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내가 애비다 (44/114)


44화 내가 애비다
2023.01.01.


명한유통 핵심 실무진들이 R호텔 로비로 들어섰다. MH면세점의 유럽 진출을 위한 협업관계자들과의 중요 미팅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미팅 장소로 이용될 객실 층에 도착했을 때였다. 앞선 남자의 곧은 어깨를 주시하며 걷던 민 실장의 발이 주춤 멈췄다.

무슨 생각에선지 객실 앞에서 발끝을 돌려세운 차 전무가 진지한 투로 확인했다.


“준비하라고 한 건?”

“예……?”

못 알아듣자 대번에 눈가가 구겨진다. 한숨을 뱉은 그가 긴말 필요 없다는 듯 한마디를 던진다.


“호랑이.”

그제야 민 실장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아! 호랑이…… 지금 공수 중입니다.”

정혁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3시간 안에 끝낼 거니까 그 전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준비해 놔.”

“걱정 마십시오. 3시간 안에 무슨 일이 있어도 준비하겠습니다.”

결연하게 확답한 민 실장의 허리가 절도 있게 반으로 접혔다.

정확히 3시간 뒤.

미팅을 끝내고 나와 차에 오른 정혁에게 쇼핑백 하나가 소중히 전달되었다.

상자를 열어 대강 내용물을 눈으로 확인한 정혁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미끄러졌다.


“용케 구했네.”

흡족한 반응에 민 실장의 얼굴에도 안도가 어렸다.


“말도 마십시오. 전국을 다 뒤졌는데 딱 하나 남았대서 공수하느라 애 좀 먹었습니다.”

“수고했어.”

도로를 달리는 동안에도 정혁의 눈길이 종종 쇼핑백으로 향했다. 유시우가 이걸 받고 좋아할 걸 생각하자 벌써부터 기분이 좋았다.

입꼬리를 씰룩이고 있을 때 몸 어딘가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휴대폰을 찾아 발신자를 확인한 정혁의 눈썹이 살짝 들렸다.

유시우였다.

낮에 통화할 때 이따가 선물을 가지고 가겠다고 약속한 참이었다. 그새를 못 참고 전화한 걸 보니 몹시 기다려지는 모양이었다.

재빨리 휴대폰을 귀에 붙였다.


“유시…….”

『…….』

이름 석 자를 부르기도 전에 정혁의 허리가 슬며시 직각으로 세워졌다. 명랑한 목소리를 기대했건만 막상 고막을 파고든 건 울음 섞인 숨소리였다.


“유시우?”

『……아저씨.』

눈가를 찌푸린 정혁은 모든 신경을 청각에 집중했다.


“무슨 일…….”

『아저씨…… 나쁜 사람. 집에…… 나쁜 사람 있어요.』

“나쁜 사람?”

『어…… 삼촌……인데. 엄마가 삼촌 나쁜 사람이라고. 그래서 시우는 방에…… 문 꼭 잠그고 나오면 안 된댔어요…….』

목소리를 낼 때마다 히끅거리는 소리가 뒤따랐다.


“끊지 마.”

무겁게 당부한 정혁이 타이를 잡아 내렸다.

신호도 무시하고 쏜살같이 달린 차는 채 수분도 되지 않아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다.

띵. 엘리베이터를 박차고 나가며 소리쳤다.


“유시우! 현관 번호 뭐야!”

『……시우, 생일.』

 

 

* * *

후미진 어딘가로 끌려온 남식의 얼굴이 시멘트벽으로 거칠게 처박혔다.

뻐억!

두개골이 깨졌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괴기한 소리가 울렸다.

머리채가 잡혀 내의 차림으로 끌려오는 동안에도 온갖 발악을 하더니, 시끄럽던 입도 얌전해졌다.

벽에 들러붙은 밀가루 반죽처럼 굳어 있던 남식의 몸이 벽을 타고 주륵 흘러내렸다.

