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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도망칠 구멍을 막는 법 (38/114)


38화 도망칠 구멍을 막는 법
2022.12.11.


사파리 랜드를 출발해 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어둠이 내려앉은 뒤였다.


“……오늘 고마웠어요.”

문 앞에 선 다정이 시우의 뒷머리를 감쌌다.


“시우도 아저씨한테 고맙습니다, 해야지.”

“아저씨! 고맙습니다.”

배꼽에 두 손을 붙인 시우가 꾸뻑 허리를 접었다. 그러곤 언제 공손했냐는 듯 정혁을 향해 폴짝폴짝 뛰었다.


“시우 꺼! 주세요!”

정혁의 등에 업힌 거대 호랑이를 가리키는 거였다.

동물원 입구에 마련된 기념품 매장엔 다양한 사이즈의 호랑이 인형이 진열되어 있었고, 다정은 시우에게 알맞은 사이즈를 고민했다.

그러는 동안 정혁은 가장 큰 호랑이 인형의 값을 이미 치르고 있었다.

이런 건 가져가 봐야 짐만 된다며 만류했지만, 장래희망이 호랑이인 애를 그렇게 배포 작게 키워 어떡하냐는 통박만 돌려받았다.

정혁이 내내 등에 업고 있던 호랑이 인형을 앞으로 끌어안았다.


“무거워. 문 열어.”

안까지 들여 주겠다는 뜻이었다. 머뭇대던 다정은 혹시라도 싶어 몸으로 가린 채 번호 키를 눌렀다.

문이 열리자 호랑이 인형은 현관 안쪽에 짐짝처럼 내려졌다.

거기까진 좋았다. 갑자기 신을 벗으려 하기에 깜짝 놀란 다정이 그의 팔을 황급히 붙잡았다.


“차정혁 씨, 들어가겠다고요?”

지난번 일을 계기로 신을 벗을 줄 알게 된 건 놀라운 발전이었다. 하지만 제멋대로 집에 드나드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정혁의 눈이 되레 황당하다는 듯이 커졌다. 내가 이 집에 들어가는 게 뭐 잘못됐냐는 식이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얽힌 채 허공에서 잠시간 실랑이를 벌였다.


“배고파. 밥 줘.”

이유를 만들어 보지만, 동정심을 유발하기엔 이미 패가 다 까발려졌다.


“안 돼요! 차정혁 씨는 차정혁 씨 집에 가서 먹어요.”

“어차피 밥 먹을 거잖아. 유시우도 배고파.”

어린 아들에게 묻어가려 수작도 부려 보지만, 집주인은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니까요. 시우 하나 챙기기도 바쁘니까 차정혁 씨는 차정혁 씨 집에 가서 먹으라고요.”

“…….”

정혁의 눈에 고민이 많아졌다. 그 눈길이 현관 안에서 호랑이를 퍽퍽 패고 있는 시우에게 향했다.

엄마! 아저씨도 시우랑 같이 밥 먹어요!

딱 그 한마디면 될 것 같은데…….

그러나 유시우는 기대를 저버렸다. 호랑이를 패다 말고 일어난 시우가 꾸뻑 허리를 접었다.


“아저씨 안녕히 가세요!”

그러곤 호랑이를 질질 끌고 집 안으로 사라져 버린다.

정혁은 허탈한 숨을 뱉었다. 납치도 해 주고 호랑이도 보여 줬더니, 제 아들이라도 배은망덕했다.

오도 가도 못 한 채 서 있는 그를 다정이 문밖으로 밀어냈다.


“차정혁 씨. 오늘은 고마웠어요. 그런데 이젠 정말 안 그랬으면 좋겠어요.”

“뭘.”

“솔직히 부담스러워요. 나 도준 선배랑 결혼하기로 한 거 알잖아요.”

“…….”

도준과의 결혼 이야기가 언급되자 정혁의 얼굴도 무겁게 굳었다.

열병을 앓게 할 만큼 내내 그의 신경을 긁어 대던 문제였다. 생각하지 않아서인지, 오늘 하루는 기분이 좋았더랬다.

그 좋았던 기분을 이런 식으로 망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런 얼굴 하지 말아요. 차정혁 씨도 이미 알고 있었잖아요.”

“유다정.”

다정의 팔꿈치를 쥐어 당기는 손에 약간의 흥분이 실렸다. 가빠진 호흡과 함께 차갑게 얼어붙은 눈길이 쏟아졌다.


“그럼 어젠 뭔데? 너 나 좋아하잖아.”

“조, 좋아하긴 누가요! 그건 실수였어요. 차정혁 씨가 아프다고 하니까…….”

겨우 잊었던 장면을 떠올리자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를 만큼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프다고 하면 아무하고 그래?”

“차정혁 씨도 오현아 원장이랑 결혼할 거잖아요. 그러니까 없었던 일로 하자고요. 서로 실수했으니까…….”

어쩐지 조금 염치가 없어진 다정은 입술을 깨물었다.

잘 모르겠다. 정말 실수였는지. 하지만 실수여야 했고, 앞으로 두 번 다시 있어선 안 될 일이었다.

