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닭 쫓던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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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닭 쫓던 개
2022.12.01.
민 실장은 마른침을 꿀떡 삼켰다.
엄중한 공기에 갇혀 벌을 선지 십여 분. 근엄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던 박 회장의 입이 마침내 열렸다.
“정혁이 여자 있냐?”
“예? 여여, 여자…… 말씀이십니까?”
민 실장의 눈알이 좌우로 어지럽게 굴렀다. 곧장 답이 돌아오지 않자 맹수처럼 번뜩이는 눈길이 올라섰다.
“송 원장이 그러지 않아? 상사병이라고. 그게 여자 있다는 소리가 아니면 뭐냐.”
“글……쎄요.”
고개를 갸우뚱하며 민 실장은 뜸을 들였다.
그사이 그의 머리는 치밀한 계산에 들어갔다. 어디로 줄을 서야 하는지.
지금의 위세로만 본다면 박 회장 앞에 넙죽 엎드려 아는 걸 죄 고하는 게 옳았다.
그러나 박 회장이 살아봤자 얼마나 살겠는가. 길게 내다보면 명실상부 후계자인 차 전무 쪽에 줄을 서는 게 현명할 거다.
계산을 끝낸 민 실장의 허리가 폴더폰처럼 굽실 접혔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제가 모시는 동안 그에 대해 보고들은 내용은 일절 없었습니다!”
“그래?”
박 회장의 입매가 일자로 꾹 다물렸다.
하긴, 여자일 리 없지. 만약 그랬다면 그건 그거대로 노여웠을 거다.
돈이 없나, 인물이 달리길 하나, 아니면 머리에 든 게 없을까. 뭐 하나 부족한 게 없었다.
그런데 감히 어떤 주제도 모르고 콧대 높은 물건이 내 손자를 퇴짜 놓을까. 눈깔이 빠진 게 아니고서야.
“그럼 여자 문제는 아니렷다…….”
지그시 눈을 감고 곰곰 생각하던 박 회장의 눈꺼풀이 스르르 열렸다.
그렇다면 물건이다. 쉽사리 수중에 넣지 못하는 게 있어 병이 난 거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박 회장이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역시 쉽게 수긍되는 얘기는 아니었다.
손자 놈은 어릴 때부터 물욕이 없는 아이다. 모든 게 넘치게 풍족했던 까닭이었다.
길을 가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이미 제 것이 되었기에 뭔가를 갖고 싶어 안달하는 일은 있을 수조차 없었다.
뭘까. 내 손자가 갖고 싶어도 갖지 못하는 게…….
그즈음 박 회장의 머릿속에 뭔가가 번뜩 스쳤다. 그녀의 눈길이 민 실장을 향해 다시 날카롭게 올라섰다.
“자네 혹시 UCU가 뭔지 아나?”
“예? U……CU라고 하셨습니까?”
의아하게 눈을 치뜬 민 실장의 입이 이내 쩍 벌어졌다. 퍼뜩 짐작되는 게 있긴 했지만, 민 실장은 죽을 힘을 다해 입술을 꽉 물었다.
속이 타는지 박 회장이 못마땅하게 혀를 찼다.
“그게 갖고 싶다지 않던. 그러고 입을 꾹 다무니 뭔지 알아야 말이지. 대체 뭐야? 새로 나온 자동차인 게야?”
“글……쎄요. 회장님. 저도 잘…….”
“얼마나 대단한 거기에 내 손자 애를 태워? 고얀! 당장 알아보고 얼마가 되었든 종류별, 색깔별, 크기별로 싹 다 들여와!”
“옙! 회장님!”
눈을 질끈 감은 민 실장의 허리가 힘차게 반으로 접혔다.
* * *
“찰떡. 준비됐지?”
솔이가 속삭이자 다 저녁때 선글라스를 깊게 눌러 쓴 두중이 손가락으로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두 사람의 눈길이 저만치 시우의 손을 잡고 멀어지는 다정의 뒷모습을 주시했다.
이윽고 어디선가 나타난 검은 정장의 남자가 다정 모자의 뒤를 따라붙기 시작했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찰떡과 콩떡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했다.
지금이야!
솔이가 신호를 주자 두중이 다다닷 튀어 나갔다.
다정 모자를 향해 전력 질주한 두중은 엄마 손을 잡고 껑충껑충 뛰는 시우를 번개처럼 낚아챘다. 그리고 옆구리에 낀 채 그대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꺅! 시우야!”
시우를 놓친 다정이 펄쩍 뛰며 소리쳤다. 그 순간 거리를 두고 따라붙던 검은 정장의 구둣발이 두중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거기 섯!”
검은 정장이 소리치며 다정을 쌩하니 스쳐 지나갔다.
다정은 질주하는 두 남자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사이 총총 뛰어나온 솔이가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네가 아니라 시우가 목적인가?”
