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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처음엔 다 오빠로 (30/114)


30화 처음엔 다 오빠로
2022.11.13.


위잉. 커피머신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검은 액체가 추출되는 모습을 멍하니 응시하던 다정의 눈길이 문득 거실로 향했다.

거실 바닥에 쪼그려 앉은 정혁은 걸레질이 한창이었다. 들이닥쳤을 때의 당당함이 무색해지는 장면이었다.

엉금엉금 기며 제법 열심히는 하는데, 걸레질 한번 안 해 본 사람처럼 몹시 어설펐다. 여하튼 인상적인 장면이라는 생각을 하며 다정은 쓰게 입맛을 다셨다.


“어쩜 사람이 그렇게 예의를 몰라요? 깨끗이 닦아요!”

괜히 한 소리 던지자 잔뜩 힘이 들어간 남자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하고 있어. 하고 있는데 자꾸 하라고 하지 마. 김새니까.”

청개구리인 줄 알았더니 의외였다. 투덜거리면서도 할 건 한다. 굳은 얼굴에 불만은 감추지 않았지만.

달그락. 투명한 유리잔에 얼음을 채워나갈 때였다. 갑자기 등 뒤로 다가온 묵직한 무게감이 다정의 어깨를 눌렀다.

흠칫 놀라는 사이 무언가가 뻗어와 시야를 덮었다. 다정의 얼굴을 다 가릴 것처럼 커다란 손이었다.

방금 씻고 나와 물기를 머금은 차가운 손바닥이 다정의 이마를 가만히 짚었다. 끔뻑거리는 속눈썹이 손바닥을 쓰는 느낌이 또렷했다.

싱크대와 제 몸 사이에 다정을 가두고 정혁은 잠시 그대로 있었다. 이윽고 낯설지 않은 숨결이 다정의 귓가로 다가왔다.


“유다정. 아파?”

속살대는 음성이 간지러웠다. 다정은 황급히 이마를 짚은 손을 붙잡아 내렸다.


“살짝 몸살기가 있긴 한데 괜찮아요.”

끌어내린 손이 물러나지 않고 이번엔 목덜미로 옮겨왔다. 열기를 식히듯 차가운 손바닥이 넓게 목을 감쌌다.


“열 있어.”

“조, 조금요. 정말 괜찮다니까요.”

그가 상체를 더 붙여 왔다. 어깨 위로 느껴지는 무게감이 여실했다. 그 무게에 실려 맞닿은 가슴으로 그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나른한 눈길이 다정의 옆얼굴을 빤히 주시했다. 코가 스칠 만큼 가까운 거리라 다정은 고개도 돌리지 못하고 숨을 참았다.

뺨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비단 미열이 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또다시 부끄러워지고 만 다정이 어깨를 비틀었다.


“더우니까 붙지 말고 저리 좀 가요!”

타박하는 말에 정혁은 어쩐 일로 순순히 한 걸음 물러났다. 괜히 열이 올라 손부채를 부치며 기세를 몰아 꾸짖듯이 말했다.


“걸리적거리지 말고 거실에 나가 있어요.”

이번에도 그는 군소리 없이 돌아섰다. 그 뒷모습을 보며 다정은 급격히 가빠진 호흡을 골랐다.

정말 한시도 방심할 수 없는 남자였다.


 
유리잔에 마저 얼음을 채우고 완성된 커피를 담아 쟁반째 들고 거실로 나왔다. 차정혁은 시킨 대로 소파 중앙에 몸을 묻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마시고 빨리 가요.”

텅, 소리가 나도록 유리잔을 내려놓으며 다소 불만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돌아서려는데, 별안간 손목이 붙잡혔다.

다정은 쟁반을 끌어안은 채 그의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혀지고 말았다. 또다시 몸이 딱 붙었다. 마시라는 커피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코앞까지 다가온 정혁이 다정의 얼굴을 곰곰 뜯어보았다. 별다른 감정이 담긴 눈빛은 아닌데, 마주하고 있자니 왜인지 열이 오르고 숨이 막혔다.


“또, 또 왜요?”

상체를 뒤로 빼며 경계하듯 말하자 긴 손가락이 다가와 다정의 눈가를 더듬었다.


“울었어?”

“아, 아뇨 울긴요.”

다정은 재빨리 손을 들어 눈가를 감추었다.

잔뜩 울었고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사실 꼴이 엉망이었을 거다.

이 남자에게 추하거나 못생긴 모습은 보여 주고 싶지 않았는데.

물론 그와의 핑크빛 미래를 꿈꾸는 건 아니었다. 그저 막연하게 예뻐 보이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5년 전 그때처럼.

발뺌했지만 정혁의 눈길은 관찰하듯 계속 그녀의 얼굴에 머물렀다.

