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오빠, 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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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오빠, 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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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오빠, 해 봐
2022.12.04.
다정은 숨을 죽인 채 커다래진 눈만 연신 깜빡였다.
너무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방어할 겨를도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차정혁의 가슴 위로 고꾸라진 뒤였으니까.
두근두근. 뺨을 맞댄 그의 가슴에서 힘차게 뛰는 심장 박동이 전해졌다.
“유다정…….”
속삭여 부르는 목소리가 갈라져 잔뜩 탁했다.
“유다정…….”
잠꼬대처럼 중얼거리는 그의 두 팔이 다정의 등을 더욱 힘껏 조였다. 사로잡힌 채 눈동자만 굴리던 다정은 작게 목소리를 내 보았다.
“차정혁 씨…… 괜찮아요?”
“……안 괜찮아. 아파.”
물살에 두둥실 떠올랐다 가라앉는 배처럼 그의 가슴이 부풀었다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많이 아파요? 어디가 어떻게 아픈데요?”
“몰라…… 그냥 아파.”
목소리와 숨소리. 그 밖의 모든 게 무겁고 나른했다. 마치 긴 수면에 취했다가 깨어난 것처럼.
빈틈없이 밀착하고 있는 자세가 민망했지만, 다정은 그에게 안긴 채 가만히 있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자 으스러트릴 듯이 옥죄던 그의 두 팔에도 차츰 힘이 풀렸다. 다정은 그제야 슬그머니 몸을 일으켜 그의 안색을 살폈다.
아프다던 말이 거짓은 아닌지 못 본 사이 얼굴이 반쪽이었다. 매끈하던 피부는 푸석했고 깊던 눈매는 메말라 건조했다.
눈을 감고 잠시간 숨을 고른 그가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다정은 얼른 그의 등 뒤로 쿠션을 밀어 넣었다.
몰라보게 핼쑥해진 남자의 얼굴로 걱정스러운 눈길이 따라붙었다. 핼쑥한 것도 핼쑥한 거지만, 평소 같지 않게 흐트러진 모습이 낯설었다.
정돈되지 않아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이마를 덮자 학생처럼 앳돼 보이기까지 했다.
서로를 마주 보는 공간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민망함을 느낀 다정은 재빨리 입술을 달싹였다.
“땅콩…… 때문에 큰일 날 뻔했다면서요.”
이곳으로 오는 동안 민 실장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5년 전 그가 땅콩 알레르기에 대해 말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죽을 수도 있었다면서요. 미련하게 왜 그랬어요?”
걱정스럽고 미안한 마음이었지만 왜인지 말이 좋게 나가지 않았다. 자기 아들을 살인자로 만들 뻔했다는 사실에 조금 화가 나는 것도 같았다.
“좋아서.”
무미건조한 목소리와 달리 그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어렸다. 공허하게 메말랐던 눈동자도 어느새 엷은 생기를 띠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어디가 어떻게 아픈 거예요?”
재차 물으며 다정은 무심결에 그의 이마를 짚었다. 열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 손길에 정혁의 눈꺼풀이 느리게 감겼다가 떠올랐다. 부드럽고 살뜰하게 이마를 짚어 주는 감촉이 좋았다.
버석하게 메마른 입술이 생동감 없이 움직였다.
“왜 이렇게 잘해 줘? 너한테 맨날 못되게 하는데.”
무거운 물음에 다정은 입술을 살짝 깨물다가 놓았다.
“차정혁 씨도…… 나 아플 때 이렇게 해 줬으니까.”
제게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눈길에 또다시 부끄러워지고 만 다정은 그만 손을 거두고 일어났다.
“차정혁 씨 괜찮은 거 봤으니까 그만 가 볼게요.”
“나 안 괜찮아.”
정혁이 떨어진 손을 냉큼 붙잡아 다시 제 이마에 붙였다.
“봐, 아직 아프잖아. 되게 불쌍해. 그러니까 계속 만져 줘.”
