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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이기적이고 못된 남자 (32/114)


32화 이기적이고 못된 남자
2022.11.20.


차내는 고요했다. 냉랭함이나 불편함보다는 쑥스러움 같은 민망하고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화사한 연분홍빛의 장미 꽃다발과 다이아몬드 반지를 떠올리며 다정은 복잡한 심경을 감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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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 전 널 처음 봤을 때부터 줄곧 이런 날을 상상했어.’

그건 도준의 프러포즈였다. 상상도 못 한 터라 설렌다거나 기쁜 감정은 느낄 수 없었다. 그저 당혹스러웠다.

선배가 그렇게 오랫동안 날…….

정녕 알지 못했다. 몹시 둔하거나 눈치가 꽝이거나, 아예 이성으로 생각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파트 단지에 도착해 안전띠를 푼 다정은 무릎 위에 놓인 꽃다발과 반지 케이스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난처해지고 말았다.

어떻게든 결론을 말해야 했지만, 그 말을 하는 건 결코 쉽지 않을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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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려다줘서 고마워요, 선배.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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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입을 떼기도 전에 도준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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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장 답을 달라는 거 아니야. 생각해. 그리고 천천히 고민해서 대답해 줘. 1년이 걸리든 10년이 걸리든 기다릴 테니까.”

이 상황이 갑작스럽다는 건 도준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더는 미룰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이번만큼은 절대 양보하지 않을 테니까.

그의 입가에 머무는 잔잔한 미소를 보며 다정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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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나한텐 시우가 있어요. 선배가 뭐가 부족해서 나처럼…….”

다정의 손등 위로 포개진 따스한 손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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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우. 내 아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적 한 번도 없어. 완벽할 순 없지만 좋은 아빠가 되도록 노력할게.”

다정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그의 따스한 눈길을 마주하자 미안한 마음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한없이 고마운 사람. 그런 사람이 갑자기 이성으로 다가오려 하고 있었다.

그럴수록 현실이 더 또렷하게 자각되었다. 다정은 자신을 시험대에 세우려는 그가 원망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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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지 말아요. 나 결혼 생각 없어요. 시우 하나 잘 키우면 그걸로 족해요. 선배 마음은 고맙지만, 난 이런 일로 우리 관계 불편해지고 싶지 않아요.”

단호하게 거절한 다정은 꽃다발과 반지 케이스를 도준의 품으로 떠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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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일은 없었던 거로 할게요. 선배도 다시 생각해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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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곁에 두고 방패막이로라도 이용해.”

차에서 내리려던 다정의 눈길이 다시 도준의 얼굴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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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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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정혁. 그 사람한테 너랑 시우 지키는 도구로 이용해. 그리고 다시 천천히 생각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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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MJ호텔 대연회장. 명한유통의 신사업 추진기념 행사가 슬슬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행사장 입구를 서성이던 정혁은 구겨진 미간을 꾹 눌렀다. 약속 시각에서 5분이나 지나 있었지만, 현아는 코빼기도 비칠 기미가 없었다.

평소라면 그러려니 할 텐데, 아침부터 컨디션이 영 좋지 못했다.

별다른 이상을 느끼는 건 아닌데, 평소와 달리 감각에 날이 서고 몸에 열이 올랐다. 그렇다 보니 신경도 한껏 예민하게 곤두섰다.

크게 심호흡한 정혁은 지그시 눈을 감고 심신을 다스렸다. 그때 어디선가 다급한 외침이 울렸다.

눈길을 돌리자 새빨간 무언가가 손을 흔들며 달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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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오빠아!”

고상한 장소에서 눈길을 끄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단전에서부터 끌어올린 한숨이 정혁의 입술을 비집고 흘렀다.


“드레스코드 전달 안 했나?”

낮게 중얼거리는 말에 곁에 선 민 실장이 난처한 듯 눈알을 굴렸다.


“분명 엘레강스라고 전달했습니다.”

“저게 어딜 봐서 엘레강스야. 플라멩코라도 출 기세잖아.”

