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양기탱천
(34/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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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양기탱천
2022.11.27.
정오를 넘긴 일요일의 화창한 오후.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마자 어린이용 전동차가 부드럽게 바퀴를 굴렸다.
“엄마, 빨리! 빨리!”
엄마가 조종하는 전동차 위에서 시우는 엉덩이를 풀썩이며 더 빨리 가자고 보챘다.
“유시우. 똑바로 앉아야지.”
전동차를 멈추고 지적하자 시우가 시트에 엉덩이를 바짝 붙이고 핸들을 꽉 붙잡는다.
안전하게 앉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다정은 다시 전동차를 조작했다.
“자, 다시 출발.”
모처럼 화창한 날씨라 시우와 밖에서 전동차를 타고 놀기로 했다.
차정혁이 선물한 고가의 전동차를 처음 보았을 땐 몹시 부담스러웠다. 너무 비싼 물건이었고 비싼 만큼 고급스러웠다.
그렇다 보니 흠집이라도 날까 맘껏 다루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제아무리 고가의 물건이라도 시간이 지나니까 다 같았다.
그저 내 아들이 타고 노는 장난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휠체어 전용 길로 미끄러진 전동차는 보행자 길로 진입해 안전하게 주행했다.
코너링을 경험한 시우가 돌고개 같은 괴성을 지른다. 그 장면에서 다정은 한숨 같은 실소를 흘렸다.
집에서는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는 게 고작이라 바람을 가르는 질주가 제법 짜릿할 테다.
놀이터를 몇 바퀴 돌고 시간을 보자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시우의 이마에 거미줄처럼 엉겨 붙었다. 안전모를 벗기자 흠뻑 젖은 정수리가 난로처럼 뜨끈뜨끈했다.
이러다가 내 아들이 죽지 싶어 다정은 휴식을 제안했다.
“우리 시우. 빠방 타고 이모네 가서 망고빙수 주세요, 할까?”
“네에!”
다정은 리모컨을 조종해 시우를 앞장세워 놀이터를 벗어났다.
카페 앞에 안전하게 주차를 마친 시우가 와다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모오!”
“우리 시우 와쪄?”
애교스러운 목소리를 내며 솔이가 시우를 반겼다.
카페는 한산했다. 매주 데이트로 바쁘던 솔이가 어쩐 일로 카페만 지키는 게 의아했던 다정이 물었다.
“일요일인데 찰떡 씨하고 데이트는 안 하는 거야?”
“아앙. 우리 찰떡이? 요새 바빠. 자기 사업 준비 중이거든.”
다정의 눈이 동그래졌다.
“사업?”
“응. 독립해서 자기 휘트니스 하나 낼 생각인가 봐. 가게 자리도 좀 알아보고 운동기구 같은 것도 알아보느라 요즘 정신없어.”
“어후, 능력 있다. 그런 거 하나 내려면 많이 들 텐데.”
놀랍다는 듯이 감탄하자 솔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주변에서 이런저런 도움도 받고. 나도 좀 돕고.”
“도와? 네가 무슨 수로?”
“보증 좀 서달라기에 생각해 본다고 했어.”
다정은 찬찬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별다른 말은 보태지 않았지만, 순수하고 순박하게만 보았던 밸런스 파괴자 윤두중을 다시 생각해 보는 중이었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여자친구에게 보증을 서 달라고 한다?
일단 친구로서 윤두중을 흠집 내야 했지만, 순순히 들을 솔이가 아니라 입을 다물기로 했다.
시우가 빙수를 먹는 동안 다정도 도준의 프러포즈에 대해 털어놓았다.
상상도 못 했다며 고백하자 솔이는 코웃음을 쳤다.
“미련한 기집애. 하긴, 내가 너한테 뭘 기대하냐.”
고개를 잘잘 흔드는 솔이를 향해 다정의 눈이 동그래졌다.
“넌 알았다고?”
“당연하지. 마음도 없는데 어떤 남자가 그렇게 잘해 주냐?”
“…….”
“세상에 이유 없는 호의와 친절은 없는 거다 너.”
친구의 훈계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진 다정은 과묵하게 입을 다물고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그때 다정의 눈에 거뭇한 형체가 잡혔다. 카페 내부에 있는 스테인리스 벽면에 비친 남자의 그림자였다.
다정은 돌아보지 않고 가만히 테이블 위로 상체를 기울였다.
“솔이야. 밖에 저 남자…… 안 돼! 돌아보지 마!”
목이 살짝 돌아가려 하기에 재빨리 주의를 주자 솔이의 고개가 딱딱하게 굳었다. 덩달아 한껏 상체를 기울인 솔이가 소곤거렸다.
“왜왜? 뭔데? 아는 사람이야?”
“아까부터 자꾸 시우랑 나 따라다녀.”
목소리를 낮춘 다정이 은밀히 속삭였다.