그녀야 그를 밀어내는 도구로 도준을 이용할 뿐이지만, 정혁에겐 진짜 약혼자가 있었다.

그건 불륜을 저지르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다정은 이 이상 시우에게 부끄러운 엄마는 되고 싶지 않았다.

다정은 팔꿈치를 옥죄는 손길을 뿌리쳤다. 그리고 냉정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차정혁 씨. 다신 시우랑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부탁할게요.”

쾅!

정혁은 저를 밀어내고 야멸차게 닫힌 문 앞에 한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긴 한숨을 뱉으며 습관처럼 구겨진 눈썹을 문질렀다. 잠시나마 치솟은 흥분을 가라앉힌 뒤에야 미끈한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유다정은 늘 이 모양이다. 한 걸음 다가섰다고 생각하면, 또 어느새 한 걸음 멀어져 있다.

아무리 도망쳐 봐라. 어차피 잡힐 거.

그런데 제 눈에서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으로 신경을 곤두세우는 게 너무 지친다.

그럼 어쩐다.

어쩌긴. 도망칠 구멍을 막으면 되지.


 

* * *



“괜찮은 게야?”

걱정스레 물으며 박 회장은 몰라보게 멀쩡해진 손자의 뺨을 쓰다듬었다.

시름시름 앓던 손자가 갑자기 멀쩡해졌다는 말이 믿기지 않았다. 그 소식을 듣고 낮부터 여러 차례 전화를 걸었건만 통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종일 애를 태우더니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해서는 갑자기 본가를 찾아왔다.

안도가 되면서도 한편으론 신경이 쓰였다.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말하거라. 응?”

“괜찮아.”

무심히 내뱉은 정혁은 소파에 풀썩 몸을 묻었다.


“몸 추스르자마자 어딜 다녀온 게야. 할미 걱정하는 줄도 모르고.”

“잠깐 바람 쐬러.”

삐딱하게 앉은 정혁이 다리에 걸친 발끝을 까딱거렸다.

기업 총수로선 어떨지 몰라도 정혁에게 있어 박 회장은 헌신적이고 좋은 할머니였다. 당연히 엄한 구석도 있지만, 손자라면 껌뻑 죽는다.

그렇다면 증손자는 어떨까. 문득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할머니.”

“오냐.”

“나도 언젠간 애가 생길 거잖아.”

평소답지 않게 질문하는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그러자 박 회장이 정색하고 말했다.


“왜 언젠가야? 결혼하면 바로 애부터 가져야지.”

피식거리던 정혁이 박 회장 쪽으로 애교스럽게 몸을 기울였다.


“나 닮은 증손자 있으면 어떨 것 같아?”

“어떻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지.”

정혁이 턱을 주억거리자 주름진 눈이 어딘지 의뭉스럽기까지 한 손자를 유심히 살폈다.


“왜? 빨리 결혼해서 자식 재롱이 보고 싶으냐.”

“뭐 그런 것도 있고. 걱정도 좀 되고.”

박 회장의 눈이 의아하게 커졌다.


“걱정? 무슨 걱정?”

“내 아들 보면 너무 귀여워서 할머니 깜짝 놀랄까 봐. 뒷목 잡고 쓰러지면 어떡해.”

박 회장이 찌푸린 웃음을 지었다. 병석에 누웠다가 털고 일어난 게 언제라고 헛소리를 하는 품이 싱거웠다.

노인의 웃음소리에 정혁은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저도 모르게 나온 내 아들이란 말에 아차 싶었더랬다.

매사에 예리한 박 회장이 아닌가. 이렇게 웃다가도 언뜻 눈치를 채는 건 한순간일 거다.

들켜선 안 된다. 제게는 인자한 할머니일지라도 유다정에게까지 호락호락한 노인은 아닐 것이다.

귓바퀴를 문지르며 능청을 떨던 정혁은 신중에 신중을 기울여 말을 이었다.


“아니, 나 닮았으면 얼마나 귀엽겠어. 하는 짓도 예쁘고.”

“좋지, 암. 어디 능력 되면 열이라도 만들어 오려무나.”

손자가 활기를 찾은 것 같자 박 회장은 기분대로 장단을 척척 맞춰 주었다.


“능력만 보면 백도 가능하지.”

“싱겁기는.”

썰렁하기만 하던 저택에 모처럼 웃음이 흘러넘쳤다.


 

* * *



“다람쥐 토토는 슬펐어요. 왜냐하면, 바다거북 리오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거든요. 토토는 리오가 그들과 함께 숲속에서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다정의 목소리가 숨소리처럼 작게 끝을 맺었다.

동화책을 평소의 반도 읽지 않았는데, 어느새 시우의 눈은 꼭 감겨 있었다.

동화책을 제자리에 넣어 두고 살며시 이불을 끌어 올리는 다정의 눈에 문득 호랑이 인형이 잡혔다.

거대한 호랑이는 시우의 침대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조만간 처치 곤란 애물단지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불현듯 한숨이 비집고 흘렀다.

다정은 가만히 무릎을 끌어안고 시우의 방을 돌아보았다. 아이의 방이 어느새 그 남자의 흔적들로 가득했다.

