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침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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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침입자
2022.12.29.
얌전하던 휴대폰 화면이 발광했다. 정면을 향하던 냉철한 눈이 아래로 떨어져 발신자를 확인했다.
그 순간 의자를 뻥 차고 일어난 정혁은 다급히 통화버튼을 눌렀다.
“무슨 일……!”
『어! 아저씨다.』
대번에 걱정스러운 첫마디가 튀어나갔지만,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해맑기만 했다.
꺄륵대는 웃음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그게 간지러워서 정혁은 입술 끝을 지그시 깨물었다.
종종 메시지를 보내오긴 하지만, 유시우에게 전화가 걸려 온 건 처음이라 조금 놀라고 말았다.
여하튼 무슨 일이 생겨 전화를 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엄마 없어요.』
“누구랑 있어?”
『할머니! 할머니 코해요. 그래서 시우가 몰래 전화한 거예요.』
정혁의 목으로 킥, 하는 웃음이 삼켜졌다.
“잘했어.”
『어! 있잖아요, 아저씨. 시우 방학했어요.』
자랑이라도 하는 듯이 말한다. 정혁의 입가가 씨익 늘어졌다.
“놀러 가고 싶은데 생각해 놔.”
『어? 엄마랑 저기 가는데.』
“저기? 어디?”
『붕! 비행기 타고 슝!』
회의실 안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다물고 눈알만 바삐 굴렸다.
유통 구조의 개편과 타사와의 차별적 시스템 구축이라는 매우 중대하고도 엄중한 회의가 진행되던 중이었다.
그 와중에 최고 결정권자는 휴대폰을 귀에 붙인 채 사랑에 빠진 남자처럼 헤실거리고 있었다.
중대하고 엄중한 회의는 그렇게 예고도 없이 중단돼 한동안 재개되지 않았다.
* * *
백화점에 도착한 다정은 의류 층으로 향했다.
여행 갈 때 입을 만한 옷이 필요했지만, 그건 뒤로 미루고 꽃분 씨와 솔이의 선물부터 속속 눈에 담았다.
통장도 두둑한 김에 가격보다 품질을 따져 손이 부끄럽지 않을 만한 것들로 장만할 생각이었다.
두 사람의 선물을 고르고 뒤이어 남성복 매장으로 들어간 다정은 신상 셔츠들을 쭉 둘러보았다.
어떤 게 좋을지 고심하며 셔츠를 만지작대던 다정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다정은 얼른 돌아서서 매장을 빠져나왔다.
무의식적으로 도준의 선물을 고르고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간 주변 사람들의 선물을 마련하며 너무도 당연했던 일이지만, 이젠 아니었다.
무겁고 심란한 기분을 부여잡고 정처 없이 거닐던 발이 문득 한 캐쥬얼 매장 앞에서 멈추었다.
빈티지 스타일의 형광 연두색 티셔츠를 입고 있는 마네킹이 눈길을 끌었다. 아동과 성인 사이즈가 나란히 입혀져 있어서 더 눈에 띄는 것 같았다.
브랜드의 마스코트인 곰돌이가 프린팅된 티셔츠인데, 시우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아동용, 그리고 성인용 티셔츠를 번갈아 눈에 담던 다정의 발이 매장 안으로 향했다.
* * *
“어머! 기집애. 뭐 이런 걸!”
선물을 풀어본 솔이가 타박을 했다. 그러면서도 입은 귀에 걸렸다.
여름을 닮은 연푸른색의 실크 원피스는 솔이와 제법 잘 어울렸다.
“싫으면 내놔.”
다정이 빼앗으려 손을 뻗기도 전에 솔이는 이미 저만치로 달아나 있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누가 싫대?”
촐싹거리던 솔이는 스테인리스 벽을 거울삼아 원피스를 댄 모습을 요리조리 비추어 보았다. 마음에 드는지 입가에선 기분 좋은 웃음이 떠날 줄 몰랐다.
