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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쓰라린 1패 (23/114)


23화 쓰라린 1패
2022.10.20.


척추를 따라 미끄러진 손길이 여린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빈틈없이 맞닿은 남자의 근육이 긴장으로 수축하는 게 느껴졌다. 뜨겁고 단 숨이 공기 중으로 뒤섞이고, 쿵쿵 뛰는 심장박동은 거칠게 서로를 때렸다.

점점 깊게 밀려드는 숨결에 다정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어떻게 숨을 쉬어야 하는지 방법조차 잊은 듯했다.

입맞춤은 거칠지 않았다. 그런데 움직임이 워낙 느리고 요염하다 보니 그조차도 외설스럽게 느껴졌다.

그가 조금 더 농밀하게 감겨 왔을 때 그의 어깨를 감싼 매끄러운 재킷이 다정의 손안에서 사정없이 구겨졌다.

아찔한 감각에 사로잡힌 다정은 포식자에게 덜미가 잡힌 먹잇감처럼 버둥거렸다.


“……1분! 1분 지났, 흡!”

찰나를 놓치지 않고 딴지를 거는 입술이 다시 삼켜졌다.


“……지, 진짜. 1분 끄읏…….”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정혁은 제 어깨를 팡팡 때리는 손목을 결박해 벽으로 찍어 눌렀다.

목덜미를 감아쥔 커다란 손이, 귓불을 더듬는 지문의 감촉이 뜨거워서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사탕처럼 머금고 굴려 댄 입술이 얼얼해질 무렵, 풍랑처럼 몰아치던 숨결도 살그머니 물러났다.

그제야 다정은 참았던 호흡을 한꺼번에 터뜨렸다. 저도 어쩌지 못하고 할딱거리는 숨소리가 부끄러워서 숨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 모습을 감상하듯 주시하는 남자의 입술이 만족스럽게 늘어졌다. 천천히 다가온 엄지가 다정의 젖은 입술을 느리게 뭉그러트렸다.

몹시 에로틱한 상황에 다정은 다시 호흡이 멎고 말았다. 그러기도 잠시.


“죽였지?”

하X드 출신의 남자는 무뢰배 같은 말을 지껄이며 킥 웃었다.

눈도 맞추지 못한 채 허둥거리는 다정의 얼굴이 막 쪄 낸 고구마처럼 붉었다. 마찬가지로 붉게 달아오른 목덜미에 그의 손이 와 닿았다.


“머리 왜 잘랐어? 긴 머리 예뻤는데.”

“좀…… 거추장스러워서요.”

정혁은 한숨 같은 웃음을 흘렸다.

예전엔 막 잠에서 깬 것처럼 부스스하게 늘어트린 나른한 분위기가 좋았는데. 지금은 흰 목이 훤히 드러나서 이건 이거대로 생각이 많아졌다.

에어컨 바람조차 스며들지 않은 공간은 쪄 죽을 만큼 더웠다. 그게 아니더라도 이 상태론 딱 말라 죽지 싶었다.

고민 끝에 카디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쥔 다정이 자판을 두드렸다.

도준에게 방배동 리모델링 현장으로 와 달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기다리자 곧 알았다는 답장이 돌아왔다.

귀를 기울이자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나 해서 문을 조금 열고 밖의 동태를 살폈다. 짐작대로 도준은 나가고 없었다.


“그, 그만 나가요.”

밖으로 나오자 사우나에 갇혔다 탈출한 것처럼 상쾌한 기분마저 밀려들었다. 어슬렁어슬렁 따라 나온 그의 얼굴도 열에 달아 좀 붉었다.

땀이 찬 재킷을 벗어 아무 데나 툭 던진 그가 타이를 끌어내리며 책상에 엉덩이를 걸쳤다. 눅눅해진 셔츠 너머로 어렴풋이 속살이 비쳤다.

다정은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는 동시에 죄책감이 스쳤다. 그와 저지른 부적절한 행위 때문이었다.

어쨌든 다른 여자와 결혼할 남자였다.

결혼을 꿈꾸지 않는다. 그렇다고 불륜을 꿈꾼 것도 아니었다.

다정의 입술이 조심스레 달싹였다.


“저기……. 차정혁 씨. 다신 이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뭘?”

“방금 같은 부적절한 행동…….”

정혁은 피식 웃었다.


“애인끼리 키스하는 게 부적절해? 애인이었잖아. 방금 헤어졌지만.”

“난 동의한 적 없어요.”

“가만히 있길래 해도 되는 줄 알았지.”

“자꾸 장난치지 말고요.”

“장난 아닌데.”

그의 말처럼 이어지는 목소리가 제법 진중했다.


“내가 출장 가는 비행기 안에서 무슨 생각한 줄 알아?”

“…….”

“난 유시우가 제일 보고 싶을 줄 알았어. 실제로 그랬고.”

