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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대빵 좋아요! (26/114)


26화 대빵 좋아요!
2022.10.30.


여름의 뙤약볕도 파라솔 아래에선 기세가 한결 누그러졌다.

허술한 플라스틱 의자에 삐딱하게 기대어 앉은 정혁은 셔츠의 단추를 하나 더 끌렀다.

더위에 장사 없다고 재킷을 벗고 타이를 풀어헤친 지도 한참이었다. 그 와중에도 그의 머리 양쪽에 자리한 호랑이 귀만은 위풍당당했다.

팔꿈치를 접어 한가로이 턱을 괴는 그의 눈길이 맞은편으로 향했다.

그와 똑같은 호랑이 귀 머리띠를 쓴 채 작은 입으로 아이스크림을 실어 나르느라 유시우는 몹시 분주했다.

정혁의 입가에 엷은 웃음이 어렸다.

어느 날 생긴 아들이 제 아들인 건 알겠는데, 좀처럼 현실감이 떨어졌다.

그나저나 원래 애들은 이처럼 에너지가 폭발적인가. 평소 운동으로 단련되어 있다 자부했는데, 체력적 한계에 부딪힌 것처럼 급격한 피로가 몰려왔다.


“내가 놀이공원도 데려오고 아이스크림도 사 주니까 좋지?”

거의 유도 질문이었다. 순진한 눈을 깜빡이던 시우는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선선히 인정하는 모습에 정혁의 입꼬리가 슬며시 말려 올라간다. 제법 만족스러워하는 눈치라 기세를 몰아 또 한마딜 던졌다.


“나 좋지?”

이번엔 곧장 대답이 없다. 대신 암팡진 입이 곧게 다물리더니 눈동자가 도르륵 구른다. 그 모습에 정혁의 눈썹 한쪽이 삐뚜름하게 솟았다.


“왜 고민해?”

“엄마가 이유 없이 잘해 주는 사람은 조심하랬어요.”

“…….”

떨떠름해진 정혁은 길게 한숨을 뱉었다. 잠시 찌푸린 눈을 멀리 두다가 이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뭐 틀린 말은 아니야. 근데 내가 너한테 잘해 주는 건 다 이유가 있어. 어쩔 수 없는 필연적 이유랄까.”

그게 뭐냐는 듯이 시우가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비밀이야. 10센티 더 크면 말해 줄게.”

시우는 그러려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아이스크림을 크게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찹찹대는 작은 입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그는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유시우.”

“네!”

“대표 삼촌이 좋아, 내가 좋아?”

“대표 삼촌!”

고민도 없이 돌아온 대답에 정혁은 울컥 울분이 차올랐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댔어. 말할 때 고민하는 습관 좀 들여.”

다섯 살 아들에게 투정을 부린 그는 아이스크림을 맛없게 한 입 떠먹었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았다.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혀 위에서 천천히 녹이며 생각하던 그는 결국 비장의 무기를 꺼내기로 했다.

크고 까맣고 순진한 눈이 끔뻑끔뻑 테이블 위에 놓인 새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듣기로 세상 어떤 장난감도 첨단 기술의 집약체라 불리는 최신 스마트폰의 경쟁 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했다.

정혁은 우쭐한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어때? 마음에 들어? 순수한 선물이니까 부담 없이 받아도 돼.”

“음…… 엄마가 이런 거 받으면 안 된다고 했는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앙증맞은 손가락은 휴대폰 화면을 꼼지락거렸다.


“내가 주는 건 받아도 돼.”

살살 구슬려 보지만 고개를 갸우뚱한 시우는 이내 휴대폰과 거리를 벌렸다.


“안 돼요!”

고작 다섯 살짜리가 이렇게나 단호하다. 정혁의 눈가가 슬며시 일그러졌다.

일평생을 제멋대로 살아왔다. 제가 마음만 먹으면 못 하는 게 없었는데, 요즘 들어 맘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특히 유다정과 유시우.

이건 뭐 제발 받아 달라고 사정을 해도 쉽지 않으니.

탄식처럼 길게 한숨을 쉰 그의 눈이 놀이공원을 오가는 사람들을 무심히 스쳤다.


“순수한 동심의 세계에 사는 넌 잘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세상 험해. 이런 거 하나 있어서 나쁠 거 없어. 아빠, 아니. 아저씨 전화번호 저장해 뒀으니까 무슨 일 생기면 전화해.”

“어…… 무슨 일 없으면요?”

“없어도 해. 아무 때나.”

시우가 입술을 오물거렸다. 고민이 될 때마다 입술을 오물거리는 게 습관인 것 같았다. 잠시 뒤 고민을 끝낸 입술이 벙긋 벌어졌다.


“안 돼요! 엄마한테 혼나요!”

“엄마한테 말 안 하면 되잖아.”

“거짓말하면 나쁜 어린이!”

“이런 건 거짓말이 아니라, 비밀이라고 하는 거야. 누구나 비밀은 있어. 나쁜 거 아니야.”