그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마음이 심란했지만, 그를 생각하는 시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를 떠올리면 실없이 웃음이 나기도 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상대를 긴장시키는 동시에 설레게 하는 특이한 남자가 싫지만은 않았다.

그저 마음이 불편할 뿐이다. 차정혁은 차정혁의 인생을 살아야 하는 남자니까.

자신과 시우 때문에 그가 지켜 오던 견고한 성벽이 무너져 내리는 건 바라지 않았다.

* * *

총명 아트 갤러리 관장인 형숙은 교양 있는 몸짓으로 찻잔을 들어 올렸다.

기울어진 찻잔 너머로 향한 눈길은 곱상하게 생긴 남자의 뒷등을 주시한 채였다.

관장실을 구경해도 좋겠냐며 양해를 구한 남자는 책장 한편을 장식한 가족사진 액자만 줄기차게 바라보고 있었다.

갤러리와 들어와 단 10분 만에 그림을 다섯 점이나 구입했다. 모두 수천만 원에서 억대를 호가하는 그림이었다.

형숙은 통 큰 고객에게 어떤 입발림을 해 줘야 할지 잠시 고민하고 입을 열었다.


“정말 작품 보는 안목이 대단하세요.”

추켜세우는 목소리에 작위적인 웃음이 가득 묻어났다.

액자에서 시선을 떼고 몸을 튼 남자는 형식적인 웃음으로 화답하며 소파로 돌아와 앉았다.


“무슨 일을 하시기에 그림에 조예가 깊으신지 궁금하네요.”

내심 남자의 신상이 궁금해 넌지시 떠보았다. 그랬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그가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어련히 끗발 있는 인물일 거로 생각하고 명함을 받아 본 형숙은 놀란 눈을 치켜떴다.


“명한유통 차정혁 전무님이라면. 박종순 회장님의…….”

“맞아요. 금쪽같은 손자.”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 정혁은 차를 한 모금 삼켰다.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다뿐, 박 회장이 단 하나뿐인 손자를 금이야 옥이야 귀하게 여긴다는 건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얘기였다.

형숙의 입가에 물린 웃음이 한결 진해졌다.


“저희 갤러리를 직접 방문해 주시다니, 너무 영광입니다, 전무님.”

“요즘 그림에 관심이 좀 생겨서.”

정혁은 말꼬리를 줄이며 피식거렸다. 거짓말을 하려니 조금 간지러워졌다.


“가족사진인가 봐요. 화목해 보이고 좋네요.”

정혁이 방금 봤던 액자들을 가리켰다.


“자녀들은 다 결혼했죠?”

“아뇨. 큰 애랑 막내만 먼저 보내고 둘째는 아직이네요.”

근심이 많다는 듯 형숙이 애석한 웃음을 지었다.


“둘째라면 아들?”

“네. 건축 계통에 있는데, 일에 빠져서 결혼에 통 관심이 없더라고요.”

“잘됐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이참에 좋은 일 좀 할까요?”

“좋은 일이라면?”

형숙의 눈에 호기심이 일었다.


“변호사 하는 후배가 있어요. 집은 살 만하고 얼굴도 예쁘장한 편인데, 어때요?”

“이런, 그렇게나 신경을 써 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형숙은 교양 있는 웃음 뒤로 애써 좋은 기색을 감추었다.

다음 날까지도 형숙은 쉽게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고매한 교육자 집안은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장남인 도진 내외는 의사였고, 막내딸 도경 내외는 피아니스트와 음대 교수가 아닌가.

하나 아쉬운 거라면 집안에 법조인이 없다는 거다. 둘째 도준의 짝으로 변호사 며느리만 딱 들어오면 구색이 완벽할 텐데.

얼마 전에도 변호사 아가씨와 어렵사리 자리를 마련했더니, 둘째가 거들떠보지도 않아 얼마나 속이 상했는지 모른다.

어쨌든 원하는 며느리를 볼 기회일지도 모르는데, 거절하는 건 옳지 않았다. 게다가 그 남자가 소개할 정도면 오죽 수준이 높으랴.

또 모르지. 이번엔 둘째 눈에 쏙 들지도.

꿈에 부풀어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형숙의 휴대폰이 울렸다.


『어머나! 전무님.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무슨 일이세요? 그 아가씨가 서두르는 모양이죠? 호호.』

김칫국을 사발로 들이켜는 중년 여자의 목소리에 정혁의 입가로 피식 실소가 흘렀다.


“아니, 아드님에 대해 좀 알아봤는데, 이쪽에서도 검증은 해야 하니까.”

『아, 예……. 그렇긴 하죠.』

형숙의 목소리가 숙연하게 가라앉았다.


“그런데 말이죠. 다른 여자랑 결혼을 전제로 교제 중이더라고. 그것도 다섯 살짜리 애 딸린 여자랑.”

상대 쪽에선 잠시 말이 없었다.


“알아보지 않고 진행했으면 이쪽 입장이 난처할 뻔했습니다. 어쩌죠? 좋은 일 좀 하려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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