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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그동안 고마웠어요 (39/114)


39화 그동안 고마웠어요
2022.12.15.


연락을 받고 도착한 카페 안은 한산했다.

숨을 고르며 내부를 두리번거리던 다정은 이내 통창 앞에 앉아 있는 중년 여자를 발견하고 걸음을 서둘렀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다정은 깊게 허리를 접어 공손하게 인사했다.

노형숙 화백, 노형숙 교수, 노형숙 관장 등, 여러 타이틀을 가진 그녀지만 존경심을 표하기 위해 교수로 호칭했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결려 온 건 막 점심을 먹으러 가려던 차였다.


『유다정 씨? 나 도준이 엄마예요. 우리 좀 만날까요.』

고상하고 차분한 음색으로 말하면서도 용건에 대한 언질은 주지 않았다.

다정도 짐작되는 바는 있으나 속단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청혼은 거절했다. 그런데 설마 도준이 그 문제를 부모님께 말했으려고.

도도하게 팔짱까지 끼고 다정을 올려다보던 형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다정?”

“네. 처음 뵙겠습니다.”

다정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려던 찰나였다.

짜악!

날카로운 마찰음과 동시에 눈앞에 번쩍 불이 튀었다. 귀가 멍멍하고 시야가 하얗게 점멸되었다.

차츰 시야가 돌아오고 나서야 다정은 형숙의 손바닥이 제 얼굴로 날아들었다는 걸 인지했다.

너무 놀란 나머지 눈가에 열기가 모이더니 어쩌지 못하고 생리적으로 눈물이 핑 돌았다.

그 사이 형숙은 다시 고상하게 자리에 앉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몹시 태연하게.

카페 안에 있던 얼마간의 사람들이 순간의 장면을 목격하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에 또다시 심기가 불편해진 형숙이 앙칼진 목소리를 던졌다.


“뭐 해, 안 앉고? 사람들 보라고 일부러 그러고 서 있니?”

다정이 맞은 편에 조용히 착석하자 형숙이 냅킨을 휙 낚아채 다정에게 던졌다.


“피도 좀 닦고. 무슨 훈장이라고 그러고 있어?”

피? 뒤늦게야 그녀의 말을 이해한 다정은 화끈거리는 얼굴 어딘가에 손끝을 대보았다. 뺨을 더듬고 떨어진 손끝에 옅은 핏물이 배어나 있었다.

그제야 형숙의 손가락에 끼워진 화려한 반지가 다정의 눈에 들어왔다. 다정은 구겨진 냅킨을 쥐어 쓰라린 부위를 꾹 눌렀다.

형숙은 그러고도 한참이나 말없이 통창 너머를 노려보며 시근거렸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무겁게 닫혀 있던 형숙의 입이 열렸다.


“야, 나 긴말 안 해. 너 우리 도준이한테서 떨어져. 넌 양심도 없니? 어디 처녀 주제에 애까지 낳아 놓고 감히 내 아들을 넘봐, 넘보길?”

다정은 테이블의 나뭇결무늬를 주시하며 입 안 살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러지 않으면 지성과 교양을 겸비했다는 교수님께 입바른 소리가 튀어 나갈 것만 같았다.

어떻게 당신 같은 여자에게 권도준 같은 아들이 태어났는지 신기하다고.

당신을 보며 내 아들에게 부끄러운 엄마가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겠다고.

그 말들이 목구멍까지 치받았지만, 최선을 다해 꾹 눌러 삼켰다.

다짜고짜 따귀를 날리는 게 아니라 사실 여부부터 확인해야 했다. 그랬다면 아드님과 전 그런 사이가 아닙니다. 라고 해명했을 것이다.

애초에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거다. 처녀 주제에 애를 낳았다는 그 이유 하나로 이미 그렇고 그런 여자로 낙인찍힌 거니까.

괜찮다. 그동안 도준이 베풀었던 호의와 그 고마웠던 마음을 생각하면 이깟 뺨 한 대쯤…….

이렇게라도 그에게 진 빚을 갚을 수 있다면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이로써 다정의 신념은 더욱더 확고해졌다.

역시 결혼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럴 일도 없겠으나 만약 도준과 결혼하면 닥칠 일들이 눈앞에 선했다. 심지어 이 여자는 다정의 시어머니도 아니었다.

그 위치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세워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런 몰상식한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른다.

불현듯 친할머니가 엄마에게 저질렀던 참담한 패악들이 떠올랐다. 방금 다정이 겪은 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다정에겐 그처럼 모욕적이고 자기 학대적인 시도를 할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그런 일에 시우를 말려들게 할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시우에게 아빠가 되어 주겠다던 도준의 말에 잠시나마 흔들린 건 사실이었다.

도준이라면 정말 좋은 아빠가 되어 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잠시나마 흔들렸던 자기 자신에게 환멸을 느꼈다.