“글쎄…….”
누군가 감시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치밀한 작전을 세웠다. 수상은 한데 아무런 물적 증거가 없어 경찰에 신고하는 건 보류했다.
일단 함정에 몰아넣고 추궁한 뒤 경찰에 넘길 계획이었다.
다정과 솔이는 신속히 카페 건물 뒤편에 있는 분리수거장으로 향했다.
매복하고 있으면 시우와 함께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온 두중이 검은 정장을 이곳으로 유인해 올 거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분리수거함 뒤에 숨어 기다리자 묵직한 발소리가 겹쳐 들렸다.
분리수거장으로 뛰어든 두중의 뒤를 쫓아 검은 정장도 막다른 길로 뛰어들었다.
“아이 이리 내!”
검은 정장이 두중을 향해 소리쳤다. 그 순간 숨을 죽이고 있던 솔이가 땅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야 이 나쁜 놈아!!”
꽥 지르는 고함을 신호로 다정과 솔이는 검은 정장을 향해 페트병을 투척하기 시작했다.
화살처럼 날아든 페트병이 퉁탕거리며 사방으로 나동그라졌다.
“너 누구야! 누가 보냈어!”
아예 덤벼든 솔이가 검은 정장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다정도 가세해 페트병으로 남자의 머리통을 마구잡이로 때렸다.
방어태세를 갖춘 검은 정장은 두 여자의 맹공에 속수무책 당하며 앓는 소리를 질렀다.
“너 목적이 뭐야?! 서남식이 보냈니? 우리 시우 납치해 오라고 시키든?!”
솔이가 악다구니를 쓰며 무자비하게 페트병을 휘둘렀다. 그 사이 두중의 옆구리에 끼인 시우는 새로운 놀이가 즐거워 꺄륵 웃기 바빴다.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울상이 된 검은 정장이 항변했다.
“악! 아닙니다. 우, 우린 그저 보호하라는 지시를, 윽!”
* * *
차 전무의 침실 앞을 오락가락 서성이는 민 실장의 표정이 초조했다.
얼마가 되었든 UCU를 사다가 손자 앞에 대령하라는 박 회장의 명을 받든 지 수 일이 지났다.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지시라 차 전무의 상태가 호전될 때까지 시간을 벌자는 심산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차 전무의 상태는 통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슬슬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차 전무가 죽기라도 하면?
애먼 생각을 하던 민 실장은 냉큼 고개를 내저었다. 절대 그렇게 두어선 안 되지.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지면, 그동안 요리조리 머리를 굴려 가며 신임을 얻은 게 다 허사가 되고 마는 거다.
그뿐이랴. 분명 UCU에 대해 입을 다문 사실이 발각되어 처분이 내려질 게 뻔했다.
이 일을 어쩐다…….
고심이 깊어지는 순간 주머니에서 진동음이 들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민 실장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심정으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무슨 일입니까?”
잠자코 내용을 전해 들은 민 실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정말입니까? 하, 이런…… 어쩌다가. 어쩔 수 없죠. 알겠습니다.”
통화를 종료한 민 실장의 입술 새로 깊은 탄식이 흘렀다. 여긴 또 여기대로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30분 뒤.
솔이네 카페로 불려온 민 실장의 허리가 절도 있게 반으로 접혔다.
“걱정을 끼쳐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정중히 사과하는 그를 향해 다정이 곱지 않은 시선을 쏘아댔다.
“저 사람들에게 날 감시하라고 시킨 게 댁! 아니 차정혁 씨 지시를 받은 댁이 저 사람들을 시켜 나와 우리 시우를 감시하라고 한 게 맞나요?”
민 실장의 눈길이 카페 안을 크게 훑었다.
구분이 안 될 만큼 비슷한 복장의 남자들 대여섯이 죄인처럼 죽 늘어서 있는 게 보였다. 차 전무의 지시로 고용한 경호업체 직원들이었다.
참으로 세상일은 요지경이다. 애초에 불안을 느낄 수 있으니, 불편하지 않게 은밀히 보호하라는 지시였다.
그런데 여자 둘에게 이렇게 쉽게 덜미가 잡힐 정도면 경호업체 딱지를 떼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게다가 하나만 걸렸다는데 어째 줄줄이 소시지처럼 딸려 나왔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면구스러운 얼굴이 되어 버린 민 실장은 한숨이 깊었다.
“감시라니요. 당치도 않은 오해십니다. 어디까지나 유다정 씨와 유시우 군의 안전을 위해 전무님의 특별 지시로…….”
“안전이라뇨?”
다정의 반문에 우물거리던 민 실장은 마른침을 꿀떡 삼켰다.
에라 모르겠다. 이판사판이다.
“실은! 유시우 군이 유괴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셨습니다.”