붉은색 드레스는 요란하다 못해 등과 가슴이 훅 파여 몹시 선정적이었다. 세상없을 화려함으로 치장한 현아가 바삐 달려와 숨을 헐떡였다.


“오빠, 오래 기다렸지? 글쎄 내가 찜해 놓은 구두를 딴 년한테 신겼다잖아. 짜증 나서 다 뒤집어 놓느라…….”

“늦었어. 들어가.”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정혁은 발끝을 돌려세웠다. 그때 그의 눈에 생소한 모습의 남녀가 스쳤다.


“지금 웃기려고 일부러 오리 흉내 내는 거지?”

권도준의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웃음이 가득했다. 그의 팔에 매달린 여자는 정말 오리처럼 뒤뚱거리며 걷고 있었다.


“선배. 구두가 너무 높아요. 넘어질 것 같단 말이에요.”

“그럼 업고 갈까?”

“선배도 참.”

놀리는 말에 유다정이 작고 수줍게 웃는다. 그 소리가 귓전에서 듣는 것처럼 또렷해서 그의 예민해진 신경을 자극했다.

나란히 팔짱을 낀 남녀의 발길이 멈춰 선 곳은 행사장 입구였다.

정혁과 마주친 다정의 눈이 동그랗게 굳다가 재빨리 현아에게 옮겨갔다.


“안녕하세요, 원장님. 여기서 다 뵙네요.”

“그러게요.”

마지못해 대꾸하는 현아의 태도가 퉁명했다. 유치원의 치부인 다정이 자신과 같은 행사에 참석한 게 못마땅한 눈치였다.


“차정혁 전무님.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어서 도준이 단정히 머리를 숙이지만, 대꾸는커녕 정혁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의 무감한 눈길은 오직 백조처럼 꾸미고 나타난 오리 같은 여자에게 향해 있었다.


 
유다정은 제법 봐 줄 만했다.

자그마한 몸 선을 타고 흐르는 머메이드 라인의 드레스와 머리를 장식한 순백의 깃털이 본래의 단아하면서도 청순한 느낌을 부각시켰다.

예뻤다. 그 사실이 신경을 긁는다. 하물며 다른 남자의 팔짱을 낀 채 수줍게 물들인 양 볼의 홍조마저 그랬다.


“이번에 우리 백화점 신축 따냈다면서요?”

현아의 새침한 목소리가 불쑥 공간을 울렸다. 시선을 튕겨 낼 만큼 화려한 색감이 순백에 가까운 다정과는 완벽한 대조를 이루었다.

정혁의 팔짱을 낀 현아가 과시하듯 그에게 몸을 더 밀착했다.


“우리 오빠가 명한 유통 전무 달고 처음 추진하는 사업이니까 잘들 하세요.”

부탁인지 명령인지 모를 당부에 도준은 작위적으로 웃어 보일 뿐이었다. 이내 부드럽게 표정을 바꾼 그의 눈길이 다정에게 향했다.


“들어갈까.”

“네, 선배.”

정답게 팔짱을 낀 남녀가 스쳐 간다. 유유히. 웃음을 나누면서.

사납게 굳은 정혁의 눈이 허공을 뚫을 듯이 노려보았다.

* * *

고상한 클래식 선율이 흐르는 공간은 화려한 사람들로 넘쳐났다.

다정은 커다란 돌고래 얼음 조각 곁을 서성이며 뻘쭘하니 샴페인만 홀짝거렸다.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이 낯설게 느껴지는 건 당연했다.

도준이 이것저것 신경 써 주고 있지만, 그도 한가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이게 누군가. 권 총장 차남 아닌가?”

“안녕하십니까. 의원님.”

부모님의 인맥에 치여 도준은 말을 붙여 오는 이들과 인사를 나누느라 몹시 분주했다.

한 무리를 보내고 한숨을 몰아쉴 때 웬 여자가 다시 인사를 건네 왔다.


“안녕하세요, 권도준 씨.”

