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안다. 동의한다. 그런데…… (17/114)


17화 안다. 동의한다. 그런데……
2022.09.29.



“이름, 유다정. 32세. 미혼. A형. 전남 장흥 출생. 열세 살에 부친 사망. 모친은 현재 청주에 거주 중이며 형제는 없습니다. 청주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안산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했습니다.”

손을 들어 지그시 감은 눈가를 짚고 정혁은 민 실장이 읊어 대는 이력을 차곡차곡 귀에 담았다.


“S대 건축학과 입학, 졸업 이후부터 현재까지 한빛 건축 사무소에 재직 중입니다. 판교 소재 R빌라트 1008동 1401호에 실거주 중이며, 자가이고 동거인은 자녀뿐입니다. 유다정 씨에 대한 정보는 이상입니다.”

팔랑이며 서류 넘기는 소리가 흐른 뒤 민 실장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름, 유시우. 5세. O형. 서울 소재 로사 산부인과에서 5월 17일 오전 6시 32분 자연분만으로 출생. 출생 당시 부친의 인적 기록은 없으며 올해 한송 교육재단 부설 사립유치원에 입학했습니다. 이상입니다.”

서류에서 슬그머니 멀어진 민 실장의 눈동자가 좌우로 굴렀다.

보고를 마쳤음에도 차 전무는 눈을 감고 잠자코만 있었다. 민 실장의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이어졌다.


“그리고 이건 말씀하신 겁니다.”

책상 위에 얄팍한 서류 봉투가 은밀하게 내밀어졌다. 그제야 정혁이 자세를 바로 세웠다.

무겁게 굳은 눈이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흰 서류 봉투를 가만히 응시했다.

이걸 열어 보는 게 과연 현명한 일인지에 대해 잠시 생각했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밀봉하지 않은 봉투의 접힌 부분을 벌리고 내용물을 꺼내 손에 쥐었다.

빠르게 내용을 훑어 내린 눈길이 서류의 끝자락 즈음에 오래 머물렀다.

태연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띠며 한동안 침묵을 유지하던 그의 입이 마침내 열렸다.


“유다정 당장 들어오라고 하세요.”

 

* * *

전무실 안으로 들어섰을 때 커다란 의자는 블라인드를 향해 있었다.

그 블라인드를 투과한 햇살이 빗살처럼 실내의 한쪽 면을 환하게 밝혔다.

커다란 의자를 향해 다정은 꾸뻑 허리를 접었다.


“……안녕, 하세요.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제야 다정을 등지고 있던 의자가 몸을 회전했다. 눈이 마주쳐서 다정은 다시 한번 허리를 굽혔다.

무겁게 몸을 늘어뜨린 정혁의 눈동자가 다정을 나른하게 응시해 왔다.

제법 오래도록 이어지는 눈길이 불편해질 무렵, 남자가 입을 열었다.


“앉아요.”

그가 소파를 눈짓했지만, 다정은 단번에 거절했다.


“괜찮습니다. 말씀하세요. 여기서 듣겠습니다.”

당차 보이려 애는 쓰는데 명백히 긴장한 모습. 여차하면 도망이라도 칠 기세로 여자는 문 근처를 오도카니 지키고 있었다.


“그래, 그럼.”

피식 웃은 그가 책상 위에 있던 A4용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다정은 조금 어이가 없어지려고 했다. 사람을 불러 놓고 그는 한가롭게 종이접기를 하고 있었다.

꼼꼼하게 뭔가를 사부작거리는 동안에도 그의 태도는 한결같이 여유작작해 보였다.

다정은 긴장을 다스리며 종이를 접어 나가는 긴 손가락의 움직임을 침묵으로 좇았다.

이윽고 그의 손에서 완성된 작품은 종이비행기였다.

요리조리 돌려보며 만족스럽게 웃는다. 곧 허공으로 떠오른 종이비행기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사무실 안을 휘저었다.

잠시 후 제 어깨를 툭 때리고 발치로 떨어진 종이비행기를 보며 다정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모욕감을 주는 방법도 가지가지였다. 예전에도 알고 있었지만, 정말 성격 별로였다.


“지금 뭐 하시는 건가요?”

지극히 사무적이지만 불쾌함은 감추지 않았다. 그러자 그가 대뜸 말했다.


“유다정, 당신 미혼모라며.”

‘밥 먹었어?’처럼 대수롭지 않게 뱉어 낸 말에 다정의 안색이 급격하게 굳었다.

심장의 고동이 빨라지는 걸 느끼며 다정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게…… 전무님과 무슨 상관이죠?”