“그걸…….”
다정은 놀란 표정이 되어 입술만 벙긋거렸다.
“서남식이란 자가 다시 접근할지도 모르니, 자택과 유치원, 그리고 유다정 씨 회사에 24시간 인력을 배치하고 안전하게 경호하란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
심란한 얼굴이 된 다정은 시선을 떨구었다.
그때의 일을 떠올리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혼자서 시우를 잘 키울 수 있다고 큰소리를 땅땅 쳤기에 더욱 그랬다.
미안하고 염치가 없어서 차마 말하지 못하고 모르면 모르는 대로 넘어가 주길 바랐는데, 알고 있었다니.
게다가 경호원들을 몰래 붙일 만큼 걱정을 끼쳤으니, 앞으로 그를 어떻게 봐야 할지 난감한 기분만 스쳤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하는 건 지나친 부담이었다.
“……마음은 충분히 알겠어요. 하지만 이건 너무 과해요. 우린 이런 보호 필요 없으니까 당장 저 사람들 철수시켜 주세요.”
“일단 전무님께 보고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유다정 씨…….”
민 실장이 다급히 말을 이었다.
“실은 전무님 건강이 무척 좋지 못하십니다.”
다정이 놀란 눈을 치떴다.
“어디가…… 많이 안 좋은가요?”
“식사도 거의 못 하시고 잠들지도 못하십니다.”
다정은 입술을 깨물었다. 모른 척 외면하려 해도 역시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과 무슨 일이 있든 관계없이 어쨌든 시우에겐 아빠가 아닌가.
아니! 아니다. 냉정하게 끊어내야만 했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죠. 아프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으면 되잖아요.”
“그게 제 생각에 치료법이 유다정 씨와 시우 군인 것 같아서요.”
“…….”
다정이 뭐라 선뜻 답을 주지 않자 민 실장은 질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읍소하는 심정으로 소리쳤다.
“유다정 씨! 우리 전무님 좀 살려주십시오. 전무님이 잘못되시면 전…….”
닭 쫓던 개 됩니다.
민 실장의 절규가 이어졌다.
“이대로 방치했다간! 평생 아버지를 아버지라 불러보지도 못하고 흑……!”
* * *
“우리 시우. 오늘은 이모네 집에서 자야 하는데, 엄마 없이도 코오 할 수 있죠?”
“네에!”
시우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너무도 간곡해서 민 실장의 애원을 뿌리치지 못한 다정은 그와 함께 정혁의 병문안을 가기로 했다.
민 실장의 말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 부풀린 건지는 판단이 서질 않았다.
하지만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고 가 주십사 하는데, 무조건 뿌리치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 그의 부탁대로 하지 않았다가 그 사람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건 그거대로 감당이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9시를 넘긴 시각이라 시우는 데리고 갈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솔이에게 부탁하고 대기 중인 차량에 올라탔다.
목적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부리나케 달린 자동차는 눈 깜짝할 새 다정을 그의 레지던스로 데려다 놓았다.
민 실장의 안내를 받아 들어선 공간은 괴리감이 느껴질 만큼 넓었다.
거실 중앙을 차지하는 큼직한 소파 테이블만 눈에 띌 뿐 아기자기한 집기나 생활용품 따윈 눈을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그 사람. 이런 곳에서 지내고 있었구나.
적막할 만큼 횅한 공간은 지나치게 싸늘해서 온기조차 느낄 수가 없었다.
민 실장이 두리번거리는 다정을 어느 방문 앞까지 이끌었다.
“여깁니다.”
살며시 노크한 그가 조심스레 문을 열어 주었다. 별다른 말은 없었다. 그저 들어가 보라는 눈짓이 다였다.
발을 들인 침실 또한 지나치게 넓었다. 가구라 봤자, 역시나 방 중앙에 달랑 놓인 커다란 침대가 전부였다.
어두컴컴한 방을 밝히는 거라곤 구석에 세워진 주황색 조명의 불빛뿐이었지만 침대 위에 모로 돌아누운 형체를 알아보기엔 충분했다.
커다랗던 어깨가 언제보다 측은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잠든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죽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한 번이라도 이 남자의 이런 모습을 보았거나 상상했던 적이 있던가. 단 한 번도 떠올려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왜 그런진 알 수 없지만, 불현듯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차정혁 씨?”
살그머니 다가가 불러 보지만, 그는 죽은 듯이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다정은 약간 충격을 받고 말았다. 그제야 죽을지도 모른다는 민 실장의 말이 조금은 와 닿는 것도 같았다.
순간 놀라 그의 어깨를 조금 흔들어 보았다.
“차정혁 씨. 괜찮아요?”
얼마간이나 반응이 없었을까. 이윽고 건조한 음성이 힘없이 흘러나왔다.
“유……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