침실을 비워 주고 나간 차정혁은 그렇다 치고, 한 침대에서 재웠던 시우는 어째서 보이지 않는 건지 의문이었다.

뒤늦게야 아들 걱정이 된 다정은 서둘러 침대 아래로 발을 내렸다. 슬리퍼를 꿰어 신고 몸을 일으키자 앓는 소리가 절로 새어 나왔다.

끙끙대며 쓸데없이 넓은 방을 가로질러 겨우 문고리를 쥐고 돌렸다. 그 순간 시베리아 벌판에 서 있는 것처럼 오싹한 냉기가 밀려들었다.

눈앞에 펼쳐진 황량한 거실. 그리고.

다정은 제가 뭘 보고 있나 싶어 눈을 비빈 뒤 다시 전방을 바라보았다.


“어흥! 어흥!”

아기호랑이 한 마리가 넓디넓은 거실을 활개 치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꺄륵 소리를 내며 궁둥이까지 들썩거리는 게 제대로 신이 났다.

호피 무늬 올인원 슈트를 입은 시우는 정말 아기호랑이 같았다. 뻥 뚫린 부분으로 얼굴이 보이지 않았더라면 시우라고 알아보지 못했을 거다.

쫑긋대는 귀와 팔랑거리는 꼬리, 섬세하게 뻗은 수염 한 가닥까지 완벽하게 재현한 올인원 슈트는 호랑이 가죽을 벗겨 만들었대도 과언이 아닐 퀄리티를 자랑했다.

더 놀라운 건 시우를 등에 태우고 거실을 엉금엉금 기는 사람이 다름 아닌 민 실장이라는 거다.


“유시우, 그럼 못써! 얼른 내려와.”

다정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그러자 호랑이 털옷을 뒤집어쓴 시우가 엄마를 발견하곤 세상 해맑은 웃음을 짓는다.


“엄마, 시우! 호랑이예요. 어흥!”

엄하게 바라보던 다정의 눈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아기호랑이의 용맹한 포효에 심장이 쿵 아플 지경이었다.


 
제 아들이긴 하지만 지나치게 깜찍했다. 깜찍하긴 한데, 다정은 이런 민폐를 눈 뜨고 지켜볼 엄마가 아니었다.

고개를 붕붕 저어 보인 다정은 냉큼 민 실장의 등에서 시우를 안아 내렸다.


“민 실장님. 죄송해요.”

“아, 아닙니다. 오랜만에 저도 즐겁습니다. 하하.”

민 실장의 억지웃음을 보며 다정은 몸 둘 바를 몰랐다. 서늘한 거실 온도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마가 땀으로 흥건했기 때문이다.

바빠서 자기 애하고도 못 놀아 주는데, 전무님 아들하고 놀아 주느라 진이 쏙 빠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계산 빠른 민 실장은 벌써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아부를 실행에 옮겼다.

차 전무 다음으로 줄을 서야 한다면 누구겠는가. 바로 이 아기호랑이였다. 지금부터라도 잘 보여 정년 안에 임원 자리 하나 꼭 꿰차고 말리라.

굳게 다짐하며 민 실장은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훔쳤다.

그때 띠릭, 하고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슥슥대는 발소리가 이어지는가 싶더니 정혁이 거실 안으로 들어섰다.

무심한 눈길이 평소와 달리 북적이는 제집 거실을 슥 훑고는 다정의 얼굴을 스쳐 다시 거실 중앙으로 되돌아갔다.

차 전무의 등장으로 민 실장은 다시 바빠지고 말았다. 시우를 번쩍 들어 올린 그는 열심히 비행기를 태우며 아이의 천진한 웃음을 유도하고 있었다.

호랑이가 된 유시우를 보며 정혁은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유시우가 꿈을 이루는 데 아빠로서 한몫한 것 같아서 되게 뿌듯했다.


“유시우, 귀여워.”

마냥 흐뭇한 그에게 다정이 핀잔을 날렸다.


“한여름에 애한테 대체 뭘 입힌 거예요?”

“왜. 어제 부산에서 비행기로 공수해 온 거야. 내가 유시우 주려고 전국을 다 뒤졌어. 한정판이라 얼마나 구하기 어려웠는 줄 알아?”

제 마음도 몰라주고 타박부터 쏟는 유다정이 불만스러웠다.


“그러니까요. 한여름에 겨울옷 재고가 없는 건 당연하죠.”

고개를 절레 흔든 다정이 시우에게 가려 하자 정혁이 그녀를 붙잡아 세웠다.


“벗기지 마, 귀여워.”

“두 번만 귀여웠다가 애 쪄 죽겠어요.”

“그래서 에어컨 빵빵하게 틀어 놨잖아.”

“차정혁 씨. 애가 강아지인 줄 알아요? 귀엽자고 한여름에 털옷을 입히게요. 어쩜 사람이 그렇게 생각이 없어요?”

