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가족 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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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가족 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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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가족 나들이
2022.12.08.
“Who will go next?” (다음은 누가 해 볼까?)
원어민 교사의 말을 귀담아들으며 또랑또랑 눈을 빛내던 아이들이 너도나도 손을 치켜들었다.
경쟁이 치열했다. 재빨리 의자를 밟고 올라선 시우가 손을 들고 껑충껑충 뛰었다.
그 열성적인 모습에 감탄한 미모의 금발 교사가 파란 눈을 동그랗게 떴다.
“All right. 시우.” (좋아요, 시우 어린이.)
선생님의 선택을 받은 시우의 얼굴에 부끄러운 웃음이 피어올랐다.
“Let me ask you a question. What’s your dream?” (선생님이 질문할게요. 시우 어린이는 꿈이 뭐예요?)
커다란 눈을 도르르 굴리던 시우가 힘차게 대답했다.
“마이! 드림! 이즈! 타이거어!”
유시우가 씩씩한 목소리로 당찬 포부를 밝혔다.
교실 밖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정혁의 눈에 기특하다는 웃음이 어렸다. 문법적 오류가 있지만 다 알아듣겠는 건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장래희망이 호랑이라니. 역시 제 아들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자연의 섭리에 어긋난 논리 역시 중요하지 않았다. 천진하고 귀여우니, 그거면 충분했다.
드르륵, 소리를 내며 교실 문이 열린 바람에 돌연 수업이 중단되고 말았다.
대충 입어도 태가 남다른 남자는 태연히 교실을 가로질렀다. 코앞에서 우뚝 멈춰 선 그림자에 시우가 입을 헤 벌리고 정혁을 올려다보았다.
빤히 눈을 맞추자니 피식 웃음이 났다.
“우와!”
별안간 시우의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짐짝처럼 어깨에 들쳐 메자 시우가 신난 소리를 지르며 버둥거렸다.
그대로 교실을 빠져나가려던 정혁은 아차 싶어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그리고 놀란 얼굴로 굳어 버린 금발 교사를 향해 입술 끝을 말아 올렸다.
“The baby tiger was kidnapped by me. So you keep going.”(아기 호랑이는 내가 납치해 가니까, 선생님은 수업 계속하세요.)
* * *
사내 화장실 벽에 처박힌 다정은 타일 벽에 이마를 콩콩 찧었다.
“왜 그랬을까…….”
어젯밤 일이 미치도록 후회스러웠다.
솔직히 말하면 주차장에서 그를 마주치기 전까지 다정은 어젯밤 일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었다.
레지던스를 나와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돌아온 시각은 그리 이르지 않았다.
허둥지둥 출근 준비를 하고 시우의 원복과 가방을 챙겨 솔이네 집으로 전력 질주를 했더랬다.
일찍 깨 혼자 놀고 있는 기특한 아들과 재회의 기쁨을 나눌 겨를도 없이 먹이고 씻기고 입혀 등원을 시키느라 아주 혼쭐이 났었다.
그러고도 15분이나 지각을 했고, 정신없이 현장을 돌아다닌 바람에 어젯밤 일을 떠올릴 틈조차 없었다.
그렇게 바쁜 일을 처리하고 다시금 여유를 찾은 뒤로는 심란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하…….”
생각할수록 탄식만 흘렀다.
또 저질러 버리고 말았다. 미친 게 아니고서야 또 그렇게 짐승처럼.
하긴, 짐승의 본능에 이성이 끼어들 영역 따윈 존재하지 않는 법이니까. 그래도 그렇지.
“미쳤어. 어쩌자고…….”
남자들이 얼마나 단순한 동물인데 또다시 여지를 주고 말았다.
그는 어젯밤 일에 특별한 의미를 두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부끄러운 차를 몰고 회사까지 찾아온 남자의 태도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물론 다정에게도 본능적인 욕망만 그득했던 밤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떤 것으로든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았다.
후회와 자책을 곱씹으며 이마를 콩 찧는데 별안간 움켜쥔 휴대폰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시우를 만나러 갈 거라던 남자로부터 걸려 온 전화였다. 그것도 영상통화.
무슨 일이 있지 싶어 재빨리 통화버튼을 누르고 팔을 길게 뻗었다.
“왜요? 시우한테 무슨 일 있어요?”
놀란 표정이 화면에 떠오르자 정혁의 눈길이 옆으로 굴렀다.
유시우는 세상 화려하고 비싼 슈퍼카 지붕에 올라가 미끄럼을 타며 잘 놀고 있었다.
“기다려 봐.”
팔을 떨군 정혁이 보닛 위를 엉금엉금 기는 시우의 뒷덜미를 잡았다.
시우는 눈이 동그래질 틈도 없이 강아지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운전석으로 옮겨졌다.
휘황찬란한 내부와 핸들을 발견한 순진무구한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시우한테 무슨 일 있냐고 묻잖아요!』
다급한 목소리는 평소보다 톤이 높았다.
“무슨 일 있지. 방금 나한테 납치됐거든.”
