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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유시우에 대한 권리 (21/114)


21화 유시우에 대한 권리
2022.10.13.



“시우가 사랑해요!”

유치원 앞에서 애틋한 이별을 나누던 중 시우가 씩씩하게 고백했다.

사랑한단다.

방그레 웃어 줄 수밖에 없는 귀여움에 다정은 아들을 품에 꼭 안았다.


“엄마도 우리 시우 많이 사랑해.”

“아니, 시우가 더 사랑하는데!”

“아닐걸. 엄마가 더 사랑할걸.”

“아니! 시우가 더! 더더!”

고집스럽게 이겨 먹으려는 시우를 보며 다정은 못 말린다는 듯 푸스스 웃고 말았다.

천만 원짜리 사고를 치고 이렇게 해맑으면 어쩌라고.

여우 같은 아들도 알고 있을 거다. 뭔가 실수했다는 걸.

천만 원의 가치는 몰라도 연거푸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는 엄마를 보며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그래서인지 주말 내내 사랑한다는 고백을 백 번은 넘게 들은 것 같다.

시우는 잘못한 게 없었다. 잘못이 있다면 강아지 앞에 간식 통을 놔둔 제 잘못이지.

시우를 들여보내고 돌아선 다정은 분주히 차에 올라 회사로 향했다.

유치원에서 회사까지의 거리는 멀지 않았지만, 출근 시간의 교통 체증은 피할 수 없었다.

초조하게 핸들을 두드리며 오늘도 지각을 면키 어렵겠다 했더니, 웬걸. 차를 주차하고 시간을 보자 5분이나 일찍 도착해 있었다.

왠지 뿌듯했다. 일주일에 서너 번은 지각을 하는데, 이런 날이면 일진이 좋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여유롭게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노트북과 핸드백 따위를 챙겨 차에서 막 내려설 때였다. 별안간 손에 쥔 휴대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를 확인한 다정의 눈가가 대번에 굳었다.

웬일로 일진이 좋다 했더니, 또 그 남자였다.

시우에게 장난감을 보내온 이후 조석으로 걸려 오는 전화가 이젠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받아 봤자 쓸데없는 소릴 지껄일 게 뻔해 줄기차게 무시하고 있는데도 참 끈질기다.

이번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부르르 몸을 떨어 대는 휴대폰을 무시한 채 다정은 사무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저도 모르게 한숨이 흘렀다. 천만 원이란 액수를 들었을 때부터 복잡한 계산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적금 만기가 언제더라? 이번 달 카드 대금은? 아파트 대출금은? 보험료는? 생활비는?

머리가 터지게 계산을 맞춰 봐도 도저히 일시로 그 돈을 돌려줄 여력이 되지 않았다.

12개월 할부를 제안하자니 없어 보이고. 무엇보다 그 남자와 사적 교류를 열두 달이나 이어 나가야 한다는 사실에는 더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다. 내키진 않지만, 시우에게 보내온 장난감은 순수한 선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일단락을 지었는데, 심란한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 남자에게 고가의 선물을 받았다는 사실에 마음이 불편했다.

옥외 주차장을 가로지르던 다정의 발이 문득 멈춰 섰다. 손안에서 울리던 진동이 멎은 것이다.

화면에 떠오른 부재중 전화 표시를 지우고 다시 걸음을 떼던 찰나, 무심코 돌린 시야에 생소하고 낯선 자동차가 스쳤다.

3층짜리 저층 건물의 옥외 주차장에선 보기 드문 최고급 대형 세단이었다.

덩그러니 서 있는 검은 세단은 얼룩 하나 없이 반질반질 광택이 났다. 그 차에 한가롭게 기대선 남자 역시 그랬다.

멋스러운 네이비블랙 슈트에 검은 구두를 착용한 그는 차와 한 덩어리처럼 보였다. 말쑥한 얼굴에서 뿜어내는 광채가 아니었다면 모르고 지나칠 뻔했다.

눈이 마주친 남자가 휴대폰을 살짝 쥐어 흔들어 보인다. 일부러 안 받는 거 다 봤어, 라는 듯 구겨진 눈썹은 못마땅하게 씰룩였다.


 
다정은 쩍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좌우를 휙휙 돌아보았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고 판단되어 냉큼 달려가 정혁의 팔꿈치부터 붙잡았다.

그를 건물 외측으로 끌고 온 다정이 발을 쿵 구르며 다그치기 시작했다.


“미쳤어요?! 여기가 어디라고!”

어디 못 올 데를 왔나. 반응이 과민하다는 생각을 하며 정혁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전화를 안 받더라고.”

“그렇다고 남의 직장까지 찾아오면 어쩌자는 거예요?!”

