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나 오늘 집에 안 갈래
(24/114)
24화 나 오늘 집에 안 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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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나 오늘 집에 안 갈래
2022.10.23.
“아이참! 사진 찍어야 한다니까 벌써 먹으면 어떡해?”
현아가 시끄럽게 타박했지만, 정혁은 안 들리는 척 제 식사에만 집중했다.
SNS에서 핫하다는 현아의 채근으로 오게 된 이탈리안 레스토랑은 최근 독특한 퓨전 스타일로 각광을 받았다.
연방 터지던 휴대폰 플래시가 잠시 멎고 현아가 뭔가를 골똘히 생각한다. 잠시 뒤 자신의 샹델 백을 테이블 위에 올리고 요리조리 위치를 잡기 시작한다.
예술작품 같은 메인 요리의 배경으로 명품 백이 퍽 마음에 드는지 다시 플래시 세례가 터져나간다.
교양 없는 상식 밖의 일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원래 상식이 없는 애라 그러려니 했다.
정혁은 말없이 식사를 이어 나갔다. 요리는 썩 괜찮았다. 재료도 최상이고 맛도 훌륭했다.
유다정이랑 유시우도 이탈리안 요리를 좋아할까.
맛있는 걸 먹으니까 자연스레 두 사람이 떠올랐다.
“앗! 어떡해!”
별안간 여대생처럼 보이는 앳된 종업원이 작게 비명을 터뜨렸다.
테이블보를 타고 흐른 와인이 현아의 허벅지를 적시고 흘러 하얀 샌들의 스트립까지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서브 메뉴를 서빙하던 종업원이 실수로 와인 잔을 넘어뜨린 모양이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 둔 고가의 핸드백이 종업원의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경악한 얼굴로 굳어 버린 현아가 헛숨을 뱉었다. 벌써 표정이 싸한 게 그냥은 안 넘어갈 기세다.
그 장면을 무심히 지켜보며 정혁은 작게 썬 관자구이를 입에 넣었다.
“죄송합니다, 손님. 정말 죄송합니다.”
허둥거리던 종업원이 몇 번이고 머리를 조아려 사과했다. 도도하게 팔짱을 낀 현아는 난감해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야! 너 이게 얼마짜린 줄 알아?”
웃는 표정으로 윽박지르며 보란 듯이 종업원의 눈앞에 얼룩진 다리를 휘적거린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세탁비를…….”
“세탁비? 야! 이게 세탁해서 되는 건 줄 알아?”
조각낸 아스파라거스를 입에 넣는 정혁의 귀로 앙칼진 고함이 파고들었다.
저게 아무리 비싸도 현아에겐 구멍가게에서 껌 한 통 사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거다.
유명 장인이 만들었든 차 한 대 값이든, 어차피 서너 번 신고 처박힐 물건이 아닌가.
좋게 넘어가도 될 일이지만, 갑질을 하고 싶어 환장한 현아에게 그런 아량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자신의 우월함을 삐뚤어진 방식으로 과시하고 싶은, 어쩌면 열등감일지도 모를 심리. 화려한 포장지로 결핍을 감추려 애쓰지만, 그걸로는 어딘가 부족했다.
충족되지 않는 나머지 것들은 약자를 괴롭히면서 얻는 만족으로 채워 나간다. 타고난 태생이 그러하니, 정혁에게도 어느 정도 비슷한 부분이 존재할 거였다.
가령 세상사와 타인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는 성향 같은 것도 애초에 저 말고는 다 아래로 깔아보는 심리가 작용한 탓일지도 모른다.
정혁은 무심한 얼굴을 하고 관자구이를 한 조각 더 입에 넣고 씹었다.
부드럽고 쫄깃하고 풍미가 좋았다.
맛있다. 유시우 데리고 올까.
“아, 진짜 짜증 나! 네까짓 게 뭐로 보상할 거야!”
마침 저녁 시간이라 레스토랑 안을 가득 채운 손님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죄송합니다. 손님. 어떡하죠? 아…… 정말 죄송합니다.”
종업원도 어느 정도 눈치는 있었다. 자신의 형편으로 샌들값을 보상하긴 어려울 것이다.
손님의 몸에 걸친 명품들만 보아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를 하는 것뿐이었다.
“미친X아! 입으로만 떠들지 말고 어떻게 좀 하라고!”
폭발한 현아가 악다구니를 썼다. 사회적으로 갑질이 이슈화되는 시기에 나 갑질하는 재벌이라고 광고를 했다.
“제, 제가 최대한 닦아 보겠습니다.”
넙죽 무릎을 꿇은 종업원이 깨끗한 냅킨을 쥐고 현아의 다리와 구두에 묻은 와인을 닦기 시작했다.
“아씨! 더럽게 어디다 손을 대?!”
현아의 샌들 뒷굽이 꿇어앉은 종업원의 허벅지를 콱 찍었다.
