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밥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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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밥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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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밥 먹자
2022.12.22.
“전무님. 이 음식들은 어떻게 할까요?”
상념에 잠긴 귓가로 민 실장의 음성이 파고들었다.
“내가 제일 감명 깊게 읽었던 동화가 뭔 줄 알아?”
차 전무의 뜬금없는 소리는 몹시 뜬금없게 시작되었다. 눈알을 뒤룩 굴리던 민 실장은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아, 뭘까요? 무척 궁금합니다.”
“선녀와 나무꾼.”
“선녀와 나무꾼이라면, 선녀가 목욕할 때 옷을 훔쳤다는…….”
“어, 그 나무꾼 새끼가 진짜 개XX거든. 선녀 날개옷을 훔쳐서 억지로 결혼했잖아. 강제결혼이니까, 지금 같으면 범죄지.”
아, 소리를 내며 민 실장이 수긍하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근데 그 나무꾼이 또 얼마나 멍청하냐면 여자를 너무 쉽게 믿는다는 거야. 애를 셋 낳을 때까지 날개옷을 주지 말랬는데…… 멍청이.”
단조로운 목소리는 대본을 읽는 것처럼 술술 흘러나왔다.
“선녀가 왜 선녀인 줄 알아?”
질문을 툭 던지곤 맞혀 보라는 듯이 나른한 눈길이 민 실장을 향했다. 도리도리 도리질을 치자 그것도 모르냐는 듯이 킥 웃는다.
“바보. 마음씨가 곱잖아. 그래서 선녀야.”
이 정도면 거의 모노드라마 수준이었다.
“선녀가 얼마나 마음씨가 곱냐면, 강제결혼 당하고 뭐 좋다고 나무꾼을 또 받아 줬다니까. 그런데 매번 기회를 줘도 멍청한 새끼가 그걸 놓쳐.”
“아, 네…….”
“교훈이 많아. 아, 착한 선녀를 놓친 나무꾼 새끼처럼 멍청하게 살면 안 되겠구나, 하는…….”
선녀와 나무꾼의 재해석을 경청하며 민 실장은 경건하게 턱을 주억거렸다.
빙그르르 몸을 돌린 정혁이 펼쳐 놓은 찬합을 노려보았다.
“그건 갖다 버리세요.”
* * *
시우를 등원시키고 돌아온 다정은 숨돌릴 틈도 없이 어수선한 집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밀린 설거지를 하고 청소기를 돌린 뒤에는 여기저기 널린 세탁물을 수거해야 했다. 세탁기까지 돌리고 나자 겨우 짬이 났다.
다정은 한숨 돌릴 겸 커피를 한 잔 내리고 느긋하게 책을 펼쳤다. 그간 바쁘게 일하느라 책을 읽어 본 게 언제인지 모르겠다.
무엇에도 쫓기지 않고 자신만의 시간을 가져 본 게 얼마 만이더라. 너무 오랜만이라 지금 만끽하는 여유가 낯설기까지 했다.
물론 한가롭게 책이나 펼쳐 들고 있다고 마냥 속이 편한 것만은 아니었다.
고정적인 수입이 뚝 끊겼다. 당장 생활비 걱정을 해야 할 실정이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곧 퇴직금도 정산될 테고, 차곡차곡 모아 온 적금을 해약하면 얼마간은 버틸 수 있을 거다.
새로운 일자리는 시우와 함께 여행을 다녀온 뒤 알아볼 생각이었다.
책을 펼친 채 상념에 잠긴 그때 세탁이 끝났다는 알림이 울렸다. 동시에 식탁 위에 놓여 있던 휴대폰도 진동했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에 고개를 갸웃한 다정이 휴대폰을 귀에 붙였다.
“여보세요.”
『유다정 건축사 되시오?』
나이 지긋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네. 어디시죠?”
