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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아빠니까 (25/114)


25화 아빠니까
2022.10.27.


열대야가 예정된 저녁, 카페는 드물게 한산했다.

딸랑, 도어벨 소리와 함께 문을 밀고 들어선 시우가 오도도 달려가며 소리쳤다.


“이모오!”

“꺅! 우리 시우 와쪄!”

자지러지게 발을 구른 솔이가 시우를 와락 끌어안았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시우의 엉덩이를 팡팡 토닥여 주던 솔이가 다정을 향해 의외라는 투로 물었다.


“그냥. 산책도 하고 시우 망고빙수 먹고 싶대서 겸사겸사.”

새초롬하게 가늘어진 솔이의 눈이 시우에게 향했다.


“시우야. 네 엄마 공짜 좋아해서 대머리 되겠다. 그치?”

장난스럽게 말하자 시우의 커다란 눈에 걱정이 차올랐다.


“어…… 안 돼요! 엄마 대머리…… 안 돼…….”

“그럼 우리 시우가 대머리 될까?”

“아! 아니! 시우 대머리! 아니야……!”

놀란 고사리손이 퍼뜩 제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 모습을 보며 엄마와 이모는 깔깔 웃고 말았다.

딸랑.

빙수를 나눠 먹으며 노닥거릴 때 카페 문이 열리고 건장한 남자가 들어섰다. 솔이의 남자친구이자 밸런스 파괴자 윤두중이었다.

그의 등장에 웃음꽃을 피운 솔이가 스프링처럼 자리를 차고 튀어 나갔다.


“어머나! 찰떡. 이 시간에 어떻게 왔어?”

“어떻게 오긴. 우리 콩떡이 보고 싶어서 왔지.”

“아잉. 몰라아!”

솔이의 애교스러운 주먹이 쫄티를 입은 남자의 우락부락한 가슴을 퍽퍽 때렸다.

한 쌍의 잉꼬처럼 재잘대던 찰떡과 콩떡이 꽈배기처럼 서서히 한 몸이 되어가는 장면에 다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제가 목격하는 게 차마 현실일 리 없다. 더 봤다간 꿈에 나올까 무서워 재빨리 눈길을 돌리는데, 꽈배기를 향해 180도쯤 돌아간 시우의 머리는 원위치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순진한 눈이 닭살 행각이 한창인 찰떡과 콩떡을 신기한 듯 관찰했다. 아무래도 심의에 걸리지 싶어 다정은 냉큼 아들의 머리를 붙잡아 제자리로 되돌렸다.


“시우야. 보는 거 아니에요. 지지.”

제 아들에겐 예쁘고 아름다운 것만 보여 주고 싶었다.


“찰떡. 주말에 시우도 워터파크 데리고 가자. 응?”

우락부락한 팔에 넝쿨처럼 매달린 솔이가 애교를 부렸다. 두중은 순진한 웃음을 머금고 흔쾌히 답했다.


“콩떡이가 좋으면 나도 좋아.”

“마음은 고마운데 두 사람이나 재미있게 놀다 와.”

다정이 거절하자 솔이의 뺨이 부어오른다.


“왜에? 너 바빠서 시우 데리고 놀러도 못 갔잖아.”

“안 그래도 이번에 시우 방학하면 같이 휴가 다녀올 생각이야. 그리고 둘이 데이트하는데 시우 보느라 제대로 놀지도 못하면 너무 민폐잖아.”

“우린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두중이 재차 권했지만, 다정은 고개를 저었다.


“말씀만으로 고마워요. 찰떡이랑 콩떡이랑 단둘이 재미있게 놀다 오세요.”

끝끝내 거절하며 다정은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부담스러운 닭살 행각에 종종 벌레 씹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지만, 활짝 핀 솔이의 얼굴만은 보기 좋았다.

두중이 잠시 통화를 하러 간 사이 다정이 조심스레 물었다.


