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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내 이름 차정혁이야 (20/114)


20화 내 이름 차정혁이야
2022.10.09.


심기 불편한 냉랭한 눈과 고집스럽게 타오르는 눈동자가 허공에서 충돌했다.

정혁은 끓어오르는 짜증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그가 계산하는 게 싫다면 자기 지갑을 꺼낼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런데 굳이 자신이 보는 앞에서 다른 남자에게, 아무것도 아닌 남자에게 제 아들의 장난감을 사 달라고 한다?

명백히 의도적으로 그의 신경을 거스르겠다는 심산이었다.

얼토당토않은 남자의 위협에 다정도 지지 않았다. 공격적인 말투가 튀어 나갔다.


“뭐가 잘못됐어요? 애초에 남의 일에 끼어든 당신이 잘못된 거죠.”

“남?”

정혁의 미간이 못마땅하게 굳었다.


“남이 아니면요?”

“말했지. 내가 내 아들한테…….”

“차정혁 씨!”

무겁고 날카로운 음성으로 말을 끊는 동시에 다정의 손이 시우의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깐 너무 놀란 나머지 경로를 벗어난 손이 남자의 입으로 향했지만, 이번엔 아들의 귀를 잘 찾아갔다.

귀를 틀어막는 엄마의 손길에 고개를 젖힌 시우가 순진무구한 눈을 깜빡였다.


“제발 애 듣는데 할 말 못 할 말 좀 가려서 해요. 그렇게 생각이 없어요?!”

“…….”

어쩐 일로 정혁의 입이 무겁게 다물렸다. 그랬음에도 할 말은 많은 얼굴이었다.

띠릭.

그때 상황을 매듭짓는 듯한 기계음이 울렸다.


“감사합니다, 손님. 또 찾아 주세요.”

친절한 계산원에게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한 도준이 쇼핑백을 받아 들었다.


“다정아, 그만 가자.”

 

* * *

돌아오는 자동차 안에서 시우는 세상 모르게 잠들어 버렸다. 장난감을 사 주지 않는다며 결사 농성을 한 게 무색했다.

차내에 정적이 깔렸다. 다정은 어색한 기분을 느끼며 운전 중인 도준의 눈치를 살폈다.

차에 올라탄 순간부터 이어지고 있는 침묵이었다. 단지 잠든 시우가 깰까 하는 조심스러운 이유로만 침묵하는 건 아닐 테다.

도준이 잠든 시우를 안아 방에 눕혀 주고 나왔을 때 다정이 차를 준비해 내밀었다.


“……미리,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요. 사실 조금 혼란스러웠거든요.”

그동안 있었던 일을 털어놓으며 다정이 고개를 떨구었다.


“이해해. 네가 미안해할 필요 없는 문제야.”

도준은 언제보다 차분하게 다정의 말을 들어주었다.

시우의 아빠는 스페인에서 우연히 알게 된 남자였다. 이름도 모르고 연락처도 모른다.

잠깐 스쳤을 뿐인데 일이 그렇게 되었다. 그뿐이다. 그리고 그 남자와 상관없이 시우는 오직 나의 아이다.

도준이 아는 건 거기까지였다.


“그래도 그 사람 다시 만났다는 말은 하지 그랬어. 그랬다면 MH 백화점 일은 안 맡았을 거야.”

“개인적인 일 때문에 회사가 피해를 보는 건 싫었어요.”

“유다정답네.”

도준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스쳤다.

명한 유통 차정혁 전무.

오히려 상대가 누군지 몰랐을 땐 마음이 편했다. 그런데 이젠 아니었다.

태연히 차를 마시고 있지만, 정체 모를 초조함이 들끓었다.


 

* * *

소파에 웅크린 다정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었다. 다른 걸 떠나 제멋대로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그 남자의 입이 제일 걱정스러웠다.

어쩜. 아들이라는 말을 그렇게 쉽게…….

곧 결혼할 사람이 정말 물색없지.

애당초 그런 남자라는 걸 몰랐던 건 아니다. 곧 죽어도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심지어 애고 여자고 가리지 않고 저 할 말은 지껄이고 보지 않던가.

그런 걸 보면 애 앞에서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않는 남정애 여사와 동류였다. 마음 같아선 둘이 배틀이라도 붙여 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무엇보다 다정이 가장 걱정스러운 건 시우였다. 이미 알게 된 사람들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시우에게 만큼은 알리고 싶지 않았다.

또 마주치지 말란 보장이 없는데, 그때 시우 앞에서 쓸데없는 소릴 하면 어쩌지?

아빠가 하늘나라에 있다고 믿고 있는 시우였다. 만약 그 사실을 알게 되어 어린 마음에 혹여 충격과 상처가 되지나 않을까 우려스러웠다.