『나 홍성규라는 사람이올시다. 유 건축사한테 의뢰할 게 있는데 우리 좀 봅시다.』
* * *
약속한 시각에 아파트 입구를 나서자 검은 세단 한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다정이 나서자 수행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뒷좌석 문을 열었다. 그 문으로 한 남자가 내려섰다.
하얀 신사복과 중절모, 목에는 파란색 실크 스카프를 멋스럽게 늘어뜨린 노년의 남성은 KFG 할아버지처럼 푸근한 인상을 주었다.
“만나서 반갑구만. 나 홍성규올시다.”
걸걸하게 자기소개를 한 노인이 명함을 내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유다정입니다.”
꾸뻑 허리를 접어 인사한 다정은 노인이 내민 명함을 건네받았다.
「삼손푸드 회장 홍성규」
어리둥절해 명함을 보던 다정은 커다래진 눈만 깜빡였다.
삼손푸드라면 대한민국 식품 업계 1위를 차지하며, 수많은 외식 브랜드와 많은 계열사를 거느린 대기업 버금가는 중견기업이었다.
“일단 같이 가 볼 곳이 있으니 탑시다.”
“어딜…….”
“내가 땅을 좀 봐 뒀거든. 우리 유 건축사께서 가서 보시고 조언을 좀 해 줬으면 해서.”
홍 회장의 신분이 확실했기에 다정은 선선히 그의 차에 올랐다.
한동안 달려 차가 도착한 곳은 도심과 멀지 않은 경기도 외곽의 한 공터였다.
다정은 주변 전경을 크게 돌아보았다. 도로와 상하수도 같은 기본 작업은 마무리가 된 상태였고, 부지도 이미 다져져 있었다.
“이곳 대지가 300평 정도 된다우.”
“여기 집을 짓고 싶다는 말씀이세요?”
이동 중에 주택을 지을 계획이라는 용무는 이미 전해 들은 바였다. 지팡이를 짚은 홍 회장은 너른 토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기다 좋은 집 하나 지어서 늦둥이 막내아들 내외한테 선물로 주려고 그러지.”
“네에, 그런데 하필 왜 저한테…….”
다정은 조금 납득이 되지 않았다.
부유층들이 개인적으로 설계를 의뢰할 때는 이름깨나 날린 유명 건축사를 찾는 게 당연했다. 그 정도 반열에 이름을 올리기에 다정은 턱없이 부족했다.
“우연히 유 건축사가 지은 집을 봤지. 튼튼하고 실용적이고. 또 젊은 사람 취향이더라고. 내 아들 내외 취향을 잘 알 것 같아서. 참, 유치원생 손주도 있다우.”
“어머. 제 아들도 유치원생이에요.”
아이 얘기가 나오자 다정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홍 회장의 눈이 크게 뜨였다.
“잘됐군, 그래. 그럼 아이들 취향까지 빠삭하겠구만. 내 아들 말이 앞으로 대여섯은 더 낳을 거라는데 그러려면 애들 뛰어놀기 좋게 만들어야 하지 싶은데. 유 건축사 생각은 어떻소.”
다정은 너른 부지를 바라보며 가상의 집을 떠올려 보았다.
“만약 제가 제 아이와 살 집을 짓는다면 저쪽에 개인 놀이터를 만들어 줄 거예요. 카 레이스를 할 수 있는 작은 경주장을 배치하고, 옥탑을 만들어서 매일 밤 별을 보며 잠들게 해 주고 싶어요.”
다정이 꿈같은 얘기를 늘어놓는 동안 홍 회장의 입가에 번진 웃음이 짙어졌다.
“하하. 좋구만, 좋아! 그럼 계약합시다. 내 설계비는 넉넉하게 드릴 테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유 건축사가 살고 싶은 집을 한번 설계해 보시구려.”
“계약…… 이요?”
“일단 설계비에서 계약금 조로 절반 입금하고, 계약서는 내일 사람을 보내 작성합시다. 설계 끝나고 착공 들어가면 그때 잔금 절반을 치르리다.”
