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결혼해 줄래 (31/114)


31화 결혼해 줄래
2022.11.17.


이른 오후의 카페는 한가했다.

쪼르르륵. 오렌지 주스를 밑바닥까지 빨아 마시고 빨대를 뱉은 남식의 눈이 혹한 듯 테이블 위에 놓인 흰 봉투로 향했다.


“말씀하신 이천만 원입니다.”

지극히 사무적인 투지만 도준의 목소리가 무거웠다. 남식은 좋은 걸 감추지 못하고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도르르 눈알을 굴리는가 싶던 남식이 잽싸게 봉투로 손을 뻗지만, 도준이 한발 빨랐다.

앞서 봉투를 낚아챈 도준이 말했다.


“준비하란 서류는요?”

“아, 그렇지.”

남식이 주머니에서 구깃구깃한 서류와 인감 따위를 테이블 위에 늘어놓았다. 그런 남식에게 눈을 떼지 않은 채 도준이 말했다.


“변호사님 확인해 주시죠.”

그제야 남식의 눈이 도준과 나란히 앉은 남자에게 향했다. 누굴 데려왔나 했더니, 가슴에 변호사 브로치가 눈에 들어왔다.

남식은 떫은 표정을 지었다.


“귀찮게 이렇게까지 해야겠수?”

“뭐든 확실한 게 좋으니까요. 싫으시면 그냥 가셔도 좋습니다.”

“아이참. 알았어, 알았다고.”

절차상 필요한 서류를 꼼꼼히 확인한 변호사가 남식에게 한 장의 서류를 내밀었다.


“이건 의뢰인 쪽에서 준비한 협의서입니다. 확인하시고 인감 찍으시면 공증절차에 들어갈 겁니다.”

남식은 협의서 안의 내용을 대충 눈으로 훑었다.

복잡할 건 없었다. 유다정과 유다정의 자녀 유시우 앞에 두 번 다시 접근하지 않겠다는 각서였다.

남식은 선선히 인감을 찍었다. 그제야 도준의 손에 쥔 흰 봉투가 내밀어졌다.

퍼뜩 봉투를 낚아채 내용물을 확인한 남식의 입가가 만족스럽게 늘어졌다.


“어이구. 우리 다정이가 통 큰 선배를 뒀네.”

“약속대로 두 번 다시 다정이랑 시우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겁니다.”

도준이 못을 박았다.


“알았어. 알았다고 몇 번 말해. 내 꼭 그리하리다.”

건성으로 대답하는 남식을 향해 도준이 또 한 번 엄중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이거 어기면 법적으로 처벌받게 될 겁니다. 명심하십시오.”

“알았대도. 약속하리다. 됐수?”

기분이 좋은지 연신 실실거리던 남식의 표정이 음흉해졌다.


“그런데 말이유. 형씨 내 동생한테 마음 있지?”

“그런 건 서남식 씨가 알 필요 없습니다. 볼일 끝났으면 그만 가 보시죠.”

“어쨌든 고맙수다. 그럼 또 봅시다.”

샐쭉거리던 남식이 안 주머니에 돈 봉투를 찔러 넣으며 부리나케 카페를 나섰다.

가볍다 못해 경박하기까지 한 그의 뒷모습을 주시하던 도준은 한숨을 삼켰다.

만약 또 보는 일이 생긴다면, 그땐 이렇게 좋게 넘어가지만은 않을 거다.


 

* * *



“회장님. 노여움은 가라앉으셨어요?”

공손히 올리는 말에도 박 회장의 퉁명스러운 눈길은 펼친 신문에 머물러 있었다. 노인의 눈치를 살피느라 진땀을 흘리는 선영의 얼굴에 조바심이 묻어났다.


“저, 회장님. 이거…… 저희 친정 오빠가 어렵게 구한 건데.”

머뭇거리던 선영이 테이블 위로 금빛 보자기에 싸인 물건을 조심스레 내밀었다.