그 남자의 입을 꿰매 버릴 수 있다면 좋으련만.


“엄마…… 쉬…….”

늦은 낮잠을 자고 일어난 시우가 눈을 비비며 방을 걸어 나왔다.

저녁을 먹고 목욕까지 하고 나온 시우는 새로 산 장난감에 푹 빠져 신이 났다.

엄마가 제일 좋다더니, 거짓말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시우는 엄마보다 공룡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크아앙, 나는 티라노사우르스다!”

시우 공룡이 엄마 공룡을 공격했다. 엄마 공룡이 불쌍한 목소리를 냈다.


“티라노사우르스 님. 저는 연약한 브라키오사우르스랍니다. 깨물면 아파요. 흑흑.”

러그 위에 앉아 공룡 모형을 가지고 함께 놀아 줄 때 초인종이 울렸다.

다정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홉 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이었다.


“이게 마지막입니다.”

배송 기사가 건네는 상자를 받아든 다정은 어안이 벙벙해 눈만 깜빡였다.

텅, 띠릭. 마지막 배송 기사가 나가고 다정은 얼이 나간 표정으로 집 안을 크게 돌아보았다.

현관부터 거실까지 줄을 세우듯 크고 작은 장난감 상자들이 빼곡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감을 잡기도 전에 식탁 위에서 휴대폰이 몸을 떨었다.

모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유다정?』

남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제야 다정은 이것들을 보내온 사람이 누군지 짐작했다.


“내 번호 어떻게 알았어요?”

즉각 경계 어린 말투가 튀어 나갔다. 그러자 통화음에 섞여 피식거리는 소리가 흘렀다.


『그거 아는 게 뭐 어렵다고.』

“…….”

다정은 뜨끈뜨끈한 이마를 쥐었다.

따지고 보면 거래처다. 명함도 뿌렸고 회사 홈페이지만 들어가도 알 수 있기에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용건이 뭐예요?”

『내 아들한테 선물 잘 갔나 해서.』

다정은 눈가를 찌푸렸다.


“우리 집은 어떻게 알았어요?”

『말했지. 안 어렵다고.』

“대체 무슨 짓이에요?”

『아빠가 돼서 장난감 좀 사 준 게 그렇게 못 할 짓인가?』

“이봐요, 차정혁 씨!”

『그래. 내 이름 차정혁이야. 계속 그렇게 불러.』

“듣기 싫어요. 이건 내일 다시 돌려보낼 테니까…….”

『잘자. 뚝―.』

“하!”

다정은 기가 막혀서 말이 다 안 나왔다.

더 시끄러운 말이 흘러나오기 전에 종료 버튼을 누른 정혁은 차창 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까불긴. 강아지풀 같은 게.

빠르게 스치는 야경을 바라보는 그의 입가에 제법 흡족한 웃음이 번졌다.

장난감을 손에 쥔 유시우는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좋아했다. 웃을 땐 말간 뺨이 복숭아처럼 볼록 솟았다.

제 아들이란 사실을 알았기 때문일까. 오물대는 입술의 움직임, 긴 속눈썹을 팔랑이며 눈을 깜빡이는 모양 하나하나가 전에 없이 또렷하게 눈에 담겼다.

유시우, 귀여워.

잠시간 흡족해하던 정혁의 미간이 불만스럽게 구겨졌다.

그 아이를 웃게 한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이 갑자기 몹시 불편해졌다.

고맙습니다. 대표 삼촌! 언제나처럼 예의 바르게 꾸뻑 허리 숙여 인사했다.

제 아이가. 제 것이. 아무것도 아닌 남자 때문에 웃었다.

웃게 하는 것도, 울리는 것도 다 자신 때문이어야만 했다. 그게 아빠만이 가진 특권이니까.

그 특권을 아무것도 아닌 남자가 누린다? 눈에 흙이 들어가도 그 꼴은 못 보지.

* * *



“장난감…….”

시우가 몸을 배배 꼬며 다정을 졸랐다.


“시우야. 이거 우리 거 아니야. 누가 우리 집으로 잘못 보냈대. 엄마가 내일 주인한테 돌려줄 거니까 만지면 안 돼요.”

하나같이 엄청 고가 브랜드의 장난감들이었다. 조금이라도 포장이 뜯기면 돌려보내는 데 애를 먹을 게 틀림없었다.

또박또박 설명해 주자 알았다고 고개는 끄덕인다. 유혹을 이겨내는 게 쉽진 않겠지만 적어도 내 것 남의 것은 구분할 줄 아는 나이였다.

그렇다 한들 다섯 살 본능에 장난감을 향해 절로 목이 돌아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련하게 반짝거리는 눈이 거실을 가득 채우고 있는 장난감 상자들을 빨아먹을 듯이 쳐다봤다.

