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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깜짝 기습 (29/114)


29화 깜짝 기습
2022.11.10.


태블릿 PC가 카랑카랑한 음성을 뱉어냈다.


『야! 너 이게 얼마짜린 줄 알아?』

잠잠한 눈길이 두꺼운 돋보기 렌즈를 거친 영상을 고요하게 좇았다.


『미친X아! 입으로만 떠들지 말고 어떻게 좀 하라고!』

듣기 싫은 고성이 공기를 갈랐다. 그 소리에 움찔 어깨를 들썩인 두 여자는 바닥에 꿇어 엎드린 몸을 더 바짝 낮추었다.

「신사동 갑질녀」라는 이름의 동영상이 인터넷에 빠르게 확산했다.

화제의 동영상은 유포되고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박종순 회장의 귀에까지 흘러 들어갔다.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있다지만, 제가 아니라고 발뺌하기엔 박 회장의 눈썰미가 만만치 않다.

화면 속 영상을 지그시 응시하던 박 회장은 더 볼 필요 없다는 듯 돋보기안경을 벗었다.

렌즈를 한 꺼풀 벗겨낸 눈은 더 무거운 빛을 띠고 있었다. 그 눈길이 발치에 엎드려 떨고 있는 두 여자의 등으로 내리꽂혔다.


“안 비서. 왜 내 집에 사람 아닌 것들이 눈에 띄어? 당장 쫓아내.”

“네. 회장님.”

엄중한 지시에 중년의 여비서가 나긋이 머리를 조아렸다. 박 회장은 냉담하게 일별하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회장님!!”

절박하게 외친 선영이 돌아서는 박 회장의 슬리퍼 발을 덥석 붙잡았다. 그 순간 평정을 유지하던 박 회장의 얼굴이 날카롭게 일그러졌다.


“손모가지를 부러트릴라! 벌레만도 못한 것이 감히 누구한테 손을 대!”

맹수 같은 기염에 퍼뜩 손을 뗀 선영이 다시금 바닥에 납죽 몸을 웅크렸다.


“회, 회장님! 한 번만!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애걸하는 선영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오, 오현아! 어서 빌지 않고 뭐 해? 어서!”

선영의 채근에 겁을 먹고 굳어 있던 현아도 두 손을 맞대고 싹싹 빌었다.


“자, 잘못했어요, 할머니! 현아가 잘못했어요.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네?”

그런 현아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박 회장은 선영을 곧이 내려다보았다.


“너 철중이 놈 앞세워 날 찾아왔을 때 뭐라 했니. 정혁이한테 빠지지 않는 애로 만들겠다 안 했니?”

“죄, 죄송합니다. 회장님…….”

“어미가 돼서 딸년 교육을 대체 어찌했길래 하루가 멀다고 이 망신이야!”

날카롭게 일갈한 박 회장의 얼굴에 서슬이 비쳤다.

손자에게나 무르지, 어지간한 그룹 총수들도 ‘놈’ 소리를 들으며 박 회장의 위세에 기 한번 펴지 못하는 게 예사였다.

그런 양반에게 남의 안방 차지하고 앉은 선영이야 오죽 하찮을까.


“첩 주제에 딸년 팔자 한번 고쳐 보겠다고 용을 쓰는 게 당돌하고 기특해서 내 좋게 봤어.”

“예! 예! 그러셨죠.”

“정혁이 짝으로 잘 가르치겠다며 애걸복걸 사정하기에 천박한 태생인 줄 알면서도 철중이 놈 체면 봐서 기회도 줬어.”

“아무렴요. 회장님 은혜야 늘 마음 깊이 새기고 있습니다.”

“내 기대는 크지 않았다. 그래도 기본은 할 줄 알았지. 한데 이 꼴이 뭐야? 우리 정혁이 얼굴에 먹칠을 해도 유분수지!”

“자, 잘못했습니다. 따끔히 야단쳐 두 번 다시 이런 일 없도록 할 테니, 한 번만…….”

“못 본 체 넘어 갈래도 좀 가당찮아야 말이지. 모자란 것들.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이리 물색없이 설쳐, 설치긴!”

쯧쯧 혀를 찬 박 회장은 다시 소파에 몸을 기댔다.

잠시 번졌던 흥분은 어느새 가시고 주름진 예리한 눈이 허공을 주시했다. 생각을 정리한 박 회장의 입이 다시 열릴 때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네 딸년 팔자 펴자고 우리 정혁이 위신을 망가트려서야 쓰나. 정혁이랑 짝짓는 문제는 다시 고민해야겠다.”

예상치도 못한 통보에 바닥에 닿아 있던 선영의 이마가 번쩍 들렸다.


“회, 회장님. 그건 이미 약속하신 거잖아요!”

“고얀 것! 누구 앞에서 목소리를 높여! 따지고 싶으면 철중이 놈한테 직접 와서 따지라고 해! 썩 물러가!”

 

* * *



“어떡해! 나 이제 어떡해! 할머니가 결혼 취소하면 어떡하냐고!”

쫓겨나다시피 박 회장의 집을 나온 현아가 발을 동동 구르며 칭얼거렸다.