신경질적으로 타이를 잡아 뺀 정혁이 남루하게 웅크린 놈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왜? 손맛이 안 잊혀? 통 그 버릇이 안 고쳐져서 그 여자한테 그렇게 들러붙나? 응?”

잘근잘근 씹어 뱉는 말투에 비해 음성은 의외로 차분했다.

겨우 정신을 차린 남식이 눈가를 찌푸렸다. 웬 놈인지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였다.


“컥컥. 너, 뭐 하는 X끼야. 이 X끼 잘 걸렸다…….”

“잘 걸린 건 너지. 내가 너 얼마나 찾아다녔다고.”

마치 예쁜 사람을 바라보는 듯이 정혁의 입가에 소슬한 웃음이 물렸다.


“뭔 헛소리야. 암튼 내가 너 고소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 깽값 한번 제대로 물어봐라. 쿠에엑, 퉤!”

찌푸린 한쪽 눈두덩이 벌에 쏘인 것처럼 서서히 부어올랐지만 기세는 여전했다.

정혁의 눈매가 부드럽게 굽었다.


“돈 좋아하나 봐?”

“그럼 돈 싫어하는 인간도 있냐, X끼야.”

“운 좋네. 너 팔자 고치겠다. 내가 가진 게 돈밖에 없거든.”

“허세 부리지 마. 내가 너 폭행죄로 콩밥 먹게 할 거야. 합의금? 한두 푼 가지고 어림도 없어. 각오해. 쿨럭.”

“정말? 백억 어때?”

보도듣도 못한 액수에 남식의 입이 슥 벌어졌다. 휘둥그레진 눈이 곧장 그의 팔에 채워진 휘황찬란한 손목시계로 향했다.

듣고 보니 좀 있는 집 자식 같긴 했다. 이래서 다정이 근처를 어슬렁거리면 콩고물이라도 떨어지기 마련이었다.

계집애가 어릴 때부터 살랑살랑 꼬리를 치더니 주변에 돈깨나 있는 사내놈들이 제법 꼬이는 모양이었다.

남식은 입맛을 다셨다. 다는 아니라도 그 백 분의 일만 내놔도 충분히 합의할 용의가 있었다.

남식의 입가에 실실거리는 웃음이 물렸다.


“에이, 양심상 백억은 너무하고. 큰 거로다가 세 장. 그 이상은 나도 못 깎아 줘.”

인심 썼다는 투로 지껄이는 말에 정혁이 피식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 근데 어쩌지? 너한테 백억을 쓸 거면 난 그 돈 너 안 줘. 경찰 검찰 판사 매수하는 데 쓰지.”

합의할 것처럼 굴더니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지 모르겠다.


“뭐라는 거야. 이 X끼가.”

“못 알아들어? 아동 납치, 주거침입, 강도, 금품 갈취, 스토커, 성추행. 강간 미수, 협박, 살해 위협. 세상에 있는 죄란 죄는 다 뒤집어씌워서 평생 감빵에서 썩게 할 거라고.”

“네가 뭔데? 네가 그 애X끼 애비라도 돼?”

여전히 기세등등 부리는 배짱에 정혁의 눈빛이 서걱 얼어붙었다. 서늘하게 늘어진 입가로 헛웃음이 흘렀다.


“어.”

“뭐?”

퉁퉁 부어오른 눈을 치뜨기도 전이었다. 남식의 눈앞에 구둣발이 들이쳤다.


“내가 애비라고! 이 XXX끼야!”

퍽퍽퍽.

통 말조심을 할 줄 모르는 남자에게 무차별 폭행이 가해졌다.


“애X끼라고 한 번만 더 해. 아주 갈기갈기 찢어 죽여버릴 테니까, XX끼야!”

 

* * *



“협조 감사합니다. 내일 서에 나와서 몇 가지 진술을…….”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이 말을 줄이며 동료 경찰관을 돌아봤다.


“범인 잡았다고 안 했나? 어딨어?”

“아, 그게…….”