작은 입이 다시 오물거린다. 그러고는 이내 도리도리 고개를 흔든다.

누굴 닮았는지 대쪽 같다.

이런 걸 보면 꽉 막힌 유다정을 닮은 게 분명했다. 세상만사 모든 사물을 철저히 이해득실로 따지는 절 닮았다면, 꼬맹이 주제에 이런 대박 건수를 거절할 리 없었다.

설마 비장의 무기도 통하지 않는 건가. 한계에 다다른 정혁의 눈초리가 민 실장에게 날아들었다.

어떻게 좀 해 보란 듯이 눈가를 구기자 민 실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시우 군. 이것 좀 볼래? 이거 엄청 재밌는 거야.”

민 실장이 알록달록 번쩍거리는 화면을 슬며시 내보였다. 최근 어린이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다는 게임이었다.


“어…….”

예상대로 단호하기만 하던 시우의 눈이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했다.


“봐, 엄청나지? 아저씨는 이거 안 해 본 어린이는 봤어도, 한 번만 해 본 어린이는 본 적이 없어.”

“우와…….”

작은 입에서 미약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이스크림 숟가락을 툭 떨어트린 시우는 번쩍거리는 화면을 홀린 듯 주시했다. 제대로 혹한 것 같았다.


“아저씨! 고맙습니다.”

완강히 버티던 고집은 고작 게임 하나에 허무하게 꺾이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자동차 안에서도 시우는 게임 삼매경이었다. 안 해 본 어린이는 있어도, 한 번만 해 본 어린이는 없다는 민 실장의 말은 진실이었다.

시우가 현혹된 틈을 타 정혁은 다시 미끼를 던졌다.


“유시우.”

“네!”

“대표 삼촌이 좋아? 내가 좋아?”

“대표 삼촌!”

한숨을 삼킨 정혁은 작은 머리통을 얄밉다는 듯이 쏘아보았다.

이쯤 되자 심각하게 고민이 되었다. 놀이공원도 안 통하고 휴대폰도 안 먹히니 이를 어쩐다.

그때 휴대폰 화면에 붙들려 있던 시우의 고개가 휙 들렸다. 말간 얼굴이 방싯 웃는다.


“근데 아저씨도 대빵 좋아요!”

복숭아처럼 붉고 보송보송한 뺨이 봉긋 솟아올랐다. 한 입 깨물어 먹고 싶을 만큼 사랑스럽게.


 
어딘가 몽글몽글 낯설고도 이상한 기분이 피어올랐다. 잠시 멎었던 호흡을 천천히 뱉으며 정혁은 차창 밖으로 느리게 시선을 돌렸다.

살그머니 아랫입술을 깨물지만 어쩌지 못하고 자꾸만 입꼬리가 씰룩였다.

대빵이란다. 그냥도 아니고 대빵.

* * *

벨을 누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벌컥 열렸다. 그 문으로 튀어나온 여자는 몹시도 화가 난 얼굴이었다.


“차정혁 씨. 정말…….”

턱을 앙다문 다정은 아들의 손을 잡고 서 있는 남자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엄마! 시우 놀이공원 다녀왔습니다.”

시우의 목소리가 들리자 야차 같던 다정의 얼굴이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유순하게 표정을 바꾼 다정이 시우의 뺨을 감싸며 세상에서 제일 좋은 엄마처럼 웃었다.


“우리 시우. 재밌게 놀았어요?”

“네에! 진짜 진짜 재밌었어요!”

“우와! 엄청 좋았겠다.”

방금만 하더라도 고리눈을 치뜨더니 목소리조차 사근사근했다. 보기보다 이중적인 여자란 생각을 하며 정혁은 헛웃음을 지었다.


“우리 시우 들어가서 손 씻을까?”

“네에!”

현관 안으로 쏙 뛰어든 시우가 도로 유턴해 허리를 반으로 접었다.


“아저씨! 안녕히 가세요!”

“어.”

짧게 손을 들어 보인 정혁의 눈길이 아쉬운 듯 시우의 뒷모습을 좇지만, 곧 야멸차게 닫히는 현관문에 시야가 가로막히고 만다.


“차정혁 씨. 미쳤어요?!”

문을 닫고 돌아선 다정이 그를 복도 구석으로 몰아세웠다. 아들한텐 살갑더니, 그에겐 사납기 그지없었다.


“두 번 다시 이런 식으로 시우 데려가지 말아요. 이거 납치예요!”

정혁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실소를 뱉었다. 실컷 놀아 주고 왔더니만 한다는 소리가 참 야박하기도 했다.


“일만 하지 말고 애하고 좀 놀고 그래. 얼마나 놀고 싶었으면 그렇게 미친개처럼 날뛰어?”

다정은 경악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 언제나 예상을 벗어나는 표현력이 기함할 노릇이었다.


“세상에. 애한테 미친개가 뭐예요?”

“정정. 미친 강아지.”

너무 진지하니까 말문이 다 막혔다.