따끔한 꾸중에 정혁의 눈가가 불만스럽게 굳었다.


“유시우가 좋아하잖아. 놀게 내버려 둬.”

“차정혁 씨. 정말…… 힉!”

뭐라 말하기도 전에 다정의 눈앞이 빙글 돌았다. 얼렁뚱땅 뭔가를 끌어안고 보니 두 팔이 그의 목에 감겨 있었다.


“유다정 아파. 쉬어야 해.”

“…….”

말을 잊은 다정은 그의 목을 끌어안은 채 신음을 삼켰다.

세상에. 공주님 안기라니!

스포츠카 다음으로 부끄러운 순간이었다.

* * *



“다 먹어.”

명롱조에 가까운 말투인데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돌아서는 모습은 자상한 보호자 같았다.

다정은 제 앞에 놓인 쟁반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담백해 보이는 소고기죽 한 그릇과 깔끔한 백김치가 소담하게 담겨 있었다.

공복이 길었던 탓일까. 입 안에 금세 침이 고였다.

죽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고 또다시 까무룩 잠들었다가 깨어났을 때 밖은 이미 캄캄해져 있었다.

따뜻한 오렌지색으로 물든 공간에 새근새근 고른 숨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정이 눈을 뜨고 처음 본 장면은 커다란 손이 작은 등을 살살 도닥이고 있는 장면이었다.

팔을 접어 머리를 받친 남자의 가슴이 오르내리면, 그의 가슴에 엎드려 잠든 시우의 등도 따라 오르내렸다.

사랑스러운 장면에 다정의 입가에도 나른한 웃음이 번졌다.

그나저나 남의 집에서 또 이렇게나 잘 잤다.

민망해진 다정은 살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부스럭대자 잠든 것처럼 지그시 감겼던 정혁의 눈꺼풀도 올라섰다. 조금 나른하면서도 초점 또렷한 눈이 시선으로 부딪혀 왔다.


“……그만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오늘 말고, 내일.”

단호히 자른 그가 협탁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저거나 봐.”

그의 시선이 가리킨 곳에 작은 쇼핑백이 놓여 있었다.

잠시 후 최신 스마트폰과 정혁의 얼굴을 번갈아 보는 눈이 어리둥절했다.


“망가졌잖아. 불편할 것 같아서.”

“…….”

다정의 얼굴에 복잡한 의문이 떠오르자 그가 예민하게 굴 필요 없다는 듯 선수를 친다.


“공짜 아니야. 나중에 갚아.”

다정은 멋쩍게 코를 훌쩍였다. 어제오늘 신세 진 걸 생각하면, 왜 당신 멋대로 이런 일을 하느냐 하는 항의는 의미가 없었다.


“고마워요, 차정혁 씨. 계좌번호하고 금액 알려 줘요.”

“응.”

계산 확실한 여자를 향해 정혁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성정이라면 감히 제가 베푸는 호의나 선심을 거절한 것에 짜증을 느낄 만도 했다.

그런데 이제는 유다정의 이러한 모습이 불순한 계산이 섞인 수작이 아니라는 걸 안다.


“어쨌든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새 휴대폰은 USIM과 데이터까지 말끔하게 복구되어 있었다.

딩동. 딩동. 딩동.

전원을 켜자마자 메시지 알림음이 쉬지 않고 울렸다. 일과 관련된 메시지가 두어 개. 그 밖에는 전부 솔이의 메시지였다.

탄식을 뱉은 다정은 서둘러 통화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세 번 울리기 전에 꽥 지르는 솔이의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이 기집애야! 뭐 하다가 이제야 전화야!』

고함을 치지만 거의 울 것 같은 목소리였다. 연락이 되지 않아 어지간히 애를 태운 모양이었다.


“미안. 휴대폰 고장 났었어.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해 줄게.”

대충 솔이의 걱정을 잠재우는 거로 통화는 마무리가 되었다. 그때까지도 정혁은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며 시우의 등을 도닥이고 있었다.


“유다정.”

속삭여 부르는 소리에 눈길을 들자 그가 제법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자존심 상해서 이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아직은 내가 못 이겨.”

다정이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이 남자의 뜬금없는 맥락은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었다.


“누굴요?”

“할머니.”

할머니라면 명한그룹 박종순 회장?

다정은 눈동자를 크게 굴렸다.


“차정혁 씨 할머니요?”

“응. 최종 보스거든.”

다 큰 남자가 할머니를 부르는 방식이 어린애 같아서 웃음이 났다.


“할머니께서 되게 무섭나 봐요?”

“무섭다기보다 고단수랄까. 유시우가 아기호랑이고 내가 그냥 호랑이면, 노인네는 아마…….”

말을 멎고 곰곰 생각하던 그의 입이 다시 열렸다.


“천 년 묵은 호랑이쯤 되려나?”