소란을 듣고 달려온 오너 셰프와 지배인까지 머리 숙여 사죄하지만, 그럴수록 현아는 더 의기양양했다.
조용히 방관하던 정혁은 관자구이의 마지막 조각을 입에 넣고 천천히 씹었다.
어느샌가 현아는 꿇어앉은 종업원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툭툭 찌르며 훈계를 가장한 모욕을 주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정혁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냅킨으로 입가를 정리했다. 그리고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완벽하게 식사를 끝마치고 일어나 나가려는 그를 지배인이 다급히 붙잡았다.
“저…… 손님. 저희가 배상은 할 테니, 일행분 진정 좀 시켜 주십시오.”
애원 같은 부탁의 말에 정혁의 눈길이 종업원과 현아를 스쳤다. 다시 지배인에게 눈길을 되돌린 정혁은 바지 주머니에 느리게 손을 찔러넣었다.
“모르는 여잡니다.”
* * *
“오빤 거기서 내 편 안 들어 주고 뭐 해?”
현아가 척척한 스커트를 들추며 투정을 부렸다.
운전대를 잡은 정혁은 말없이 도로를 달렸다. 그 상황에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레스토랑을 빨리 벗어나 주는 거였다.
그가 모른 척 나가 버리자 휘둥그레진 현아는 배상이고 뭐고 필요 없다며 부리나케 정혁을 따라나섰다.
버리고 갈 수 있었다. 막 출발하려는 차에 난입에 가깝게 올라타지 않았더라면.
“아 진짜 속상해. 반 죽여 놨어야 하는 건데.”
방향 지시등을 켠 정혁은 사이드미러를 살피며 차선을 변경했다. 그의 침묵이 길어지자 눈치가 보이기 시작한 현아가 애교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에이, 오빠랑 데이트하는 날인데 내가 한번 봐줬다.”
저 혼자 펄쩍 뛰다가 저 혼자 금세 헤실거린다.
조용한 식사를 방해받은 것에 화는 나지 않았다. 화도 상대에게 기대가 있을 때 나는 거다.
명한가 사람이 되어서도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회사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그 꼴을 그냥 두고 볼 박 회장이 아니니, 그조차도 정혁이 신경 쓸 문제가 아니었다.
네 이런 점이 싫으니까 따끔히 고치라는 잔소리를 할 생각 또한 없었다. 잔소리도 관심이 있어야 하는 거니까.
어차피 타고난 심성이 되바라졌으니, 잔소리로 될 일도 아니고.
묵묵히 핸들을 붙잡고 침묵하던 정혁의 입꼬리가 살그머니 말려 올라갔다.
유시우는 누굴 닮아 그렇게 착하고 예의가 바른지 모르겠다. 어린 게 꾸뻑꾸뻑 공손하고 씩씩하게 인사할 때마다 대견하고 기특했다. 아마 유다정을 닮았겠지.
게스트하우스에서 유다정을 처음 보았을 때 정혁은 그녀가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더랬다. 식사를 받아 갈 때마다 몇 번이고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 것이다.
공짜도 아니고 정당한 값을 치르는데, 매번 뭐가 저리 고마울까.
나중에야 알았다. 그 여자가 무척 착하고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걸.
끼이익.
차가 멈추자 현아가 차창 밖을 확인했다. 도착지가 자기 집 대문 앞이라는 걸 깨닫고 입이 툭 나온다.
정혁을 휙 돌아보는 표정이 뾰로통했다.
“현아 집에 가라고?”
팔꿈치를 접어 머리를 괸 정혁은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핸들만 톡톡 두드렸다. 현아가 빨리 내려 주었으면 하는 기색이 여실했다.
하지만 현아는 꿋꿋한 아이였다. 부드럽게 표정을 바꾼 그녀가 정혁의 어깨에 살포시 머리를 기댔다.
“아항, 오빠. 와인 몇 잔 마셨더니 현아 너무 힘들어.”
“힘드니까 들어가.”
“싫어헝. 나 오늘 집에 안 갈래.”
한 번도 돌리지 않던 정혁의 눈길이 그제야 제 팔에 거머리처럼 매달린 현아에게 향했다.
“왜?”
“왜는? 알면서. 암튼 현아 오늘 집에 안 들어갈 거야.”
“그럴래?”
“그렇다니까.”
현아의 어깨가 수줍게 말렸다. 가만히 눈을 맞추던 정혁이 턱을 끄덕였다.
“그래, 그럼.”
안전띠를 풀고 차에서 내린 그가 휴대폰을 쥐어 올렸다. 어딘가로 전화를 걸며 차 뒤로 걸어간 그가 트렁크를 뒤지기 시작했다.
이내 무언가를 가지고 운전석 쪽으로 돌아온 그의 목소리가 반쯤 열린 창문 틈으로 흘러들어 왔다.
“나야. 지금 논현동으로 차 한 대 보내. 내 차는 하룻밤 누구 빌려주려고. 그렇게 됐어. 빨리 보내.”
