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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유다정을 위해서 (45/114)


45화 유다정을 위해서
2023.01.05.


기다란 손끝이 창백하게 질린 뺨에 닿자 겁을 먹고 웅크린 몸이 흠칫 경기를 일으켰다.


“아, 아파…….”

달싹거리는 입술로 미미한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달래듯 뺨을 감싸고 문지르자 둥글게 말린 몸이 한껏 더 움츠러들었다.

그 모습이 집을 잃어버린 달팽이처럼 하찮고 또 하찮아서 안쓰럽기만 했다.


“괜찮아. 아프게 안 해.”

잔잔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속삭였다. 목소리가 주는 안도감 때문인지, 다정의 호흡이 차츰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괜찮아.”

보드라운 손길이 젖은 눈가와 뺨을 더듬었다.


“괜찮아, 유다정.”

꿈결처럼 속삭이는 음성이 제 이름을 불렀을 때 다정의 눈이 가물가물하게 떠졌다.

끔뻑 감겼다 떠지는 눈으로 굵은 눈물이 똑 떨어져 콧잔등에 맺혔다.

다정의 흐릿한 시야가 뿌연 빛을 쫓았다. 눈물을 머금어 축축해진 입술이 막연히 중얼거렸다.


“……무서워.”

“괜찮아. 이제 아무도 무섭게 못 해.”

“정말……?”

“정말.”

안심하라는 말에도 젖은 눈동자는 한동안 불안하게 흔들렸다. 커다랗고 자상한 손이 눈꺼풀과 이마를 덮어 빛을 차단했다.


“더 자. 눈 감아.”

여전히 걱정스러워 끔뻑이는 속눈썹이 손바닥을 간지럽히다가 이윽고 스르르 감겼다.

긴 눈물이 두려움의 여운처럼 감긴 눈꼬리를 타고 흘렀다.


 

* * *

침침한 물안개에 도시가 푹 잠겼다.

달아오른 열기를 식히듯 새벽녘 소나기를 퍼부은 하늘은 짙은 먹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음침한 전경을 52층 높이에서 내려다보며 정혁은 휴대폰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아니, 내가 직접 가요. 뭘 물어요? 뭐가 영 안 내키는 모양이지. 설마 눈 뜨자마자 내 얼굴이 보고 싶어서 칭얼거리는 건 아닐 거 아니야. 변태도 아니고.”

간결하게 통화를 마쳤을 때 굳게 닫힌 침실 문이 음산하게 열렸다. 그 문으로 꾸물꾸물 기어 나온 작은 형체가 눈을 비볐다.

비틀거리면서 용케도 안 넘어지고 거실을 가로지른다. 흡사 술 취한 아저씨나 몽유병 환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비몽사몽인 채로 비틀대며 걸어와 꾸뻑 허리를 숙인다. 눈은 거의 감긴 채였다.


“어…… 아저씨…… 안녕히 주무셨어요.”

예의 바르게 아침 인사까지 챙기고는 정혁의 다리에 매미처럼 철썩 들러붙는다.

아름드리나무처럼 그의 다리를 끌어안은 채로 유시우는 다시 자기 시작했다.

입을 헤 벌리고 뒤로 완전히 꺾인 머리가 이리저리 갈대처럼 흔들렸다. 그 와중에도 떨어지지 않으려고 다리를 끌어안은 팔은 필사적이다.

비스듬히 기운 눈을 하고 정혁은 그 신기한 현상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의문이 스친다. 이럴 거면 계속 자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 다 떠나 7시밖에 안 됐는데, 애가 너무 부지런했다.

커다란 손이 시우의 머리를 잡아 고개를 바로 세웠다.


“유시우. 애는 이렇게 일찍 일어나는 거 아니야.”

“어…… 아니, 유치원…… 가야 하는데…….”

중얼중얼 대꾸하는 걸 보면 안 자는 게 분명한데, 방학한 걸 까먹은 걸 보니 또 잠꼬대가 분명했다.

한 손으로 작은 가슴팍을 쥐어 올려 품에 안았다. 지그시 머리를 눌러 어깨에 턱을 괴어주고 침실로 향했다.


“유시우 방학했어. 더 자도 돼.”

“…….”

쪼그만 뒤통수를 감싸고 말하는데 이번엔 대답이 없다. 침실로 되돌아가던 걸음을 멈추고 눈길을 돌리자 어느새 완전히 잠들었다.

잠든 틈을 노려 찐빵처럼 눌린 뺨에 입술을 비벼 보았다. 말랑하고 보드라운 감촉이 좋아서 웃음이 났다.

뺨을 깨물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유다정에게 금수만도 못하다 소리를 들을까 꾹 참았다.

침실로 들어가 침대에 눕히고 옆자리로 눈길을 돌렸다. 유다정은 여전히 구석진 곳에 웅크려 잠들어 있었다. 커다란 침대를 통 활용할 줄 모르는 여자였다.