힐끗 눈길을 들어 올린 정혁은 다시 한번 헛웃음을 지었다. 제법 당돌하게 굴긴 하는데, 너무 가소로워서 자꾸만 웃음이 났다.


“그거나 보고 뻗대.”

나른하게 늘어진 눈길이 그녀의 발치를 가리켰다. 다정은 시선을 떨궜다. 그가 가리키는 곳에 종이비행기가 있었다.

뭔가가 인쇄된 서류였다. 의중은 알 수 없지만, 어련히 내용을 확인해 보란 말인 것 같아 순순히 종이비행기를 주워 펼쳤다.

다정은 천천히 내용을 훑어 내려갔다. 그리고 한순간 온몸의 피가 모조리 빠져나가는 듯한 아찔한 기분에 사로잡히고 만다.

서서히 굳어 가는 여자의 반응을 즐기기라도 하는 양 남자의 입꼬리가 미끄러졌다.


“상황파악 되지?”

속살거림 같은 짧은 한마디에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다정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문 채 움켜쥔 종이만 주시했다. 어지러운 글자들을 씹어 대는 눈동자가 거칠게 요동쳤다.


“내 애더라고.”

다시 확인시켜 주지 않아도 되었다.

들켜버렸다고. 모두 들통나 버렸다고. 손끝에 간신히 쥐고 있는 종이 위에 그 사실이 선명히 인쇄되어 있었기에.

「 차정혁(부) XY / 유시우(자) XY / 친자확률 : 99.999999875....% 」


“우리 노인네가 나만 보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어. 씨도둑질은 못 한다나 뭐라나.”

무겁고 또 나른한 빛을 띠는 눈동자가 그녀의 창백한 얼굴로 향했다. 살짝 기울어진 입술이 희미한 실소를 흘렸다.


“근데 있더라고. 그 도둑년이.”

 

 
파랗게 질린 다정의 손안에서 유전자 검사지가 우그러졌다. 다정은 곤란해진 호흡을 애써 가다듬고 목소리를 내었다.


“제…… 아이예요. 전무님과는 상관없습니다.”

정혁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냥 웃어 버렸다.

멋대로 제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으면서 저렇게 당당할 일인가. 아니, 저건 뻔뻔한 거다. 그래서 그런가. 볼 때마다 괘씸한 기분이 치솟았다.

왜 그런 기분이 드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어느 대목이 괘씸한 건지.

일부러 작정하고 아이를 가진 건 아닐 거다. 정혁도 그 정도는 알았다.

애초에 수작을 부릴 목적이었다면, 이렇게 유전자 검사지를 들이대기 전에 제 발로 먼저 찾아왔겠지.

크고 맑고 순진무구한 눈을 가진 다섯 살짜리 남자아이의 손을 잡고, 아니지. 벌써 5년 전에 찾아와 초음파 사진을 들이밀며 이렇게 말할 거다.

‘당신 아이예요. 그러니 책임지세요.’라고.

유다정에게도 임신은 일종의 사고였을 거다. 그 사고에 대해 그에게 알릴 길조차 없었다는 것 역시 알았다.

다만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건, 그 사고의 결과물을 실체로 만들어 세상 밖에 내놓았다는 사실이었다.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당장 중요하지 않았다. 정작 화가 나는 건 다른 대목이니까.

말했어야지. 적어도 재회했을 때 말했어야지. 시침을 떼고 발뺌을 하는 게 아니라.

당신의 유전자와 99% 이상 일치하는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었다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말을 했어야지.

놀라고 황당하기야 했겠지만, 이렇게까지 기분이 엿 같진 않았을 거다.


“되게 자신만만하네?”

“……떳떳하지 못할 게 없으니까요.”

“그래? 그럼 소송해 볼까? 5년 전에 네가 도둑질해 간 걸 내가 돌려받을 수 있는지 없는지.”

“그게 무슨…….”

아연하게 질린 다정을 주시하는 눈빛이 일순 사납게 돌변했다.


“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기는 해?”

낮게 씹어 뱉는 음성도 전에 없이 무겁고 날카로웠다. 늘 태연자약하기만 하던 남자의 얼굴 위로 뒤섞인 복잡한 감정들이 스쳤다.


“미치지 않고서 어떻게 그런 짓을 해.”

“저, 전…….”

뭐라도 항변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벙긋거리는 다정의 입술은 끝내 아무 말도 뱉지 못했다.

그랬을까. 제 선택이 미친 짓이었을까.

고작 하룻밤인 남자의 아이를 낳았다. 그 선택에 있어 아이 아빠를 철저히 배제한 것도 사실이었다.