『뭐라고요?!』
화면 속 다정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진다. 또 한 소리 나오지 싶어 정혁은 얼른 휴대폰 각도를 아래로 기울였다.
“어? 엄마다! 엄마아!”
코앞에 드리워진 엄마를 발견하고 시우가 방싯방싯 웃었다. 예상대로 유다정은 세상에서 제일 좋은 엄마로 돌변했다.
『우리 시우. 맘마 먹었어요?』
“네에! 엄마! 그런데 시우! 있잖아요. 붕붕이 타고 놀러 갈래요.”
『어? 놀러? 아직 유치원 안 끝났는데?』
“호랑이! 호랑이 보러 갈 거예요! 아저씨랑 붕붕이 타고 슝!”
작은 궁둥이가 정혁의 무릎 위에서 신이 나 들썩거렸다.
다정은 난감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호, 호랑이? 음……. 시우야 엄마가 아저씨랑 얘기해 볼게요. 잠깐만 기다려요.』
뚝, 상냥한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영상통화는 야멸차게 끊겼다. 그리고 곧장 진동하는 휴대폰.
통화버튼을 누른 정혁이 휴대폰을 귀에 붙였다.
『차정혁 씨! 지금 뭐 하자는 거예요!』
엄청 사납다. 자기 아들한텐 강아지풀처럼 사근사근하더니.
“호랑이 보러 갈 거야. 유시우랑 호랑이 보러 가자고 약속했어.”
『이것 봐요, 차정혁 씨! 대체…….』
시끄러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정혁은 귀에서 휴대폰을 멀찌감치 떼고 시우의 머리카락에 코를 문질렀다.
부드러운 아기 냄새가 났다. 그 냄새가 좋아 산소처럼 숨을 마시며 시끄러운 잔소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얼마 뒤 작은 소음이 뚝 끊긴다. 다시 귀를 붙이자 긴 한숨 소리가 이어졌다.
『……유치원엔 연락해 둘게요. 대신 이번 한 번만이에요. 그런데 설마 아까 그 차 타고 갈 건 아니죠?』
“왜 아니야? 유시우 태워 주려고 일부러 폼 나는 거로 골라온 건데.”
『카……시트는요?』
물어보는 목소리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정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없어도 돼. 암튼 나랑 같이 운전해서 갈 거야. 유시우 되게 좋아해.”
『미쳤어요?!』
다정이 꽥 소리를 질렀다.
『그 차에 시우 태우기만 해 봐요!』
예사롭지 않은 말투에 정혁의 눈가가 굳었다.
유시우를 무릎에 앉히고 핸들을 잡게 해 줄 철없는 로망을 꿈꿨다.
“유다정은 카시트 있어?”
『당연하죠! 아이 키우면서 카시트 없는 집도 있어요?』
곰곰 생각해 보니 철없는 로망은 로망으로 간직하는 게 옳았다.
“그럼 카시트 있는 유다정이 데려다주든가.”
* * *
차내에 명랑한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좋아하는 동요를 부르며 시우는 한껏 기분이 들떠 있었다.
“우리 시우. 호랑이 보러 가서 좋아요?”
“네에!”
룸미러 속에서 시우와 눈을 맞춘 다정은 방긋 웃었다.
“호랑이도 시우 보면 엄청 좋아하겠다. 그치?”
“시우! 어……. 호랑이 백 마리 볼 거예요!”
“와, 우리 시우 용감하기도 해라…….”
말끝에 다정의 입가에 번진 웃음기가 사악 지워졌다. 곧장 뾰족하게 빛나는 눈이 조수석으로 날아가 꽂혔다.
미끈한 뺨에 구멍이라도 낼 기세로 쏘아보는데도 뻔뻔한 남자는 아랑곳도 없다.
차마 시우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기 뭐해 입을 꾹 붙이고 있지만, 한껏 솟구친 다정의 어깨는 잔뜩 화가 난 채 시근덕거리고 있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이 다 안 나왔다.
카시트도 없는 그 이상한 차에 제 아들을 싣고 달린다?
다정의 귀엔 아들을 살해하겠다는 말로밖에 해석이 되지 않았다. 일도 팽개치고 달려와야 했을 만큼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그리하여 한 차에 올라탄 세 사람은 사파리 랜드로 향했다.
첫 가족 나들이였다.
* * *
“꺄! 시우야 저기 봐 봐!”
사파리 버스를 타고 이동하던 중 다정이 돌고래 소리를 질렀다.
등받이에 길게 팔을 걸친 정혁은 조금 어이가 없어서 헛숨을 뱉었다.
왜 네 멋대로 애를 데려가냐며 방방 뛰더니, 어째 자기가 더 흥분해 난리였다. 여하튼 버스에 사람이 적지 않은데 제일 시끄러웠다.
커다란 곰이 두 발로 일어서서 재롱을 떨다가 버스 창문을 앞발로 두드렸다. 곧장 다정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꺄! 어떡해! 꺄악!”
버스가 들썩일 만큼 요란했다.
그런 엄마가 조금 부끄러웠던지 시우의 작은 머리통이 옆으로 돌더니 이를 어쩌면 좋냐는 듯이 정혁을 빤히 본다.
