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1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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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1분만
2022.10.16.
“세상에. 어쩜 그렇게 뻔뻔한지.”
팔짱을 낀 여자가 기막혀하며 혀를 찼다.
방직 공장으로 시작해 원단가공업과 의류제조업으로 방귀깨나 뀐다는 영신모직의 맏며느리였다.
“미혼모라 그런가. 창피한 것도 모르나 봐요.”
하나테크 사모가 보탰다.
시시한 월급쟁이 남편이 전 재산을 털어 투자한 게임 회사가 대박을 터뜨린 바람에 하루아침에 인생 역전에 성공한 사모님이었다.
누가 알았으랴. 부지런히 사 모은 백 원짜리 주식이 2천 배로 뛰어오를 줄.
덕분에 회사 경영권까지 손에 넣고 알량한 준재벌의 반열에 등극했다.
“보통내기가 아니겠어요. 니들이나 나가라며 눈 똑바로 뜨고 큰소리치는 거 보세요.”
이혼당하고 친정에 더부살이 중인 푸름건설 고명딸이 가세했다.
학부모회 회장과 부회장, 총무는 한송 사립유치원 원장실에 모여 한동안 목소리를 드높였다.
조용히 찻잔을 들어 올린 현아는 그저 시큰둥하게 듣기만 할 뿐이었다.
자기들만 믿으라더니, 되레 당하고 와서 발끈하는 꼬락서니에 비웃음도 안 나왔다.
달그락.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에 미묘한 신경질이 묻어났다.
“재단에서 이사장님하고 제 체면이 말이 아니에요.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유치원 명예에 흠집이 나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 말이에요.”
새침한 투로 중얼대는 현아의 얼굴에 작위적인 수심이 가득했다. 큰소리를 땅땅 쳤던 게 무색해진 영신모직 며느리가 냉큼 현아를 달랬다.
“오 원장님. 걱정 마세요. 몇 번 더 망신을 당하면 자기가 안 나가고 배기겠어요? 저희만 믿으세요.”
“그럼요. 믿고 말고요. 우리 학부모회가 있어 너무 든든해요.”
웃는 얼굴로 여자들을 배웅하고 돌아선 현아는 짜증을 감추지 않았다.
선영이 시킨 대로 남의 손을 빌리긴 했는데, 결과는 보다시피였다.
사실 미혼모와 사생아가 유치원을 나가든 말든 현아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다만 시킨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해 엄마를 실망시킬까 그게 걱정이었다.
남들은 마마걸이라고 비아냥거릴지 몰라도 현아는 선영을 맹신했다. 그녀는 틀린 적이 없으니까.
그게 아니었다면, 언감생심 첩년 딸 소리나 듣던 제가 정혁의 결혼 상대로 낙점이나 되었을까.
태생이 어떻든 한송그룹 오철중 회장의 혈육이다. 물질적으로야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랐다.
그러나 한 가지. 공식적인 자리에 얼굴을 비출 수 있는 처지는 못 되었다. 감춰져야 했고, 세상에 드러나선 안 되었다.
십수 년쯤 되었나. 어느 날 본처가 죽었다. 지병인 심장병이 원인이라고 했다.
선영은 기다렸다는 듯이 한송가 안주인 자리를 꿰찼다. 현아를 가둔 새장의 문이 활짝 열린 것도 그때였다.
마침내 오철중 회장의 딸로서 인정받게 된 것이다.
선영을 닮아 반반한 얼굴에 든든한 후광이 더해지자 환심을 사려는 남자들이 줄을 섰고 모두 그녀를 공주처럼 떠받들었다.
과정이야 어떻든 그럭저럭 괜찮은 결말이었다.
한송가의 일원으로 맞이한 첫 공식 행사는 명한그룹 창립기념회였다.
그곳에서 그를 처음 보았다. 박 회장의 금쪽같은 손자. 명한의 유일한 상속자.
사람들 틈에서도 그는 단연 눈에 띄었다. 특유의 나른한 분위기와 빛나는 외모는 그가 가진 독보적인 배경조차 칙칙하게 만들어 버릴 만큼 눈이 부셨다.
당시에도 그는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이며, 주변과 세상일에 무심했다.
그 치명적이고 강렬한 첫인상에 십 대 소녀의 가슴은 단번에 꿰뚫려 버렸다.
잔디에 끌리는 파티 드레스가 어색했지만, 현아는 계속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가 말을 걸어 주길 기다리면서.
그러다 드레스 자락을 밟고 그의 앞에서 꼴사납게 고꾸라졌을 땐 정말이지 딱 죽고만 싶었다.
그는 제 발밑에 대자로 뻗은 현아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놀라거나 걱정해 주는 표정은 아니었지만, 비웃지도 않았다.
창피함은 잠깐이었다. 현아는 그의 앞에서 넘어진 걸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제 손을 잡아 일으켜 줄 남자가 그라서 기뻤다.
