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끌렸고 원했고 좋았다
(18/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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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끌렸고 원했고 좋았다
2022.10.02.
“선배…….”
출근하자마자 들려온 소식을 접하고 다정은 멍한 눈만 반복해서 깜빡거렸다.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듯 도준의 해사한 얼굴이 뿌듯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래. MH 백화점 우리가 땄어.”
“아…….”
기대하지 않은 터라, 아니 탈락했으면 하고 내심 바랐기에 다정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난감했다.
“공식적으로 발표된 거예요?”
“성우가 미리 귀띔해 준 거야. 명한건설 쪽에 먼저 통보가 갔다더라고. 수일 안에 우리 쪽으로도 통보가 올 거야.”
“……그 일에 달려든 경쟁 업체가 다 쟁쟁한데 정말 우리가 됐다고요?”
“결정권자 중에 널 되게 좋게 본 사람이 있었대. 발표가 마음에 들었다나 봐.”
조금 감이 왔지만, 다정은 설마 하는 심정으로 되물었다.
“누, 누가요……?”
“누구더라?”
눈가를 찌푸린 도준이 성우와의 통화 내용을 되새겼다.
“전무라던가? 여하튼 그 사람 단독 결정이라고 하더라고.”
“네에…….”
“워낙 능력 있는 직원을 두니 피곤하네.”
“선배도 참.”
다정의 얼굴에 떠오른 수줍은 웃음이 금세 수심으로 바뀌었다.
회사를 생각하면 기쁜 일인데, 왜인지 다정은 마냥 기쁘지가 않았다.
제안서가 아무리 좋더래도, 그 남자와의 불미스러운 인연 때문에 재고의 여지도 없이 탈락할 줄 알았다.
그런 결과를 예상하고 도준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차마 이렇게 되리라곤…….
고개를 휙 내저은 다정은 심란한 마음을 떨치기 위해 애써 생각의 방향을 돌렸다.
그렇게 큰 사업에 설마 사심을 반영했으려고. 한빛의 설계가 마음에 쏙 든 걸 테지.
그 남자는 분명 당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내 아이라는 말에 동의했다.
결혼을 앞두고 있으니, 인생의 걸림돌이 될 만한 것들은 당연히 피해 가고 싶을 테다.
괜찮을 거다. 다시 마주치게 되더라도 서로 상관없는 사람처럼 지나쳐 가면 그뿐.
차정혁. 그 남자가 동의한 대로.
* * *
한적한 사찰에 고요한 풍경 소리가 맑게 울렸다.
경건하게 향을 피워 올린 정혁은 부친의 위패를 향해 절을 올렸다.
곁에 놓인 방석 위에 자리를 잡은 박 회장은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들의 위패를 마주하고도 그녀의 눈길은 오직 듬직한 손자에게 향해 있었다.
훤칠한 키며 훤한 인물이 날이 갈수록 제 아비였다. 위패 따위가 무슨 소용이냐는 듯, 박 회장은 그저 고요히 아들 보듯 손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네가 이렇게 장성한 걸 봤다면, 네 아버지가 얼마나 좋아했겠냐.”
“…….”
기어이 박 회장의 눈시울이 축축하게 젖었다.
만인을 호령하는 엄격한 기업 총수라도 이날만큼은 여과 없이 눈물을 떨구며 애통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박 회장을 배웅하고 차에 오른 정혁에게 민 실장이 물었다.
“회사로 모실까요?”
정혁은 잠시 말없이 차창 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병풍처럼 드리워진 사찰의 고즈넉한 전경이 눈에 담겼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여자가 있었다. 충동적으로 정한 행선지를 입 밖으로 꺼냈다.
“홍제동으로 가.”
쉬지 않고 내달린 자동차는 어느 지점에선가 더 나아가지 못하고 멈춰야만 했다.
길이 좁고 경사가 사나워 대형 세단을 몰아 이 이상 진입하는 건 불가능했다.
부릉부릉, 엔진음을 울리며 설설 기던 차는 어쩔 수 없이 달동네 초입에서 정혁을 뱉어냈다.
사찰에 들르느라 언제보다 말끔한 슈트 차림의 남자는 누추하고 시시한 동네와 상당한 대조를 이루었다.
정혁은 거미줄처럼 꼬인 골목길을 익숙한 양 걸었다. 그렇게 다다른 곳에선 한바탕 소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야이 인간아! 내 돈 가져와!”
「원조 파전」
낡고 삐뚤게 걸린 간판 아래로 양푼과 양은 주전자 따위가 쏟아져 나왔다. 그것들과 함께 뛰쳐나온 남자는 허둥지둥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뒤이어 낡은 문턱을 차고 나온 중년의 여자가 허공을 향해 국자를 휘둘렀다.
“이 육시랄 놈아! 내가 두 번 다시 널 상종하면 나성자가 아니다!”
