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엄마를 울린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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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엄마를 울린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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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엄마를 울린 남자
2022.12.18.
원복을 입고 단추가 채워지는 동안 시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엄마 오늘도 돈 벌러 안 가요?”
어린 눈에도 며칠째 느긋한 엄마가 낯선 모양이었다. 마저 단추를 채운 뒤 다정은 방긋 웃었다.
“응, 엄마 당분간 집에서 일할 거야. 우리 시우 유치원도 매일 엄마가 데리러 갈게요.”
“정말?”
“정말.”
“와아!”
기분이 좋은지 시우가 껑충거렸다. 엄마가 실직 상태인 줄도 모르고 이렇게 신이 났다.
이거면 되었다. 복잡한 어른들의 문제는 아무것도 모른 채 이대로 밝고 천진하게 자라 주면 그걸로 족했다.
회사를 나온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이후로 도준에게선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평소 그의 성격을 떠올리면 어머니가 저지른 행동 때문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을 거다. 괴로워하며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에게 아무 연락이 없는 편이 다정으로선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시간이 빨리 흘렀으면 좋겠다. 모든 게 빛바래고 퇴색되어 하루빨리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 버릴 수 있도록.
* * *
다정은 쇼케이스 안에 정돈된 반찬들을 이것저것 바구니에 골라 담았다. 유치원 하원 시간에 맞춰 시우와 함께 장을 보러 나온 참이었다.
“엄마 얼마예요?”
“만 원.”
보지도 않고 돌아온 대답에 다정은 어이없는 얼굴로 숙희를 돌아보았다.
숙희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시우의 입에 작게 자른 참외를 물려 주느라 분주했다.
다정은 제가 골라 담은 반찬들을 내려다보았다. 대충 보아도 삼만 원은 족히 넘을 텐데, 만 원이란다.
부루퉁한 얼굴로 빤히 쳐다보자 숙희가 눈길을 돌리더니 말도 돌린다.
“얼굴 흉 질라. 연고 부지런히 발라.”
“……바르고 있어요.”
다정은 뺨 위에 난 상처를 손등으로 문질렀다. 이래저래 주변에 걱정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심란했다.
급히 기분을 추스른 다정은 지폐 한 장을 꺼내 계산대에 턱 내려놓고 핀잔을 날렸다.
“장사꾼 밑진다는 말 다 거짓말이라더니, 그 말이 거짓말이네.”
흘깃 눈길을 돌린 숙희가 오만 원권 지폐를 발견하곤 놀라 입을 벌린다.
“엄마야! 얘가 미쳤어.”
숙희가 냉큼 지폐를 낚아채는 사이 다정은 시우와 함께 부리나케 가게를 나섰다.
“자꾸 사기 치면 나 단골집 바꿀 거야!”
“야 이 지지배야! 돈 도로 가지고 가!”
숙희가 가게 문턱까지 쫓아와 소리치지만, 벌써 저만치로 달아난 다정은 속 좋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엄마! 꼬뿐이 할머니가 사기 쳤어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정의 손을 잡고 살래살래 흔들던 시우가 물었다. 의아하게 눈을 키운 다정은 살풋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시우, 사기가 무슨 말인지 알아요?”
“응……. 네! 거짓말하는 거! 거짓말하면 나쁜 어린이!”
“그치, 거짓말을 하면 나쁜 사람이야. 근데 착한 거짓말을 하는 사람도 있어. 꽃분이 할머니가 그런 사람이야.”
“어…….”
다섯 살 머리로는 조금 복잡했던지 시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우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집으로 돌아왔을 때 복도 저편에 낯익은 남자가 서 있었다.
“어? 아저씨다!”
시우의 목소리가 울리자 빈집의 문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남자의 눈길도 돌아섰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와다다 달려간 시우가 꾸뻑 배꼽 인사를 했다. 아이를 보는 정혁의 눈에 대번에 웃음이 차올랐다.
“안녕. 유시우.”
커다란 손이 정수리를 흩뜨리자 시우가 질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조용히 다가간 다정은 말없이 문을 열고 장 봐 온 물건들을 현관 안에 내려두었다.
“시우 들어가서 손 씻자.”
“네에!”
시우를 먼저 들여보낸 뒤 문을 닫고 돌아선 다정은 크게 심호흡했다. 무거운 표정이었지만 첫마디는 제법 차분하게 나갔다.
“차정혁 씨. 다신 찾아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
말없이 다정의 얼굴을 살피던 정혁이 눈가를 찡그렸다. 다정의 눈꼬리 아랫부분에 못 보던 상처가 눈에 띄었다.
“왜 그래? 다쳤어?”
긴 손가락이 불쑥 다가왔다. 그 손이 뺨을 스친 동시에 다정은 날카롭게 그를 뿌리쳤다.
“내 말이 말 같지 않아요?! 제발 나 좀 내버려 둬요! 다 싫어요! 지긋지긋하다고요!”
속에 말을 모조리 게워낸 다정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부디 이것들이 그에게 착한 거짓말이 되길 바랐다.