이렇다 할 대책이 없던 선영은 한숨만 쉬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려도 유분수지! 선영의 손에 들린 핸드백이 기어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냅다 머리통을 휘갈기자 눈이 튀어나올 뻔한 현아가 황당한 얼굴로 뒤통수를 거머쥐었다.


“아씨! 왜 때려!”

“잘 좀 하지 이게 뭐야! 엄마가 뭐랬어? 몸가짐 바르게 하랬잖아!”

선영을 노려보는 눈에 눈물이 핑 고였다. 억울해 죽겠는지 입을 비죽이던 현아가 바락 대들었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래? 와인을 쏟은 건 걘데 왜 나만 갖고 그래! 이제 어떡할 거야! 나 오빠랑 결혼 못 하면 엄마가 책임져!”

선영은 손톱을 씹으며 고민했다. 이윽고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요새 정혁이랑 어때?”

“뭐가?”

“너한테 잘해 주느냐고.”

그 대목에서 징징거리던 현아의 표정이 우쭐해졌다.


“당연하지. 오빤 나라면 껌뻑 죽어. 레스토랑에서도 나한테 싫은 소리 한마디 안 했다니까. 그날도 봐. 나 지켜 주려고 집 앞까지 데려다주고 가는 거.”

“그럼 됐어. 정혁이가 좋다는데 할망구가 어쩌겠어. 넌 정혁이 마음이나 꽉 붙들어.”

신신당부하는데도 현아가 행동에 나서지 않자 선영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뭐 하고 있어? 당장 정혁이한테 가 봐.”

“오빠 회사 찾아오는 거 싫어해.”

“지금이 물불 가릴 때야? 가서 맛있는 거 사달라고 애교도 좀 부리고 네 편으로 구워삶으란 말이야!”

 

 

* * *



“오빠앙!”

하이톤의 음성이 신경을 긁었다. 노크도 없이 벌컥 열린 문으로 힐끗 향한 정혁의 눈길이 다시 서류로 떨어졌다.


“가. 일하는데 회사 드나들지 말고.”

“아이참. 현아가 오빠 보고 싶어서 왔는데, 보자마자 그러기 있어?”

선영의 지시대로 애교스럽게 콧소리를 흘리며 다가간 현아가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면박을 줘도 굴하지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꿋꿋한 게 오현아는 사막에 떨어져도 씩씩할 애였다.

아니면 면박을 줘도 그게 면박인 줄을 모르거나.

정혁이 밀어내듯 현아의 팔을 풀고 삐딱하게 고개를 들었다.


“유치원은 별일 없고?”

갑자기 그가 유치원에 관심을 보이자 현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오빠 무슨 신기 있어?”

“…….”

무슨 헛소리냐는 듯 빤히 쳐다보자 현아가 탄식을 흘리며 돌아섰다. 소파에 풀썩 몸을 묻은 현아는 앞뒤 다 자르고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삼촌이면 삼촌이라고 말을 해야지. 유괴를 당했네, 어쩌네. 별 호들갑을 다 떨었다니까.”

한 귀로 대충 흘려들으며 정혁은 서류를 한 장 넘겼다.


“참. 오빠도 전에 봤지? 그 미혼모 말이야.”

“…….”

“어제 그 여자 애가 유치원에서 유괴됐다고 경찰까지 부르고 난리도 아니었다니까.”

나태하게 늘어져 있던 정혁의 허리가 반동하듯 곧추섰다.


“애 엄마는 땅바닥에 주저앉아서 울고불고. 눈 뜨고 못 봐 주겠더라니까.”

푸념처럼 지껄이던 현아가 고개를 내저었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정혁은 간신히 입술을 달싹였다.


“애는…… 어떻게 됐어?”

“찾았다나 봐. 별것도 아닌 일로 유치원만 발칵 뒤집어 놓고. 어후, 짜증 나!”

차갑게 식은 손끝이 경련을 일으키는 눈썹을 쓸었다. 그가 더 관심을 보이지 않자 현아가 명랑한 목소리로 화제를 돌렸다.


“오빠. W호텔 디저트 바 괜찮다는데, 현아 달달한 것 좀 사 줘.”

“네 돈 주고 사 먹어. 너 돈 많잖아. 바빠, 가.”

무겁게 가라앉은 눈이 툴툴대며 돌아서는 현아의 뒷모습을 주시했다. 잠시 생각에 잠긴 정혁은 곧장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어제 한송 유치원에서 원아 실종신고 들어갔을 거야. 경위 좀 알아봐.”

 

* * *



“선배 미안해요.”

애써 웃음기를 섞지만 다 죽어가는 목소리에 도준의 목소리에도 걱정이 담겼다.


『미안하긴. 새로 뽑은 경력직 직원 일정 당겨서 오늘부터 출근하라고 했어. 그러니까 상태 나아질 때까지 푹 쉬어.』

“바쁜데…….”

『그동안 희주 씨 잘 가르친 보람이 있어. 너만큼은 하니까 걱정 마.』

통화를 마친 다정은 미열이 느껴지는 이마를 짚었다.