두 번 다시 만날 일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그에겐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상황일 것이다.

곧 결혼을 앞두고 있으니 달갑지만은 않겠지. 어떻게든 그녀와 시우의 존재가 신경 쓰일 테다. 혹은 거슬리거나.

그랬기에 다정은 더더욱 당당하고 떳떳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시우의 존재를 부정하는 거니까. 제 전부인 시우가 실수로 태어난 아이가 되어 버리는 거니까.

다정은 단언할 수 있었다. 다시 5년 전으로 돌아간대도 같은 선택을 할 거라고.

적막한 침묵이 끝나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하던 차에 다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어느새 냉정을 되돌린 채였다.


“안심해요, 유다정 씨. 소송은 안 할 테니까.”

정혁은 가볍게 한숨을 몰아쉬었다.

여자의 말이 맞았다. 애초에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아이였다.

곰곰 생각하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해. 네 맘대로 낳았는데, 그걸 내가 어떡하겠어. 책임질 이유가 없잖아.”

원하는 대답이었는데, 다정은 왠지 모르게 가슴이 저렸다.

어쨌든 다행스러운 결말이었다. 다정은 다시 한번 힘주어 못을 박았다.


“맞아요. 전무님한텐 아무런 책임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관심 두지 말아 주세요.”

“…….”

정혁의 눈꺼풀이 지그시 내려앉았다가 다시 올라섰다.

묘한 불쾌감이 밀려들었다. 안다. 동의한다. 그런데 도리어 상대가 뻔뻔하게 나오니까, 그건 그거대로 거슬렸다.

떨떠름한 표정을 정갈하게 바꾼 그는 낮게 조소했다.


“얘기 빨라서 좋네. 알았어. 그만 가 봐요. 유다정 씨.”

 

 

* * *

박 회장의 눈썹이 쓱 올라갔다. 중문을 밀고 들어서는 손자의 얼굴이 평소와 달리 침침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할머니, 왜 또.”

하라면 하고, 오라면 오면서도 막상 면전에선 툴툴거린다. 매사에 못마땅하고 불만이 많아 보여도 타고나길 순종적인 녀석이었다.

박 회장은 습관처럼 투덜거리는 손자의 재킷을 받아들고 등을 어루만졌다.


“왜는. 내일 네 아버지 기일이라 불렀지.”

“…….”

박 회장을 바라보는 정혁의 얼굴에 약간의 당황이 스쳤다.

철새처럼 외국을 떠돌아도 일 년에 한 번은 반드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매년 이맘때가 아버지의 기일이기 때문이었다.

며칠째 머리가 무서워서인지, 기분도 거지 같았다.

그 때문일까. 지금껏 한 번도 잊은 적 없던 아버지의 기일을 새카맣게 잊고 있었다는 사실에 짜증이 밀려 나왔다.

가볍게 한숨을 삼킨 그는 곧장 소파로 걸어가 풀썩 몸을 묻었다. 귀찮은 손길로 슥슥 타이를 끌어 내리는 손자를 유심히 보며 박 회장이 넌지시 물었다.


“무슨 일 있는 게야?”

“아니.”

무심히 툭 내뱉지만 꺼칠한 안색은 평소와 달랐다. 박 회장은 더 묻지 않았다.


“씻고 내려와 밥 먹거라.”

“이따가.”

짧게 자른 정혁이 박 회장의 손을 잡아 소파에 주저앉혔다. 그리고는 넙죽 드러누워 보기에도 앙상한 할머니의 무릎에 머리를 대었다.

다 큰 녀석이 응석이다. 그게 싫지 않아서 박 회장은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손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늘은 예서 자고 내일 할미랑 같이 네 아버지 보러 가.”

대답은 없지만, 박 회장은 손자가 자신의 말대로 할 거라는 걸 알았다.


“곤하냐?”

“응.”

꺼칠한 낯을 보며 안쓰러운 표정을 짓던 박 회장이 정혁의 넓은 어깨를 아기 어르듯 토닥였다.

고요하게 덮였던 정혁의 눈꺼풀이 올라갔다.


“할머니. 그때…… 어땠어?”

“그때? 언제?”

“나 처음 만났을 때.”

처음 만났을 때라. 그때를 떠올려 보듯 박 회장의 늙어 주름진 눈이 옛 감상에 젖어 들었다.


“어떻긴. 얘가 내 손자가 맞나 했지.”

박 회장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어렸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내 손자구나 했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정혁은 다시 눈을 감았다.

곰곰이 떠올려 보았다. 유시우. 그 아이를 처음 봤을 때 어땠더라.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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