곁으로 다가가 이마를 짚었다. 약간의 미열과 식은땀이 배어났다. 새벽에는 종종 가위에 눌려 경기를 일으키더니 지금은 많이 안정된 것 같았다.

창백한 뺨을 쓰다듬는 그의 표정이 무거웠다.

다정의 상처를 너무도 깊숙이 들여다본 탓이었다. 악성 종양처럼 제게로 전이된 상처들을 떠올릴 때면 기분이 한없이 가라앉는다.

한편 정반대의 기분도 스친다. 뭐라고 해야 할까. 기특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대견하다고 해야 하나.

그런 일을 겪어놓고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씩씩한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래 놓고 뒤로는 가위에 눌리며 저 혼자 끙끙 앓는다.

타고난 씩씩함도 심신이 받았을 충격과 피로까지는 어쩌지 못했을 거다.

강박적으로 자립심이 강한 여자였다. 타인에게 공짜 밥 한 끼를 얻어먹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할 만큼.

아마 민폐라고 여겨 자기 짐을 타인과 나누지 못하는 걸 테다.

제 일은 스스로 해결해야만 당당할 수 있다는 믿음이 만들어 낸 허울뿐인 씩씩함은 고집에 가까웠다.

솔직한 바람을 말하자면 유다정이 조금만 응석을 부려 주면 좋겠다. 그럼 뭐든 다 해 줄 수 있을 텐데.

우스운 건 혼자서 모든 걸 감당하려는 고집스러움조차 예뻐 보인다는 거다. 유시우를 사랑하는 모습을 지켜볼 때면 더없이 예쁘고.

예뻤다. 예쁘니까 좋은 것 같았다. 유다정이 좋다.

말투와 표정, 그 밖의 것들로 이미 감추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좋아한다는 말을 꺼내진 못했다.

조만간 그 말을 해도 괜찮을 시기가 올 수도 있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5년 전 그때 유다정이 달아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적어도 이 가녀린 여자가 모든 걸 혼자 짊어지는 꼴은 두고 보지 않았을 거다.

차정혁으로 말할 것 같으면, 누군가 제 것을 건드린다는 것 자체가 용납이 안 되는 인간이었다.

유다정이 제 것이었다면, 차정혁의 그늘에 있었더라면, 어제 같은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정혁은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자신의 선택이 유다정을 얼마나 힘들게 할지 잘 안다. 강아지풀 주제에 까불어도 봐준 건 그래서였다.

유다정을 위해서.

그런데 이젠 저를 욕하고 때린대도 할 수 없다.

안쓰러움에 말간 뺨을 손등으로 쓸어내렸다.


“유다정. 너 이제 어떡하냐.”

 

 

* * *

투명한 비닐 팩에 담긴 증거물들이 테이블 위에 나열되었다.


“복도에 비치된 소화기에 몰카를 숨겨 놓고 도어록 비번을 딴 것 같습니다. 야밤에 몰래 소화기를 들고 갔다가 다시 가져다 놓는 장면이 CCTV에서도 확인이 됐습니다.”

담당 형사의 말에 형사과장과 경찰서장의 얼굴이 무거워졌다. 기름 낀 이마를 슥슥 문지르던 서장이 혀를 둘러 입술을 핥았다.


“그래서, 피의자 상태는 어때?”

신경질이 잔뜩 묻어난 목소리에 담당 형사가 흠칫 눈동자를 굴렸다.


“그게…… 갈비뼈 넉 대 골절에 코뼈와 안와 골절, 무릎 인대가 파열됐고 치아가 다섯 개 부러졌습니다. 현재로선 밥숟가락도 못 들 지경이라 서너 달쯤 입원이 불가피합니다. 거의 산송장인데, 특이점은 목숨에는 지장이 없다는 겁니다.”

“으휴! 다 나가!”

탄식을 쏟은 서장이 모두를 내쫓았다.

이윽고 서장의 원망 가득한 눈길이 남의 집 불구경하듯 편안한 남자의 얼굴로 날아가 꽂혔다.


“나참! 애를 그렇게 반 죽여놓으면 어떡합니까!”

서장의 투정이 시작되었다.


“안 그래도 요즘 시끄러운데, 이거 말 새 나가 보세요. 과잉진압이네 뭐네, 우리 서가 다 뒤집어쓰게 생겼다고요!”

칭얼거리는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정혁은 떨떠름하게 귓바퀴를 문질렀다.


“차 전무. 이거 명백한 폭행입니다. 선을 넘어도 적당히 넘었어야지!”

“아, 이러면 나도 좀 짜증 나는데.”

한숨 섞인 나른한 목소리가 서장의 말을 차고 들었다.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서장이 발끈했다.


“아니, 그렇잖아요. 대신 범인도 잡아 주고 실적도 올려 줬는데, 이 정도면 용감한 시민상 같은 거 줘야 하는 거 아닌가 해서.”

퉁명한 눈길을 던지자 말문이 막힌 서장의 입이 떡 벌어졌다.

관할 경찰서장 장만수.