유다정은 거짓말에 재주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거짓말을 밥 먹듯이 했다. 분명 맨바닥에 주저앉아 울었다고 했다. 잔뜩 부은 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유시우에 대해 조금만 건드려도 눈물부터 쏟고 보는 여자였다.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안 지 얼마나 됐다고 저조차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하물며 그가 모르는 시간 동안 낳고 젖을 물리고 자신의 일부처럼 키워 온 아이가 사라졌으니 유다정은 오죽했을까.

아빠가 되고 보니 얼마나 겁을 먹고 울었을지, 그 심정이 조금은 와 닿는 것 같았다.

굳이 아는 척하고 싶진 않았다. 그 순간의 감정을 다시 되새기게 할 필요는 없으니까.


“저, 저리 가요. 더우니까 붙지 말라고 했잖아요.”

이러다가 질식해서 죽고 말 거라는 생각에 다정이 그의 가슴을 밀쳤다. 그랬더니 그가 뜬금없이 말했다.


“애인할래?”

“……!”

다정은 냉큼 쟁반을 들어 입술을 감추었다. 그 위로 놀란 토끼 눈만 삐쭉 드러내곤 고개를 붕붕 저었다.


“아, 아니요! 안 할래요.”

“아쉽네.”

그렇게 말한 남자의 커다란 손이 불쑥 다가와 다정의 머리를 농구공처럼 턱 붙잡았다.

속절없이 끌려간 머리통이 그의 어깨에 살포시 기대졌다. 당황한 주먹이 반사적으로 그의 어깨를 퍽퍽 때렸다.


“애, 애인 안 한다니까요!”

“그럼 오빠 해. 오빠 해 줄게.”

놀라 커졌던 다정의 눈이 조금 멍해진 채로 뒤룩 굴렀다.


“오빠는 무슨…….”

“너 지금 아프잖아. 그러니까 기대서 쉬라고.”

“괜찮은데…….”

“애인이라고 했으면 팔베개야.”

“아…….”

낮게 신음한 다정은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팔베개를 모면하고 싶다면 이 이상 입을 열지 않는 게 유리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팔베개가 취향이면 지금이라도 애인하고.”

“아, 아뇨! 그냥 오빠 해요…….”

“잘 생각했어.”

덤덤하게 말한 남자의 시선이 정면으로 향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손길은 다정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보드라운 셔츠에 덮인 탄탄한 팔의 감촉이 관자놀이와 뺨을 타고 전해졌다.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대고만 있을 뿐인데, 시간은 덧없이 흘렀다.

얼마나 지났을까. 긴장이 풀리자 어느새 기댄 어깨가 편안하게 느껴졌다. 이대로 잠들어도 좋을 만큼.

문득 그에게서 이러한 편안함을 느낀다는 사실이 불편해졌다. 어깨를 기댄 채 다정이 잠꼬대처럼 중얼거렸다.


“차정혁 씨. 나한테 이렇게 잘해 줄 필요 없어요. 내 걱정할 필요도 없고요.”

“너 걱정하는 거 아니야. 유시우 걱정하는 거지. 너 아파서 죽으면 유시우 어떡해. 고아 되면 불쌍하잖아.”

“…….”

듣다 보니 어딘가 어감이 이상했다. 발끈한 다정이 퍼뜩 머리를 세우고 언성을 높였다.


“차정혁 씨!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말이 씨가 된다는 말도 몰라요?”

그러기도 잠시, 화를 내던 머리통은 다시 붙잡혀 단단한 팔뚝에 밀착되었다.


“그러니까 아프지 말라고.”

“제발 말 좀 예쁘게 할 수 없어요?”

이번엔 누그러진 투로 핀잔을 주었다. 그러자 정면을 향해 있던 그의 눈길이 옆으로 돌았다. 그러고도 다정의 얼굴을 더 자세히 보려는 듯 한껏 고개를 숙인다.


“그럼 유다정이 가르쳐 줘. 예쁜 말.”

“그걸…… 가르쳐서 될 일이…….”

중얼거리던 다정은 재빨리 시선을 피하며 입술을 감쳐물었다. 빤히 맞춰 오는 그의 눈길에 다시 부끄러워지고 말았다.

그 순간 이 낯간지러운 분위기를 타개할 만한 주제가 번뜩 스쳤다.


“참! 시우가 그러는데요. 차정혁 씨더러 호랑이 아저씨래요. 왜 그렇게 부르는 거예요?”

다정의 물음에 별안간 그가 피식거리며 웃었다.

놀이공원에 갔을 때 쓰고 있던 호랑이 귀 머리띠가 인상적이었던 모양인데, 아들의 눈에 늠름하고 용맹한 맹수로 비쳤다는 사실이 퍽 마음에 들었다.


“귀여워. 유시우.”

질문에 대한 답은 없고 그저 귀엽단다. 궁금하단 듯이 눈을 홉뜨자 그의 입꼬리가 기분 좋게 늘어졌다.


“그런 게 있어. 유시우랑 나랑 둘만의 비밀이야.”