결혼이 자식에게 아빠를 만들어 주기 위한 수단이 되어선 안 된다. 그걸 위해 엄마는 수십 년이 넘도록 자신을 죽이고 고통스러운 세월을 견뎠다.

그 선택을 가장 경멸하고 비난해 온 게 누구던가.

형숙의 거침없는 악담이 계속되고 있었지만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메마른 눈을 무감각하게 깜빡이며 다정은 묵묵히 그 시간을 견뎠다.


 

* * *

화창한 월요일의 아침이었다.

유치원에 도착한 다정은 아들과 진하게 이별의 포옹을 나누었다. 주말을 함께 보내고 헤어지려니 애틋한 마음이 더욱 컸다.


“우리 시우. 오늘도 친구들하고 사이좋게 지내기.”

“네에!”

씩씩하게 대답한 시우가 다정의 목을 끌어안고 입술을 내밀었다. 뽀뽀를 해 주려나 했더니, 시우는 일회용 반창고가 붙어 있는 다정의 뺨에 호, 하고 입김을 불었다.


“엄마! 시우가 호오, 했어요. 그러니까 인제 안 아프지?”

“우와 정말. 방금까지 엄청 아팠는데 시우가 호오, 해 주니까 엄마 인제 하나도 안 아파요.”

찌푸려 웃던 다정은 아들의 뺨에 뽀뽀를 퍼부었다.


“엄마가 우리 시우 많이 사랑해.”

“아닌데! 시우가 더 사랑하는데!”

큰소리로 외치고 오도도 달려 나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다정의 얼굴에 이내 수심이 번졌다.

사무실로 출근한 다정은 오전 내내 분주했다.

자신이 담당하던 일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구분이 쉽도록 자료도 분류했다. 마지막으로 수납용 상자에 얼마 되지 않는 개인 물품을 챙겼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치고 텅 빈 책상 앞에 앉아 도준을 기다렸다.


“미안, 월요일이라 찾는 데가 워낙 많아야 말이지.”

늦은 출근을 한 그는 미안하다는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렇지 않아도 언제쯤 들어오냐는 다정의 메시지를 받은 터였다.

다정은 기다리지 않고 곧장 도준의 자리로 향했다. 그리고 책상 위에 하얀 봉투를 내려놓았다.

검은 뿔테 안경 위로 도준의 눈썹이 의아하게 들렸다.


“이게…… 뭐야?”

“사직서예요.”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동요 없이 흘러나왔다.

그제야 도준의 눈길이 다정의 책상으로 향했다. 늘 어수선하고 정신없던 자리가 말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담당하던 일은 희주 씨한테 인수인계할게요. 그리고 남은 작업은 재택근무로 대체하고 싶어요.”

조금은 미안하고 또 조금은 염치없는 얼굴이었지만, 다정의 목소리는 주저함이 없었다.


“다정아, 너…….”

도준은 한 대 맞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어리둥절하긴 했지만, 다정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건 직감할 수 있었다.

금요일 오후 갑자기 몸이 좋지 않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걱정스러워 주말 내내 전화를 했지만 제대로 통화를 할 수 없었다.


“너 무슨 일 있지?”

허리에 손을 얹은 도준이 심각하게 추궁해 왔다. 지금 상황이 쉽게 납득되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껏 도준과 쌓아 왔던 신뢰는 튼튼하고 견고했다. 거짓을 지어내고 둘러댄들 의혹만 부풀릴 뿐이다. 그래서 다정은 감추지 않기로 했다.


“나 선배 어머니 만났어요.”

“뭐? 어머니가 왜…….”

“내가 말했잖아요. 우리 관계 불편해질 거라고. 나 선배 얼굴 보는 거 불편해요.”

도준은 말을 잇지 못한 채 충격을 받은 듯한 얼굴로 입술만 뻐끔거렸다.


“선배 어머니 말이 맞아요. 애까지 딸린 내가 선배한테 가당키나 하겠어요.”

그를 할퀴는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나왔다. 이렇게 자신을 깎아내리면 외려 미안해서라도 붙잡지 못할 테니까.


“그동안 신세 많이 졌어요. 다 못 갚고 가서 미안해요.”

 

* * *



“차정혁!!”

사무실로 난입한 남자의 외침은 절규에 가까웠다.

광분한 남자는 길을 가로막는 비서진 대여섯과 치열하게 몸을 부대끼며 고함을 질러 댔다.

책상 앞에 늘어진 정혁은 잠자코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절망으로 일그러진 권도준의 얼굴이 제법 볼 만했다.


“차정혁 나왓!!”

정혁은 가벼운 한숨을 뱉으며 책상 앞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들 나가 봐요.”

그의 지시에 필사로 막아서던 비서들이 머뭇거리다가 이내 물러났다. 그들이 물러가자 시근대던 도준이 다짜고짜 달려들었다.