하지만 기대는 완전히 빗나갔다. 시큰둥하게 바라보던 그는 손을 내밀어 주긴커녕 장애물을 피해 가듯 현아를 사뿐히 뛰어넘어 유유히 지나쳐갔다.
현아는 깨달았다. 세상에서 절 이처럼 막 대할 수 있는 남자는 차정혁이 유일하다는 것을.
그날 이후 현아는 굳게 결심했다. 그와 결혼해야겠다고.
엄청난 포부를 밝히자 선영은 몹시 기뻐하며 자신의 딸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녀는 곧장 현아를 명한가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물밑작업에 들어갔다.
현아도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은 건 아니었다. 제게 주어진 과제를 착실히 수행해 나갔다.
교양부터 쌓으라는 선영의 강요로 지겨운 프랑스 유학을 4년이나 버텼고, 오랜 외국 생활에 익숙한 그와 소통하기 위해 영어도 원어민 수준으로 갈고 닦았다.
따분한 골프도 프로급으로 연마했고, 큰 짐승이 풍기는 지독한 악취를 견디며 승마도 익혔다.
그 모든 걸 참고 견딘 이유는 정혁에게 어울리는 여자가 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그를 차지하고야 말았는데, 어째서 초조한 기분이 드는 걸까.
알 수 없는 불안을 느낀 현아는 잇새에 손톱을 물고 자근거렸다.
그때 누군가가 그녀의 허리를 와락 껴안았다. 그 바람에 현아는 짧은 비명을 터뜨리고 말았다.
놀라기도 잠시, 특유의 웃음소리를 알아챈 현아는 허무한 한숨을 뱉었다.
“뭐야? 놀랐잖아, 김영준.”
불퉁하게 쏘아 대며 영준을 밀어내자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몸의 감촉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김영준. 한송 사립유치원 계약직 체육 교사.
청소년 국가대표로 잠시 주목을 받았으나, 이후 자잘한 부상을 극복하지 못하고 조기 은퇴를 선언해 일찍이 퇴물이 된 전직 축구 선수였다.
현아가 정색하자 영준이 곱상한 얼굴로 웃었다.
“놀랐어?”
“원장실에 맘대로 드나들지 말라고 했잖아.”
새침한 태도가 계속되자 이죽거리던 영준의 표정도 불만스럽게 굳었다.
“요새 왜 그래?”
“내가 뭘?”
“전화도 안 받고 문자도 씹고. 왜 거리 두기 하냐고.”
느릿하게 팔짱을 낀 현아는 지겨운 얼굴로 한숨을 뱉었다.
차, 시계, 용돈. 그간 놀아 준 보상은 충분히 치렀다. 그렇게 데리고 놀 땐 좋은데 끝은 늘 이처럼 질겼다.
“왜 이렇게 구질구질해? 나 곧 결혼한다고 했잖아.”
“누가 결혼하지 말래?”
영준은 천연덕스러웠다. 재벌들의 생태야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아도 뻔했다.
“어차피 정략결혼이잖아. 결혼은 그 남자랑 하고 몸은 나랑 놀면 되지.”
“너 진짜……!”
성을 내려던 현아의 입술이 영준에게 틀어막혔다. 곧이어 엉겨 붙은 두 사람을 집어삼킨 곁방의 문이 쿵 소리를 내며 닫혔다.
* * *
햇살이 시리게 눈을 찌르고, 약이 바짝 오른 매미도 제법 시끄럽게 울어 대는 계절로 접어들었다.
홀로 사무실을 지키던 다정은 목덜미에 손 선풍기를 겨눈 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걱정 마. 유시우 차시우로 안 만들 테니까.”
다정은 그 약속을 믿어 보기로 했다. 그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으니까.
그를 증명하듯 차정혁은 이후로 다정의 눈앞에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조석으로 걸려 오던 전화도 뚝 끊겼다.
딱 한 번 시우에게 새 장난감을 보내오긴 했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그렇게 존재가 희미해져 가던 남자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건 대략 한 달만이었다.
한빛 건축 사무소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선 남자는 텅 빈 사무실을 크게 둘러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부드럽게 입꼬리를 밀어 올렸다.
“잘 있었어?”
“네? 아…… 네.”
약간 얼이 나간 채로 대답하자 그의 눈길이 다시 사무실을 느리게 훑었다.
“여기서 일해?”
“네? 네…….”
“왜 혼자야?”
“……외, 외근 중이에요. 그런데 여긴 무슨 일로……?”
눈길을 되돌린 정혁이 눈썹을 살짝 끌어 올렸다.
“뭘 물어. 너 보고 싶어서 왔겠지.”
“…….”
거칠 것 없는 대답에 다정은 입술만 뻐끔거렸다. 도무지 전개가 갑작스러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전에 없이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까닭에 왠지 모를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그렇게 잠시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을 때 문득 익숙한 목소리가 먼 울림처럼 다정의 귀에 스쳤다.
우윳빛 통유리 너머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걸어오는 실루엣이 눈에 잡혔다. 도준이었다.