보고 싶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제 아들이.


“근데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처음 달려온 데가 유치원이 아니고 여기더라고.”

미국에 체류하는 한 달 내내 아들이 눈에 밟혔지만, 머릿속을 지배하는 건 유다정이었다.

다정은 잠시 할 말을 잃고 머뭇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차정혁 씨. 곧 오현아 원장하고 결혼한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무슨 문제라도 있어? 하는 듯이 태평하게 돌아온 반문에 다정은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설마 이 남자가 이 정도로 윤리의식이 빵점일 줄은 몰랐다.


“그런데, 라뇨? 차정혁 씨가 이러면 나까지 나쁜 여자가 되잖아요. 난 차정혁 씨랑 결혼할 사람한테 미안한 마음 가지고 싶지 않아요.”

정혁은 낮게 코웃음 칠 뿐 대꾸하지 않았다.


“그래서 말인데, 앞으로 각자 인생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 대목에서 정혁의 눈가가 불편하게 굳었다.


“말했지. 딴 새끼가 내 아들 아빠 노릇 하는 거 못 본다고.”

“어차피 차정혁 씨도 결혼할 거잖아요. 결혼하면 또 아이가 생길 거고요…….”

“그건 그거고 유시우는 유시우야.”

이젠 다정도 그에 대해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그의 우기기식 화법에 논리를 적용하는 건 무의미했다.

그럼 설득이다.


“그런 거라면 걱정 말아요. 나 평생 결혼 안 해요. 난 시우만 있으면 돼요. 차정혁 씨 걱정하는 일 없도록 나 혼자 시우 잘 키울 수 있어요.”

“…….”

“우리 시우 잘 키울 테니까, 차정혁 씨는 멀리서 지켜봐 주면서 그렇게 차정혁 씨 인생 살았으면 좋겠어요.”

어린애 달래듯 구슬려 보지만, 떨떠름한 표정의 그는 되레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안 내키는데.”

“자꾸 그러면 나랑 시우랑 당신이 모르는 곳으로 꽁꽁 숨어 버릴 거예요.”

씨알도 안 먹힐 고집스러움에 협박도 시도해 보지만, 그의 입가엔 가소롭다는 웃음만 물렸다.


“해 봐. 내가 못 찾나. 이제 다 아는데? 이름도 나이도.”

 

 

* * *



“자재 때문에 공사 시일 길어지면 손해가 얼마나 큰 줄 알아?”

현장 소장이 뻐끔 뱉어 낸 담배 연기와 함께 투덜거렸다. 안전모를 벗은 도준은 열기가 고인 머리를 식히며 웃었다.


“손해를 봐도 제가 보는데 왜 소장님이 화를 내세요?”

“다 권 대표 걱정해서 하는 말이지. 내 마음을 그렇게 몰라?”

“알죠. 제가 소장님 마음을 왜 모르겠어요.”

너스레를 떤 도준이 사람 좋게 웃었다.

화물 사고로 자재 공급에 차질이 생겼다는 말을 듣고 천안 현장에 내려온 참이었다. 도준은 쾌청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차피 이틀 동안 비랍니다. 자재가 와도 외부 공사는 미뤄야 하니까, 준공 날짜는 얼추 맞출 수 있을 겁니다.”

그사이 다른 작업부터 하기로 타협을 보고 돌아설 때 등 뒤에서 소장의 목소리가 울렸다.


“참, 권 대표! 조만간 시원하게 막걸리 한잔해야지?”

“예예! 착공 얼마 안 남았으니까 그때 거하게 한번 모실게요!”

친근하게 손까지 흔들어 보인 도준은 곧장 차를 몰아 현장을 빠져나왔다.

고속도로로 진입해 뻥 뚫린 도로를 내달리는데 영 속도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질주하는 전방의 차선이 시야로 쏟아져 들어오는 동안에도 도준의 뇌리에는 그날의 장면만이 가득했다.

분명 방배동 리모델링 현장으로 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다정의 차가 주차장에 그대로 서 있는 걸 발견한 순간, 또다시 뭔가가 어그러졌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얼마 뒤 건물을 빠져나오는 한 남자.

차정혁. 그 남자였다.

넋을 잃은 도준은 그 남자를 태운 검은 세단이 유유히 멀어지는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었다.

묘한 감정을 동반한 초조함이 휘몰아쳤다. 부아아앙! 답답한 심정을 대변하듯 가속 페달을 밟는 도준의 발에 더욱 힘이 실렸다.

별안간 진동음이 귀에 잡힌다. 반짝 정신을 차린 도준은 저도 모르게 힘껏 짓이기던 가속 페달에서 발을 떼었다.

액정으로 눈길을 돌리자 의외의 이름이 떠올라 있었다.