“차정혁 씨! 마지막 부탁이에요. 제발 내 앞에 나타나지 말아요!”
쾅.
늘 그렇듯 문은 야멸차게 닫혔다. 그 문 앞에 가만히 선 채 정혁은 구겨진 이마를 문질렀다.
미심쩍은 듯 고개를 갸웃한 그가 발길을 돌리며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신호는 길지 않았다.
“배솔이 씨? 차정혁입니다.”
* * *
외부 일정을 마치고 사무실로 들어설 때였다. 발끝을 세운 정혁의 눈길이 소란한 곳으로 향했다.
“저리 비켜, 이것들아! 내가 내 아들 보러 왔다는데, 니들이 무슨 자격으로 막아?!”
웬 중년의 여자가 막아서는 비서들을 향해 고래고래 악다구니를 쓰고 있었다.
진한 초록색 투피스에 망사 스타킹, 샛노란 스카프, 새빨간 입술과 시퍼런 눈두덩이.
흡사 광대 같은 꼬락서니를 해서는.
알록달록 요란한 차림의 여자를 응시하던 정혁은 무시한 채 사무실로 발길을 옮겼다.
“어머나, 정혁아!”
아들을 발견한 성자는 냉큼 비서들을 뿌리치고 정혁을 뒤따랐다.
“우리 아들 왜 이제 와? 엄마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왜 왔어.”
“왜는? 우리 아들 맛있는 것 좀 가져다주려고 왔지.”
폭신한 소파 중앙을 차지한 성자가 분홍색 보자기를 끌러 찬합에 담긴 잡채와 김밥 따위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들. 엄마가 아들 보러 오는데 이유 있어?”
정혁의 미간이 눈에 띄게 구겨졌다.
“엄마? 당신이 엄마 맞아?”
비난이 담긴 어조에 성자가 난색을 지으며 엉덩이를 들썩였다.
“어머, 정혁아. 너 내 배 아파서 낳았어.”
“낳으면 다 엄마냐고.”
“어머머. 얘 말하는 것 좀 봐.”
말을 잇지 못하던 성자가 갑자기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목에 늘어뜨린 스카프를 쥐어 눈시울을 찍었다.
“내가 이 꼴을 보려고 열 달이나 배 아파 널 낳았다. 흐윽…….”
정혁은 한숨을 감추지 않았다. 가증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열 달. 그래 열 달. 일 년도 안 되는 고작 열 달이었다. 눈앞에 절 낳았다는 여자가 그나마 엄마 노릇을 한 건.
어떤 여자는 유시우를 차시우로 만들까 봐 전전긍긍 눈시울부터 붉히는가 하면, 어떤 여자는 아들을 용돈 주는 도구로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죽어야지. 아들한테 엄마 대접도 못 받고, 흑!”
성자가 넋두리를 쏟는 동안 정혁은 이마를 짚고 눈을 꾹 감았다.
“이게 다 니 아버지 그 인간 때문이야!”
아버지란 말에 정혁이 눈을 부릅떴다.
“아버지 입에 올리지 마. 무슨 염치로 아버지를 입에 담아?”
“네 아버지만 아니었으면 내가 생때같은 자식 버리고 집을 나갈 일이 뭐야!”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흘렀다. 지겹도록 반복된 레퍼토리라 이젠 식상하기까지 했다.
아버지.
차재성이라는 이름의 그는 가난한 시인이었다.
문학과 시를 너무도 사랑했던 순수한 청년은 가업도 등진 채 낮엔 교사로, 또 밤엔 시인으로 그렇게 자신의 열정을 불살랐다.
정혁을 낳은 여자는 교생 선생님을 짝사랑하던 아버지의 제자였다. 끊임없이 구애하다가 졸업하고 나서는 더 적극적으로 돌변했다.
아버지의 하숙집을 제멋대로 드나들더니, 어느 날엔가는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가 아예 눌러앉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덜컥 정혁을 가졌다는데.
이 대목에서 정혁은 실소를 감추지 못했다. 저란 인간의 탄생 비화가 구질구질하기 짝이 없어서.
여하튼, 의도치 않게 맺은 인연일지라도 아버지는 진심이었던 모양이다. 그가 남긴 무수히 많은 시 속에 그 흔적들이 증거였다.
정혁은 지금도 이해가 가질 않는다. 시 속에 표현된 여자는 주로 낭창낭창하고 하늘하늘한 꽃에 비유되었다.
그런데 눈앞의 이 여자는 어떤가. 동일인이라고 믿기엔 간극이 지나쳤다.
그렇게 계획에도 없이 생겨 버린 아내와 아이는 아버지를 망쳤다. 그는 가족을 돌봐야 한다는 책임에 짓눌렸고, 꿈은 짓밟혔다.
자유로운 영혼인 그에게는 몹시 버겁고 벅찬 일이었을 거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아버지로서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정혁을 낳은 여자는 그렇지 못했다.
가난한 생활에 진절머리를 내며 남편과 아들을 버리고 동창생과 눈이 맞아 집을 나갔다고 한다. 정혁이 태어나고 석 달 만이었다.