반갑게 미소 짓는 여자를 보며 도준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얼마 전 깜짝 선 자리에서 마주쳤던 한강병원 이사장의 막내딸이었다.


“이수경 씨를 이런 데서 만날 줄은 몰랐습니다.”

“박 회장님 주치의는 외삼촌인데 왜 제가 여기 있는지 모르겠어요. 절 여기까지 내보내신 부모님 의중이야 뻔하죠. 공개 선 자리에 내보내는 거 아니겠어요?”

“네. 정말 귀찮은 일이죠.”

공감한다는 듯 도준이 찌푸려 웃었다.

그 사이 조용히 행사장을 빠져나온 다정은 외부 대기석으로 향했다.

하이힐도 익숙지 않은데, 스탠딩 파티를 견디려니 뒤꿈치가 따끔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대기석에 앉아 좌우를 두리번거리다가 슬쩍 구두를 벗고 뒤꿈치를 살폈다. 예상대로 살갗이 다 벗겨져 있었다.

고민하던 다정은 궁여지책으로 호텔 직원에게 도움을 청했다. 일회용 반창고를 부탁했더니, 친절하게도 금세 구해다 주었다.

다정은 절뚝거리며 화장실로 향했다. 비어 있는 칸을 차지하고 구두를 벗어 던지자 겨우 살 것 같았다.

느릿느릿 상처에 반창고를 붙이고 나서도 다정은 곧장 나가지 않고 시간을 지체했다. 뒤꿈치가 까졌다는 핑계로 약간의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다.

화장실에 숨어서 쉬어야 하다니, 제 신세가 처량하기 짝이 없었다.

그때 타일 위를 거칠게 내딛는 구두 굽 소리가 귀에 잡혔다.


“아악! 오현아 미친 거 아니야?!”

앙칼지게 내지르는 고함에 다정의 눈이 반짝 뜨였다. 오현아? 뒤룩 눈을 굴리는데 또 다른 여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러게 걔 성질 알면서 왜 건드려?”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지는 타조처럼 입고 와서 누구더러 싸 보인대? 그래도 그렇지. 사람들 다 보는 데서 샴페인을 끼얹어?! 몰상식하긴!”

“샴페인인 걸 다행으로 알아. 걔 성질이면 똥물을 끼얹고도 남았어.”

다정은 숨을 죽인 채 귀를 쫑긋 세웠다. 오현아 원장과 뭔가 실랑이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짜증 나!! 첩 딸 주제에 뭘 믿고 그렇게 나대는 거야?!”

“명한그룹 박 회장의 금쪽같은 손자를 꿰찼는데, 걔 눈에 뵈는 게 있겠어?”

사방이 꽉 막힌 화장실 칸에 갇혀 다정은 멍한 눈을 끔뻑였다.

명한그룹 박 회장의 손자.

박종순 회장이야 대한민국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기업인이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지만 설마 그 남자가 그 정도일 줄은.

다정의 가슴 안으로 왠지 모를 차가운 바람 한 줄기가 흘러들었다.

* * *

화장실을 나선 다정은 천천히 걸음을 디뎠다. 통증은 여전했지만, 한결 나았다.

행사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입구 쪽으로 향할 때였다. 별안간 낚싯바늘에 꿴 양 몸이 크게 반동했다.

다리가 휘청거리고 팔꿈치를 붙잡은 손길에 시야가 반전되었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남자는 몹시도 화가 난 얼굴이었다.

다정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차정혁 씨……?”

“따라와.”

짧고 명료하게 뱉은 남자의 무자비한 손이 다정을 어딘가로 잡아끌었다.


“저기! 이봐요! 대체……!”

넘어지지 않으려고 총총 뛰는 발에서 벗겨진 구두가 저만치로 멀어지고 있었다.

쾅! 삼키듯이 다정을 밀어 넣은 비상계단의 문이 거친 소리를 울리며 닫혔다.