낯간지러워서 화제를 돌렸더니 쏘아 대는 야릇한 눈빛은 한결같다. 불현듯 그의 숨결이 입술의 얇은 막을 스쳤다. 차정혁이 다가오고 있었다.

재빨리 쟁반을 들어 입술을 감춘 다정이 느슨해졌던 경계를 곧추세웠다.


“오, 오빠라면서요!”

“순진하게 왜 이래? 처음엔 다 오빠로 시작하는 거야. 교회 오빠란 말이 괜히 있어?”

“나! 나 무교예요!”

“그럼 옆집 오빠 하든가.”

쟁반을 사수하던 손목이 지그시 붙잡혀 내려갔다. 다정의 당황한 눈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세상에!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피해야만 하는데 피할 수가…….

지이이잉!

갑자기 어디선가 거센 진동이 울렸다. 입술이 닿을락 말락 한 거리. 더 다가가지 못한 채 정혁이 눈가를 찌푸렸다.

이렇게까지 거리를 좁히는 데는 제법 긴 시간이 필요했지만, 멀어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뒤로 몸을 물린 정혁이 진동의 근원지인 자신의 재킷을 뒤져 휴대폰을 꺼내 쥐었다.

보통이라면 무시했겠지만, 기다리던 전화가 있었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가 즉각 통화버튼을 누르고 휴대폰을 귀에 붙였다.


『민 실장입니다. 지시하신 내용에 대해 관할서에 알아봤습니다. 결과 보고드릴까요.』

“말해.”

『전일 오후 3시 반경 실종 신고가 들어간 건 맞는데, 신고 당일 오후 8시경 찾았답니다. 시우 군을 데리고 있던 서남식이란 남자를 연행했는데, 시우 군의 외삼촌이라고 해서 일단락된 것 같습니다.』

“…….”

휴대폰을 귀에 붙인 채 정혁의 시선이 다정의 얼굴로 향했다.

그가 알기로 유다정은 형제가 없었다. 그런데 엄마와 성이 같은 유시우에게 다른 성을 가진 외삼촌이 있다니 의아한 게 당연했다.

정혁이 침묵하는 이유를 알기라도 하는 듯이 민 실장이 곧장 뒷말을 이었다.


『유다정 씨 모친이 17년 전 재혼한 남편의 아들이라 혈연관계는 아닙니다. 특이 사항으로 도박과 폭행 전과가 있습니다. 최근에도 도박으로 6개월 복역하다가 두어 달 전에 출소한 모양입니다.』

“그게 다야?”

『아닙니다. 한 가지 더 있는데 이걸 말씀드려야 할지…….』

“말해.”

『합의로 마무리가 되어 전과 기록으로 남진 않았지만, 미성년자 성폭행을 시도한 사건 기록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피해자가…….』

“…….”

정혁의 눈꺼풀이 느리게 덮였다가 조금 시간을 두고 다시 올라섰다. 자신을 향해 유순하게 깜빡이는 눈을 고요하게 바라보는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 * *

정혁은 어느새 제 무릎을 베고 잠든 다정의 얼굴을 잠잠히 바라보았다.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는 것 같더니 한순간 스르륵 무너져 이렇게 쿨쿨 잘 자고 있었다.

뺨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조심히 쓸어 넘겼다. 지금은 세상 모르게 잠들어 있지만, 여전히 안색은 창백했다.

살짝 내려앉은 손바닥이 다정의 이마를 짚었다. 미열이 있긴 했지만, 걱정할 만큼은 아니었다.

시간을 확인한 그는 다정을 안아다가 침실로 옮겼다. 얇은 여름용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올린 뒤 거실로 나와 벗어둔 재킷을 주워 들었다.

슬리퍼가 끌리지 않도록 조용히 걸어 밖으로 나온 그는 닫힌 문 앞에 가만히 멈춰 선 채 긴 한숨을 뱉었다.


‘당시 피해자가 미성년자였던 유다정 씨였습니다.’

정혁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었다.

아들이 사라졌을 때 받은 충격이 작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 그 아들을 데려간 자가 자신에게 그런 짓을 한 남자란다.

불과 어제 그런 일을 겪고 저렇게나 씩씩할 일인가. 과연 5년 전 절 농락하고 뒤통수까지 대차게 후려친 여자다웠다.

씩씩해서 다행이다. 다행이긴 한데, 한편으론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재차 한숨을 쉰 정혁은 신경질적으로 타이를 끌어내리고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신호가 길게 울리다가 끊어졌다.


“배솔이 씨. 내 아들 픽업 좀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오늘 다정이가 갈 거예요.』

“유다정 못 갑니다. 몸이 안 좋은 것 같아서 방금 재우고 나오는 길이거든요.”

『어머!』

뭘 상상하는지 솔이가 놀란 소리를 터뜨렸다. 그러곤 잠시 음흉한 웃음을 흘리더니 곧 알았다는 대답을 돌려주었다.

통화를 마친 정혁은 곧장 다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네, 전무님.』

“사람 좀 풀어. 그 새끼 찾아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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