정혁이 네 살 되던 무렵.
아버지는 정혁의 손을 잡고 으리으리한 집을 찾아갔다. 고상한 중년 여인을 보며 아버지는 아장아장 걷는 아들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정혁아, 할머니한테 안녕하세요, 해야지?’
할머니는 무거운 표정으로 어린 정혁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저 애가 네 아들이냐? 씨도둑질은 못 한다더니.’
당시의 탐탁잖았던 눈빛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것이 기어코 새끼까지 버리고 도망쳤다지? 내 뭐랬니? 이제야 죽자고 뜯어말렸던 어미 심정을 알겠니?’
아버지는 병색이 완연한 얼굴로 그저 침묵했다. 그리고 한참 만에야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어머니, 정혁이 좀 키워 주세요.’
‘네 새끼를 내가 왜? 다 싫다고 버리고 가더니 이제 와서?’
‘전 실망을 드렸지만, 이 애는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 겁니다.’
할머니는 근엄하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 한결 너그러워진 투로 말했다.
‘돌아오기만 한다면 다 용서하마. 네 아들도 손자로 인정하겠다. 그럼 모든 게 다 제자리를 찾을 거다.’
‘저 폐암 말기랍니다. 얼마 안 남았대요.’
순간 말을 잇지 못한 할머니는 무너지듯 주저앉아 아버지의 등을 때리며 오열했다.
아버지는 곧장 최고 의료시설에 입원했지만, 치료 시기를 놓쳤다는 안타까운 결과만 들어야 했다.
태어나 절 낳은 여자를 처음 본 건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였다.
‘흐윽! 정혁아아아! 내 아들!’
버린 아들을 마치 잃어버린 아들처럼 끌어안고 아버지의 주검 앞에 대성통곡했다.
아버지가 명한그룹 장손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 버린 후회의 통곡이었다.
그렇게 아들을 핑계로 어떻게든 재벌가에 들러붙으려 했지만, 그걸 가만히 두고 볼 박 회장이 아니었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너 낳고 몸조리를 못 해서 여기저기 아프고 맥도 못 추겠는 게 보약이라도 한 제 지어 먹어야 하나? 아이고.”
눈물 바람이더니 갑자기 태세 전환이다.
눈가를 꾹 누르고 있던 정혁은 지갑을 열어 카드와 신분증을 꺼냈다. 그리고 지갑 통째로 내던졌다.
발치에 떨어진 지갑을 옳다구나 주워 든 성자의 입이 귀에 걸렸다.
“호호호. 아들 낳은 보람 있네.”
“가. 한 번만 더 눈에 띄어. 그땐 대한민국에서 발붙이고 못 살 줄 알아.”
무감하면서도 나른한 눈길로 경고하고 의자를 빙그르르 돌려 성자를 등졌다.
“민 실장, 내보내.”
블라인드로 투과되어 온 빛에 시야가 지워졌다.
엄마…….
그 단어를 떠올리자 가장 먼저 생각나는 얼굴은 하나였다.
유다정.
맑고 순한 얼굴로 유시우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짓는 얼굴을 그리자 불현듯 욕지기가 치솟았다.
미친 새끼.
정혁은 괴로움에 일그러진 눈가를 손으로 덮었다.
『도준 오빠 엄마가 갑자기 찾아왔대요. 어디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교수면 다야? 왜 애를 때려? 나참, 뭐라더라? 처녀가 애를 낳았다는 둥 별 말 같지도 않은 악담을 퍼부었다질 않나.』
그날 배솔이가 들려준 이야기였다.
『사람들 다 보는 데서 애를 아주 쥐 잡듯이 잡았다나 봐요. 대낮에 일하다 말고 카페로 찾아와서 엉엉 우는데, 보는 내가 속이 상해서 정말! 다정이가 말리지만 않았으면 꽃분 씨랑 같이 가서 교수고 뭐고 머리채라도 뜯어 놓는 건데, 어휴!』
유다정이 울었다고 했다. 어린애처럼 엉엉.
저였다. 제가 울렸다. 얼굴에 상처를 낸 것도, 여린 마음을 헤집어 놓은 것도 모두 제 짓이었다.
그런 꼴을 당하게 하려던 건 아니었다.
그냥 질투가 났던 것 같다. 뭐든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황이 짜증스러웠고, 그것들을 제 입맛에 맞게 정리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결과적으로 그 여자의 마음을 난도질해 놓은 꼴밖에 되지 않았지만.
“앞으로가 걱정이에요. 뼈를 묻을 생각으로 다니던 직장도 그만뒀으니, 속이 말이 아닐 거예요. 시우도 키워야 하는데, 고민도 많고 막막하겠죠.”
정혁은 마른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이렇게까지 개자식이어도 되는 건가.
자책과 자조감이 밀려드는 동시에 그의 머릿속에 또 다른 걱정이 스쳤다.
유시우의 눈에 이런 자신은 어떻게 비추어질까, 하는…….
엄마를 울린 남자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어쩌면 혐오스러워서 몸서리를 칠지도 모른다.
그가 자신을 낳았다는 여자에게 그러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