분명 놀이터에서 시우와 노는 동안에도 내내 눈에 띄었던 남자였다. 느낌이 이상해서 곧장 집으로 가지 않고 카페까지 오게 된 거였다.
카페에 도착하고 한동안 보이지 않기에 괜한 의심인가 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다시 카페 밖을 기웃거리는 장면이 포착되었다.
다정의 눈이 가늘어졌다.
“미행이나 감시의 냄새가 진하게 풍겨.”
“근데 감시나 미행을 하기에 옷이 너무 튀는 거 아니니?”
남자는 새카만 선글라스에 검은 정장을 입고 귀에는 인 이어까지 착용하고 있었다.
무더운 여름, 눈에 띄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차림을 지적하자 다정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닌가?”
그때 호기심이 발동한 솔이가 제안했다.
“잡아서 캐 볼까? 왜 따라다니는지.”
* * *
“그걸 왜 이제야 말해!!”
뜻밖의 소식을 전해 들은 박 회장이 노발대발했다. 금쪽같은 손자가 몸져누워 며칠째 회사에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뭐 해? 김 박사한테 전화 넣고 당장 앞장서지 않고!”
퍼렇게 서슬이 내려앉은 박 회장의 안색에 근심이 뒤섞였다.
녀석이 몸져눕다니!
박 회장으로선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자라 오면서 병치레 한번 해 본 적 없는 아이였다.
땅콩 알레르기가 있긴 했지만, 음식만 가리면 큰 문제는 없었다. 평생 조심하더니 얼마 전에는 무슨 정신이었던지 땅콩을 먹고 결국 탈이 났다.
그로 인한 후유증일까. 그럼 다행인데.
박 회장은 눈 깜짝할 새 정혁이 머무는 레지던스로 달려왔다.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정혁은 죽은 듯이 모로 누워 미동조차 보이지 않고 있었다.
곁으로 다가간 박 회장은 손자의 안색을 살폈다. 노을 지는 뿌연 유리 너머를 응시하는 눈은 초점이 없었고 얼굴은 꺼칠했다.
안쓰러운 표정이 된 박 회장이 축 늘어진 손자의 어깨를 다독이듯 어루만졌다.
“정혁아. 우리 아가. 어디가 어찌 안 좋은 게야?”
걱정스러운 물음에도 손자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어디가 아픈지 할미한테 말을 해야 알지.”
걱정 반 푸념 반으로 박 회장이 이런저런 말을 붙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정혁의 머릿속은 온통 한가지 생각으로 그득했다.
유다정이 권도준과 결혼을 한다고?
그걸 눈 뜨고 볼 수 있을까. 상상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속에서 불길이 치솟는데.
유시우를 빼앗는다고 협박하면 어떨까. 아무 데도 가지 못하게. 그럼 평생 제 곁에 머물 수밖에 없을 텐데.
아니, 아니다. 모든 걸 알았던 순간에도 아들에게 엄마를 떼어 놓을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그래도 다른 남자가 유시우한테 아빠처럼 구는 꼴은 눈 뜨고 볼 자신이 없었다. 그 여자도 마찬가지고.
이처럼 무력한 기분을 느낀 게 얼마 만이더라. 평생 처음이었다.
단 한 번도 원하는 걸 가지지 못한 적이 없었다. 그건 너무도 쉬웠다. 돈이든 힘이든, 무엇으로든 필요한 건 쟁취하고야 말았다.
그런데 지금의 차정혁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무력하고 무능하고 아무 데도 쓸모가 없다.
“……할머니.”
숨을 쉬듯 흘러나오는 목소리엔 힘이 실려 있지 않았다.
“오냐. 우리 아가.”
“……나, 아파.”
어휴. 박 회장은 속이 타들어 갔다.
“그러니까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말을 해야 할미가 알지.”
“몰라. 그냥 아파…….”
잘 모르겠다. 어디가 아픈지.
일평생 그 어떤 외부적 요인도 그의 삶에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관심도 없었고 자기 자신 말고는 그 누군가를 열렬히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다 제 것이어야 하는데, 마땅히 제 뜻대로 움직여야만 하는데, 유다정이 처음이다. 제 맘대로 되지 않는 건.
모든 게 무기력했다. 그러면서 열병이라도 앓는 것처럼 가슴이 지글지글 끓었다.
다 타고 재가 되어 버린 것처럼 짙은 상실과 공허함만 밀려들었다.
박 회장은 무거운 탄식을 쏟았다.
왜 이렇게 기력이 없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130년 된 삼을 먹인 보람도 없이.
애를 태우던 박 회장은 거실로 나와 엄한 목소리를 냈다.
“김 박사 아직이냐!”
머지않아 헐레벌떡 달려온 김 박사가 정혁을 진찰했다. 체온을 측정하고 조심스레 가슴에 청진기를 대보더니, 그의 표정이 애매해졌다.