“130년 된 삼이라네요. 정말 어렵게 구했다는데…….”

말 도중에 코웃음을 흘리는 박 회장의 싸늘한 눈길은 여전히 신문에만 박혀 있었다.

요리조리 눈치를 보던 선영이 재빨리 보자기를 풀어헤쳤다. 짙푸른 이끼를 배경으로 몸을 늘어트린 산삼의 자태가 영롱했다.


“이것 좀 보세요, 회장님. 정말 때깔이 다르다니까요.”

그제야 박 회장이 특별한 선물 쪽으로 흘깃 시선을 주지만, 눈길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다 늙어서 이딴 거 먹으면 죽을 때 편히 눈 못 감는다.”

“아이참, 회장님도. 아직 정정하신데 오래오래 사시면서 천수를 누리셔야죠.”

마음에도 없는 알랑방귀를 뀌며 선영은 어색하게 웃었다.


“내 눈에 띄지 말랬는데, 무슨 일이야? 할 말 있음 냉큼 하고 물러가.”

“저 그게…… 며칠 뒤에 명한 유통 신사업 추진 기념행사 있잖아요. 이번에 백화점 개편안으로 차 서방이 대대적으로 추진하는 일이라…….”

“네 이년! 누구더러 차 서방이라는 게야!”

말을 끝내기도 전에 불호령이 떨어졌다. 화들짝 놀란 선영은 냉큼 제 발등으로 시선을 깔았다.


“차, 차 전무가 추진하는 사업인지라…….”

“그래서 뭐.”

“차 전무가 혼자 있으면 눈에 띌 테고 구설에 오를 수도 있는데, 현아한테 한 번 더 기회를 주시는 게 어떠실지…….”

박 회장은 짧게 한숨을 뱉었다.

하긴. 손자놈 위신을 세우려 마련한 행사에 녀석을 혼자 세워둔다면 모양새가 영 좋지 못할 거다.

애초에 버릇을 고칠 심산이었지, 현아를 단박에 잘라낼 생각은 없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혼사 문제다.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았지만, 이미 두 집안이 혼맥으로 묶인다는 지라시가 퍼질 대로 퍼졌다.

그로 인해 양측 관련 계열사 주가가 대폭 상승한 것도 무시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칼자루는 박 회장에게 있었다. 한송그룹 오 회장과 오랜 연을 생각하면 섭섭한 그림을 길게 유지하는 것도 썩 보기 좋진 않을 거다.


“좋다. 이번에 잘 다녀와서 처신이 어땠나 보마.”

마지못해 허락한다는 식으로 받자 희게 질렸던 선영의 얼굴이 대번에 환해졌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감사합니다!”

“할 말 끝났으면 냉큼 사라져.”

싸늘한 냉대에도 선영의 얼굴엔 웃음이 떠날 줄 몰랐다.

선영이 돌아가고 나서야 박 회장의 눈길이 귀한 물건으로 향했다.

온갖 귀한 걸 접해 본 그녀의 눈에도 귀하긴 제대로 귀한 물건이었다. 돈이 있어도 구하기 어려운 물건인 건 틀림없었다.


“무리를 좀 했겠구먼.”

혼잣말을 중얼거린 박 회장이 여주댁을 불렀다. 부름을 받고 냉큼 달려온 중년 여자의 입이 쩍 벌어졌다.


“엄마야! 이리 귀한 걸.”

“갖고 가서 정혁이 놈 눈치 못 채게 먹을 만한 거로 만들어 봐.”

“아이고. 장사 하루 이틀 하는 것도 아니고 감쪽같이 만들어 낼 테니 걱정 마셔요. 그나저나 우리 도련님 빨리 장가를 드셔야지. 이거 드시고 밤이 길어서 어쩌시려나. 호호호.”

“어허! 하여간 고 입!”

날카로운 호통에 여주댁의 입이 합 다물렸다.

* * *

생소한 건물 외관을 보며 다정은 영문 모를 눈만 깜빡였다.


“선배 여긴 왜?”