“얘. 너무 진지한 거 아니니?”

“내 사랑은 늘 진지했어.”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래?”

“네가 애만 낳았지 사랑에 대해 뭘 알겠니.”

으스대는 모습에 다정은 피식 웃음이 터졌다. 얼빠로도 모자라 금사빠인 친구가 못내 걱정스러웠지만, 저렇게나 좋다니 그걸로 되었다.

* * *

매끄럽게 빠진 건물 외관을 보며 다정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고급 빌라촌인 L파크는 며칠 내로 준공을 완료하고 인허가 단계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소장님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마지막까지 잘 부탁드릴게요.”

현장 소장에게 당부 겸 인사를 건네고 돌아서는데 휴대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를 확인한 다정은 시큰둥한 태도로 전화를 받았다.


“네.”

『유다정 뭐 해?』

“지금 바빠요.”

짧게 자른 다정은 곧바로 종료 버튼을 눌러 버렸다.

안 받으면 안 받는다고 또 회사로 찾아올지 몰라 받긴 했는데 긴말은 필요 없었다. 일단 받긴 했으니 막무가내로 찾아오진 않을 거였다.

지난번 보일러실에서의 밀회 때문인가. 이후로 다정은 몹시 마음이 심란했다. 차정혁과의 거리 두기가 반드시 필요한 시점이었다.

뚝―!

통화가 야멸차게 끊기자 정혁의 표정이 대번에 딱딱하게 굳는다.

까분다. 또.

순간 울컥해서 다시 통화버튼을 누르려던 손가락이 허공에서 머뭇거렸다. 입술을 살짝 깨물다 놓은 그는 결국 휴대폰을 툭 던지다시피 내려놓았다.

빠르게 스치는 차창 밖 풍경으로 눈을 돌리며 정혁은 무겁게 한숨을 뱉었다. 예뻐서 한번 봐주기는 하는데, 짜증이 나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왠지 모르게 싸늘해진 차내 공기에 민 실장이 룸미러를 힐끔 살폈다. 방금까지만 해도 나쁘지 않던 차 전무의 심기가 몹시 불편해 보였다.

민 실장도 눈이 있고 귀가 있었다. 상시 수행하다 보니 차 전무가 무슨 이유로 애를 태우는지 뻔히 보였다.

겉으론 얼빠진 타입이나 민 실장은 상황 판단이 빠르고 행동이 민첩했다. 눈치가 빠르다고 보는 편이 정확할 거다. 오랫동안 중진들을 곁에서 보좌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모른 척하는 게 정답이라는 걸 알지만, 자꾸만 입이 근지럽다. 잠시 고민하던 민 실장이 운전 중인 김 비서의 옆얼굴을 흘끔거렸다.

수행 기사인 김 비서가 약간 걸렸지만, 그 역시 차 전무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은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을 거였다.

다행스러운 건 김 비서의 가장 큰 장점이 비서가 갖추어야 할 덕목 중 하나인 과묵함이라는 거다.

고민을 끝낸 민 실장이 마침내 뒷좌석을 향해 넌지시 상체를 비틀었다.


“저…… 전무님. 제가 비록 부하직원이지만 결혼도 했고 애가 둘이다 보니 결혼 선배로서 조언 한 말씀 드리자면…….”

조곤조곤 말을 연결하던 민 실장은 뒤늦게야 정신이 반짝 들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넘게…….”

“계속해요.”

“네?”

민 실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갑자기 공대를 하니까 왜인지 모골이 송연했다.


“한 말씀 한다면서요.”

“그게…… 그러니까.”

“하라니까. 한 말씀.”

공대하다가 또 반말이다. 빨리 말하지 않아 짜증이 난 모양이었다.

다무는 게 나을지, 뱉는 게 나을지 헷갈렸지만 주책맞게 터진 입은 결국 말을 뱉고야 말았다.