이윽고 진찰 도구들을 챙겨 방을 나서는 김 박사의 뒤를 박 회장이 분주히 따라나섰다.
“김 박사. 어떤가?”
“저, 그게…… 신체적 이상 징후는 없습니다, 회장님.”
“아무 이상이 없는데 저 애가 왜 저래?”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박 회장의 미간이 잔뜩 구겨졌다.
“혹시 심리적 문제가 아닐지요. 최근 상심하거나 큰 충격을 받으신 일이라도…….”
박 회장은 얼굴을 찌푸린 채 곰곰 생각했다.
특별히 보고 받은 일은 없었다. 제 할 일은 똑 부러지게 해냈기에 회사도 무리 없이 굴러갔다. 불과 며칠 전 신사업 기념행사도 무사히 치렀다고 했다.
“아니네. 내 알기로 그런 일 없네.”
박 회장의 말에 김 박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으로선 특별한 이상은 없지만, 정 염려되신다면 병원에 나오셔서 종합적인 검진을 한번 받아 보시죠.”
결국, 김 박사가 아무 진단도 내리지 못하고 돌아가자 박 회장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당장 송 원장 불러라!”
양의학이 듣지 않으면 한의학이다.
부름을 받고 부리나케 달려온 송 원장은 땀을 닦을 겨를도 없이 정혁의 맥부터 짚었다.
지그시 눈을 감고 신중히 맥을 살피던 송 원장이 미심쩍은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혀 좀 보겠습니다.”
그의 요청에 정혁이 무기력한 얼굴로 혀를 길게 빼 보였다. 요리조리 살피던 송 원장이 이번엔 눈꺼풀을 쥐어 크게 벌려 안구를 살폈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송 원장이 박 회장을 밖으로 불러냈다.
“어떤가, 송 원장. 무슨 큰 병인가?”
“그게…… 체내에 양기가 지나치게 쌓여 있습니다.”
“양기가 쌓이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최근에 보신용으로 챙겨 드신 거라도 있습니까?”
“실은 귀한 삼이 들어와 내 몰래 먹였네만.”
그 말을 들은 송 원장이 어쩐지, 하고 탄식하며 손바닥에 주먹을 딱 내리쳤다.
“내 손자 체질에 삼이 받는다지 않았어. 근데 뭐 문제라도 되냔 말일세.”
“삼을 복용해서 문제가 된 건 아니지요. 그런데 병을 키운 꼴이 됐습니다.”
송 원장이 낭패라는 듯 끌끌 혀를 찼다.
“이 사람아! 좀 알아듣게 말하래도. 그래서 어디가 어떻다는 게야!”
“그러니까 진맥해 본 결과 아무래도 심중에 병이 나신 것 같습니다.”
“심중에 병? 마음의 병이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양방에서는 우울증이라고도 합니다만, 흔히들 상사병이라고 하지요.”
박 회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심리적 문제가 아니냐는 김 박사의 의심과 일맥상통하는 진단에 슬슬 가닥이 잡히기 시작했다.
“아니 요즘 세상에 무슨. 그럼 내 손자가 저를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를 짝사랑한단 말인가?”
“그건 모르지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물건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한숨을 쉰 송 원장이 뒷짐을 지고 조곤조곤 말을 덧붙였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어떤 대상을 사모하면 사람의 몸속에 양의 기운이 생겨납니다. 사모하는 대상을 만나거나 생각하면 기분이 좋고 마음이 즐거워서 웃을 일도 많지요. 내적이든 외적이든 그러한 행위를 해야 체내에 쌓인 기운도 배출이 되고 기가 순조롭게 흐르는 법인데…….”
박 회장의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그런데 반대로 사모하는 대상을 그리워하며 애를 태우게 되면 기운을 배출하지 못하고 몸에 쌓이는 겁니다. 그런 상태에서 일거에 양기를 북돋아 주는 삼까지 복용했으니. 에이, 불난 집에 기름을 부은 격이지요.”
“이게 당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있나.”
박 회장이 인상을 콱 찌푸렸다.
“간단히 말해 양기탱천인 지경에 이른 겁니다.”
※양기탱천(陽氣撑天) : 양기가 하늘을 찌를 듯이 솟구쳐 오름.
“지금 상태론 툭 건드리기만 해도 터집니다.”
“터지다니. 뭐가?”
“글쎄요. 뭐가 됐든 터지면 끝장입니다.”
아연실색한 박 회장의 질문이 다급해졌다.
“하면 끝내 양기를 해소하지 못하면 어찌 되는가?”
“체질마다 다르겠으나 보통은 오장육부가 양기에 타들어 가 시름시름 앓다가……. 에헤헴, 흠!”
매섭게 날아드는 박 회장의 서늘한 눈빛에 치여 송 원장은 방정맞게 놀리던 입을 꾹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