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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갖고 싶어 (33/114)


33화 갖고 싶어
2022.11.24.


위험한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던 남자의 어깨가 거칠게 붙잡혔다.


“차정혁!!”

그의 이름 석 자를 부르짖는 도준의 고함이 쩌렁 울렸다.

뻐억! 무방비하게 돌려세워진 정혁의 얼굴로 주먹이 날아든 건 한순간이었다.

일격에 나가떨어진 정혁은 잠시간 혼미해 몸을 가누지 못했다.

거칠게 머리를 털어 아찔한 시야를 떨쳐내고 아릿한 점막을 혀로 쓸었다. 비릿한 피 맛이 감돌았다.

별안간 웃음이 샌다. 가녀린 여자를 상대로 개차반처럼 굴던 제 꼬락서니가 우습기 짝이 없었다.


“차정혁 씨!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호통처럼 외치는 도준의 손아귀 안에서 다정의 하얀 구두가 우그러졌다. 다정을 찾아 행사장 밖으로 나왔을 때 발견한 구두였다.

자신이 직접 골라 신긴 구두를 못 알아볼 리 없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지 싶어 순간 눈앞이 아뜩했었다.

다짜고짜 주먹부터 나간 건 본능이었다. 과거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든 상관없었다.

결과적으로 그가 다정을 난폭하게 몰아세우는 장면을 목격한 순간 도준은 눈앞의 남자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언제 주먹질을 했냐는 듯 도준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아?”

“괘, 괜찮아요, 선배.”

방금 남자의 뺨을 후려치고 언성을 높였던 흥분감과 도준의 등장으로 중첩된 당혹감은 여전했지만, 다정은 애써 목소리를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안심한 도준은 그녀의 손을 꼭 움켜쥐고 돌아섰다. 그리고 마치 위험한 것과 대면하기라도 한 것처럼 정혁과 대치했다.


“차정혁 씨. 다정이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했던 겁니까?”

“넌 빠지지?”

아릿한 턱을 움켜쥔 정혁이 불만스럽게 받았다.


“빠지고 싶어도 그럴 수 있는 사이가 아닙니다. 다정이 나랑 결혼할 여잡니다.”

“뭐……?”

정혁의 눈가가 눈에 띄게 굳었다. 그럴 리 없다는 듯 일그러진 눈이 다정의 얼굴로 날아가 꽂혔다.

어째선지 그를 길게 마주하지 못한 채 다정은 시선을 떨구고 말했다.

위협적으로 굴던 순간조차 애원처럼 절박하게 매달리던 그의 두 눈을 똑바로 마주 볼 수 없었다.


“남의 여자한테 이러고 다니는 거 그쪽 약혼녀도 압니까?”

도준의 지적에 정혁의 인상이 차갑게 굳었다.


“내 약혼녀한테 껄떡이지 말고 본인 약혼녀나 챙기시죠. 차정혁 씨.”

정중한 경고로 마무리를 지은 도준은 다정의 손을 잡고 돌아섰다. 쿵! 두 사람이 사라진 공간에 고요한 정적이 내깔렸다.

정혁은 차가운 숨을 불어냈다. 패색으로 일그러진 두 눈에 비참한 심경이 고스란히 차올랐다.

대참패였다.

* * *

행사장을 벗어났을 땐 이미 어둠이 내려앉은 뒤였다.

도준의 재킷을 어깨에 두른 다정은 부축을 받아 차에 올랐다. 반대편으로 돌아온 도준도 운전석에 올랐지만, 시동은 곧장 걸리지 않았다.

불편한 침묵을 깨고 도준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다정아. 아까 내 말은 신경 쓰지 마. 그 사람이 너무 막무가내라.”

결혼할 여자.

고작 다섯 글자였다. 그 짧은 말이 도준에게는 세상 어떤 말보다 어렵게 느껴졌다.

충동적으로 지른 한 마디지만, 간절했다. 이런 상황 말고, 진정으로 누군가에게 그녀를 그렇게 소개할 수 있는 날이 오긴 할까.

불투명한 기대심보다도 지금은 그 말이 다정에게 부담이 되었을까 그게 더 걱정이었다.


“알아요, 선배. 신경 쓰지 않으니까 선배도 신경 쓰지 마세요.”

겨우 제 안색을 되돌린 다정의 입가에 엷은 웃음이 번졌다. 도준은 머쓱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이윽고 시동이 걸리고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달리는 차 창을 주시하던 다정은 소리 없이 한숨을 쉬었다.

오늘에야 알 것 같았다.

화장실에서 여자들이 나누던 대화를 엿들었던 순간 깨달았다.

그가 자신과는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라는 걸.

그랬을 거다. 5년 전부터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평범해 보이지는 않았으니까.

그에겐 자신이 줄곧 살아오고 살아가야 할 세상이 있을 터다. 그런 남자가 그녀와 시우의 세상에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무모한 시도였을지도 모른다. 그 순간부터 모든 게 어그러지고 있으니까.

우연히 재회하고 서로에게 힘든 강요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는 현실이 다정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짓눌렀다.