“아, 안 돼요.”
잡힌 손을 빼내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왜?”
“그야 시우 등원도 시키고 출근도 해야 하니까…….”
“잠들 때까지만 있어. 유시우가 아파도 이렇게 나 몰라라 할 거야? 매정하게?”
다정은 해탈한 얼굴로 한숨을 뱉었다. 죽을 만큼 아프다고 하더니 헛소리를 지껄이는 입을 제외하면 다른 덴 멀쩡해 보였다.
꾀병에 가까운 응석이라는 걸 알면서도 다정은 어쩌지 못하고 도로 침대맡에 앉았다.
“그럼 차정혁 씨 잠들 때까지만 있다가 갈게요. 아프니까…….”
퍼엉! 펑!
불현듯 먼 곳에서 울리는 몽환적인 폭발음이 귀에 잡혔다. 창밖으로 눈길을 돌리자 화려한 불꽃이 까만 밤하늘을 어지러이 수놓고 있었다.
“맞다. 한강 여름 불꽃 축제가 이맘때쯤이었지……. 우리 시우도 봤으면 좋아했겠다.”
좋고 예쁜 걸 보면 어김없이 아들 생각부터 났다.
형형색색으로 물들어 살풋 웃음을 터뜨린 다정의 허리로 별안간 탄탄한 팔이 감겨 왔다.
놀라 버둥거리는 사이 다정은 침대 중앙으로 끌려와 있었다.
어느새 정면으로 펼쳐진 커다란 창이 한눈에 들어왔다. 너른 품은 다정의 등을 감싼 채였다.
“여기 전망 좋아. 유다정이 보고 유시우한테 얘기해 줘.”
귓가로 다가온 입술이 속삭여 말했다. 다정은 민망함에 입술을 감쳐물었다. 정말 하나도 안 아파 보였다.
어쨌든 비싸고 전망 좋은 초호화 레지던스에서 감상하는 불꽃놀이는 환상적이었다.
“잠깐만요. 그런데 꼭 이런 자세로 봐야 해요?”
전망 좋은 위치로 옮겨 준 것까지는 좋았는데, 거머리처럼 등에 찰싹 달라붙어 끌어안고 있을 필요까진 없었다.
다정이 항의를 쏟자 그의 입술이 곧장 귓가로 다가왔다.
“유다정 추울까 봐.”
간지러운 숨결에 다정은 퍼뜩 귀를 감쌌다.
“차정혁 씨. 지금 여름이에요.”
“우리 노인네 말이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댔어. 근데 넌 개가 아니잖아.”
어깨를 움츠린 다정은 황당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지그시 내리깐 눈도 다정을 빤히 바라보았다.
“너 걱정하는 거 아니야. 유다정 감기 걸려서 유시우한테 옮기면 어떡해. 유시우도 개 아닌데.”
“…….”
퍼엉! 펑!
밤하늘에 펼쳐진 장관을 바라보는 순한 얼굴이 천진하게 웃었다. 그 얼굴을 감상하는 정혁의 눈에도 웃음이 어렸다.
좋았다. 제 것이 아니라며 야멸차다가도, 어느새 이렇게 온전히 제 것처럼 굴어 주는 게.
* * *
퍼엉! 펑!
불꽃 축제는 한창이었다. 그랬음에도 두 사람은 나란히 누워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주 보는 게 어색하면서도 다정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잠 안 와요?”
“유다정은?”
반쯤 내리감긴 다정의 눈이 느리게 끔뻑였다.
“피곤한데 잠이 안 와요.”
“팔베개해 줄까.”
“괘, 괜찮…….”
사양하기도 전에 묵직한 팔이 다정의 귀밑을 파고들었다. 숨소리가 가까웠다. 이불이 사부작거리는 소리조차 지나치게 크게 들렸다.