뿌듯하게 웃기도 잠시 다정은 또 다른 쇼핑백을 뒤적였다.
이번엔 꽃분 씨 차례였다.
커다란 해바라기 코르사주로 장식된 린넨 모자와 여름용 카디건을 내밀자 숙희의 눈이 왕방울만큼 커다래졌다.
“세상에. 얘 돈 무서운 줄 몰라.”
다정의 눈길이 뾰족해지자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하던 숙희는 냉큼 상자를 가로챘다.
“이왕 사 왔는데, 하는 수 없지.”
하여간 모녀가 똑같다.
그렇게 모녀는 한동안 스테인리스 벽 앞을 떠날 줄 몰랐다.
그 무렵 시우의 또랑또랑한 눈이 바삐 움직인다. 빙수를 먹느라 찹찹대던 입의 움직임도 현저히 느려졌다.
시키는 대로 착하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제 것은 없냐는 표정이었다.
다정은 아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재빨리 쇼핑백을 뒤져 큼직한 상자를 내밀었다.
“이건 우리 시우 꺼.”
“우와!”
스노클 물안경을 본 시우가 탄성을 질렀다.
신기한 듯 이리저리 얼굴을 대 보지만, 쉽지 않다. 사이즈를 조절해 머리에 씌워 주자 시우의 입이 붕어처럼 동그랗게 벌어졌다.
숨을 쉬어야 생존이 가능한 건 다섯 살 본능으로도 아는 모양이었다.
* * *
통 크게 저녁 식사까지 대접하고 나오자 하늘이 어둑어둑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살래살래 엄마 손을 잡고 흔들던 시우가 물었다.
“엄마! 붕 비행기 언제 타요?”
“글쎄, 일곱 밤은 더 자야 할걸?”
“휴…….”
시우의 입에서 탄식이 터졌다. 일주일을 어떻게 기다리나, 애를 태우는 눈치였다.
집에 도착했을 때 다정은 조금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불이 환하게 켜진 건 물론이고 TV 소리까지 들려오는 게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우야. 할머니가 텔레비전 안 끄고 나오셨나 봐.”
시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 할머니 텔레비전 안 봤는데. 코했어요.”
“그래? 이상하네…….”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리며 통로를 벗어나 거실로 들어섰을 때 다정은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시야에 잡히는 집안 몰골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서랍이란 서랍은 죄 끄집어져 있고 쏟아진 물건들은 어지럽게 나뒹굴었다.
얼핏 비치는 침실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옷장 서랍장 할 것 없이 뭔가를 찾아 뒤진 것처럼 모조리 헤집어 놨다.
먹던 컵라면과 소주병이 테이블 위를 굴러다녔고, 소파 위에는 낯선 옷가지가 나부라져 있었다.
지금 시각은 오후 8시.
쇼핑을 마친 시각은 오후 2시경.
숙희에게 전화를 걸어 시우를 데리고 카페로 나오라고 한 시각도 그즈음이었다.
그렇게 대략 여섯 시간 동안 비어 있었던 집이 사람의 흔적으로 낭자했다.
섬뜩한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뭔가를 생각하고 판단을 내릴 겨를은 없었다. 다정은 황급히 시우를 현관 쪽으로 돌려세웠다.
침입자의 정체가 누구냐 하는 문제는 나중이었다. 경찰에 신고하는 것 역시 일단 여길 나간 후였다.
서둘러 현관으로 발을 떼던 그때였다. 통로 중앙에 있던 화장실 문이 덜컥 소리를 내며 열렸다.
또다시 얼어붙고 만 다정은 부릅뜬 눈만 거칠게 흔들었다.
열린 문으로 환한 빛이 새어 나오고, 어둑한 그림자가 그 위를 가로질렀다.
이윽고 그 문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형체가 기어 나왔을 때, 다정은 경악한 얼굴로 숨을 집어삼켰다.
“어? 언제 왔냐?”
러닝셔츠와 트렁크 팬티 차림의 남자가 태연하게 말하며 배를 벅벅 긁었다.