「배솔이」

친분이 있긴 했지만, 다정을 통하지 않고선 사적 교류가 없는 사이라 도준은 의아한 얼굴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도준 오빠? 다정이 통화가 안 돼요.』

“클라이언트랑 미팅 중일 거야. 무슨 일 있어?”

『실은 저희 엄마가 조금 다치셨어요.』

어쩐지 목소리가 다급하게 들리긴 했다.


“저런, 많이 다치셨어?”

『화상이요. 반찬 만들다가 기름에 데어서 응급실에 오긴 했는데, 심각한 건 아니에요. 그것보다 시우 데리러 가야 하는데, 다정이랑 전화가 안 되니까 애가 타서요.』

도준의 입가에 부드러운 웃음이 번졌다.


“안 그래도 근처 지나는 길이야. 시우는 나한테 맡기고, 넌 어머니나 잘 살펴드려.”

『정말요? 그럼 너무 고맙죠. 오빠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그럼 부탁해요.』

 

* * *

모처럼 운전대를 잡은 정혁은 한가롭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핸들을 미끄러트렸다.

차가 말썽이니 데리러 오라는 현아의 거짓말은 더 이상 반복되지 않았다. 그랬음에도 이젠 제 발로 유치원을 찾아가는 길이 기껍기까지 했다.

차를 주차하고 가벼운 걸음으로 계단을 뛰어오르며 팔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도 딱 맞았다. 곧 조용하던 현관으로 새끼 짐승들이 뛰쳐나오며 괴성을 질러 댈 걸 생각하자 둥실 떠오른 풍선처럼 기분이 설렜다.

그렇게 한계치까지 몸집을 키운 풍선이 김새듯 팡 터져나간 건 한순간이었다.

정혁의 시선이 껄끄러운 남자의 얼굴을 주시했다. 피차 마찬가지라는 듯 도준의 건조한 눈길도 그의 얼굴에 길게 머물렀다.

그때 짹짹대며 아이들이 현관으로 밀려 나왔다. 동시에 허공에서 팽팽하게 얽혔던 두 남자의 시선도 끊어졌다.


“시우야!”

“대표 삼촌!”

도준을 발견한 시우의 만면에 웃음이 피었다. 뭐가 그리도 신나는지 어린 게 앙증맞은 다리를 재게도 놀린다.


“유시우!”

평소답지 않게 키운 정혁의 목소리가 신나게 달려 나가던 시우의 달음질에 제동을 걸었다.

애초에 멀리서 지켜보자는 심산이었다. 유다정이 그러라고 했으니까. 그런데 무슨 심리인지, 유시우가 권도준에게 안겨 드는 꼴은 또 못 보겠다.

대략 3미터 거리를 두고 도준을 향해 나아가던 시우의 발이 우뚝 멈춰 섰다.

완벽한 트라이앵글 구도로 마주 선 세 사람. 아이를 두고 묘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시우야. 삼촌한테 와야지.”

무릎을 굽힌 도준이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재촉했다.


“유시우. 이쪽으로 와.”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로 정혁이 가세했다. 어리둥절한 시우의 입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어…….”

번민과 혼란에 휩싸인 무구한 눈이 두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우리 시우. 엄마한테 가자. 어서 삼촌한테 와.”

“유시우. 이쪽으로 오라니까.”

앙증맞은 입을 오물거리던 시우의 발끝이 이내 결단을 내리고 움직였다. 작은 발이 저를 향해 돌아선 순간 정혁의 입꼬리가 우쭐하게 미끄러진다.

정혁은 주머니에서 손을 빼 팔을 조금 벌렸다. 생각해 보니 한 번도 안아 준 적이 없더랬다.

짧은 찰나 제 품에 안긴 시우를 번쩍 들어 공중에서 3회전 시키겠다는 시뮬레이션도 마쳤다.

아들을 처음으로 안아 보는 역사적인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데 부지런히 내달리던 시우의 다리가 별안간 두어 걸음 앞에서 끼익 멈추었다.

귀여운 입이 짹 벌어진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예의 바르게 꾸뻑꾸뻑 두 번이나 허리를 굽힌 뒤 시우는 돌아섰다.


“대표 삼촌!”

와다다 달려가 도준의 목을 끌어안고 꺄르륵 소리를 내며 웃는다.

시우를 안아 들고 일어난 도준이 단정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명확한 표정은 없지만 으쓱한 기색이 여실했다.

도준이 정혁을 등지자 그의 목에 안긴 시우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든다.


“아저씨 빠빠이!”

“…….”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들어 보인 정혁의 손끝이 이내 힘없이 툭 떨어졌다.

아무것도 아닌 남자와 함께 멀어지는 아이를 보는 눈동자가 불길처럼 이글거렸다.

지금까지 이런 굴욕은 없었다. 차정혁 인생 최초의 쓰라린 1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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