어안이 벙벙한 다정은 잠시간 넋이 나간 채로 맨 발가락만 맞대고 꼼지락거렸다.

허리춤에 손을 얹고 돌아선 남자의 등에는 화가 잔뜩 묻어 있었다. 하지만 화를 낼 사람은 저 남자가 아니었다.


“차정혁 씨! 이게 무슨 짓이에요?”

“무슨 짓?”

신경질적으로 몸을 비튼 그가 성큼 걸음을 밀고 들어오더니 다정을 벽으로 몰아세웠다. 사나운 눈빛을 쏘아대는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넌 무슨 짓인데?”

“내, 내가 뭘요?”

따져 묻자 딱딱하게 굳은 그의 눈이 아래로 움직였다.

목덜미와 쇄골을 느리게 훑던 눈길이 트인 치맛자락으로 언뜻 비치는 맨다리까지 이어졌다.

유다정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본 순간 정혁은 알 수 없는 열기에 휩싸였다.

이런 모습으로 다른 남자의 팔짱을 끼고 그 남자를 향해 수줍게 웃었을 땐 용암이 솟구치듯 호흡이 가쁘고 열이 피어오르기도 했다.

지금도 그랬다. 눈앞에 있는 여자의 모습에 목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불만스럽고 또 다른 의미로 견디기 힘든 모습을 훑고 올라온 눈길이 다시 다정의 얼굴로 꽂혔다.


“내 앞에서 이런 꼴을 하고 권도준이랑 붙어먹어?”

상스럽기 그지없는 표현에 다정은 황당한 표정이 되었다.


“부, 붙어먹다뇨! 대체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워 먹은 거예요? 그리고 이 꼴이 뭐 어때서요? 오현아 원장은 홀딱 벗고 왔던데, 차정혁 씨는 그쪽이나 신경 쓰세요!”

“남들이야 뭘 입고 다니든 알 바 아니야.”

“오현아 원장이 어떻게 남이에요? 차정혁 씨랑 결혼할 사람이잖아요!”

정확한 지적이었다.

그와 결혼할 여자는 오현아다. 유다정과 재회하기 전부터 그렇게 정해진 일이었다.

박 회장이 결정했고, 특별한 문제가 없다면 그 결정에 따르면 그뿐이었다. 누구라도 상관없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잘 모르겠다. 정말 누구라도 상관없었을까.

알고 있다. 이 여자가 뭘 입든 누구와 있든, 자신에게 간섭할 권한이 없다는 걸.

아는데, 머리로는 아주 잘 아는데,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불같이 치솟는 이 정체 모를 감정들을 통제하고 싶지 않았다. 차가운 이성이 다 불살라져도 좋을 만큼.

잠시 빗겨났던 정혁의 시선이 똑바로 날아들었다.


“그게 뭐. 내가 누구랑 결혼하든 그게 권도준하고 네가 붙어먹어도 되는 이유는 아니야.”

“…….”

다정은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차마 모욕적이고 자존심이 상해 더 들어 줄 수가 없었다.

이 이기적이고 못된 남자를 두고 봐 줄 인내 역시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심장이 격렬하게 뛰는 게 느껴졌다. 한계에 부딪힌 다정의 손이 결국 허공을 갈랐다.

짜악! 날카로운 마찰음과 동시에 고개가 꺾인 남자의 입술을 비집고 하, 하는 실소가 흘렀다.


“정신 차려요, 차정혁 씨! 나한테 이런 말 할 입장인지 생각 좀 해 봐요!”

따끔한 일침에도 아랑곳없이 그의 눈길이 소슬하게 부딪쳐왔다.


“내 입장이 어떻든 유다정이랑 유시우는 내 거야.”

냉정한 목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커다란 손이 다정의 목뒤를 낚아채듯 움켜쥐었다.


“유다정.”

쏟아지는 시선의 압박에 숨이 막혔다.


“나만 좋아하라고.”

코앞에서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던 눈이 절박하게 일그러졌다.


“다른 새끼 보지 말고, 나만 보고 나만 생각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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