다정은 호흡을 느리게 조절했다. 쿵쿵 뛰는 심장 소리를 들킬까 염려가 되었다.
시선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가까운 나머지 이리저리 회피해도 눈에 닿는 건 그의 얼굴뿐이었다.
차라리 보지 말자 싶어 눈을 감았다. 그 순간 다정의 입술로 말캉한 감촉이 밀려들었다.
번쩍 눈을 뜬 다정이 화들짝 놀라 그의 가슴을 밀었다.
“무, 무슨 짓이에요!”
“눈 감길래 해도 되는 줄 알았지.”
“이러면 나 그냥 갈 거예요.”
협박 같은 경고의 말에 정혁의 얼굴에 긴장이 스쳤다. 얼른 다정의 손을 움켜쥔 그가 쓰다듬어 달라는 듯이 그 손을 제 머리에 얹었다.
“예뻐해 줘. 유시우 예뻐하는 것처럼.”
“우리 시우는 엄마한테 이런 이상한 짓 안 하거든요.”
정혁은 힘없이 뜨인 눈을 몇 번 끔뻑였다. 그러곤 이내 우쭐한 웃음을 그려냈다.
“왜 웃어요?”
“아니, 기능적으로 내가 더 우월한 것 같아서. 유시우도 못 하는 걸 나는 하잖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해서는 남사스러운 말을 잘도 했다.
“정말 어린애처럼 왜 그래요?”
“유다정이 나만 예뻐해 주면 좋겠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공기도 무겁게 가라앉았다. 지그시 바라보는 눈빛 역시 그랬다.
“유다정이 나만 보면 좋겠어. 나만 생각하면 좋겠고. 웃는 것도, 우는 것도 다 나 때문이면 좋겠어.”
“차정혁 씨…….”
얼마 전에도 비슷한 말을 들었던 것 같은데, 그때와는 사뭇 느낌이 달랐다.
분명 귀로 듣고 있는데, 그 말들이 문을 밀고 들어오는 고백처럼 다정의 가슴을 잔잔하게 울렸다.
다시 말캉한 감촉이 입술에 닿았지만, 다정은 거부하지 못했다. 거칠지 않은 부드럽고 상냥한 입맞춤이었다.
그의 호흡이 조금 더 짙게 밀려왔다가 멀어졌을 때 달뜬 홍조가 다정의 뺨을 뒤덮었다.
저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수줍음은 꼭 제 몫인 것만 같아 억울해지는 순간이었다.
애가 탄 듯 눈가를 더듬던 입술이 약간 가빠진 채 속삭였다.
“착하게 굴고 싶은데, 이럴 땐 어떤 게 착한 건지 몰라.”
더워진 그의 호흡이 피부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런 그의 목에 다정의 팔이 매끄럽게 감겼다.
발그레하게 붉힌 뺨과 입술이 속삭여 말했다.
“이럴 땐 안 착해도 돼요.”
열망 어린 눈길을 교차하기도 잠시, 성급히 포개진 두 입술이 서로의 체온 위로 격렬하게 뭉그러졌다.
퍼엉! 펑!
어두운 밤하늘에 불꽃의 향연이 펼쳐졌다. 그리고 누군가의 양기도 폭발하는 밤이었다.
* * *
햇살에 찌푸린 눈꺼풀을 밀어 올렸을 때 눈에 들어온 건 텅 빈 옆자리였다.
시트에 구겨진 흔적만을 남긴 채 유다정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눈을 감은 정혁은 허탈한 실소를 뱉었다.
또 내뺐다. 하여간 도망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친다.
시간을 보자 정오가 머지않았다. 부스럭대며 침대를 벗어난 그는 곧장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를 마치고 가벼운 티셔츠와 저지 팬츠 차림으로 나와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차 키 중 하나를 낚아챘다.
현관을 나서자 막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으로 민 실장이 내려서는 게 보인다. 손에는 죽 전문점의 로고가 새겨진 포장백을 든 채였다.