“이 개XX야!”

냅다 주먹을 날리지만, 지난번과는 달랐다.

가뿐히 몸을 비틀자 울분이 담긴 도준의 주먹이 허방을 때렸다. 중심을 잃고 휘청이던 그는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 순간 정혁의 주먹이 선수를 쳤다. 도준의 턱으로 묵직한 한방이 날아들었다. 비틀거리던 도준은 그대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지난번엔 잘 먹었어. 방금 거 괜찮았지?”

통쾌한 얼굴로 피식거리며 정혁이 타이를 조금 끌어내렸다.

빠질 것 같은 턱을 움켜쥔 도준은 오뚝이처럼 튀어 올라 다시 정혁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너 우리 어머니한테 무슨 말을 한 거야!”

 

 
분노가 응집된 손을 툭 쳐낸 정혁이 구겨진 옷깃을 바로잡았다.


“왜? 틀린 말 한 것도 아니잖아.”

“이 치졸한 자식아. 대체 왜 그랬어! 왜 그런 말을 한 거야! 너 때문에 다정이가 회사까지 그만뒀어!”

그 대목에서 정혁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봐, 권도준. 그런 식으로 책임을 전가하면 마음이 편한가?”

“뭐?”

“뭘 모른 체해? 언젠가 닥칠 일이란 거 너도 알고 있었잖아.”

비꼬듯이 날아든 질타에 도준의 입술이 피가 날 정도로 짓물렸다.


“내가 해결할 문제였어! 당신이 상관할 문제가 아니었다고!”

“그래? 그럼 여긴 뭐 하러 왔어? 이런 일이 있기 전에 네 엄마부터 구워삶아 놨어야지. 뻔히 이렇게 될 줄 알면서 결혼하겠다고 우쭐했던 건가?”

“난, 난…….”

도준은 끝내 그의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다정과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어머니가 어떻게 반응할지 아들인 그가 몰랐다면 거짓말이다.

차정혁이란 남자의 등장으로 하루하루가 불안하고 초조했다. 그래서 쫓기듯이 고백하고 대책 없이 청혼했다.

이 사태가 과연 차정혁의 탓이기만 할까. 아니, 아니다. 그의 비난은 적절했다.

그는 도화선만 당겼을 뿐,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을 설치한 장본인은 도준이었다.

청혼을 거절하려는 다정의 대답을 유예시킨 건 도준 자신이었다. 그럼 그 직후라도 부모님께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설득을 끝마쳤어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왜일까?

겁이 났겠지. 부모님을 설득할 자신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다정을 잃게 될까 봐 두려웠던 거다.

그 두렵던 결말이 이런 식으로 눈앞에 닥쳤다. 그에 격분해 본질은 까맣게 잊고 모든 원망의 화살을 차정혁에게 돌리려 했다.

치졸한 그나, 비겁한 자신이나 우열을 가리기 힘들 만큼 못났다.


“권도준. 유다정 주변에 얼씬하지 마. 계속 그러면 유다정만 힘들어져.”

무던하게 날아온 경고에 도준은 침묵으로 자신의 패배를 순순히 인정했다.

권도준은 비겁했다. 반면 눈앞의 이 치사하고 약아 빠진 남자는 어떤가.

도준의 약점을 간파하고 피도 눈물도 없이 비수를 찔러 넣어 단번에 숨통을 끊어 버렸다.

차정혁. 객관적으로 그는 기업 경영에 있어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냉철한 직관과 인정을 두지 않는 공격적인 인수합병을 여럿 추진해 짧은 시간 그룹에 이로운 성과를 안겼다는 말을 들었다.

그 능력을 과신해서인지 차정혁은 사람의 마음도 제멋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이지만, 어디까지나 착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 오만한 착각조차 자신감으로 비추어질 만큼 뻔뻔하고 아량 없는 이 남자가 옳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제 마음 내키는 대로 수단 방법 가라지 않고 다정을 파고드는 동안, 자신은 무얼 하고 있었나. 끊임없이 망설이고만 있었다.

차라리 저 남자처럼 뻔뻔할 수나 있다면. 그랬다면 이런 자괴감에 시달릴 일도 없을 텐데.

체념하듯 어깨를 축 늘어트린 도준의 목소리가 힘없이 흘러나왔다.


“차정혁 씨. 대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뭡니까? 다정이를 어떻게 할 생각이냔 말입니다.”

“네가 주제넘게 그것까지 알 필요는 없고.”

고개를 떨군 도준은 비참함이 서린 발끝을 터덜터덜 돌려세웠다.

그가 사라진 문을 무감하게 주시하던 정혁은 지그시 눈을 내리감았다.

KO승이다.

승리감에 도취하기도 잠시, 그의 입가에 물린 나른한 웃음에 자조 어린 씁쓸함이 묻어났다.

모르겠다. 저도 어쩌고 싶은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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