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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잘 자, 아들 (27/114)


27화 잘 자, 아들
2022.11.03.



“이케 큰 기차! 똥그라미인데! 어…… 시우가 타니까 하늘로 막 올라갔어! 사람들이, 어, 어…… 개미 같았어요!”

대관람차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시우의 머리에 샴푸를 하던 다정은 냉큼 놀란 목소리를 냈다.


“정말? 그렇게 높으면 우리 시우 엄청 무서웠을 텐데.”

“아, 아니! 시우 하나도 안 무서워요!”

오리 인형을 꼭 움켜쥔 시우가 물에 젖은 강아지처럼 거세게 도리질을 쳤다. 다정은 또 한 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맞다! 우리 시우 엄청 용감하지? 엄마가 깜빡했어요.”

겨드랑이를 간지럽히자 꺄륵 웃는 소리가 축축한 공간을 울렸다.


“또! 죽은 말…… 열 마리! 아니 스무 마리 탔어요. 올라갔다 내려갔다 빙글빙글하는 거!”

회전목마를 말하는 듯했다.


“풍선 타고 슝 갔다가! 어…… 붕붕이! 붕붕이도 탔어요!”

시우는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오늘 무슨 놀이기구를 타고 놀았는지 엄마에게 자랑하고 싶어 작은 입을 한시도 가만히 두질 않았다.

웃음기 어린 다정의 얼굴에 씁쓸함이 스쳤다.

얼마나 좋았으면…….

그 남자가 어째서 미친 강아지 같았다고 했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생각해 보니 시우를 데리고 놀이공원을 간 게 언제인지 까마득했다.

아장아장 걸을 때 유모차에 태워 나들이 식으로 가 본 게 고작이었다. 시우에겐 기억에도 가물가물할 테니 오늘 처음 가 본 거나 다름이 없었다.

늘 미안하면서도 다정은 새삼 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한창 뛰놀고 호기심이 많을 나이인데, 그간 바쁘다는 핑계로 참 무심한 엄마였다.

놀이공원에 가자고 떼를 쓸 만도 한데 한번 조르지도 않는 착하기만 한 아이.

다정은 안쓰러운 마음에 시우의 젖은 뺨을 어루만졌다. 땀과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꾀죄죄하더니 어느새 물기를 머금은 뺨이 보얬다.


“시우야. 시우 방학하면 엄마랑 비행기 타고 놀러 갈까?”

오리 인형을 외면한 눈이 엄마를 향해 커다래졌다.


“비행기……? 붕! 비행기?”

기대심에 눈을 빛내는 아들을 보며 다정은 방그레 웃었다.


“응. 붕 비행기 타고 엄마랑 바다 보러 가자.”

 

 

* * *

레지던스로 돌아온 정혁은 재킷과 타이를 아무렇게나 소파에 내던졌다.

애하고 노는 게 이렇게나 지칠 일인가.

그 사실이 우스워져 피식거리며 드레스룸으로 향하던 발이 돌연 주춤 멈춰 섰다. 다시금 몸을 비튼 그는 쓸데없이 커다랗고 횅한 공간을 찬찬히 돌아보았다.

불을 밝히지 않아 푸르게 물든 거실을 채우는 거라곤 덩그러니 놓인 소파 테이블과 차가운 적막이 다였다.

이게 아닌데.

방금까지 제가 있던 세상은 이렇지 않았다. 눈이 부시게 환하고 재잘재잘 시끄럽고, 또 따뜻하고.

그런데 여긴.

적막하다 못해 삭막하기까지 한 공간에 발을 들이자 비로소 현실이 자각되기 시작했다.

뭔가 기분 좋은 꿈을 꾸다가 도중에 깬 것처럼 헛헛한 바람이 가슴을 쓸고 지나갔다.

그 익숙하고도 정체 모를 감정들이 조금 더 진하게 밀려왔을 때, 정혁은 고개를 절레 저었다.

부질없는 생각을 떨치고 드레스룸으로 발길을 돌리는데, 문득 주머니 안에서 짧은 진동이 느껴졌다.

휴대폰을 꺼내자 한 통의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치ㅁㄷㅐ미ㅌㅐ숭ㄱㅕ노ㄹ거ㅇㅐ요^&*^어ㅁ만ㅌㅐ비미ㄴㅇㅣ니ㄲㅏ아저ㅆㅣ자ㄹㅈㅏ여」

피식 웃음이 났다.

오타가 이렇게 귀여울 일인가.

유시우. 작아도 있을 건 다 있었다. 앙증맞은 눈코입. 반듯하고 선명한 눈썹과 긴 속눈썹.

만져 보고 싶을 만큼 둥글고 보드라워 보이는 귓바퀴. 그리고 신기할 만큼 작은 손. 보들보들한 손가락 끝에 돋아난 연한 손톱마저 신기했다.

고사리손으로 자판을 꾹꾹 눌러 썼을 생각을 하니 갑자기 콧잔등이 간지러워졌다.