동료 경찰관이 재빨리 그의 귀에 대고 뭔가를 속닥였다. 아, 소리를 내며 고개를 주억거린 경찰관이 어색한 웃음을 물었다.


“진술은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여하튼 많이 놀라셨을 텐데, 이제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럼 저흰 이만.”

현장조사를 끝낸 경찰관들이 심심한 위로를 전하고 돌아섰다.

그들을 배웅하자마자 다정은 재빨리 문을 걸어 잠그고 안전고리까지 채웠다. 그제야 맥이 턱 풀려 현관에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눈을 감고 여전히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는 도중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정은 서둘러 시우의 방으로 향했다.

집안이 쑥대밭이었기에 안전을 위해 시우는 방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했다.

괜히 마음이 쓰여 평소 하지도 않는 노크를 하고 조심히 방문을 열었다. 시우는 시킨 대로 침대에 앉아 얌전히 동화책을 읽고 있었다.

다정이 들어서자 침대를 폴짝 내려온 시우가 다정의 품으로 안겨들었다. 다정은 두 팔로 시우를 꼭 끌어안았다.


“우리 시우 무서웠지? 이제 괜찮아.”

하나도 안 무서웠다며 도리질을 친 시우가 고개를 휙 젖혔다.


“어…… 근데! 경찰 아저씨가 나쁜 사람 잡아갔어요?”

“그럼요. 꼼짝도 못 하고 잡혀갔지.”

애써 씩씩하게 대답했지만, 다정의 목소리가 먹먹했다.

생각보다 의젓한 모습이라 안심이 되었지만, 오늘 일이 시우에게 트라우마나 되지 않을까 다정은 못내 걱정스러웠다.


“시우야. 혹시 무서운 생각이 나거나 이상한 생각이 들면 엄마한테 꼭 얘기해 줘야 해요.”

“네에!”

“우리 시우. 방에서 동화책 한 시간만 더 읽을까?”

시우를 다독여 놓고 방을 나온 다정은 식탁 의자에 털썩 앉아 차게 식은 이마를 짚었다. 어질러진 것들을 치워야 했지만, 도무지 손이 가질 않았다.

다정은 액정이 산산이 부서진 휴대폰을 보며 복잡한 얼굴로 마음을 졸였다. 남식과 함께 나간 정혁이 걱정스러웠지만 전화조차 할 수 없었다.

그때 갑자기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다정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놀라기도 잠시 스크린에 떠오른 얼굴을 보고 얼른 현관으로 달려 나갔다.


“차정혁 씨. 괜찮아요?”

다급히 문을 열어젖히는 다정의 얼굴이 창백했다. 의외로 문밖에 선 남자는 차분해 보였다.


“들어가도 돼?”

아깐 제멋대로 들어와 놓고 뒤늦게 예의범절을 따진다. 다정은 현관문을 넓게 벌려 주었다.


“그 사람은……?”

“신경 쓰지 마. 다신 못 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거실까지 들어선 정혁은 집 안을 크게 둘러보았다.


“유시우는?”

“시우는 방에…….”

다정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마치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시우가 있는 집에서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진 게 모두 제 잘못인 것만 같아 그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무겁고 고요한 눈길이 그런 다정을 가만히 응시했다. 괜찮은 척하지만, 한껏 웅크린 어깨가 잘게 떨렸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정혁은 조금 난처해지고 말았다.

화를 내는 건 익숙한 일이었다. 짜증을 내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에게 사과라는 걸 하는 것도 얼마 전에야 처음 해 봤다.

그런데 위로라는 건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통 감이 오질 않았다.

그래서 그냥 안았다.


“무, 무슨 짓이에요?”

깜짝 놀란 다정이 두 팔을 허우적거리지만, 밀어내는 힘은 하찮기 짝이 없었다.


“무서웠잖아. 그러니까 조금만 있어.”