천 년 묵은 지네란 말은 들어 봤어도 호랑이란 말은 처음이었다. 우스운 말을 하면서도 너무 진지해서 다정은 또 웃음이 났다.


“그런데 갑자기 차정혁 씨 할머니 얘긴 왜 하는 거예요?”

천장을 향해 있던 그의 눈이 옆으로 돌았다. 매사에 덤덤함을 유지하던 눈동자가 어쩐 일로 결연한 빛을 띠고 있었다.


“내가 잘해 본다고.”

“……?”

영문 모를 얼굴을 향해 다가온 긴 손가락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그러니까 유다정도 파이팅.”

 

 

* * *

이튿날 다정이 아파트로 돌아왔을 때 현관문에 부착된 낯선 물체가 눈에 띄었다. 지문과 안면 인식 기능이 있는 최첨단 도어락이었다.


“자, 다음은 우리 꼬마가 해 볼까?”

설치 기사의 말에 호기심 어린 눈을 반짝이던 시우가 고사리손을 쭉 뻗었다. 검은 패드에 손가락을 대자 간결한 기계음이 울리며 문이 열렸다.


“우와!”

신기해하는 시우를 위해 설치 기사는 두어 번 더 문을 여닫는 시범을 보였다.


“현관 안팎에 CCTV와 방범 센서도 설치를 끝냈습니다. 억지로 문을 열려는 시도가 3번 이상 감지되면 보안 업체와 세대주 연락처로 즉각 통보가 갈 겁니다.”

다정이 설치 기사의 설명을 귀담아듣는 동안 그것들을 지시한 남자는 방관자처럼 지켜만 볼 뿐이었다.

달라진 건 도어락만이 아니었다. 지문 등록을 마치고 집 안으로 들어선 다정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난장판이던 집 안이 말끔해진 건 물론. 소파며 흠집 난 가구, 심지어 커튼과 러그조차도 기존의 것과 비슷한 새것으로 교체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쪽 벽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는 스탠드 조명. 디자인만 봐도 고가의 브랜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지시한 대로 잘 이행되었던지 정혁은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나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흔적일랑 하나도 남기지 말고 모조리 바꾸라고 지시했다.

눈만 마주치면 돌아가겠다는 다정의 말을 무시하고 붙잡아 둔 건 이를 위해서였다.

은연중에 다정과 눈이 마주쳤다. 빤히 쳐다보는 게 뭔가 할 말이 많은 눈치라 정혁은 냉큼 선수를 쳤다.


“귀신 나올 것 같아서.”

낮게 중얼거린 그가 어깨를 움츠리며 몸서리를 쳤다. 이쯤 되자 다정은 문득 궁금해졌다.


“차정혁 씨. 혹시 귀신에 민감해요?”

집을 휘 둘러보던 눈이 다정의 얼굴로 원위치했다. 빤히 눈을 맞추더니 경직된 입꼬리가 피식거린다.


“나 남자야.”

“…….”

귀신에 민감하냐고 물었더니 남자란다.

어쨌든.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또 돈으로 돌려준다고 하게?”

다정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한 채 입술만 말아 물었다.

사실 고민이 되었다. 그의 말대로 돈으로 돌려준다거나 부담스럽다는 말을 하는 게 약간 조심스러워진 까닭이었다.

어디까지나 시우의 안전을 염려하는 아빠의 마음까지 무시하는 게 되어 버릴까 봐.

시우를 그토록 위험한 상황으로 몰아넣었던 자신에게 과연 그의 마음을 무시할 자격 같은 게 있을까.

다정은 너무 정 없이 굴었던가 스스로를 되짚어 본 후 고개를 저었다.


“아, 아뇨! 고마워요. 앞으론 안심하고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입가에 번진 웃음이 왜인지 어색했다. 누군가에게 기댄다는 게 어색해서,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도 왜인지 어색했다.

맞쥔 손을 꿈지럭거리던 다정은 퍼뜩 떠오르는 게 있어 집 안을 두리번거렸다. 그날 쇼핑한 물건들이 식탁 아래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게 보였다.


“저기…… 차정혁 씨 이거…….”

쇼핑백 하나를 슬며시 내미는 손가락이 부끄럽게 움츠러들었다.

정혁의 눈썹이 들렸다.


“선물?”

“차정혁 씨가 해 준 거에 비하면 약소하지만…….”

“유다정. 너 나 그만 좋아해.”

대뜸 던져진 말에 다정의 눈이 확 커졌다. 저도 모르게 정색한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내, 내가 언제 차정혁 씨를 좋아했다고 그래요!”

새빨개진 얼굴로 향한 눈이 가소롭다는 듯이 웃는다.


“선물 같은 건 좋아하는 사람한테 주는 거잖아.”

“넘겨짚지 말아요!”

“아니면 말고.”

픽 웃으며 좋은 기분을 감추지 못하는 그의 입술이 귓가로 다가왔다.


“유다정. 내가 너 좋아한다고 말하는 날, 우리 1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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