이런 게 애틋함이란 감정일까. 느껴 본 적 없어서 좀 헷갈렸다.

뭐라고 답장을 할까 고민하다가 자판을 두드렸다.


「잘 자, 아들.」

깜빡거리는 커서 표시를 바라보며 전송 버튼으로 향하던 손가락이 멈칫거렸다.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던 그는 삭제 버튼을 누르고 다시 글자를 고쳤다.

딩동.


「잘 자, 유시우.」

 

* * *

삐―

갑자기 울리는 인터폰 소리에 서류 위로 미끄러지던 펜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연결 버튼을 누르자 단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무님. 한빛 건축 사무소에서 오셨습니다.』

정혁의 눈썹이 살짝 들렸다.

유다정이? 설마 며칠 안 봤다고 보고 싶어서 왔을 리는 없을 테다. 그래도 반가웠다.

들여보내라고 말한 뒤 결재 서류를 미뤄 놓고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열린 문으로 들어선 이는 기대하던 여자가 아니었다.

정혁의 표정이 심드렁하게 굳었다. 기대했던 얼굴이 아니면 실망하면 그뿐인데, 이쪽은 실망을 넘어 존재 자체가 불쾌한 남자였다. 물론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한빛 담당자 아닌 거로 아는데.”

다소 불만스러운 첫마디에도 환영받지 못한 방문자는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


“한빛 건축 사무소 대표 권도준입니다. 초면은 아니니 다른 인사는 생략하겠습니다.”

정혁은 책상 앞에서 몸을 일으켰다. 내키진 않지만, 손님맞이의 형식을 갖춰 주기로 했다. 그의 방문 목적이 내심 궁금한 까닭이었다.

응접용 소파로 자리를 옮기며 앉으라 눈짓하자 도준이 적당한 위치에 착석했다.


“여긴 무슨 일로?”

정혁이 삐딱한 눈길을 주었다. 담담하게 그를 마주하던 도준은 결연하게 입을 뗐다.


“더는 다정이 주위를 맴돌지 마십시오.”

인사를 생략한다더니 몹시도 단도직입적이었다. 가볍게 숨을 고른 정혁은 무던한 태도로 반문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당신 때문에 다정이가 힘들어하는 걸 더는 보고 싶지 않습니다.”

정혁은 어딘가 비장하기까지 한 남자를 빤히 주시했다. 그리고 실소했다.


“권도준 대표. 내 애 엄마 좋아해?”

불현듯 평정을 유지하던 도준의 눈가가 불쾌하게 굳었다.


“차정혁 전무님! 다정이를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마십시오.”

“그럼 뭐라고 해? 내 아들 엄마니까 애 엄마 맞잖아.”

“당신에겐 다정이와 시우를 그렇게 부를 권리가 없습니다.”

정혁은 헛숨을 뱉었다. 둘이 짠 것도 아니고 그놈의 권리 타령이 매번 심기를 긁는다.

그들이 말하는 권리가 도의적인 의미라는 걸 알지만 그건 그가 알 바 아니었다. 법적으로 유시우에 대한 권리의 절반은 차정혁에게 있는 게 명백하니까.

멋모르고 책임은 포기했다. 그러고 보니 남은 건 권리뿐인데, 그것마저 손을 놓으면 제가 너무 손해 아닌가.

그렇대도 다정에게 한 약속은 지켜질 거다. 유치하게 새끼손가락을 걸 필요도 없었다. 애초에 그럴 마음은 먹지도 않았으니까.

유시우. 제 아들을 엄마 없이 자라게 하는 일은 결코 없을 거다.

불편한 심기를 애써 삼키며 정혁은 차분히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이봐. 그 애가 생물학적으로 내 아들인 건 분명한 사실이야. 근데 아빠인 내게 권리가 없으면 누구한테 있지? 아무것도 아닌 당신에게 있나?”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아빠라고 주장하면 답니까? 5년 전 당신이 저지른 일 때문에 다정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십니까?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잖습니까.”

정혁을 향한 도준의 굳은 눈빛에 복잡한 감정들이 떠올랐다.

이 남자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 일로 다정과 다정의 모친이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그리고 멀리서 지켜만 봐야 했던 자신은 심정은 어땠는지.

전부 눈앞의 이 남자 때문이었다. 그런데 다시 나타나 다정에게 힘든 시간을 곱씹게 하는 이 남자가 견딜 수 없었다.


“뭘 모르는 건 그쪽 아닌가? 생각해 봐. 애가 괜히 생겨?”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아니. 날 무슨 범죄자 취급하니까 기분 좀 별로라서.”

귓불을 문지르며 정혁이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무성의한 태도에 도준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차정혁 전무님. 전 진지하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난? 난 아닌 것 같아?”

정혁의 눈길이 날카롭게 올라섰다.