그와 마주친 민 실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차 전무가 제 발로 침실을 기어 나온 게 얼마 만인지 모른다.
“아닛! 전무님! 드디어 쾌차하신 겁니까?”
그간 알게 모르게 속앓이를 해 온 민 실장의 얼굴이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기쁨으로 물결쳤다.
슬쩍 눈길을 준 정혁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복잡미묘한 표현이 뒤섞여 있지만 뭉뚱그려 ‘치하’쯤으로 생각해도 좋을 거였다.
느긋하게 주차장으로 내려온 정혁은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부아아아아앙!
* * *
회사 옥외 주차장에 차를 세운 다정은 눈을 감고 시트에 머리를 기대었다. 오전 내내 현장을 돌고 복귀했더니, 맥이 턱 풀어졌다.
눈을 감고 잠깐 숨을 돌린 후에 차에서 내려설 때였다.
부아아아앙!
귀를 찢을 듯한 굉음에 다정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동시에 납작한 차 한 대가 주차장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끼이익!
짧은 스키드 마크를 그리며 멈춰 선 차는 계속해서 부앙부앙 요란한 소리로 울었다.
다정은 난데없이 등장한 샛노란 스포츠카를 기웃거렸다. 미끈하게 잘 빠지고 엄청 비싸 보이는데, 직접 타고 다니기엔 어딘가 부끄러운 생김새였다.
부앙! 부앙부앙!
사람도 얼마 못 태울 것처럼 생긴 주제에 참 시끄럽다. 그나저나 보행자가 있는 주차장에서 이렇게 운전이 험해서야.
한 소리 할까 고민하며 찌푸린 눈으로 운전석을 주시할 때였다. 선팅된 까만 유리가 부드럽게 밀려 내려가더니 그 안에서 불만스러운 얼굴이 등장했다.
화들짝 놀란 다정은 운전석을 향해 총총 내달렸다.
“차정혁 씨! 여긴 또 뭐 하러 왔어요?!”
절로 다그치는 말이 튀어 나갔다.
“또 내뺐더라.”
“내빼긴 누가요? 출근해야 하니까 온 거죠.”
황당해서 헛숨이 나왔다. 그 와중에도 푸석푸석 다 죽어 가던 얼굴에서 광채가 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타.”
“안 돼요. 근무 중이란 말이에요.”
도리질을 치자 정혁의 눈가가 굳었다.
부앙! 부아앙!
가만히 서 있던 차가 또다시 시끄럽게 울어 대기 시작했다. 저로서는 가격도 짐작 못 할 슈퍼카를 보며 왜 부끄러워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창피하니까 그만 좀 해요! 정말 왜 이래요?”
“오빠, 해 봐.”
쩍 벌어진 다정의 입으로 놀란 숨이 삼켜졌다.
“미쳤어요?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오빠, 하면 갈게.”
거의 사고가 마비된 채 굳어 있자 노란 쇳덩어리가 다시 시위를 시작했다.
부앙! 부앙부앙!
계속된 소음에 건물 창문으로 사람들이 하나둘 머리를 내밀었다.
개나리 같은 화려한 색감을 자랑하는 슈퍼카에 눈길을 사로잡힌 사람들은 가던 걸음도 멈추고 휴대폰 카메라를 들이대기도 했다.
부아앙! 부앙!
“오, 오빠!!”
급한 마음에 외치고는 봤는데, 창백하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돼, 됐어요?!”
“됐어.”
정혁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올라간다.
“그 말 들으러 여기까지 와서 이 난리예요?”
“아니, 유시우 보러 가는 길에 들렀어.”
“시우는 또 왜요?”
“유시우랑 놀 거야.”
끼이익 소리를 내며 후진한 차가 방향을 틀어 부아앙 달려 나간다.
얼이 나간 채 그 뒤꽁무니를 바라보던 다정은 얼굴을 감싸고 탄식했다.
진심으로 부끄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