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당신이 무슨 권리로요!
(19/114)
19화 당신이 무슨 권리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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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당신이 무슨 권리로요!
2022.10.06.
“대표 삼촌!”
도준을 발견한 시우가 와다다 달려와 안겼다. 모처럼 유치원에 방문한 도준이 반가웠던지 엄마는 안중에도 없다.
한쪽 무릎을 굽힌 도준이 시우를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훑었다.
“우리 시우, 얼마나 컸나 볼까?”
“네에! 시우 이마―안큼 컸어요!”
시우가 하늘을 향해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의심스럽다는 듯이 도준이 한쪽 눈을 가늘게 찌푸렸다.
“응? 정말? 못 믿겠는데. 어디?”
도준이 앉은 자세로 손을 들어 키를 가늠하려 하자, 시우가 자라처럼 목을 길게 뺐다.
뒤꿈치도 슬며시 올라갔지만, 도준은 못 본 체하며 감탄을 질렀다.
“와! 정말 엄청 컸네. 열 밤 자면 삼촌보다 더 크겠는데?”
“정말요?”
시우가 제 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열 밤 자고 삼촌이랑 다시 키 재 보기다.”
“네에!”
다정은 소리 없이 웃고 말았다. 열 밤이라니. 가당찮다. 도준과 정식으로 키재기를 하려면 못해도 15년은 기다려야 할 거다.
“엄마! 우리 어디 가요?”
“글쎄. 삼촌도 왔으니까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시우 뭐 먹고 싶어요?”
“어…… 햄버거!”
“으음?”
웃음을 머금고 있던 다정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햄버거 같은 거 먹으면 시우 키 안 클 텐데. 그래도 햄버거 먹을래요?”
“아니…… 어…… 그러니까, 햄버거…….”
엄마의 우회적 강요에 고민스러운 표정을 하면서도 미련을 떨치지 못하는 눈치였다. 도준이 넌지시 끼어들어 말했다.
“오늘은 삼촌도 햄버거 먹고 싶은데, 우리 햄버거 먹으러 가자.”
“어…… 진짜?”
“진짜.”
도준이 입가를 늘여 부드럽게 웃었다. 시우의 눈이 반짝 빛나는가 싶더니 슬며시 엄마 쪽으로 향한다.
눈가를 구긴 엄마가 대표 삼촌을 못마땅하게 흘겨보고 있었다.
“선배.”
“걱정 마. 나도 햄버거 많이 먹었는데 이만큼 컸잖아. 이 나이 땐 뭐든 잘 먹는 게 남는 거야.”
“선배도 참.”
엄격한 엄마 흉내를 내지만 그녀가 누구보다 물러터진 엄마라는 건 도준이 가장 잘 알았다.
“그럼 가 볼까?”
시우를 번쩍 들어 목에 태운 도준은 덩실덩실 춤을 추듯 주차장으로 방향을 돌렸다.
“오빠 뭘 그렇게 봐?”
현아가 물었지만, 정혁에게선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린 듯 흔들림 없이 한 방향을 주시하는 눈동자의 테두리가 알 수 없는 열기를 띠었다.
가족처럼 화목해 보이는 세 사람. 그리고 유다정의 아이를 마치 제 것인 양 목말 태우고 걷는 남자.
저 몹쓸 여자는 뭐가 그리도 좋은지 잘도 웃는다. 멀쩡히 살아 있는 아빠는 하늘나라에 보내 놓고.
유시우와 유다정의 존재를 알게 된 후 이런 장면을 목격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상상 초월한 장면을 눈으로 직접 목격한 순간, 왠지 모르게 배알이 꼴렸다.
꾸물꾸물 밀려 나오는 극심한 짜증을 느끼며 정혁은 어금니를 꾹 물었다.
* * *
“이따가 진짜 티라노사우르스 보러 가요?”
유치원에 도착해 이별의 애틋함을 나누던 중 시우가 물었다. 엄청 기다려지는 모양이었다.
“그럼요. 어제 삼촌이 약속했잖아. 이따가 시우 유치원 끝나면 삼촌이랑 엄마랑 시우랑 공룡 보러 갈 거예요.”
“우와!”
시우가 껑충 뛰며 만세를 불렀다.
“우리 시우. 오늘도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친구들이랑 사이좋게 지내기.”
“네에!”
다정은 씩씩하게 대답하는 시우를 꼭 안았다. 날이 갈수록 애틋함만 더해졌다.
“엄마 안녕!”
“시우도 안녕. 이따 또 만나요.”
다정은 친구들 틈으로 사라지는 시우의 뒷모습을 길게 바라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목에 삼삼오오 모여 있는 여자들이 보인다. 다정을 향한 시선도 느껴졌다.
참 한결같다. 아이들을 등원시키고 나면 저 자리에 모여 다정이 지나가는 걸 흘끔거리는 게 그녀들의 일과였다.
그런데 오늘은 못마땅한 눈길만 보내던 평소와 전개가 달랐다.
실용적이지 못한 옷차림을 한 여자가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도도하게 팔짱을 끼며 대뜸 묻는다.