“유다정 그 여자랑 나, 서로 좋아서 그랬다고. 권도준 당신이 무슨 생각인지는 관심 없어. 근데 뭘 하든 유시우는 내 거야. 유시우가 내 거면 유다정도 내 거고.”

“차정혁 전무! 억지도 격에 맞게 부리십시오!”

 

 
경고는 제법 단조롭게 흘러나왔다.


“권도준. 선 넘지 마. 당신은 내 아이와 아이 엄마한테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런 억지나 듣자고 찾아온 게 아닙니다. 긴말 않겠습니다. 더는 다정이 인생에 끼어들지 마십시오. 곧 결혼도 하실 분이.”

“…….”

힘주어 뱉은 마지막 말에 정혁의 입이 무겁게 다물렸다.

눈에 띄게 굳은 그를 보며 회심의 일격이라도 날린 양 도준은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무릎을 일으켜 세웠다.


“제 용건은 여기까지입니다. 오늘은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럼.”

정중하게 고개 숙여 인사까지 한 뒤 도준은 그대로 돌아섰다. 그의 뒷모습이 사라진 지점을 향해 정혁의 눈가가 싸늘하게 경직되었다.

완벽한 2연패.

미끈한 손가락이 불편하게 구겨진 눈썹을 쓸었다.

자신이 그 여자 인생에 끼어든 게 아니다. 유다정, 그 여자가 제 인생에 끼어든 거지.

* * *

끼이익! 거친 소리를 내며 차가 멈춰 섰다.

다정은 하얗게 질린 채 내버리다시피 차를 박차고 달려 나갔다. 평소보다 많은 사람이 유치원 앞을 메우고 있었다.

허둥지둥 주위를 살폈다. 바삐 오가는 사람들 틈으로 화단 구석에 쪼그려 앉은 솔이가 보였다.

다정은 떨리는 손끝을 말아 쥐며 화단으로 향했다. 처량하게 훌쩍거리는 솔이를 보자 목이 메었다.


“솔이야…… 어, 어떻게 된 거야?”

침착하려 하지만 목소리가 떨렸다. 그런 다정을 보자마자 솔이는 울음부터 터뜨렸다.


“흐앙! 다정아아아! 우리 시우 어떡해에! 다 찾아봤는데, 없어어엉!”

“…….”

다정의 입술 새로 차가운 숨이 비어져 나왔다.

솔이의 흐느낌은 들리는데 일순 하얗게 지워진 시야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공사 현장에 막 도착한 무렵 솔이로부터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시우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허어엉! 우리 시우 어떡해에에!”

다정이 얼이 나간 사이 솔이의 울부짖음은 더 거세졌다. 다리에 힘이 풀린 다정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아…… 어떡하지? 우리 시우…… 얘가 어딜…….”

멍한 시야에 사람들의 모습이 잡혔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들이 주변을 살피고 어딘가로 무전을 보내며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헐레벌떡 땅을 차고 나간 다정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경찰관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우리 시우! 제 아이 좀 찾아주세요!”

애원하듯 매달리자 경찰관의 눈이 조금 커졌다.


“혹시 실종 아동 보호자 되십니까?”

“네! 제가, 제가 시우 엄마예요! 우리 시우 좀 찾아주세요. 네?”

“보호자 분. 너무 걱정 마십시오. 지금 주변 수색 중이고 CCTV 기록도 수거하고 있으니까 금방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원아가 사라진 일로 유치원이 발칵 뒤집혔다. 지역을 대표하는 교육기관이라며 시에서 대대적으로 홍보를 했던 터라 경찰서 역시 비상이 걸렸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달려온 도준이 거친 호흡을 몰아쉬었다.


“다정아! 어떻게 된 거야?”

그가 물었지만, 다정은 화단에 맥없이 주저앉아 넋을 놓은 채였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이 허공을 맴돌았다.

유괴? 부유층 대상의 유치원이니 돈을 노리고 아이를 유괴했을지도 모른다.

불현듯 언젠가 보았던 영화가 떠올랐다. 아동 유괴 사건을 다룬 영화였는데,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그 영화 결말이…….

영화의 결말을 떠올린 순간 다정은 입을 틀어막고 말았다. 그다지 좋은 결말은 아니었다. 그 장면을 떠올리자 너무 무서워서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남 일이 아닐 수도 있는데, 이렇게 수수방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력함에 하염없이 눈물만 흘렀다.

그때 뭔가가 번쩍 머릿속을 스쳤다. 다정은 허둥지둥 휴대폰을 쥐고 통화 목록을 뒤지기 시작했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젖은 눈동자가 저장된 이름을 바라보았다.

「이상한 남자」

도와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지금 상황을 전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시우를 찾아 다시 제 품으로 돌려줄 것만 같았다.

떨리는 손가락이 통화버튼 위를 맴돌았다. 입술을 물고 망설이던 다정은 끝내 통화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목을 놓아 흐느껴 버렸다.

잘 키우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약속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잃어버렸다는 말을 그 사람에게 도저히 전할 자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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