그 모습이 흡사 간식을 앞에 두고 침을 줄줄 흘리는 강아지 같았다.

다정은 상자를 이것저것 들쑤시며 반송할 만한 주소를 찾았지만, 어디로 돌려보내야 할지 몰라 난감하기만 했다.

고민 끝에 휴대폰 검색창을 열어 명한 유통 주소를 확인했다.

메모지에 옮겨적고 수신인은 차정혁 전무라고 적었다. 이삿짐센터가 되었든 퀵이 되었든 아침에 즉시 착불로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 * *

주말 아침이라 느지막이 잠에서 깬 다정은 찌푸린 눈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9시 반.

대략 삼사십 개나 되는 상자마다 주소를 써 붙이고 개수를 확인하느라 새벽에야 잠들었더니 어김없이 늦잠을 자고 말았다.

잠을 다 내쫓지 못해 몽롱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는데 뭔가 찜찜한 기분이 스쳤다.

가만, 아홉 시 반?

이 시간까지 시우가 조용하다는 게 이상했다. 아이들은 일찍 자는 만큼 원래 아침잠이 없었다.

특히 주말 아침이면 6시부터 일어나서 엄마를 찾아오기 마련인데, 어째 조용했다.

벌떡 상체를 일으킨 다정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이불을 휙 걷었다.

시우는 보이지 않았다. 이불 안에도 침대 밑에도 없었다. 애초에 방문이 열린 흔적도 없었다.

아들이 걱정스러워 주섬주섬 내 것 같지 않은 몸을 추슬러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시우야…….”

“엄마!”

거실 가운데서 놀고 있던 시우가 씩씩하게 엄마를 소리쳐 불렀다.

다정은 해맑고 천진한 아들을 바라보며 멍청하게 뜨인 눈만 끔뻑였다. 눈 앞에 펼쳐진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다 풀어 헤쳐진 장난감들이 여기저기 나뒹굴고 상자와 포장재들이 아수라장처럼 널려 있었다.

제 아들은 쓰레기 매립장 같은 곳에 앉아 장난감을 가지고 노느라 정신이 없었다.


“슈퍼 붕붕이!”

히어로 가면을 쓴 시우가 어린이용 명품자동차 위에 올라타 몸을 들썩였다. 쓰레기에 걸려 굴러가진 못할지언정 제대로 신은 났다.

식탁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다정은 하하하, 하고 해탈한 웃음을 짓고 말았다.


 
반쯤 넋을 놓고 있을 때 손에 쥔 핸드폰이 진동했다. 저장하지 않은 번호지만 누군지 알았다.

차정혁 그 남자였다.

망설이던 다정은 통화버튼을 누르고 말없이 휴대폰을 귀에 붙였다.


『왜 이렇게 늦게 받아?』

아무렇지도 않게 전화는 기본. 인사를 건네는 목소리조차 너무 태연했다.

다정은 한숨을 삼켰다.


“용건이나 말해요.”

『용건이 꼭 있어야 해?』

“그럼 왜 전화한 건데요?”

『잘 잤어?』

“뭐라고요?”

『그게 내 용건이야.』

입술을 잘근 깨문 다정은 큼큼 목을 다듬었다.


“저…… 혹시 어제 보낸 물건들 말인데요. 가격이 얼마쯤…….”

『글쎄, 천 얼마 되려나? 얼마 안 해.』

“아…….”

천만 원. 선뜻 입을 떼지 못하고 잠자코 있자 너머에서 못마땅한 숨소리가 들렸다.


『돈으로 돌려주겠다 그딴 말 하기만 해.』

눈을 훅 부릅뜬 다정은 고개를 붕붕 저었다.


“어후,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별수 없죠. 대신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봐서.』

피식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다정은 울상이 된 얼굴을 손바닥에 묻었다.

* * *

잠실 스페셜 레지던스.

52층 높이에서 내려다보는 도시의 전경은 지루했다.

심심한 회색 도시를 감흥 없이 바라보며 정혁은 러닝머신 위를 달렸다. 호흡이 가쁘고 관자놀이를 타고 흐른 땀방울이 턱 끝에 맺혔다.

귀에 꽂은 블루투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만, 신호음은 끊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침내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된다는 안내가 흘러나왔을 때 정혁은 이어폰을 빼 던졌다.

유다정은 주말 오후부터 오늘 아침까지 정혁의 전화를 계속 피하고 있었다.

하루 딱 두 번이다. 아침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상식선에서 그다지 귀찮을 정도는 아닐 거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흘렀다.

누가 잡아먹기라도 하나.

충분히 경고했다. 도발해봤자 역효과라고. 그 충고를 무시한 건 그 여자였고, 제 오기를 부추긴 것도 그 여자였다.

정혁이 지금부터 하는 모든 건 다 유다정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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