여자는 멀리 달아나는 남자를 향해 천박하고 우악스럽게 욕설을 퍼부었다.
슬금슬금 구경꾼들이 모여들고 있는데도, 자처해서 구경거리를 제공하는 여자는 수치를 몰랐다.
펄펄 뛰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여자가 갑자기 땅바닥에 풀썩 주저앉는다.
“아이고오! 내 팔자야아!”
고무 재질로 보이는 보라색 슬리퍼를 손에 쥔 여자가 그것으로 땅을 치며 곡을 하기 시작했다.
정혁은 그 모습을 무심한 얼굴로 지켜보았다. 정말이지 꼴불견이 따로 없었다.
“서방이 또 쌈짓돈 훔쳐서 날랐나 벼.”
“앞에 서방은 매일 두들겨 패더니 이번 서방은 양반일세. 쯧쯧.”
동네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정혁의 귀로 흘러들어왔다.
“양반은 무슨. 맨날 화투판에서 산다더만.”
“저러고도 서방 없이 못 사는 거 보면 용하다, 용해.”
누가 보든 말든 여자는 길바닥에 퍼질러 앉아 한참이나 통곡을 했다.
세상 끝난 것처럼 울던 여자는 오래지 않아 툴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평상에 척 걸터앉아 툭 내던진 슬리퍼에 발을 꿰어 넣었다.
훌쩍이던 여자의 눈길이 그제야 구경꾼들에게 향한다.
“뭘 봐! 구경났어?!”
사람들을 향해 빽 고함을 치던 여자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 커졌다.
“에구머니나! 이게 누구야?”
멀끔한 청년을 발견한 여자가 평상을 박차고 달려 나왔다.
“엄마 보러 온 거야? 아이고, 내 새끼!”
놀라움과 반가움이 뒤섞인 얼굴을 하고 덤벼드는 여자를 피해 정혁은 뒷걸음쳤다.
“아이고나, 세상에! 우리 아들 못 본 사이 더 훤칠해졌네.”
대놓고 싫다는 내색을 하는데도 성자는 개의치 않고 따라오며 정혁의 뺨을 붙잡고 더듬었다.
정혁은 인상을 찌푸렸다. 얼굴에 닿은 손바닥에서 배어난 눅눅한 감촉이 기분 나빴다.
이 천박하고 상스러운 여자의 모습이 절 낳았다는 생모의 실체였다.
쉴 새 없이 뺨을 쓰는 손을 야멸차게 뿌리친 정혁이 진저리를 쳤다.
“만지지 마.”
씹어 뱉듯이 경고하지만, 성자는 굴하지 않았다.
“이 녀석이. 엄마한테 왜 이렇게 야박해? 내 뭐랬니? 너도 핏줄이 당길 때가 있을 거라 안 했니?”
핏줄? 정혁은 조소했다. 대꾸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아들한테 외면당한 성자는 떨떠름하게 입가를 씰룩이다가 도로 평상에 앉아 분통을 터트렸다.
“네 아부지 그 인간만 아니었으면 내가 새끼 얼굴도 못 보고 이러고 살 일이 뭐냐. 서러워 죽겠네!”
그 순간 정혁의 얼굴에 서슬이 스쳤다.
“그 입에 누굴 올려? 오늘 아버지 기일인 줄은 알아?”
샐쭉 눈을 흘긴 성자는 부루퉁하게 입을 내밀었다.
“당장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기일 타령은. 내가 이렇게 된 게 다 누구 때문인데?”
“또 아버지 탓이야? 아버지한테 미안하지도 않아? 사랑하긴 했어?”
이런 질문을 하면서도 자신이 이 여자한테 뭘 기대하고 있나 하는 한심한 기분만 들었다.
“네가 몰라서 하는 말이야. 사랑도 돈이 있어야 하지!”
성자는 당당하게 소리쳤다. 허탈한 숨을 토한 정혁은 지갑 안에 있던 수표를 몽땅 꺼내 손에 쥐었다.
“그저 돈돈! 그렇게 좋으면 실컷 주워!”
버럭 내지른 고함과 함께 구겨 쥔 수표가 공중으로 내던져졌다.
꽃가루처럼 뿌려진 수표들이 팔랑팔랑 허공을 날았다. 그 장면에 평상에 들러붙어 있던 성자의 엉덩이가 화들짝 튀어 올랐다.
“엄마야! 내 돈 다 날아간다. 이 녀석이 줄라면 곱게 줄 것이지. 내 거야! 아무도 줍지 마! 다 내 거야!”
성자는 벌레처럼 바닥을 기며 한 장이라도 놓칠세라 돈을 줍기에 바빴다. 최소한의 양심도, 일말의 수치도 모르는 여자였다.
그 모습을 경멸의 눈초리로 지켜보던 정혁은 분노를 삼키며 돌아섰다.