“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그러니까…… 유다정 씨 마음을 사로잡으려면 우선 아드님부터 공략하라는 조언을 드리고 싶습니다.”

정혁이 눈썹을 스윽 끌어 올렸다.


“아드님?”

“아드님이시라고…….”

민 실장의 눈이 지진을 일으켰다. 이건 명백한 실수 같았다.


“아, 제가 잘못 알았나 봅니다.”

“아뇨. 맞아요. 내 아들.”

정혁의 입꼬리가 흡족하게 미끄러졌다.

아들.

유다정이 ‘아들’이라는 말에 극도로 예민한 반응을 보여 자제했었다. 그런데 타인의 입을 통해 제 아들이라는 소리를 들으니까 왜인지 기분이 남달랐다.


“민 실장. 애가 둘이라고 했습니까?”

“네? 네! 그렇습니다.”

“사실 이런 고민을 한 지는 얼마 안 됐는데…….”

정혁이 느릿하게 턱을 문질렀다.


“내가 여자는 좀 꼬시거든. 근데 애들은 잘 몰라서 말입니다.”

민 실장은 마른침을 꿀떡 삼켰다. 차 전무의 어색한 존댓말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혹시 노하우 같은 거 있습니까? 예를 들면 다섯 살 꼬마를 사로잡는 비결이랄지.”

긴장으로 굳어진 민 실장의 입가가 사르르 풀어졌다. 드디어 차 전무의 신임을 얻은 것만 같아 감격이 북받쳐 올랐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무님! 우리 둘째가 아드님과 딱 같은 나이입니다. 다섯 살은 제가 꽉 잡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믿음직스럽네.”

차창 밖으로 눈길을 돌린 정혁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번졌다.

민 실장의 말이 일리가 있었다. 유시우 마음을 사로잡으면 유다정은 넘어오게 되어 있었다.

1+1이니까.


 

* * *

도면 작업이 한창이던 다정의 눈길이 심하게 몸을 떠는 휴대폰 화면으로 옮겨갔다.

동그랗던 눈이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가늘어진다.

「이상한 남자」

참 꾸준했다. 아침저녁으로 질리지도 않는 모양이다.

다정은 받지 않을 생각으로 다시 도면 작업을 이어 나갔다.

징, 끊어진 휴대폰이 다시 짧게 진동했다. 이번엔 메시지였다. 다정은 화면을 열어 메시지 창을 띄웠다.


「유시우 내가 데려가.」

아연한 다정은 다급히 통화버튼을 눌렀다. 신호는 길지 않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목소리가 울렸다.


『내 전화 피하는 거 맞네.』

“이봐요, 차정혁 씨. 시우 이모가 갈 거니까 애한테 손대지 말아요.”

『배솔이 씨 돌려보냈어.』

“그게 무슨 말이에요?”

『무슨 말이긴. 배솔이 씨랑 나랑 번호 딴 사이란 소리지.』

“…….”

이 남자가 언제 솔이에게까지 마수를.

배솔이, 이 배신자. 둘이 언제부터 내통하는 사이가 된 건지 황당했다.


『끊어. 나 유시우랑 놀 거야.』

“당신이 뭔데 시우랑 놀아요?”

휴대폰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왜? 난 유시우랑 놀지도 못해? 놀려면 소송해야 하나?』

“이것 봐요, 차정혁 씨!”

『지금 못 봐. 유시우랑 놀 거라니까.』

하여간 시종일관 당당하다 못해 뻔뻔했다.


“나 지금 농담하는 거 아니에요.”

『보고 싶으면 기다려. 다 놀고 보여 줄 테니까. 뚝―.』

“하……!”

기가 막혀서 웃음도 안 나왔다. 눈을 질끈 감은 다정은 깊게 심호흡하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내키지 않을 뿐 크게 불안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아빠니까. 시우를 위험하게 하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하나 걱정스러운 거라면 아무 말이나 뱉고 보는 그 물색없는 입이었다.

