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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좋아한다고 말하면 (42/114)


42화 좋아한다고 말하면
2022.12.25.


머지않아 코스 요리가 한상차림으로 나왔다. 두 사람이 먹기엔 엄청난 양이었고 지나치게 화려했다.


“먹어. 이거 좋아한다며.”

“안 좋아해요.”

차갑게 돌아온 대답에 정혁의 눈썹이 살짝 들렸다.


“그래? 그럼 배솔이 씨가 거짓말했네.”

“…….”

다정은 한숨을 감추지 않았다.

솔이 이 계집애는 첩자 노릇을 하는 거로도 모자라 식성까지 죄 고해바친 모양이었다.

속이 타는 기분이라 다정은 제 앞에 있는 잔에 사케를 따랐다. 연거푸 두 잔을 털어 넣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다시 병을 쥐려는데, 그녀의 손 위로 커다란 손이 포개졌다.


“속 버려. 먹으면서 마셔.”

조곤조곤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껏 가라앉은 채였다.

다정의 손에서 넌지시 술병을 가로챈 그가 병을 기울였다. 쪼로로. 청량한 소리를 내며 데워진 술이 다시 빈 잔을 채웠다.

이번에도 다정은 그가 채워 준 술잔을 단번에 털어 넣었다. 알싸한 액체를 꿀떡 삼키고 잔을 턱 내려놓았을 때 돌연 고소한 냄새가 들이쳤다.

눈길을 들자 흰 살점 하나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가 긴 팔을 뻗어 살점을 허공에 띄운 채 먹으라는 듯 살짝 흔들어 보인다.


“됐어요. 나도 손 있어요.”

차갑게 외면한 다정은 젓가락을 쥐어 회 한 점을 불편하게 먹었다. 안 내킨다는 듯 턱을 움직여 꾹꾹 씹었다.

순간 쫀득하고 고소한 맛에 다정의 눈이 절로 커졌다. 분위기가 이렇지 않았더라면 맛있다고 호들갑을 떨 뻔했다.

정혁은 외면받은 살점을 다정의 앞접시에 얌전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시우의 어깨를 조심조심 토닥였다.


“나 닮았어. 되게 신기해.”

“…….”

다정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할까. 내가 봐도 닮았다고 할까, 아니면 당신 아들이니 당연하다고 할까.


“많이 아팠어?”

“…….”

대답이 없자 시우에게 향해 있던 그의 눈길이 돌아왔다.


“유시우 낳을 때 말이야.”

“당신은 설명해 줘도 몰라요.”

“진통 때문에 고생한다던데. 얼마나 했어?”

“열여덟 시간…….”

무심코 중얼거리던 다정은 한숨을 뱉었다.


“차정혁 씨. 지금 뭐 하자는 거예요?”

“궁금해서. 난 아무것도 모르잖아. 그래서 얼마나 미안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다정은 괜스레 목이 메는 기분이었다.


“차정혁 씨가 미안해할 일 아니에요.”

“유시우가 네 전부라며. 그렇게 되도록 난 아무것도 안 했잖아. 그래서 미안해.”

깊어진 눈길로 바라보며 연결하는 끝소리가 어색하게 발음되었다.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 차정혁 생애 누군가를 상대로 처음 뱉어 보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다정의 목 언저리로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치고 올라왔다


“차정혁 씨가 왜요?”

“그냥 다. 내가 다 미안한 거 같아서.”

“다시 말하지만, 당신이 미안해할 일 아니에요. 많이 아팠지만, 아이 얼굴 보면서 또 금세 잊었어요.”

“그러네. 아무리 말해 줘도 모르겠네. 얼마나 아팠는지.”

“아파도 감내할 만큼 가치 있는 일이잖아요. 그만큼 아팠으니까 더 많이 귀하고 또 소중하고요.”

말을 맺은 다정은 사케를 한 잔 더 삼켰다.


“그 여자도 아팠을 텐데.”

“그 여자…… 누구요?”

“나 낳았다는 여자.”

다정은 헛숨을 들이켰다. 하여간 말을 못되게 하는 것도 재주였다.


“어머니한테 왜 말을 그렇게 해요? 당신 어머니도 당연히 아프고 고통스러웠겠죠. 그러니까 어머니께 당신도 소중하고요.”

“그럴까. 분명 진통도 했을 거고 많이 아팠어도 감내하고 낳았을 텐데. 그렇게 낳자마자 버릴 수 있었을까.”

시우의 얼굴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애잔하게 일렁였다.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다정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몇 마디만으로도 그에게 어떤 상처가 있는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부족함 없이 남다른 삶을 살아온 남자라고 믿었다. 그의 집, 차, 지위. 눈에 보이는 모든 게 완벽해 보였으니까.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란 것 역시 알았다. 정서적 결핍은 그 어떤 물질로도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그래도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차정혁 씨.”

이름을 부르자 정혁의 눈길이 곧게 다정을 향했다.