다정은 뜨거워진 이마를 쥐며 탄식을 삼켰다. 악의가 없는 건 알지만 이 남자와 말을 섞다 보면 은근히 열이 올랐다.

그 순간 그의 얼굴이 다정의 코앞으로 불쑥 다가왔다. 깜짝 놀란 다정이 반사적으로 가슴을 짚어 저지했지만, 입이라도 맞출 듯한 기세였다.

경계 어린 말투가 당황과 뒤섞여 튀어 나갔다.


“뭐, 뭐뭐, 뭐 하려고요?”

“아니, 아들하고 놀고 와서 보여 준댔잖아. 실컷 보라고.”

다정은 숨을 꿀떡 삼켰다. 불쑥불쑥 이러는데 정말 부담스러워 죽을 맛이었다.


“말장난하지 말고 그만 가요.”

“그냥 가라고?”

정혁이 의아하게 눈을 키웠다. 이렇게 가면 어떡하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더 할 말 남았어요?”

“보통 이럴 때 커피 한잔하고 갈래요, 그러던데.”

어이없는 표정으로 쳐다보던 다정은 이내 단호히 선을 그었다.


“커피 없어요.”

“라면은? 사실 그쪽이 더 취향이긴 해. 라면 먹고 갈래요, 해 봐.”

이번엔 어이가 없다 못해 환장할 노릇이었다.

다정은 등 뒤로 문고리를 꼭 움켜쥐었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늑대 같은 남자에게서 시우와 자신의 보금자리만큼은 어떻게든 사수하고 싶었다.

크게 심호흡한 다정은 목소리를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이것 봐요. 차정혁 씨.”

“실컷 보라니까.”

“자꾸 이러면 숨어 버릴 거라고 했죠.”

“어차피 찾을 건데 뭐 하러 귀찮게.”

그의 입술 새로 피식 실소가 흐른다. 다정은 슬슬 약이 올랐다.

원래 이런 남자였던가. 다정이 알기로 그는 차갑고 냉소적이며 무심하기 이를 데 없는 남자였다.

하긴. 이름을 안 것도 불과 얼마 전이라 그에 대해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지만.

어쨌든 눈앞의 남자는 다정이 알던 그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이 남자가 한번 작정을 하면 아무리 진지하게 말을 해도 현실은 우스운 농담 따먹기가 되어 버렸다.

불편했다. 지붕에서 새는 빗물처럼 시우와 제 삶에 서서히 스며들려는 그가.

다소 지친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차정혁 씨. 나 좀 내버려 둬요.”

“내버려 두잖아.”

“이게 내버려 두는 거예요?”

“내가 안 내버려 뒀으면 너 벌써 닳아서 없어졌어. 알지도 못하면서.”

되레 투덜거리는 게 봐줬다는 식이다. 다정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 기가 막혀서.”

“막혔어? 어디 봐.”

또다시 불쑥 다가온 그의 숨결이 뺨과 귓가를 스쳤다. 화들짝 놀라 그의 가슴팍을 밀어낸 다정의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높아졌다.


“그 귀 아니거든요!”

“난 또 그 귀인 줄 알았지.”

능청스럽게 중얼대고는 킥 웃는다. 뻔히 놀리는 말인 줄 알면서도 다정은 어쩌지 못하고 얼굴을 붉혔다.


“신소리 그만하고 가요!”

“라면 먹고 간다니까.”

“글쎄, 라면도 커피도 없다고요!”

쾅!


 
문전박대를 당한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남자의 입가엔 흡족한 웃음이 번졌다. 그렇게 닫힌 문 앞을 한동안 떠나지 못하더니 이내 경쾌한 걸음걸이로 돌아선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도준의 팔이 아래로 툭 떨어져 내렸다. 그의 손에 들린 꽃다발 역시 한없이 초라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긴장과 설렘으로 가슴이 몹시도 두근거렸더랬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모퉁이를 돌기 직전까지는.

그리고 지금은 다른 의미로 가슴이 뛰었다. 불안하고 초조해서 거칠게 뛰는 심장이 옥죄는 것만 같았다.

복도 저편에서 벌어지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 순간, 두 발이 쇳덩이라도 달린 양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더 나아가지 못한 채 도준은 오도카니 그늘진 모퉁이를 지켜야만 했다.

터덜터덜 아파트 입구를 빠져나온 도준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14층. 불이 환하게 밝혀진 곳으로 아련한 눈길이 향했다.

맥없이 떨어져 있던 손이 재킷 안주머니를 더듬어 작은 상자를 꺼내 쥐었다.

조개처럼 다물린 반지 케이스의 입을 벌리자 노란 가로등 불빛을 흡수한 다이아몬드가 빛을 발했다.

5년이나 지나도 영롱한 반짝임은 그대로였다. 반짝반짝 빛나는 유다정처럼.

권도준. 이 한심한 새끼.

늘 이런 식이다. 이렇게 늘 한 걸음씩 뒤처지고 만다.

먼저 알았고 더 오래 알았다.

그런데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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