악연……이겠지.

이대로 그와 계속 접점을 만들었다간 시우와 그녀의 세상 역시 무너져 버릴지 몰랐다.

어쩌면 처음부터 시작되지 말았어야 할 인연이었을 지도.


 

* * *

무기력하게 내리깐 눈이 휴대폰 화면을 멍하니 응시했다.


「엄ㅁㅏ가호랑ㅇㅣ아저ㅆㅣ 조은아저씨래ㅆㅓ요.」

정혁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오타가 난무하더니 갈수록 실력이 향상되는 게 눈에 보였다.

고작 다섯 살 꼬마에게 길지 않은 메시지를 찍어 넣는 일은 제법 고된 일일 거다. 그런데도 이틀에 한 번꼴로 메시지를 보내오는 게 기특했다.

유시우가 메시지를 보내오는 시간은 주로 밤 9시 전후였다. 잠들기 전 엄마 몰래 보내는 것 같았다.


「호랑ㅇㅣㅣ보러 얹ㅔ가요. 차ㅁ 엄마ㄱ ㅏ 오랑이아ㅈㅓ씨 타라가면 안대ㄴ대ㅆㅓ요.」

놀이공원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이다음엔 호랑이를 보러 가자고 약속했는데.

어쩌면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보고 싶다 유시우.

문자 메시지 창에 떠오른 글자들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보물처럼 차곡차곡 쌓아온 것들을 수십, 수백 번도 더 반복해서 보고 또 보았다.

물끄러미 휴대폰 액정을 응시하던 정혁은 충동적으로 사무실을 벗어났다. 막연한 그리움에 두 다리가 멋대로 움직였다.

기운 없는 몸을 차에 실었다.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유치원.”

목적지를 말하고 뿌연 창밖을 응시하는 눈길이 공허했다.

행사장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고 벌써 수일이 흘렀지만, 유다정에게선 전화 한 통 걸려 오지 않았다.

원래 자기 손으로 전화를 하는 여자가 아니었으니, 그러려니 했다. 그래서 정혁도 하지 않았다.

전화를 건들 받으리란 보장도 없지만, 무슨 말로 첫마디를 떼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런 방식으로 패배를 인정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구차하게 스스로 자존심을 깎아내리는 짓 따위를 할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유다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혼할 여자라는 권도준의 말을 부인하지 않았다.

거짓말쟁이. 자기 인생에 결혼은 없다더니. 유시우만 있으면 된다더니. 다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유다정도 여잔데, 여자를 믿어선 안 된다는 사실을 오래전 이미 터득했음에도 또다시 교활한 여자의 거짓말에 놀아나고 말았다.

안 볼 거다. 그런 여자 따위 두 번 다시 안 볼 거다.

하지만 유시우는 다르다. 보고 싶으면 볼 거고 만나고 싶으면 만날 거다. 유다정은 아니라도, 유시우는 차정혁의 것이 맞으니까.

지금껏 터무니없는 억지들을 부려왔단 건 스스로가 가장 잘 알았다. 그러나 유시우가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 하나만큼은 억지가 아니었다.

그의 아이고 그의 일부니까, 그의 것이 맞았다.

그건 유다정조차 부정할 수 없으며, 세상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불변의 진실이니까.

* * *

유치원에 도착한 시각은 점심시간을 코앞에 둔 시점이었다.

그리움에 사무친 눈길이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유리창 너머를 응시했다.

새끼 짐승들은 수업이 한창이었다. 친절하고 상냥한 선생님의 목소리에 아이들이 손을 들며 짹짹거린다. 그 안에는 유시우도 있었다.

무감하게 응시하던 정혁의 눈에 금세 흐뭇한 웃음이 어렸다. 작은 입을 벙긋벙긋 벌리면서 참 귀엽다.

점심시간이 되자 배식 직원들이 식판을 실은 카트를 교실로 밀어 넣었다.

왁자지껄한 장면들을 묵묵히 눈에 담으며 정혁은 복도 한편을 우두커니 지켰다.

유시우가 어린이용 젓가락을 들고 밥을 먹는다. 오물오물 잘도 먹는다. 편식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식사가 끝나자 스스로 식판을 들고 일어난다. 배식 직원에게 가져다주고 공손히 배꼽 인사까지 한다.

잠시 뒤 배식 직원이 뭐라고 말하자 아이들이 웃으며 질서정연하게 줄을 서기 시작했다.

후식으로 나눠 준 아이스크림 바를 하나씩 받아든 아이들이 자리로 돌아와 비닐 껍질을 벗겼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관찰하던 정혁의 고개가 살짝 기울었다.

유시우가 난감한 얼굴을 하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게 보였다. 작은 손을 꼼지락거리지만, 비닐 포장이 벗겨지지 않아 곤란한 눈치였다.

어느 순간 앙증맞은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이 위로 쑥 올라갔다. 제 아이스크림을 낚아챈 손을 쫓아 시우가 고개를 젖혔다.

키 큰 어른을 향해 커다란 눈을 깜빡이던 시우가 활짝 웃었다.