“아…….”
뭐가 이렇게 쉽지?
조금 어리둥절하면서도 다정의 머리는 빠르게 계산에 들어갔다.
계약금이 들어오면 당장 생활에 여유가 생기는 건 말할 필요도 없고, 프리랜서로 일할 수 있으니 육아에도 도움이 될 터였다.
조금 뜻밖이긴 했지만, 행운 같이 찾아온 기회를 차마 거절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다정은 주먹을 불끈 쥐고 결연하게 대답했다.
“회장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 *
고요한 유치원 현관을 주시하는 눈길이 기대로 일렁였다.
예전에는 저곳으로 새끼 짐승들이 밀려 나올 때면 괴기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지금은 설렌다.
시간이 되자 어김없이 아이들이 밀려 나왔다. 짹짹대는 아이들 틈에서 정혁은 바삐 눈을 움직였다.
“유시우!”
“어!”
휙 돌아선 눈이 그를 발견하곤 입을 벙긋 벌린다. 어딘가로 달려 나가던 시우는 그에게로 방향을 틀었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안녕.”
시우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입술을 오물거린다. 그 섬세한 행동들을 유심히 관찰하던 정혁의 입꼬리가 미끄러졌다.
뭘 찾는지 뻔해 유시우에게 현실을 일깨워 주었다.
“엄마 안 와.”
커다래진 눈이 흠칫 들썩인다.
“어? 아닌데…… 엄마가 데리러 온댔는데. 엄마 돈 안 벌어서…….”
“엄마 바빠. 돈 벌러 갔어. 그래서 이모가 오기로 했는데, 이모도 안 와.”
“어…… 이모는…….”
무구한 눈에 약간의 충격과 혼란이 소용돌이쳤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정혁은 무릎을 굽혀 시우와 눈높이를 같이 했다.
“유시우. 나랑 밥 먹을래?”
“음…….”
“나 혼자 밥 못 먹어.”
망설임이 가득한 눈이 몇 걸음 뒤에 서 있는 민 실장에게 향했다.
일렁이는 눈이 민 실장을 보다가 혼자 아닌데? 라는 듯이 정혁의 얼굴로 되돌아왔다.
“남자랑도 안 먹어.”
“시우……. 시우도 남잔데!”
“유시우는 괜찮아. 내가 많이 좋아하거든.”
“어, 음…….”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눈치라 정혁은 재빨리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배고파.”
“배고프면 불쌍한 사람인데…….”
“그래, 불쌍하니까 같이 밥 먹어 줘.”
동정심 가득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던 시우는 인심 쓴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혁은 피식 웃으며 시우를 팔에 안았다. 뺨과 귓가로 코끝을 미끄러트리자 시큼한 요구르트 냄새가 났다.
요구르트 냄새가 나는 유시우가 귀여워서 또 웃음이 났다.
* * *
목적지에 도착한 정혁은 시우를 안은 채 고급 일식집의 입구로 들어섰다.
기모노를 차려입은 고상한 자태의 중년 여자가 공손히 허리를 접어 그를 반겼다.
“전무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룸으로 모시겠습니다.”
지배인이 안내하는 VIP룸으로 들어간 정혁은 좌식 바닥에 다리를 내리고 옆자리에 시우를 앉혔다.
보통의 아이들이 식당을 휘젓고 다니는 것과 달리 유시우는 얌전했다.
놀이공원에 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저 두리번거리며 신기한 걸 보는 듯이 눈을 빛낼 뿐이었다.
테이블 위로 얌전히 그러쥔 두 주먹이 앙증맞았다.
“일행 한 사람 더 올 겁니다. 도착하면 오마카세로 줘요. 지금은 아이 먹을 거 몇 가지랑 사케 한 병.”
“알겠습니다.”
미닫이문 앞에서 무릎을 꿇은 지배인이 느리게 머리를 숙이곤 문을 닫았다.