“세상 모든 엄마가 다 같을 순 없어요. 하지만 분명한 건 표현이나 방식이 다를 뿐. 엄마 마음은 다 같다는 거예요.”

“엄마라고 다 너 같진 않아.”

“…….”

“그래서 대단하다고 생각해. 누군가에게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 존중받아 마땅하고.”

다정은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엄마로서 당연하게 해 왔을 뿐,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유다정. 수고 많았어. 진심이야.”

무겁고 진지한 목소리가 처진 어깨를 도닥여 주는 따스한 손길처럼 가슴을 울렸다.

별안간 다정의 눈시울이 화끈거렸다.

그간 홀로 시우를 키우며 힘든 일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가깝게는 여전히 해소하지 못한 엄마와의 갈등에 늘 마음이 짓눌렸다.

나름 씩씩하게 해냈다고 믿었고, 그건 많은 이들의 위로와 격려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 남자가 건네는 위로는 조금 달랐다.

수고했다는 한마디. 그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애썼다고, 혼자서도 잘해 냈다고. 그 말을 다른 누구도 아닌, 그에게 듣고 싶었나 보다.

눈시울이 시큰거려 다정은 한참이나 제 앞에 놓인 접시만 바라보았다. 응어리진 모든 것들이 녹아내리는 건 한순간이었다.

잔잔한 가슴에 돌멩이를 던진 것처럼 얕게 일었던 파장이 가라앉을 무렵 다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혁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의 팔에 안겨 잠든 시우의 뺨을 쓰다듬고는 단단한 어깨에 살포시 머리를 기댔다.

유독 측은해 보이는 남자를 안아 주는 대신 부드러운 셔츠에 덮인 팔을 쓰다듬어 주었다.

가벼운 말 한마디로는 전해지지 않을 진심과 위로를 전하기에 이편이 더 나을 거라는 판단이 섰다.

그가 건넨 위로의 답례쯤이라 보아도 좋았다.

그런 다정의 정수리 위로 정혁은 가만히 고개를 기울여 뺨을 기댔다.

유시우와 유사한 냄새가 났다. 부드럽고 은은하고 포근한 냄새.

시간은 고즈넉하게 흘렀다. 그 사이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지만, 서로에게 기대어 침묵으로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일본풍 샤미센 연주가 희미하게 울리는 공간에 따뜻한 공기가 감돌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찮을 만큼 가볍던 머리가 정혁의 어깨에서 떨어졌다. 고개를 든 다정의 맑은 두 눈이 그를 향했다.


“차정혁 씨. 그때 스페인에서 했던 말 기억해요? 우리 각자의 삶을 책임질 수 있는 성인이라는 말.”

정혁의 눈길이 감상에 젖은 듯한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내가 선택했어요. 설령 불장난 같은 시간의 결과라 할지라도 난 부끄럽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 순간만큼은 진심이었거든요. 우리 시우 그렇게 진심으로 품은 생명이니까 절대 후회하지 않아요.”

자신이 얼마나 씩씩한 사람인지 보라는 듯 약간 붉어진 얼굴을 하고도 다정은 활짝 웃었다.

설렜다. 끌렸고 좋았다. 진심으로.

어떨 땐 시우보다 더 어린아이 같은 이 남자가 여전히 설레고 좋았다. 아니어야 하는데 자꾸 마음이 향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고마워요. 차정혁 씨. 설레고 두근거리는 게 뭔지 알려 줘서.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거예요.”

조심스레 손을 뻗은 다정이 그의 뺨을 감싸 쥐었다.

당신은 버림받지 않았어요. 몹시 소중한 사람인걸요.

그렇게 위로하는 마음을 담아 엷게 웃어도 주었다.

뺨을 감싼 손등 위로 정혁의 손이 포개졌다. 그가 지그시 감았던 눈을 다시 떴을 때 유다정의 눈시울은 조금 더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청주의 알싸한 향이 서로의 코끝에서 휘몰아치다가 흩어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그 향취에 이끌려 정혁의 고개가 서서히 기울었다. 그리고 다정의 입술 위로 더운 숨결이 스쳤을 때 그는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금방 입술을 맞댈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가슴을 밀어내는 손길에 제동이 걸렸다.

막아서는 손길에 그는 피식거리며 순순히 물러났다.


“잘하네. 더 해 봐.”

“뭘요?”

“나 들었다 놨다 하는 거.”

특유의 말투에 다정은 살풋 찌푸려 웃었다.


“유다정.”

“…….”

“나 유시우 좋아해.”

다정의 눈이 동그래졌다. 언제나 엉뚱해서 뜬금이 없었다.


“그리고 유다정한테도 좋아한다는 말 하고 싶어.”

그 대목에서 다정은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몰라 입술만 감쳐물었다.


“근데 내가 유다정한테 좋아한다고 말하면…….”

잠시 말을 멎은 정혁은 가볍게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여전히 갈등 중이었다. 그건 정해진 결혼이나 약혼 예정자에 대한 고민이 아니었다.

자신의 선택으로 유다정이 또 힘들어질까 쉽사리 결정의 향방을 잡지 못한 채 망설이는 중이었다.