꿈에 볼까 두렵던 그 남자, 서남식이었다.
공포가 엄습했다. 사고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그러나 본능은 빨랐다.
다정은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 쥐었다.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심장이 미친 듯이 고동쳤다.
112라는 숫자 세 개를 누르는데, 우스울 만큼 손이 떨렸다. 뒤늦게야 긴급번호 버튼을 발견하고 누르려던 찰나 다정의 손에서 휴대폰이 휙 낚아채 졌다.
화들짝 놀란 다정은 냉큼 시우를 뒤에 붙이고 뒷걸음질 쳤다.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던 남식의 입꼬리가 비식 휘었다. 동시에 바닥으로 날아간 휴대폰이 빠악! 소리를 내며 작살이 났다.
잔뜩 흥분한 남식이 금이 간 휴대폰을 팍팍 짓밟기 시작했다.
난폭한 장면에 시우의 몸이 경직되는 게 느껴졌다. 경계하듯 그와 대치한 채 다정은 무작정 소리쳤다.
“시우야, 시우 방으로 가! 가서 문 잠그고 있어!”
엄마의 지시에 시우는 즉각 돌아서서 제 방으로 달아났다.
“문 꼭 잠가! 엄마가 나오라고 할 때까지 절대 나오면 안 돼!”
철컥. 문까지 걸어 잠그는 소리가 들리자 겨우 안도가 되었다.
휴대폰을 찍어 밟던 남식이 시근덕거리며 허리에 손을 얹었다. 주춤거리던 다정은 냉큼 거실 한편에 있던 스탠드 조명을 움켜쥐었다.
고작 일 미터 남짓 되는 얄팍한 스탠드를 겨누자 남식이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친다.
“너 뭐 하냐?”
“가, 가까이 오지 마! 당장 내 집에서 나가!”
겁에 질려 경고하는 목소리에 힉힉거리는 호흡이 뒤섞였다.
“이게 사람을 벌레 취급하나! 이걸 그냥 확!”
버럭 고함을 친 남식이 손을 휙 쳐올렸다. 위협적인 동작에 기겁한 다정은 그만 스탠드를 놓치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시우 때문이라도 정신을 차리려 하는데 자꾸만 시야가 빙빙 돌았다.
마치 14년 전의 공포가 다시 재연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시우를 위해서 어떻게든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손이 다시 스탠드를 찾아 바닥을 더듬지만, 남식이 선수를 친다.
퍽!!
사나운 슬리퍼 발에 차인 스탠드는 수납장 아래로 날아가 처박히고 만다. 깨져 나간 전구의 파편이 사방으로 넓게 흩어졌다.
다정은 겁에 질려 힉힉대며 귀를 틀어막았다. 아무리 틀어막아도 윙윙대는 소음은 귓전을 떠나지 않았다.
슥슥 슬리퍼를 끌고 다가온 남식이 다정의 옷자락을 멱살처럼 움켜쥐고 을렀다.
“야! 내가 동생 집에 좀 올 수도 있지. 꼭 이렇게 X랄을 해야겠냐? 엉?”
정말이지 진절머리가 났다. 가족이라고 우기는 것도 치가 떨렸고, 오빠 행세를 하려는 것도 소름 끼쳤다.
다정은 용기를 쥐어짰다.
“조…… 조금 있으면, 아이 아빠 올 거야. 그 사람 오면…… 그냥은 안 넘어갈 거야. 그러니까, 그 전에 나가. 그, 그럼…… 신고 안 할게. 진짜야.”
마지막으로 아량을 베풀지만, 남식은 피식피식 실소만 흘렸다.
“이게 진짜, 사람 호구로 보네. 야, 야.”
남식이 손가락을 세워 다정의 머리를 툭툭 밀었다.
“애 애비 없는 거 내가 모를 줄 아냐? 엉? 이게 사람을 빙다리 핫바지로 아네?”