“용건 있으면 와도 되는 거 아닌가?”

“글쎄! 무슨 용건이길래 회사까지 찾아오냐고요!”

“전화 받아.”

그러니까 전화를 안 받으면 언제든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경고를 해 주러 왔다는 거다.

곤혹스러워하는 여자를 지그시 바라보던 그는 정말 할 말은 그것뿐이라는 듯 홀연히 돌아섰다.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던 다정이 태연히 멀어지는 그의 뒷등을 향해 소리쳤다.


“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당신하고 아무 상관도 없다는 말에 동의했잖아요!”

저벅, 내디딘 구둣발이 다시 돌아섰다. 다정은 재차 못을 박아둬야겠다고 생각하며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섰다.


“차정혁 씨. 제발 서로 몰랐던 때처럼 지내요. 네?”

“어떻게 그래? 네가 애를 낳았는데. 그 애가 내 거고.”

조곤조곤 고저 없는 목소리가 무겁게 깔렸다. 말을 잇지 못한 다정은 멎은 호흡을 느리게 뱉었다.


“누가 당신 거라는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억지 좀 그만 부려요.”

“유시우. 내 아들이니까 내 거 맞잖아.”

“이것 봐요. 시우가 물건인 줄 알아요? 책임질 이유가 없다고 말한 건 당신이에요. 잊었어요?”

그 말에 정혁은 곰곰 생각하는 얼굴을 하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아. 그랬지. 근데 책임질 이유가 없다고 그 애가 내 아들이 아닌 건 아니잖아. 넌 내 거 아니라도, 유시우는 내 거야. 그래서 다른 새끼가 내 아들한테 아빠처럼 구는 꼴 못 보겠다고.”

건조한 목소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두 귀로 고스란히 듣고 있으면서도 다정은 눈앞의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좀처럼 납득이 되지 않았다.


“차정혁 씨. 지금 무슨 소릴…….”

“내가 어릴 때부터 좀 그래. 누가 내 걸 넘보는 꼴을 못 봐. 알아 둬.”

경고성 어조로 냉랭하게 뱉고 돌아선 뒤로 또 한 번 격앙된 외침이 울렸다.


“당신한텐 그럴 권리 없어요!!”

우뚝 멈춰 선 정혁은 우두커니 선 채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난번부터 해 대는 권리 타령에 영 귀가 껄끄러웠다.

휙 방향을 틀어 돌아온 그가 다정을 마주한 채 허리를 굽혔다. 바투 붙어 물어뜯을 것처럼 위협적인 눈빛이 쏟아졌다.


“진짜 권리 행사 좀 해 볼까?”

소슬한 시선이 급격히 창백해진 얼굴을 핥았다.


“내가 유시우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아? 너 감당할 수 있어?”

“…….”

말문이 막힌 다정은 소리 없이 입술만 벙긋거렸다.

무슨 일이 벌어지냐니.

그 말이 다정의 귀엔 시우를 앗아가겠다는 통보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세상이 무너진다는 말보다 더 무서운 말이었다.

다정의 눈가로 불안한 열기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차정혁 씨! 대체 왜 이래요?!”

한껏 날을 세운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그래 봤자 겁을 먹고 짖어대는 소형견처럼 시끄럽기만 할 뿐, 눈앞의 남자에겐 어떤 타격도 없어 보였다.


“뭐가 됐든 넌 나 못 이겨.”

쐐기를 박듯 자신만만하게 날아와 꽂히는 음성이 다정의 가슴에 비수처럼 박혔다.

다정은 떨리는 손끝을 꽉 오므려 쥐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그가 만약 친권이나 양육권 소송을 건다면 다정은 당해 내지 못할 거였다.

아이를 향한 애틋함이나 사랑 같은 감정의 호소 따위에 법이 귀를 기울일 리 없으니까.

어떡하지? 어떡해야 하지?

초조함과 두려움에 호흡이 불안정해지고,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

문득 시우와 생이별하는 장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차정혁과 재회한 후로 수없이 그려졌던 장면이었다.

애써 뇌리에서 떨쳤던 장면들이 재연되자 불안한 떨림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더럭 겁이 난 다정이 그의 팔을 움켜쥐었다. 으름이 통하지 않으니 그다음은 자연스럽게 애원이 되었다.


“이, 이렇게 부탁할게요. 나한텐 시우밖에 없어요. 시우가 내 전부라고요! 그러니까 시우랑 나 내버려 둬요. 네?”

“모르면 몰라도, 이미 아는데.”

“…….”

남자는 감정 없는 냉혈한처럼 지껄였다.

눈시울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물방울이 기어이 다정의 뺨을 스치고 떨어져 내렸다.