어젯밤부터 몸 상태가 이상하더니 기어이 병이 나고 말았다. 목은 부어 목소리는 잔뜩 갈라지고, 여기저기 욱신거리는 게 안 아픈 데가 없었다.

하긴. 그 난리를 겪고 몸살이 안 나면 그게 더 이상했다. 그래도 마음 편히 놀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다정은 손목에 파스 한 장을 붙이고 노트북 앞에 앉았다. 현장에 나갈 수 없다면 도면 작업이라도 해야 했다.

작업에 집중하며 두어 시간쯤 지났을까. 얌전하던 휴대폰이 진동했다.

「이상한 남자」

화면에 떠오른 발신자 명을 가만히 바라보던 다정은 천천히 숨을 고른 뒤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문 열어.』

목 알아먹을 말에 다정은 어리둥절한 눈만 깜빡였다.


『부수고 들어가?』

“……네?”

쾅쾅쾅!

흠칫 어깨를 떤 다정의 눈길이 굉음을 내는 현관 쪽으로 향했다.


『문 열라고. 부수기 전에.』

“아…….”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다정은 냉큼 현관으로 향했다. 띠릭. 좁게 열린 문틈으로 두더지처럼 머리를 쏙 내밀자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쏟아졌다.


“여긴 무슨 일로……?”

말끝을 흐리는 다정의 얼굴로 무심한 눈길이 따라붙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곳은 죄다 훑어 내린 그가 불현듯 다정의 손목을 낚아챘다.

파스의 싸한 냄새가 후각을 강하게 파고들자 정혁이 대번에 눈가를 구겼다.


“다쳤어?”

“아, 아뇨. 이건……. 그냥 좀 욱신거려서.”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그가 크게 한숨을 뱉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문을 잡아 넓게 벌리고는 현관 안으로 성큼 발을 밀어 넣었다.

깜짝 기습에 놀란 다정은 숨을 삼키며 돌아섰다. 너무 얼결에 벌어진 일이라 막아설 겨를도 없었다.


“저, 저기요! 차정혁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다정이 허둥거리며 뒤쫓지만, 큰 보폭을 이용해 움직인 남자는 어느새 거실 중앙을 차지하고 있었다.


“차, 차정혁 씨! 대체…….”

“유시우는?”

돌연 눈을 맞추더니 묻는다.


“시우는 유치원에…… 아니, 그보다 차정혁 씨!”

“이런 데 살아?”

다시 질문을 던진 그가 집안을 넓게 둘러보았다. 묘한 어감에 은근히 기분이 나빠진 다정은 황당하게 눈을 치떴다.


“이런 데가 뭐 어때서요?”

“아니, 무슨 집이 이렇게 코딱지만 한가 해서.”

다정은 기가 막혀서 말이 다 안 나왔다.

애초에 저축의 개념으로 큰 평수를 장만하고도 내내 무리를 했다며 후회를 했는데, 이 남자에게 조롱거리가 될 줄은 몰랐다.


“차정혁 씨 코딱지는 실평수가 28평인가 보죠? 걱정 말아요. 시우랑 둘이 살기 완전 넉넉하니까!”

벌게진 얼굴로 정색하고 반격했지만, 역시나 그에겐 별 타격이 없어 보였다.


“그럼 됐고.”

잠깐 사이 혼이 쏙 빠졌던 다정은 고개를 휙휙 저어 재빨리 나간 정신을 수습했다. 자꾸만 본질을 흐리는 질문에 말려들어선 안 되었다.


“여긴 왜…… 아니, 그보다 나 집에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회사에 갔더니 씩씩한 아가씨가 알려 주더라고.”

“희주 씨요……?”

“몰라, 남의 여자 이름 관심 없어.”

“그건 그렇고 차정혁 씨. 왜 함부로 남의 집에 들어오는 거예요?!”

으름을 놓자 정혁이 눈을 키웠다.


“여기가 왜 남의 집이야. 내 아들 집이지.”

“…….”

다정은 말을 잇지 못했다.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었다.


“이봐요! 차정혁 씨. 당장 나가요!”

꼿꼿이 세운 손가락이 현관을 가리키지만, 애초에 뻔뻔함이 뭔지도 모르는 남자는 끄떡도 없었다.


“당장은 싫고, 조금 이따가. 지금은 너랑 차 마실 거야.”

당황하는 얼굴로 부드러운 눈길이 쏟아졌다. 숨이 막힐 듯 그윽한 눈빛에 갑자기 부끄러워진 다정은 살그머니 입술을 감쳐물었다.


“혹시…… 무슨 얘기 듣고 왔어요?”

“무슨 얘기? 무슨 일 있어?”

의아하게 눈썹을 들추는 그를 보며 다정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니에요. 그럼…… 차만 마시고 바로 가기예요.”

“봐서.”

쪼르르 고개를 떨군 다정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이건 도저히 말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차정혁 씨. 차 마시려면 신발부터 벗어요. 남의 집에 들어올 때 신발 벗는 건 우리 시우도 알아요.”

“…….”

저조차도 자각 못 했던지 정혁의 눈길이 그제야 제 구둣발로 향한다.


“어떻게 다섯 살짜리만도 못해.”

꿍얼대며 돌아선 다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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