숨을 고른 정혁은 마저 뒷말을 연결했다.


“내가 너한테 좋아한다고 말하면, 너 힘들어져. 그래서 참고 있어.”

“…….”

다정은 의아한 눈만 깜빡였다. 무슨 의미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보다 이 정도면 벌써 좋아한다고 말한 것과 뭐가 다른지 의문이었다.

그 사실을 꼬집어 줄까 고민도 했지만, 다정은 관두기로 했다. 대신 엷게 웃었다.


“차정혁 씨. 그만 데려다줘요.”

 

* * *



“유다정 씨 차 집으로 가져와요.”

“네, 전무님.”

차 키를 받아든 민 실장은 수행 기사에게 차 전무의 안전을 당부한 뒤 곧장 주차된 다정의 차로 향했다.

자신의 전용 차량에 다정을 먼저 태우고 정혁은 시우를 안은 채 조심히 뒤따라 올랐다.

돌아오는 길에도 대화는 없었다. 두 사람의 눈길은 서로를 향하듯 잠든 시우의 얼굴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인제 그만 줘요.”

아파트 단지에 도착한 다정이 그에게 안겨 잠든 시우에게 팔을 뻗었다.


“무거워. 집까지 올라가.”

다정의 눈이 가늘어졌다.


“엄마들의 진가를 모르네요. 엄마들은 아무리 무거워도 안을 수 있어요.”

“아이언맨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네.”

“헐크도 될걸요. 아마.”

“유다정은 헐크가 돼도 예쁠 거야.”

정혁은 새근새근 잠든 시우의 이마에 가만히 뺨을 대었다가 뗐다. 그제야 시우는 엄마의 품으로 넘어올 수 있었다.


“조심해. 내 아들 떨어트리지 말고.”

“떨어트리면 몸을 날려서라도 지킬 테니까 걱정 말아요.”

방그레 웃으며 돌아서던 다정이 다시 발끝이 원위치했다.


“참. 차정혁 씨.”

“…….”

“시우 보고 싶으면 언제든 보러 와도 좋아요.”

 

 

* * *

모바일 뱅킹 화면을 뚫을 듯이 바라보며 다정은 멍한 눈만 깜빡였다.

「₩250,000,000」

제가 뭘 보고 있나 싶어 눈도 깜빡이지 않고 동그라미를 세고 또 셌다.

다정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 아무래도 0이 하나 더 찍힌 게 틀림없었다.

한 시간 뒤 홍 회장의 대리인이 계약서를 들고 도착할 예정이라는 전화를 받았다.

계약금은 확인했냐는 말에 그제야 부랴부랴 통장 잔고를 확인했더니, 예상치도 못한 거액이 입금되어 있었다.

어떤 건축사의 경우 이에 상응하는 설계비를 받기도 했지만, 아주 유명세를 떨친 이들에 한해서였다.

여하튼 자신의 몸값이 아직 그에 미치지 않는다는 건 다정이 가장 잘 알았다.

휴대폰을 쥐고 망설이던 다정은 통화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은 길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홍 회장님. 다른 게 아니라 계약금…… 말인데요.”

용건을 말하자마자 상대방에서 의아한 숨소리를 냈다.


『액수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다정은 허공에 대고 손사래를 쳤다.


“아, 아뇨. 액수가 너무 많아서요.”

『응? 유 건축사는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구먼. 내 거는 기대가 크다는 뜻이니 결과로 자기 능력을 확인해 보는 건 어떻소?』

통화를 마친 다정은 후끈한 뺨을 감싸고 크게 심호흡했다. 이게 웬 떡이냐 싶다가도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 얼떨떨했다.

뭔가 가슴이 벅차오르면서도 한편으론 엄청 부담스러웠다.

* * *



“꼬뿐이 할머니!”

“아이고! 우리 강아지.”

모처럼 다정네 집을 방문한 숙희는 와다다 안겨드는 시우를 끌어안고 뽀뽀를 퍼부었다.

유치원 방학을 맞아 이것저것 쇼핑이 시급했던 다정의 부탁으로 잠시 시우를 돌봐 주기로 한 것이다.

마침 반찬 가게가 문을 닫는 날이기도 했다.

숙희가 시장 가방 한가득 담아온 반찬들을 보며 다정은 한숨을 쉬었다.


“반찬은 또 뭐 하러. 날도 더운데.”

“아이고, 시끄러. 새끼들 먹이는데 이깟 게 뭐 대수라고.”

다정의 타박에도 숙희는 꿋꿋했다.

엄마가 외출하고 시우는 거실에 앉아 여름방학 숙제를 끄적였다. 그러기도 잠시 지루해졌는지 통 집중을 못 하던 시우의 눈이 옆으로 핑그르르 돌았다.

소파에 누워 코를 고는 꽃분 씨.

할머니가 잠든 걸 확인한 시우는 자기 방으로 총총 달려갔다. 그리고 침대 매트리스 아래로 짧은 팔을 쑥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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