어제만 하더라도 그는 정혁에게 꽤 협조적인 자세였다. 재벌가의 로열패밀리와 친분을 쌓을 기회를 마다할 사람은 없으니까.

그런데 서남식이 만신창이가 되었다는 보고를 받고는 태도가 싹 돌변했다. 편의를 봐줄 수는 있으나, 똥물까지 뒤집어쓰는 건 타산에 맞지 않는다는 거다.

여하튼 새벽 댓바람부터 길길이 날뛰는 통에 서장의 투정을 들어 주러 정혁은 직접 걸음까지 해야 했다.

잠시 기 싸움을 나누던 정혁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할 수 없지. 그럼 나도 기자들한테 가서 고자질 좀 해 볼까? 아동 유괴범을 잡아 놓고 전과자를 제대로 조사도 안 하고 그냥 놓아준 바람에 피해자가 보복을 당했다. 시나리오 좋죠?”

“그거야 피해자가 아는 사이라고 해서 무마된 거라니까!”

답답하다는 듯이 언성을 높이는 장 서장의 얼굴로 소슬한 눈빛이 날아들었다.


“서장님. 14년 전 사건의 피해자와 가해잡니다. 기록만 유심히 봤어도, 가해자를 피해자 면전에 들이대면서 아는 사이냐고 묻는 멍청한 짓은 안 했겠지. 피해자가 묵시적 위협이나 협박에 노출됐을 거란 생각은 못 하나? 요즘 경찰 참 편해. 그죠?”

“이것 봐요, 차 전무!”

모욕적인 언사에 장 서장의 얼굴이 언짢게 굳었다.


“어쨌든 잠재적 범인을 놓친 건 분명하잖아요. 새어 나가면 기자들이 개떼처럼 덤벼들겠지. 1차 범행이 실패로 돌아가자 몰카를 설치해 비밀번호를 알아냈다. 그리고 무단 가택 침입에 강도, 아이가 있는 집에서 부녀자 강간 시도까지. 그런 흉악범을 방치했으니……. 어후, 우리 서장님 그 뭇매 다 감당할 자신 있으려나?”

딱딱하게 굳은 서장의 얼굴이 서서히 죽상으로 변해 갔다. 장 서장의 목소리가 한풀 꺾였다.


“차 전무. 왜 이럽니까? 피해자한테 2차 가해 하지 말래서 소환 진술도 생략하고 편의 다 봐드리지 않았습니까. 내 말은 용의자 폭행까지 우리가 뒤집어쓰는 건 너무 심하다는 거지.”

설설 기면서도 장 서장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아무래도 제대로 코가 꿴 것 같았다.


“정년이 한참이나 남았는데 모가지 날아가게 생겼다니까. 나뿐이면 말을 안 해. 내 밑에 애들 줄줄이 옷 벗어야 하는데 달린 처자식들은 어떡합니까.”

거의 애걸복걸이었다. 곰곰 듣고 있던 정혁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치. 서장님 고충이야 잘 알지. 아는데, 짜증 나잖아. 일개 시민이 경찰 대신 범인 잡는다고 칼침까지 맞을 뻔했는데, 우리 서장님은 투덜대기만 하고.”

“칼침? 칼침이라니!”

장 서장의 눈이 의아하게 떠졌다. 그 얼굴을 무심히 바라보며 정혁은 턱을 괸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칼 들고 덤비는데 어떡해. 나도 죽기 살기로 싸워야 할 거 아닙니까.”

정혁이 삐딱하게 앉아 다리를 꼬았다.


“서장님 난처해지는 건 나도 싫으니까, 경찰 빼고 용감한 시민이 잡은 거로 합시다. 그럼 정당방위로 넘어가기도 쉽잖아. 어쨌든 전과도 있고 칼도 들었으니 형량 당연히 늘 테고, 우리 서장님 옷 벗을 일도 없고 윈윈 아닌가?”

파리가 들어가도 모르게 벌어져 있던 서장의 입에서 또다시 탄식이 흘렀다.


“그게 말이 된다고 봅니까? 그럼 흉기는 어딨습니까?”

“흉기든 증거든, 그림은 우리 서장님이 그리셔야지. 난 어디까지나 연필만 쥐여 주는 거고.”

정혁의 입꼬리가 장난스럽게 말려 올라갔다. 아이고! 서장이 타는 속을 달래려 냉수를 벌컥 들이켰다.

그 모습을 빤히 주시하던 정혁이 다시 귓바퀴를 만지작거렸다.


“그게 싫으면 당장 기자들하고 면담 좀 하고.”

대충 말의 요지를 이해한 서장이 고심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정확히 원하는 게 뭡니까?”

“글쎄, 일단 악질인 건 분명하잖아요. 어떡하겠어. 우리 같은 사람들이 정의구현 해야지. 많이도 안 바라. 대충…….”

나른하게 중얼거리며 귓바퀴를 문지르던 정혁의 눈이 올라섰다.


“한 십수 년 푹 썩혔으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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