다정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분하고 억울했다. 시우와 자신의 평온한 일상에 갑자기 끼어든 남자가 원망스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상황이 이런데도 다정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노려보며 무력하게 눈물을 흘리는 게 다였다.

해 볼 테면 해 보라는 배짱조차 부리지 못했다. 그랬다간 정말 제 아이를 빼앗아 가 버릴까 봐.

일그러진 눈으로 굵은 눈물을 뚝뚝 떨구면서도 노려보는 꼴이 처량하고 애처로웠다.

그 모습을 덤덤히 주시하던 정혁의 눈꺼풀이 지그시 내리 감겼다가 떠졌다.

차갑게 굳은 표정은 어느새 한풀 누그러져 있었다. 길게 한숨을 쉰 그의 손끝이 젖은 눈가에 닿았다.


“그러게 까불긴 왜 까불어.”

약간 찌푸린 얼굴에 타박하는 말투였다. 그것과 별개로 눈가와 뺨을 더듬는 손길은 조심스럽기만 했다.

울리려는 의도는 없었다.

차정혁이란 남자로 말할 것 같으면 눈앞에서 여자가 울든 웃든, 아무 관심도 없는 남자였다.

그런데 아이가 제 전부라고 말하는 여자, 그러니까 제 아들의 엄마라는 여자가 우니까 그건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머리 꼭대기까지 곤두섰던 신경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흐물흐물해지는 기분이랄까.

독립투사라도 되는 양 괄괄하게 덤벼들더니, 울긴.

이래서 강아지풀 같다는 생각을 했나 보다.

보기엔 보들보들한데 만지면 까슬까슬한. 그러면서 날카롭지도 못한, 누구 하나 상처 입히지도 못하고 저 혼자 부스러지고 마는 연약한 풀.

그리고 바라보면 자꾸만 간지럽다.

축축한 기운만 대충 거둬 낸 손길이 멀어졌다.


“사람 긁지 마. 아프지도 않고 따갑지도 않은데, 신경만 곤두서니까.”

통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다정은 젖은 눈만 끔뻑였다. 그 눈을 가만히 바라보던 정혁은 거기까지만 말하고 돌아섰다.

화들짝 놀란 다정이 그의 팔꿈치를 냉큼 붙잡아 세웠다.


“그, 그냥 가면 어떡해요?”

“…….”

일그러진 두 눈에 다시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그가 이대로 돌아서서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벌일까 두려워서였다.

무슨 말이라도 해 주고 가야지. 이렇게 가면 어떡하냐고. 하고 싶은 말이 애처로운 얼굴에서 다 읽혔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앙다문 입술 아래로 잘게 떨리는 턱을 보며 정혁은 긴 한숨을 뱉었다.


“네 눈엔 내가 뭐로 보여?”

“…….”

“엄마한테 애나 뺏는 개X끼로 보여?”

“아…….”

다정은 짧게 신음했다. 거친 표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한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걱정 마. 유시우 차시우로 안 만들 테니까.”

소리조차 내지 못하던 입술이 겨우 말을 뱉었다.


“……정말요?”

“정말.”

새파랗던 다정의 얼굴에 서서히 핏기가 돌았다. 그러고도 못 믿겠는지 다정의 입술이 빠르게 달싹였다.


“진짜?”

“진짜.”

그제야 그의 옷자락을 절박하게 움켜쥔 손에 스르르 힘이 풀렸다.

불안하고 놀란 가슴이 진정되자 뒤늦게야 민망함이 밀려들었다. 주책없이 흐른 눈물을 손등으로 슥 문질러 닦지만 한 번 차오른 감정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겨우 제 안색을 되돌린 다정이 우물거렸다.


“그럼 약속해요…….”

조심스레 내미는 새끼손가락을 보며 정혁은 어이가 없어서 헛숨을 흘렸다.

똑똑한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수준이 제 아들하고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손가락 걸고 하는 약속이 무슨 소용이라고.


“어디 모자라?”

정혁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었다.


“이럴 땐 각서 써서 공증받자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믿으니까. 나쁜 사람 아닌 거…….”

진심이었다. 다듬어지지 않아 거칠고 무례하고 제멋대로지만, 단 한 순간도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시우를 보면 알 수 있었다. 한없이 착하고 순수한 제 아들의 아빠가 나쁜 사람일 리 없으니까.

눈물막에 덮여 옅게 흔들리는 순한 눈을 바라보며 정혁은 급격히 느려진 호흡을 천천히 뱉었다.

잔잔하게 마주하는 시선 사이로 여름 아침의 온화한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결에 그의 목소리가 실려 왔다.


“믿을 거면 그냥 믿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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