정혁은 짧게 한숨을 뱉으며 시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좀 참아.”
버스가 사자 무리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털 달린 짐승들은 하나같이 더위에 지쳐 바위나 풀밭에 축 늘어져 있었다.
그 와중에 역동적인 장면이 포착되었다. 갈퀴가 풍성한 수사자가 암사자와 뒤엉켜 종족 번식을 위한 행위가 한창이었다.
가이드도 살짝 당황했던지 차내 스피커를 통해 헛기침 소리가 울렸다.
『큼큼……. 여러분들은 사자가 짝짓기하는 희귀한 장면을 눈으로 생생히 목격하고 계십니다. 전쟁 통에도 사랑은 싹트는 법이니까요. 하하하.』
정작 아이들은 아무 생각도 없는데 어른들의 입은 하나같이 과묵해졌다.
다정은 괜스레 뜨거워진 뺨을 쓸어내렸다. 동심을 간직한 아이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하여간 물색없는 사자였다.
모두가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른 와중에도 정혁은 꿋꿋하게 사자의 교미를 지켜보고 있었다. 어딘지 표정이 심오하기까지 했다.
민망하지도 않나 싶어 힐끔거리자, 심오한 얼굴로 장면을 관찰하던 남자의 입꼬리가 픽 미끄러진다. 거의 비웃음이었다.
눈앞의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우쭐한 표정만 봐도 짐작할 수 있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하X드 출신의 남자는, 방금 사자보다 자신이 더 우월하다는 결론에 도달한 게 틀림없었다.
* * *
마지막으로 진입한 코스에서 마침내 호랑이를 만날 수 있었다.
우글우글 모여앉은 고양잇과 짐승을 보며 시우는 이날만을 기다린 것처럼 신이 났다.
아들보다 더 좋아하던 다정은 언제부터인가 사파리 투어를 즐길 수 없었다.
반면, 수사자에게 정신적 승리를 거둔 남자의 입가에선 우쭐한 웃음이 떠날 줄 몰랐다.
사파리에서 맹수들을 관람하고 난 뒤에는 일반 동물들을 관람했다.
시우는 양쪽으로 다정과 정혁의 손을 잡고 껑충껑충 뛰었다.
“우리 시우, 목 안 말라요?”
다정이 걱정스레 물으며 더위에 익어버린 시우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또랑또랑한 눈으로 두리번거리던 시우가 먼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엄마! 저거!”
나란히 콘 아이스크림을 들고 땡볕 아래를 거닐자니, 시우의 걸음이 더뎠다.
먹느라 보느라 걷느라 어린 게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몇 번인가 다리가 엉켜 넘어질 뻔하기도 했다.
보기에 안쓰러웠던지 정혁이 그런 시우를 안아 제 팔에 앉혔다.
그 모습을 보며 다정은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느꼈다. 혼자였더라면 이 더위에 지친 아들을 안아 주는 일 따윈 불가능했을 거다.
투명한 막이 설치된 울타리 앞에 도착해 정혁이 시우를 내려 주었다. 허리를 굽힌 다정은 거대한 얼음이 둥둥 떠 있는 연못을 가리켰다.
“시우야. 저게 뭘까?”
“하! 마!”
“하마 입 되게 크다. 그치?”
하마가 쩍 입을 벌리고 하품을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우의 입도 덩달아 동그랗게 벌어졌다.
그런 시우를 지켜보며 다정은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다른 데도 다 예쁘지만 이럴 땐 뒤통수가 제일 귀여웠다.
제 눈에 뭔들 안 예쁠까마는 어째서인지 다정은 그 사실을 정혁과 공유하고 싶어졌다.
살그머니 정혁의 티셔츠 소매를 당겼다. 그러자 시우와 한 방향을 바라보던 눈길이 지그시 아래로 떨어졌다.
운동화를 신은 다정은 더 작고 아담해서 가까이 세워 두면 턱을 제법 내려야 눈을 맞출 수 있었다.
“차정혁 씨. 있잖아요.”
조용하게 목소리를 내며 다가온 다정이 뒤꿈치를 살짝 올렸다. 얼굴이 더 가까워지자 목소리가 숨소리처럼 작아졌다.
“우리 시우는요. 뭔가에 몰두할 때 뒤통수가 제일 귀여워요.”
소곤대곤 쿡 웃는 다정의 얼굴이 파랗게 익어 가는 강아지풀처럼 낭창낭창 보드라운 느낌을 주었다. 그 풋풋한 웃음에 정혁의 눈길이 길게 머물렀다.
다정이 다시 거리를 벌리려던 찰나였다. 불쑥 다가온 말랑한 감촉이 다정의 입술을 순식간에 쪼고 달아났다.
쪽!
소리가 제법 크게 울렸다. 숨을 멎은 다정의 눈이 휘둥그레진 그때 시우가 휙 고개를 젖혔다.
다정이 황급히 목을 다듬는 사이 정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하마를 노려보았다.
무구한 눈은 그렇게 한동안 수상하게 구는 엄마와 아저씨를 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