통화를 마친 정혁이 열린 차창 안으로 가지고 온 물건을 툭 던지며 말했다.
“노인네 말이 한데서 자면 입 돌아간대. 덮고 푹 자.”
제 무릎 위로 떨어진 담요를 보는 현아의 얼굴이 부글부글 일그러졌다.
“아씨! 알았어, 알았다고!”
빽 소리친 현아는 담요를 패대기치고 곧장 차에서 내렸다.
시근대며 걸어가 제집 초인종을 신경질적으로 누르는 뒷모습이, 나 토라졌어! 라고 말하는 사이 정혁은 다시 차에 올랐다.
신속히 핸들을 꺾으며 휴대폰을 쥐었다.
“차는 없던 거로 해.”
* * *
조곤조곤 동화책을 읽어 나가는 목소리에 쌕쌕 평온한 숨소리가 뒤섞였다.
책장을 넘기려던 다정의 눈길이 침대로 향했다. 시우는 어느새 꿈나라로 떠나고 없었다.
잠든 시우를 한동안 사랑스럽다는 눈길로 바라보던 다정은 동화책을 덮고 살그머니 일어났다.
조용히 방을 나와 문을 닫고 돌아서는데, 문득 식탁 위에 펼쳐 놓은 노트북 화면이 눈에 잡혔다. 새로 들어온 메일을 확인하라는 알림이 떠올라 있었다.
다정은 가볍게 한숨을 몰아쉬었다. 퇴근해서도 일이 끊이질 않았다. 퇴근 전에 확인했는데, 그새 새로 들어온 메일이 대여섯 통이나 되었다.
모두 시공 업체에서 보낸 견적서나 클라이언트 수정 요구와 관련된 메일들이었다.
아침 회의에 도준에게 보고하고 업무에 반영하려면 대충이라도 내용을 파악해 둬야만 했다.
하나하나 메일을 열어 보고 요약한 내용을 메모해 나갈 때였다. 갑자기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깜짝 놀란 다정의 눈길이 반사적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밤 9시 반을 넘긴 시각.
다정은 조금 당혹스러운 기분을 안고 벽으로 다가가 스크린에 떠오른 얼굴을 확인했다. 캡 모자를 눌러 쓴 남자였는데 얼굴은 정확히 보이지 않았다.
유심히 스크린을 바라보는데, 남자의 고개가 화면을 향해 번쩍 들렸다. 그 순간 소스라치게 놀란 다정은 소리를 지를 뻔한 입을 틀어막고 말았다.
차가운 소름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동공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입을 틀어막은 손은 덜덜 떨렸다.
쿵쿵!
벨을 누르고도 기척이 없자 남자가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쿵쿵!
소리가 이어지자 퍼뜩 현관 앞까지 달려간 다정은 어쩔 줄을 몰라 그 앞을 안절부절 서성였다.
어쩌지? 이대로 내버려 두면 이웃에서 항의가 들어 올지도 모른다.
쿵쿵쿵!
돌아가지 않고 계속 문을 두드리는 걸 보니 다정이 집에 있는 걸 확인하고 온 게 분명했다.
경찰을 부를까? 그러다가 괜히 이웃에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면?
쿵쿵! 쿵!
입술을 잘근 깨문 다정은 일단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대범하게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다정이 나오자 지루하게 굳어 있던 남자의 얼굴에 반가움이 스친다. 끔찍한 얼굴을 참고 견디며 다정이 그를 밀어붙였다.
“미쳤어?!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어떻게 알긴. 내가 너 사는 집 정도는 알아 두는 게 당연하지.”
약간 허스키한 남자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여 흘렀다.
다정은 기가 막혀서 헛숨을 뱉었다. 그러는 중에도 가슴이 요동쳤다. 남자는 다정에게 가로막힌 문을 계속해서 기웃거렸다.
“집 좋다 야. 근데 너 애도 있더라. 언제 결혼했냐?”
“……뭐?”
“니 아들래미 엄청 잘생겼더라. 그래, 애 아빠는 뭐 하는 사람이야?”
그의 입에서 시우가 언급되자 다정의 안색이 급격히 창백해졌다.
“헛소리 말고 꺼져! 다시 한번 찾아오면 경찰에 신고할 테니까 그렇게 알아.”
“우리 사이에 왜 이래? 내가 네 얼굴 좀 보러 올 수도 있지 그게 죄냐?”
“꺼지라고!”
견디다 못한 다정이 저답지 않게 빽 소리를 질렀다. 고성에도 남자는 실쭉거리며 웃었다.
“갈 데가 없는데 어디로 꺼지냐? 신세 좀 지자.”
그가 현관 문고리를 향해 손을 뻗는 순간 전율 같은 소름에 치가 떨렸다. 방어적으로 그를 밀쳐 낸 다정이 주머니를 뒤져 몇 장의 지폐를 내던졌다.
“여관을 가든 도박장을 가든 이거 갖고 꺼져! 다시 내 앞에 나타나면 정말 죽여 버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