속삭이듯 달래며 잘게 떠는 여린 등을 쓸어 주자 경직된 몸에서도 차츰 힘이 빠져나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잠잠하던 다정의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시우가 들을까 소리를 죽여 가며 다정은 서럽게 흐느꼈다. 뒤늦게야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밀려들어 저도 모르게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그런 그녀를 두 팔로 더 꼭 보듬으며 정혁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새 오빠란 놈이 추악한 면모를 드러낸 건 부모님의 재혼 직후였다. 아직 중학생이었던 다정에게 말 못 할 고민이 생긴 것도 그 무렵이었다.

오누이라는 걸 내세워 필요 이상으로 친근하게 구는 서남식이 불편했고, 가족이라는 이유로 그와 한 공간에 있어야 하는 매 순간이 끔찍했다.

다정이 고등학교 진학 당시 이모네 몸을 의탁해 타지에서 학교를 다닌 것도 그 때문이었다. 어린 학생이 상습적인 고통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한 최선이었을 거다.

그렇게까지 했음에도 서남식은 끈질겼다.

다정의 고등학교 졸업식 날이었다. 모친을 먼저 돌려보낸 뒤 서남식은 졸업을 기념하자는 핑계로 싫다는 다정을 노래방으로 유인했다고 한다.

그렇게 세상을 향해 날아오를 꿈에 부풀었어야 했을 졸업식은 그녀에게 지워버리고 싶은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 버리고 말았다.

당시의 사건은 물리적 폭행에 더 중점을 두고 조사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만큼 참담했다.

실제 어린 여학생에게 가해진 폭력이 얼마나 잔인했는지, 기록으로 보관된 증거 사진에 그 정황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여러 사정으로 합의된 채 마무리가 되었지만, 악몽 같던 기억을 깨끗하게 도려내는 건 불가능했을 거다.

아이언맨도 헐크도 될 수 있다고 큰소리를 치지만, 그래 봤자 강아지풀처럼 작고 여린 여자였다.

그 남자를 마주친 순간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을지 정혁으로선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예요.”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는지 금세 앙탈이다.


“너 안 떨 때까지.”

“이젠 괜찮아요.”

가슴을 밀어내는 힘에 정혁은 순순히 밀려났다. 아이 쓰다듬듯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어 주고 물었다.


“유시우 방 어디야?”

“저기…….”

대답을 듣자마자 정혁의 발끝이 돌아섰다. 시우의 방으로 향한 그가 문을 열었다.


“유시우.”

이름을 부르자 동화책을 읽던 시우가 침대를 폴짝 뛰어내렸다.


“아저씨!”

와다다 달려드는 시우를 가뿐히 안아 들자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시우의 입이 헤 벌어졌다.

시우를 안고 돌아온 그가 다정의 허리를 떠밀었다.


“가.”

“네? 어딜…….”

“내 집에 가. 당분간 거기서 지내.”

“아니에요. 이젠 괜찮아졌어요.”

극구 사양하는 다정을 빤히 바라보던 눈이 난장판인 집 안을 넓게 훑었다.

깨진 전구의 파편, 굴러다니는 소주병과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침입자의 옷가지들.


“귀신 나올 것 같은데.”

“치우면 돼요…….”

정혁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다정의 손목을 살그머니 쥐어 올렸다.


“너 다쳤어.”

다정의 양 손목에 불그스름한 멍울이 번져 있었다. 아마 내일이면 퍼렇게 멍이 들 거였다.


“여기도.”

살짝 팔을 비틀어 보이자 팔꿈치에 핏자국도 보였다. 쓰라린 느낌은 있었지만, 너무 정신이 없어서 피가 나는 줄도 몰랐다.


“이 정도는 연고 바르면 돼요.”

고집을 부리자 정혁은 더 말하지 않았다.


“맘대로 해. 어쨌든 유시우는 여기서 못 재워.”

납치라도 하듯 시우를 안고 쌩 돌아서는 모습에 다정은 펄쩍 뛰었다.


“차정혁 씨! 거기 서요! 시우 돌려달란 말이에요!”

어쩔 줄 몰라 허둥거리던 다정은 제 아들을 훔쳐 가는 남자를 부리나케 쫓아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