잠시 후 전복죽과 튀김. 게살 샐러드와 돈까스 같은 메뉴들이 줄줄이 나왔다.
아이 먹을 걸 달랬더니 어린이용 숟가락과 포크가 알아서 세팅되었다.
시우는 숟가락을 꼭 쥐었다. 그러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전복죽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왜?”
묻자 고개가 휙 돌았다.
“어…… 뜨거우면 못 먹어요!”
정혁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아저씨도 뜨거운 거 못 먹어요?”
“응, 고양이 혀거든.”
닮을 게 없어서 그것까지 닮았다.
가볍게 웃음을 흘린 정혁은 죽 그릇을 들어 올렸다. 숟가락으로 크게 저어 호호 불자 하얀 김이 휘몰아쳤다.
몇 번 반복해 적당히 한 김 식은 걸 어린이용 숟가락으로 떠서 내밀자 짹 벌어진 입이 잘도 받아먹는다.
새우튀김과 고구마튀김을 하나씩 앞접시에 올려 주자 포크로 콕 찍어 바삭 소리를 내며 먹는다.
절박해 보일 만큼 포크를 꼭 움켜쥔 손, 씰룩거리는 뺨, 오물거리는 입술.
유시우의 모든 게 신기해 그저 잠잠한 눈길로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사케를 한 잔 마시고 잔을 내려놓을 때 시우가 그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아저씨. 엄마 언제 와요?”
엄마가 없으니까 불안한 모양이었다.
“금방 와.”
엷게 웃음을 머금고 대답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휴대폰이 울렸다.
『차정혁 씨! 우리 시우 지금 어딨어요?』
목소리에 잔뜩 흥분이 묻어났다. 정혁은 차분한 투로 대답했다.
“밥 먹여.”
『매번 말도 없이……! 어디예요?』
“지금 주소 보내.”
정혁은 곧장 전화를 끊고 위치를 찍어 메시지를 보냈다.
* * *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찍은 다정은 핸들을 거칠게 꺾었다.
홍 회장과 갑작스레 약속이 잡힌 바람에 솔이에게 유치원 픽업을 부탁했었다. 그런데 돌아와 봤더니, 아이가 애먼 사람에게 가 있는 게 아닌가.
주소지에 도착한 다정은 허둥지둥 가게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예약하셨습니까?”
“아, 차정혁 씨…….”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허리를 깊게 숙여 보인 지배인이 앞장서 길을 안내했다. 그녀가 멈춰 선 곳은 복도 깊숙한 곳에 있는 미닫이문 앞이었다.
“전무님. 손님 도착하셨습니다.”
이윽고 미닫이문이 자동문처럼 매끄럽게 열렸다. 열린 문 안에서 무릎에 시우를 앉히고 등을 토닥이는 그가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다정은 울컥 화가 치밀었다.
“차정혁 씨!”
“쉿.”
정혁이 손가락을 입술 위로 교차했다.
“애 깨. 막 잠들었어.”
입을 작게 벌린 채 시우는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다정이 가만히 서 있기만 하자 정혁이 턱짓으로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앉아.”
다정은 마지못해 맞은 편에 가서 앉았다.
“전무님? 식사 들일까요?”
“조용히 있고 싶으니까 식사는 한꺼번에 줘요. 사케도 한 병 더.”
머리를 숙인 지배인은 곧 얌전히 닫히는 미닫이문 뒤로 사라졌다.
“왜 멋대로 이러는 거예요? 시우 엄마는 나예요.”
시우에게 고정되어 있던 정혁의 눈이 올라섰다.
“누가 뭐래?”
“왜 당신 멋대로 시우를 데려가는 건데요?”
“이래야 유다정이 나랑 같이 밥 먹어 주지.”
“…….”
“밥 먹자.”
“차정혁 씨.”
“같이 먹어. 너랑 밥 먹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