“그쪽이 유시우 엄마예요?”
그녀를 필두로 두어 사람이 뒤로 포진해 있었다. 하나같이 전투적인 태세였다. 다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요?”
“나 영신모직 며느리예요. 그리고 이쪽은 하나테크 사모. 저쪽은 푸름건설 큰 따님.”
다정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네, 안녕하세요. 어머님들. 그런데 용건이 뭔가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어요. 유치원 옮겨 주세요.”
“왜 그래야 하죠?”
“왜긴요. 여기가 보통 유치원인 줄 알아요?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해 봐요. 댁 같은 사람 아이가 다니기 가당키나 해요? 교양 없고 수준 떨어지게.”
“나 같은 사람이 뭔데요?”
다정은 동요 없이 침착하게 받아쳤다. 그러자 또 다른 여자가 호들갑스레 지껄였다.
“어머머머. 이 여자 뻔뻔한 거 봐. 미혼모 주제에 창피하지도 않은가 봐.”
다정은 헛숨을 뱉었다. 바쁜 사람 붙잡고 한다는 소리가 예상을 빗나가지 않아서 식상했다.
“어머니들. 무슨 말씀인지 알겠는데요, 그 부탁은 들어줄 수 없을 것 같네요.”
“안 옮기겠다 그거예요?”
“네. 정식으로 추천서 받고 입학했어요. 불만 있으면 불만 있는 분들이 옮기세요.”
상대할 필요를 못 느끼고 두어 걸음 떼던 다정이 별안간 걸음을 멈춰 세웠다.
“참. 요즘 싱글맘이라는 듣기 좋은 말도 있어요. 어디 가서 미혼모라고 하면 꼰대 소리 듣기 딱 좋으니까 알아두시고요. 상대를 배려해서 말조심하는 것도 교양의 하나겠죠? 그럼 전 돈 벌어다 주는 남편이 없는 관계로 바빠서 이만.”
* * *
쇼핑몰 내를 가로지르는 정혁의 뒤로 십수 명의 실무진들이 꼬리처럼 따라붙었다.
아무것도 거칠 것 없이 나아가는 그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바짝 긴장한 모습이었다.
최근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하는 복합 쇼핑몰 MH CITY의 불시 점검에 나선 것이다.
광활한 쇼핑몰 곳곳을 돌아다니며 까다로운 잔소리를 몇 마디 뱉은 것 말고는 그럭저럭 순조로운 편이었다.
지상층 점검을 모두 마치고 내려온 정혁은 지하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탔다.
무신경하게 정면에 시선을 두던 그의 눈가가 불현듯 일그러진다. 아이를 데리고 온 남녀의 모습이 눈에 잡힌 것이다.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이라 썩 유쾌하지 않았다.
지하층에 도착한 정혁이 민 실장을 향해 나직하게 뱉었다.
“오늘은 이쯤 하죠. 다들 복귀하세요.”
복귀하라는 한마디에 여기저기서 안도와 탄식이 뒤섞인 숨소리가 울렸다.
그들이 꾸뻑 허리를 굽히고 달아나듯 멀어지는 사이에도 정혁의 눈길은 한 방향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 * *
다정은 빵빵하게 부어오른 시우를 난감하게 바라보았다.
“안 돼. 어서 내려놔.”
엄하게 말하자 이번엔 입이 비죽 튀어나온다. 그러면서도 고사리손으로 꼭 움켜쥔 상자는 절대 놓지 않았다.
공룡 박람회에 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돌아가는 길이 말썽이었다. 아이들은 출구와 가까운 곳에 마련된 상술의 덫에 쉽게 사로잡히고 만다.
시우도 다르지 않았다. 기념품을 파는 매장에 발길이 붙잡혀 벌써 10분째 꼼짝 않고 다정과 대치 중이었다.
“유시우. 엄마랑 약속했는데. 이렇게 고집부리면 안 되는 거 알면서.”
좋은 말로 달래 보지만 아련한 눈망울은 공룡 모형이 포장된 상자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러지 말고 다정아, 사 주자.”
시우가 안쓰러웠던 도준이 설득하지만, 다정은 단호했다.
“선배, 나 그렇게 야박한 엄마 아니에요.”
시우에게 장난감 하나 사 주는 게 아까워서 이러는 게 아니었다. 시우가 고집을 부리는 장난감과 색깔만 다를 뿐 똑같은 것이 집에 있다는 게 문제였다.
“유시우. 엄마랑 약속 안 지켜?”
“…….”
“약속 안 지키면 나쁜 어린이.”
“…….”
모자의 대치 상황이 이어지고 있을 때였다. 저벅저벅 가까워진 발소리가 기 싸움이 한창인 모자 앞에 멈추어 섰다.
남자의 난데없는 등장에 다정은 놀란 숨을 집어삼켰다. 그 얼굴을 빤히 보던 남자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진다.
냉소적인 눈이 입을 비죽 내밀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보더니, 아이의 손에 들린 장난감으로 옮겨졌다.