아연하게 질린 다정은 저도 모르게 정혁의 팔꿈치를 움켜쥐었다. 어쩔 줄 몰라 허둥거리다가 냉큼 구석진 곳에 있던 문으로 그를 끌고 갔다.
한여름에 도준이 절대 들어와 볼 리 없는 보일러실이었다.
잽싸게 몸을 밀어 넣고 커다란 남자를 안으로 끌어당겼다. 얼렁뚱땅 끌려오면서도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왜 숨어? 죄지었어?”
“그게 아니라…… 쉿!”
사실 다정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 남자가 이곳에 있는 이유를 도준에게 설명할 길이 막막해 저도 모르게 숨고 싶었나 보다.
막상 숨긴 했는데, 그러고 보니 어딘가 그림이 이상했다. 공간은 한 사람이나 겨우 통과할 만큼 협소했다.
그의 체격이 작지 않은 탓에 마주 본 몸이 끼이다시피 밀착되었다.
갈수록 억류된 몸이 갑갑하게 느껴졌다. 왠지 그가 더 몸을 붙여 오는 것도 같았다. 서서히 체중까지 실어 오는 게 명백히 고의적이었다.
견디다 못한 다정이 소리치듯 속삭였다.
“무슨 짓이에요? 좀 떨어져요.”
“좁은 걸 어떡해? 좀 참아. 들키면 너만 곤란한 거 아냐?”
처음엔 어리둥절하더니 왠지 즐기고 있는 모양새였다. 셔츠에 덮인 탄탄한 가슴에 다정의 뺨이 눌려 뭉개졌다.
귀에 밀착된 가슴에서 거센 심장 소리가 휘몰아치고 맞닿은 체온은 뜨거웠다.
뒤늦게야 괜히 숨었다는 후회가 밀려들지만, 지금 나가면 무슨 오해를 받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마주 보는 게 민망해서 차라리 뒤돌아설까 고민도 해 봤지만, 그건 그거대로 민망할 것 같아 관두기로 했다.
갇힌 공기가 점차 후끈해졌다. 그가 벽을 짚고 최대한 공간을 만드는데도 별 소용이 없었다.
문밖에서는 통화 중인 도준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정수리 위로 쏟아지는 더운 숨결이 무거웠다. 이윽고 어색한 공기를 타고 작은 속삭임이 울렸다.
“유시우 잘 있어?”
다정의 표정이 새초롬해졌다.
“한동안 연락도 없더니…….”
“장기 출장 갔었어.”
“아…….”
시우를 위해 생각을 돌려먹었나 했더니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정혁의 입가가 가볍게 늘어졌다. 피식거리며 귓가로 다가온 입술이 속살거렸다.
“혹시 기다렸어?”
“아, 아뇨.”
다정이 정색하며 도리질을 쳤다. 그 바람에 코끝이 셔츠에 덮인 그의 가슴을 스쳤다. 그게 간지러웠던지 그의 상체가 움찔거렸다.
“유다정이 싫어할까 봐. 기다리는 줄 알았으면 했지.”
“……아, 아니라고 했잖아요.”
“아니면 말고.”
장난스러운 웃음을 마지막으로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여름. 밀폐된 공간. 그리고 유난히 체온이 높은 남자.
세 가지 조건이 모두 충족되자 땀방울이 목덜미를 타고 흘렀다. 그 감각조차 야릇하게 느껴질 만큼 온몸의 세포들이 예민하게 들끓었다.
“향수 뭐 써?”
항상 느끼는 거지만 뜬금없는 소릴 잘도 한다.
“애 엄마가 향수는 무슨요.”
“그럼 샴푸 냄새?”
정수리 근처를 오가는 콧날의 느낌이 선명했다. 이상야릇하니까 그만두란 듯이 다정이 휙 고개를 젖혔다. 그렇다 보니 그의 시선을 고스란히 맞아야만 했다.
지그시 맞춰오는 그의 눈빛에 묘한 흥분이 어렸다.
“너 고소할 거야.”
“가, 갑자기 또 왜요? 고소 안 한다면서요.”
“그거 말고. 6일 남은 거 계약불이행으로 고소할 거야.”
다정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그의 목울대가 시야를 덮쳤다.
“그게……. 그렇게 억울했어요?”
“억울해.”
무거운 숨이 떨어졌다. 입술을 감쳐문 다정은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볼록하게 솟아오른 남자의 목울대에 시선을 고정했다.
“유다정.”
“왜…… 자꾸 불러요.”
“애인할래?”
“네……?”
다정의 눈이 놀란 토끼처럼 커다래졌다.
“딱 1분만 하고 헤어져.”
무슨 씨 나락 까먹는 소리냐는 말을 하려는데, 크고 뜨거운 손이 힘 있게 허리를 감아쥐었다.
“나, 1분 동안 애인이랑 키스할 거야.”
“무, 무무, 무슨!”
“딱 1분만. 그 이상하면 나도 키스로 안 끝나.”
“아아아닛!”
돌발적으로 밀어닥친 입술이 다정의 호흡이 그대로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