“어? 아저씨다!”

영차 일어난 시우가 반갑게 배꼽 인사를 했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유시우도 안녕.”

피식 웃으며 정혁은 쓸모를 모를 만큼 작은 어린이용 의자에 쪼그려 앉았다. 비닐 포장을 벗겨 시우에게 내밀자 두 손으로 공손히 받는다.


“어…… 고맙습니다!”

작은 입이 초콜릿 옷을 입은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쪽쪽 빨아 먹기 시작했다.

그 얼굴로 유심히 따라붙은 눈동자가 열심히 먹느라 씰룩이는 뺨의 움직임을 관찰하듯 좇았다.

어느새 입가에 초콜릿이 잔뜩 묻었다. 정혁은 저도 모르게 엄지를 뻗어 시우의 입가를 닦아 주었다.

눈이 마주쳐서 웃었더니 초콜릿 범벅인 유시우도 배시시 웃는다.

정혁은 가만히 몸을 기울여 시우와의 거리를 좁혔다. 조심스레 머리카락에 코를 대보았다.

아이스크림의 단내와 섞인 아기 냄새가 폴폴 풍겼다. 그게 귀여워서 또 웃음이 났다.

찹찹대며 맛있게 먹는 걸 가만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맛있어?”

고개를 끄덕인 시우가 또랑또랑한 눈으로 정혁을 빤히 보았다.

뭔가 고민이 있는 것처럼 아이스크림을 한 번 보고 다시 그를 본다. 그리고는 그에게 먹던 아이스크림을 불쑥 내민다.


“어…… 아저씨 한 입 줄게요.”

인심 쓴다는 듯 말하며 작은 혀가 입가에 묻은 초코를 날름 핥았다. 먹고 싶어서 쳐다본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정혁은 입가를 늘여 웃었다. 그리고 기꺼이 제 것을 나눠주는 시우의 아이스크림을 조금 베어 물었다.


 


“맛있네.”

웃어 주자 유시우도 뿌듯하게 웃는다.

누가 쪽쪽 빨던 걸 먹는다는 건 차정혁 인생에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유시우가 빨아 먹던 걸 먹는데 아무렇지도 않았다.

차가운 크림이 입안으로 부드럽게 녹아 들어갔다. 혀 위를 굴러다니는 껄끄러운 알맹이도 느껴졌다.

크게 심호흡한 정혁은 시우의 머리를 쓰다듬고 그만 일어났다. 들어올 때와 달리 교실을 나서는 그의 발걸음이 급했다.


“아저씨. 안녕히 가세요!”

등 뒤에서 새처럼 지저귀는 예쁜 목소리가 울렸다.

돌아보지 않았다. 이후에 벌어질 일을 유시우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혀가 아릿하고 기도에 서서히 감각이 마비되어 갔다. 그럴수록 그의 걸음이 더 빨라졌다.

복도를 바삐 지나 현관을 벗어난 순간 쨍하게 들이치는 햇살에 현기증이 밀려들었다.

순식간에 눈앞이 뿌옇고 급격한 호흡곤란이 찾아왔다. 휘청거리던 정혁의 무릎이 맥없이 풀썩 꺾였다.

그 장면을 목격하고 달려온 민 실장의 놀란 얼굴을 마지막으로 정혁은 의식을 놓았다.

* * *

정혁이 다시 눈을 뜬 곳은 병실이었다.

눈을 뜨고 처음 본 얼굴은 박 회장이었다. 근엄하게 굳은 얼굴에 근심과 걱정이 가득했다.

“생전 그런 일이 없더니 어쩌자고 아무거나 먹어. 조심성 없이.”

안도와 염려가 묻어난 잔소리를 한 귀로 듣고 흘리며 정혁은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머리가 어질하고 의식이 몽롱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이스크림에 땅콩이 들어가 있다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유시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땅콩이 들어 있는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다행이다. 그것만은 닮지 않아서.

민 실장의 말에 의하면 아이들은 저 먹는 걸 남에게 쉽게 주지 않는다고 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준다고 했다.

그런데 달라고도 안 했는데 기꺼이 주었다. 제 엄마를 닮아서 마음씨가 고운 거겠지.

유시우에게 선택받았다는 사실이 좋았다. 그래서 먹었다. 친절하게 제 것을 주는데 거절할 수가 없어서 먹었다.

땅콩이 아니라 독을 주었더라도 기쁘게 삼켰을 거다.

정혁은 힘없이 몸을 웅크렸다. 갑자기 시큰해진 눈가로 열기가 차올랐다.


“어디가 계속 안 좋은 게야?”

박 회장의 목소리에 걱정이 가득했다. 평소답지 않게 가라앉은 손자의 모습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할머니…….”

“오냐.”

“갖고 싶어…….”

박 회장의 눈이 의아하게 커졌다. 어린애도 아니고 장난감을 갖고 싶다는 투라 조금 우습기도 했다.


“갖고 싶어? 뭐가?”

대답은 곧장 돌아오지 않았다. 얼마나 흘렀을까. 갈라져 흘러나온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유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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