퇴근 후 갈 데가 있다는 도준의 말에 따라나섰더니, 도착한 곳이 뜬금없게도 웨딩숍이었다.

저와는 전혀 연관이 없는 장소라 도준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다정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심스레 물었다.


“선배 혹시 결혼해요?”

“글쎄, 네가 신부 해 줄 거 아니면 당장은 어렵지 싶은데?”

직설적인 농담에 다정은 싱거운 웃음을 지었다.


“선배도 참.”

“내일 명한유통 신사업 추진 기념행사 있잖아. 어차피 너랑 나랑 둘이니까 좋든 싫든 우리 둘이 파트너인데, 기본 의상은 갖춰야 할 것 같아서.”

파트너? 다정이 고개를 갸웃했다.


“우린 협력사라 들러리나 설 텐데, 그냥 깔끔한 정장이면 되지 않아요?”

“무슨 소리야? 초대장에 만찬 파티라고 써 있는 거 못 봤어?”

멋쩍어진 다정은 뺨을 긁적였다. 행사 날짜와 시간만 확인했지, 부수적인 내용까진 살피지 못했다.

그제야 다정은 조금 복잡한 얼굴이 되었다.


“설마 영화에 나오는, 뭐…… 그런 파티는 아니죠?”

아니긴, 맞았다.

퍼스널쇼퍼를 앞세워 행진처럼 밀려 들어오는 사람들을 보며 다정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대형 행거에 걸린 수십 벌의 화려한 드레스가 다정의 눈앞까지 배달되었다. 말 그대로 영화에서나 보던 장면이었다.

유명 웨딩숍으로 알려진 곳은 일반 파티나 행사용 드레스는 물론 남성용 턱시도까지 아울러 취급하고 있다고 했다.

다정은 어안이 벙벙했다. 결혼과 거리가 먼 다정이 이런 곳에 와 봤을 리 없었다.

평범한 사람이 드레스를 입는다면 아마 결혼식이 유일할 텐데, 그런 곳에 도준과 함께 있으려니 기분이 조금 묘했다.

소파에 얌전히 앉아 눈만 굴리는 다정과 달리 도준은 적극적이었다. 그는 다정에게 입힐 드레스를 신중하게 골랐다.

스스로 건축가이기도 했고, 화가인 어머니의 영향 때문인지 도준은 미적 감각이 섬세하고 탁월한 편이었다.


“우선 이거랑 이거, 그리고 이거. 일단 세 벌만 입어 보겠습니다.”

도준이 고른 드레스는 디자인만 다를 뿐, 모두 아이보리 계열이었다.

그의 결정이 떨어지기 무섭게 단정한 유니폼을 입은 여자들이 우르르 몰려와 다정을 포위했다.


“자, 잠깐! 서, 선배, 난!”

다정은 납치되듯 탈의실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 * *

레지던스로 돌아온 정혁은 전용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그에 앞서가 신속히 호출 버튼을 누른 민 실장이 뒤이어 무언가를 내밀었다.


“전무님 본가에서 보내오신 겁니다.”

금빛 보자기에 싸인 물건은 사각의 형체를 띠고 있었다. 정혁은 무심결에 보자기를 받아 들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럼 편안한 밤 되십시오!”

허리를 반으로 접어 배웅하는 민 실장의 모습이 닫히는 문 너머로 사라졌다.

터덜터덜 집 안으로 들어온 정혁은 아일랜드식 식탁 위에 보자기를 내려놓고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한참 뒤 샤워가운 차림으로 돌아온 그는 젖은 머리에 수건을 덮어쓴 채 냉장고를 열었다.

캔 맥주 하나를 꺼내 돌아서는데 문득 금빛 보자기가 눈에 잡혔다.

슥슥 슬리퍼를 끌고 가 보자기를 벗기자 옻칠을 입어 은은한 광택을 발산하는 3단 찬합이 모습을 드러냈다.