핏줄. 할 수만 있다면 끊어 버리고 싶었다.
차에 올라 타이를 거칠게 끌어 내리며 숨을 골랐다. 눈치를 살피던 민 실장이 조심스레 물었다.
“전무님, 어디로 모실까요?”
정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시간을 보았다. 마침 그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부릉, 엔진음을 일으키며 차가 천천히 굴렀다.
* * *
“도착했습니다. 내리시겠습니까?”
“아니, 그냥 잠시만.”
정혁은 차창 밖 한 곳에 시선을 고정했다.
잠시 뒤 예상했던 대로 아이들이 현관으로 쏟아져 나왔다. 역시나 눈에 띄는 아이는 하나였고, 정혁은 단번에 그 아이를 찾아냈다.
천진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아이가 누군가를 발견하고 해맑게 웃는다. 그리고는 앙증맞은 다리를 재게 놀려 절 반기는 여자에게 폴짝 안긴다.
유다정. 그 여자는 아니었다. 긴 생머리를 하나로 묶어 내린 여자는 아이가 이모라고 불렀던 여자였다.
여자의 손을 잡은 아이가 멀어져 간다. 두 사람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정혁은 물끄러미 향한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별안간 허탈한 실소가 흐른다.
우스웠다. 제가 왜 유치원에 있는지도 모르겠고, 애초에 왜 이곳에 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고 막연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핏줄. 정말 핏줄이 당겨서 온 걸까.
이상한 건 아이의 얼굴을 보면서도 머릿속은 온통 유다정, 그 여자로 그득했다는 거다.
여자가 믿을 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건 생모를 보며 뼈저리게 깨달아 온 사실이었다.
그랬기에 현아와의 결혼도 쉽게 결정했다. 어차피 못 믿을 거 누구라도 상관없으니까.
스스로에게 고백해 보자면 5년 전 일은 분명 정혁에게 일반적이지 않은 일이었다.
싫지 않았다. 끌렸고 원했고 좋았다.
여자가 사라진 것에 과민하게 짜증을 느끼고 신경질이 난 건 아마 그 때문이었던 것 같다.
유다정. 그 여자가 그렇게 사라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신중히 들어 올린 손끝이 결 곱게 뻗은 눈썹을 문질렀다.
분명 싫지 않은 여자였다. 그런데 아이까지 있으면 얘기가 어떻게 되는 건가.
* * *
징징. 짧게 진동한 휴대폰 화면 위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내용을 확인한 다정은 한숨과 함께 가벼운 웃음을 흘리며 답장을 입력했다.
「걱정하지 말고 실컷 바람 쐬고 와♥」
답장을 보내고 시간을 확인한 다정은 서둘러 작업 중이던 자료를 개인 USB에 백업했다.
“선배. 오늘 현장 마감했거든요. 나머지 작업은 집에 가서 할게요.”
복잡한 건물 모형을 신중히 조립해 나가던 도준이 피식 웃는다.
“새삼스럽긴.”
언젠 네 맘대로 안 했냐는 투다. 민망해진 다정은 혀를 작게 빼물고 웃었다.
종종 있는 다정의 조기 퇴근을 두고 도준은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똑 부러지게 제 할 몫을 해내고 있기에 말할 필요 없는 문제였다.
만약 빡빡한 직장 상사 눈치를 봐야 하는 처지였다면, 다정이 홀로 아이를 키우는 건 절대 불가능했을 거다.
“시우한테 무슨 일 있어?”
“아뇨. 유치원에 데리러 가야 하는데 솔이가 바빠서요.”
눈길을 들어 올린 도준이 놀랍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손님이 그렇게나 많으면 알바를 더 채용해야 하는 거 아니야?”
“카페 말고 사생활이 바빠요.”
“사생활?”
무슨 흥미진진한 사연이 있나 싶어 도준의 눈이 호기심으로 빛났다. 다정은 눈을 가늘게 좁히고 소곤대듯 목소리를 낮췄다.
“요즘 연애하거든요. 그것도 엄청 우락부락한 남자랑요.”
운동을 하며 매력을 어필하겠다던 솔이의 자신만만한 계획은 성공했다. 그리하여 솔이는 며칠 전부터 그 밸런스 파괴자와 뜨거운 열애 중이다.
「두중 씨가 양평으로 드라이브를 가자고 하는데, 거절하고 싶지 않아 ㅠㅠ」
반드시, 꼭, 기필코! 새 남자친구와 드라이브를 가고 싶다는 간절함이 메시지에서 절절히 읽혔다.
한창 좋을 시기에 친구 아들을 돌보느라 데이트를 놓치는 건 바람직하지 않았다.
다정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하던 일을 마무리 지은 도준도 따라 일어났다.
“같이 가. 오랜만에 시우 보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