툭툭 밀칠 때마다 머리가 흔들렸다.
다정은 입술을 짓씹었다. 진심으로 살의가 치솟았다. 할 수만 있다면 정말 죽여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현재 다정이 그를 상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외려 그를 자극해서 좋을 것도 없었다. 자칫 시우까지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성인 남자에게 잠긴 문을 부수는 것쯤은 일도 아닐 것이다. 무슨 일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시우의 안전이 최우선이었다.
고심하던 다정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도, 돈…… 줄게. 나, 나 돈 있어. 그러니까…… 여기서 나가기만 해. 나가면…… 바로 줄게.”
돈 얘기가 나오자 굳어 있던 남식의 입가에 실실 웃음이 물렸다.
“아씨, 진작 말하지 그랬어. 이래서 내가 널 안 좋아할 수가 없다니까.”
옷자락을 놓은 남식이 다정을 일으켜 소파에 주저앉혔다. 그러곤 나란히 앉아 술병을 쥐었다.
“그러고 있지 말고 오빠랑 한잔해.”
병째 소주를 벌컥 들이켠 남식이 다정의 어깨 위에 척 팔을 걸쳤다. 뿌리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병나발을 불며 남식은 너무도 태연하게 TV를 시청했다.
다정은 애가 타들어 갔다. 1초가 하루처럼 느껴졌다. 더 견딜 재간이 없던 다정이 재차 입을 열었다.
“……돈, 준댔잖아. 지금 나가. 지금 안 나가면 안 줄 거야.”
고개를 돌린 남식이 반쯤 풀린 눈을 끔뻑거렸다.
“아이, 다정아. 오빠한테 왜 그렇게 야박해.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알면서.”
“……뭐?”
“돈 받는 건 당연한 거고. 그 전에 재미도 좀 봐야지.”
씨익 웃는 그의 눈에 음흉한 빛이 스침과 동시에 남식의 얼굴이 불쑥 다가왔다.
“흐윽!”
반사적으로 그를 뿌리친 다정은 황급히 몸을 틀었다. 달아나려 하지만, 다시 옷자락이 붙잡혀 주저앉혀지고 말았다.
낄낄거리는 그에게서 역겨운 술 냄새가 진동했다. 힘겨루기라도 하듯 버티며 다정은 그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때 허우적거리는 다정의 손끝에 무언가가 스쳤다.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던 빈 소주병이었다.
병을 움켜쥔 다정은 그것으로 남식의 머리를 가차 없이 내리쳤다. 살의를 담아 힘껏.
그러나 아쉽게도 공격은 빗나가고, 외려 그것이 성질을 돋웠는지 남식은 더 과격하게 돌변했다.
“아씨, 이게 진짜!”
욕설을 뱉은 그가 위협적으로 높게 손을 쳐올렸다. 그 순간, 남식의 머리가 훅 꺾였다. 동시에 다정을 짓누르던 무게감도 멀어졌다.
머리채가 잡힌 남자의 몸이 한순간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그 장면이 슬로비디오의 한 장면처럼 다정의 눈에 아주 느리게 잡혔다.
천천히 공중으로 떠오른 몸뚱어리는 이내 난잡하게 어질러진 거실 바닥으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구둣발로 거실 중앙에 우뚝 선 남자는 몹시도 차분해 보였다. 그의 눈길이 뒤집힌 거북이처럼 버둥거리는 남자를 스쳐 다정에게 향했다.
겁에 질려 그렁그렁한 눈을 마주 보는 눈엔 감정이 없고, 약간 벌어진 입술 새로는 가쁜 호흡이 흘렀다.
벌겋게 달아오른 이마에 배어난 땀방울이 반짝거렸다.
정혁은 두말하지 않았다. 성큼 발끝을 돌려 앓는 소리를 내며 바르작거리는 남식의 머리채를 바락 움켜쥐었다.
성인 남자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질질 끌고 나가던 그가 돌아서며 한마디를 뱉었다.
“애 달래. 유시우 놀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