뚜껑을 열고 내용물을 확인한 정혁의 눈썹이 살짝 들린다. 그가 좋아하는 여주댁 표 만두였다.

속이 비치는 얇은 만두피, 섬세하게 잡힌 주름만 보더라도 여주댁 솜씨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뜨겁진 않아도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정혁은 고민도 없이 의자에 앉아 찬합을 펼쳤다.

식탐이 별로 없는 그였지만, 여주댁 표 만두는 그냥 못 지나간다.

젓가락을 들고 반투명한 얇은 피를 자랑하는 만두를 하나 집어 입에 넣고 씹었다. 예상대로 감칠맛이 은은하고 담백한 게 맛이 좋았다.

흡족한 얼굴로 만두를 하나 더 입에 문 그의 얼굴이 돌연 시무룩하게 가라앉았다. 얌전하게 씹는 턱의 움직임도 느려졌다.

맛있는 걸 먹으니까 어김없이 그 아이 얼굴이 떠올랐다.

유시우, 보고 싶다.

* * *



“준비되셨습니다.”

촤라락. 커튼이 열렸다. 원형의 플로어 위에 선 여자는 마치 한 마리의 백조 같았다.

다정의 표정은 여전히 벼락이라도 맞은 양 어리둥절했지만, 어쨌든.


“예쁘다.”

완성된 작품을 감상하듯 도준의 만면에 화사한 웃음이 피었다.

다정은 제가 입은 드레스를 보며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아무리 여름이라지만 이건 좀.

탑 드레스는 가슴과 어깨가 시원하게 노출되어 있었다. 민망해서 어깨를 감싸자니 이번엔 아래가 문제였다.

허벅지 위까지 쫙 갈라진 드레스 틈으로 한쪽 다리의 희멀건 살결이 다 비쳤다. 위를 가리자니 아래가 문제고 아래를 가리자니 위가 문제였다.


“선배, 이건 좀…….”

“예쁘다니까. 눈부셔.”

간지러운 찬사에 다정의 얼굴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

그로부터 두 벌의 드레스를 더 입어 봤지만, 도준의 안목대로 첫 번째 드레스가 선택되었다.

두 번째나 세 번째나 디자인만 미묘하게 다를 뿐, 노출이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특정 부분이 망사냐, 치맛자락의 정중앙이 트였냐, 좌우 한쪽만 트였냐 하는 차이가 다였다.


“손님. 턱시도 착용해 보시겠습니까?”

다정이 드레스를 선택하자 이번엔 도준의 차례였다.

도준이 턱시도를 입으러 들어간 사이 다정은 공주님 소파에 앉아 어색한 표정으로 눈만 깜빡였다.

아이보리 색의 드레스를 입고 있기 때문일까. 마치 예식을 앞둔 신부처럼 긴장되고 초조한 기분마저 스쳤다.

머지않아 턱시도로 갈아입고 나온 도준의 모습에 다정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어때?”

그의 질문에 다정은 순간 멍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너무 근사해서 헛웃음이 나왔다.

평소 청바지에 가벼운 티셔츠 차림이거나, 혹은 얇은 남방을 겉옷처럼 걸친 차림을 본 게 다였다.

그런데 이렇게 신사답게 차려입은 모습을 보자니 그의 애착 뿔테 안경에서까지 지성미와 세련된 느낌이 물씬 풍겼다.


“말해 뭐 해요, 선배. 정말 멋있어요. 당장 결혼식장 들어가도 되겠어요.”

다정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에 약간 머쓱한 웃음을 짓던 도준이 공주님 소파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래서 말인데, 다정아.”

그가 한 걸음 앞에 멈춰 섰다. 그러곤 갑자기 다정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무슨 상황인지 다정이 인지할 겨를도 없이 도준이 허리춤에 숨겨두었던 손을 불쑥 내밀었다.

그저 뒷짐을 지고 있다고 믿었던 손에 들린 건, 작은 꽃다발. 그리고 반지 케이스였다.


“유다정. 결혼해 줄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