다시 올라온 눈길이 도준을 냉랭하게 쳐다보다가 다정의 얼굴로 되돌아왔다.
“민 실장.”
정혁의 입술이 간결하게 움직였다. 그의 부름에 거리를 유지하던 민 실장이 재깍 바투 다가섰다.
“네, 전무님.”
“여기 있는 거 종류별, 색깔별, 크기별로 전부 다 여기 꼬마한테 들려 보내.”
지시를 내린 그의 손이 시우의 정수리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손가락 틈으로 밀려드는 연하고 부드러운 머리칼의 감촉이 간지러웠다.
“알겠습니다, 전무님.”
이유 불문 지시를 받든 민 실장이 잽싸게 돌아섰다. 그 모습에 다정이 제동을 걸었다.
“자, 잠깐만요.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갑자기 나타난 것도 당황스러운데 다짜고짜 흘러가는 상황이 납득이 되지 않았다. 거만한 눈길이 조금 찌푸려진 채 다정의 얼굴로 내리꽂혔다.
“돈 벌어서 뭐 해? 애 갖고 싶은 거 하나 못 사 줄 거면.”
다정의 입이 쩍 벌어졌다. 한순간에 저를 무능한 엄마로 만들어 버리는 상황이 황당해서 곧장 반박했다.
“너무 많으면 아이들이 싫증을 빨리 느낀다고요. 이것도 교육이에요.”
설마 이 남자와 교육 운운하며 아이를 두고 언쟁하는 날이 오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싫증 나면 다른 거 사 주면 돼.”
“이것 보세요! 당신이 뭔데 이래요!”
“왜? 내가 유시우한테 장난감 좀 사 주면 안 돼?”
“당신이 무슨 권리로요!”
정혁은 굳은 얼굴로 실소를 흘렸다. 권리. 기분 참 엿 같아지는 단어였다.
콱 인상을 찌푸린 그가 한 걸음 다가섰다. 닿을 듯이 불쑥 가까워진 얼굴에 짜증이 가득했다.
“소송해 볼까? 내가 내 아들한테 장난감 사 줘도 되는지 안 되는지.”
“……!”
식겁한 다정의 손이 그의 입을 황급히 틀어막지만, 늦은 듯했다.
새로이 알게 된 사실에 도준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고, 민 실장은 다른 의미로 놀라고 말았다.
모자의 뒷조사를 전담한 민 실장이지만, 설마 차 전무가 이렇게 공개적인 장소에서 그 말을 뱉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하나 다행인 건 시우가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는 거다.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지금은 오직 공룡 장난감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슬프고 서러웠기에.
다분히 충동적으로 뱉은 말이지만, 정혁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인상을 찌푸린 그가 제 입을 틀어막은 다정의 손을 쥐어 내렸다.
“어떡할래? 더 크게 말할까?”
* * *
시우의 얼굴이 마시멜로처럼 말랑말랑해졌다. 인고와 투쟁 끝에 시우는 원하는 장난감을 쟁취하고야 말았다.
언제 뺨을 부풀렸냐며 금세 좋아서 배시시 웃는 게 애는 애였다.
다정은 서둘러 시우의 손에 장난감을 쥐여 주고 돌아섰다. 후회스러웠다. 진작 사 주고 자리를 떴다면 이 남자를 마주칠 일도 없었을 것을.
동시에 화가 치밀었다.
‘소송해 볼까? 내가 내 아들한테 장난감 사 줘도 되는지 안 되는지.’
계속해서 귓가를 맴도는 말에 다정은 머리가 어질했다.
그는 분명 아무 상관도 없다는 말에 동의했다. 스스로 책임져야 할 이유가 없다고도 말했다. 그런데 어쩌자고 그런 말을.
곤혹스러운 기분을 잠시 접어 두고 시우를 계산대로 앞세울 때 등 뒤에서 정혁의 목소리가 울렸다.
“민 실장. 계산해.”
“네, 전무님.”
민 실장이 품에서 지갑을 꺼냈다.
“됐어요! 그쪽이 왜요!”
다정이 정색하고 쏘아붙이자, 민 실장의 어깨가 획 오그라들었다.
애먼 사람에게 예민하게 굴고 말았다. 미안해진 다정은 재빨리 눈에서 힘을 빼고 누그러진 투로 말했다.
“괜찮습니다. 저희가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다정의 눈길이 여전히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도준에게 향했다.
“선배. 우리 시우 장난감 하나 사 주세요.”
앞선 것과 달리 목소리가 낭랑했다.
“어? 어…… 그래.”
반쯤 넋을 놓고 있던 도준이 지갑을 찾아 몸을 더듬었다.
지갑을 꺼내 쥐고 계산대를 향하려던 그때, 잿빛 슈트에 싸인 남자의 뒷등이 도준의 시야를 덮었다.
도준을 막아서고 다정을 향해 성큼 걸음을 디딘 정혁의 눈동자가 아래로 떨어졌다.
경고성 짙은 말투가 무겁게 내리깔렸다.
“너 이런 식으로 도발하면 역효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