제발 시우한테 쓸데없는 소린 하지 말아야 할 텐데.

* * *

정혁의 찌푸린 눈이 눈앞에 펼쳐진 전경을 크게 훑었다.

아주 번잡하고 시끄럽다. 게다가 유치원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새끼 짐승들로 버글거렸다.

대각선 쪽으로 눈길을 내리자 어쩐 일로 유시우가 얌전하다. 정혁의 손가락을 꼭 쥔 채 시우는 앙증맞은 입술만 오물거리고 있었다.

지금 있는 장소가 낯설고 어색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말똥말똥 빛나는 눈은 그렇지가 못했다. 반짝거리는 게 마치 신세계를 만난 듯한 눈이었다.


“여기 어때? 마음에 들어?”

무심히 떠봤다.


“어……. 엄마한테 말 안 하고 모르는 사람 따라오면 안 되는데…….”

회전목마를 빨아먹을 듯이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모르는 사람 아니니까 괜찮아. 아까 이모한테 확인했잖아.”

새카맣게 각 잡힌 슈트를 빼입고 그는 시우와 함께 놀이공원으로 나아갔다.

놀이공원이 낯선 건 시우만이 아니었다. 꿈과 환상의 세계가 낯설고 어색하긴 차정혁도 마찬가지였다.

종합적인 코칭과 안내는 민 실장이 맡았다. 입장하자마자 민 실장이 안내한 곳은 동화책에 나올 법한 이상한 건물이었다.

잠시 후 차 전무의 섬뜩한 표정과 마주한 민 실장은 목숨을 걸 각오로 간언했다.


“전무님. 이런 데 오시면 이런 거 써 주셔야 합니다.”

아주 못마땅한 눈길이 그의 손에 들린 동물 귀 머리띠를 노려보았다.


“미친 거야?”

“아드, 아니! 시우 군을 생각해서라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더니, 아들 얘기가 나오자 대번에 표정이 누그러진다.

정혁은 한숨을 꾹 눌러 삼켰다.


“그게 뭔데?”

“이건, 그러니까…… 코끼리 같습니다만.”

“코끼, 하 씨…….”

순간 욕이 나올 뻔했지만, 유시우를 생각해서 꾹 참았다.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어 한숨이 흐르지만 금세 마음을 고쳐먹었다.

해야지. 유시우인데. 그리고 차정혁은 아빠니까.


“코끼리 싫어. 다른 거.”

“원숭이는 어떠십니까?”

“너무 경박해. 좀 점잖은 거 없어?”

고심하던 민 실장이 앙증맞고 귀여운 머리띠를 손에 쥐었다.


“그럼 토끼는 어떠십니까? 전무님하고 아주 딱…….”

그 순간 차 전무의 두 눈에 전에 없을 살기가 어렸다. 뒤늦게야 뭔가 실수했다는 걸 깨닫지만, 때는 늦었다.


“따악? 토끼랑 나랑 따악? 어딜 봐서 내가 토끼랑 딱이야?”

“제, 제 말씀은 그러니까…….”

민 실장의 관자놀이를 타고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정혁은 어이가 없어서 피식피식 실소했다.


“이 봐, 민 실장. 뭘 잘 모르는 거 같은데, 내 인생을 통틀어 그딴 짐승은 절대 해당 사항 없어. 알겠나?”

“아무렴요. 당연히 그러실 테죠. 그럼…….”

민 실장의 안목이 영 못마땅했던 그가 눈짓으로 뭔가를 가리켰다.


“저거. 저게 그나마 좀 낫네.”

“정말이지 안목이 탁월하십니다!”

거울 앞에 선 정혁은 셔츠 깃과 타이의 모양을 점검하고 돌아섰다. 느긋하게 매장을 나서며 어색한 머리를 슬쩍 더듬어 보았다.

큼직한 호랑이 귀가 그런대로 만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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