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너 아빠 어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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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너 아빠 어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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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너 아빠 어딨어?
2022.09.25.
“누수 사고예요. 재공사는 당연한 거고, 당장 시급한 건 피해 배상 부분입니다. 최 변호사님께서 아웃렛 쪽 담당자와 직접 논의해 주셨으면 하고요.”
사고 해결을 위해 도준이 한빛의 고문 변호사와 통화하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아닙니다. 1차로 아웃렛 쪽과 배상 합의를 하고, 2차로는 시공 업체 쪽에 책임을 물을 겁니다. 네, 심각하죠.”
그렇게 말하면서 허허 웃는 도준은 전혀 심각해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기막혀하며 다정은 층수 버튼을 눌렀다.
사람이 좋은 것도 정도가 있지. 이러니 매번 황 이사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걸 테다.
실제로 아웃렛 건은 문제가 심각했다.
사고를 친 범인은 만수설비지만, 책임은 전적으로 공사를 감독한 한빛 건축 사무소에 있었다.
당장 침수로 못 쓰게 된 상품의 피해액과 중단된 영업 날짜의 막대한 손실까지 한빛이 떠안아야 할 판이었다.
당연히 만수설비 측에 손해배상 청구를 하겠지만, 진짜 문제는 거기서부터였다. 황 이사가 순순히 배상할 리 없기 때문이었다.
공사는 엉망으로 해 놓고 책임 회피는 기본에 되레 뻔뻔하게 큰소리를 치는 작자였다.
배 째란 식으로 나올 게 뻔하기에 소송으로 갈 가능성이 농후했다.
도준도 황 이사가 어떤 사람인 줄 알기에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을 거였다.
“관리 감독에 소홀했으니 우리 쪽 책임도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띵, 멈춰 선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통화에 전념하던 도준이 의아하게 눈을 치떴다.
주차장이 있는 지하 3층에 도착했을 거라 믿은 엘리베이터는 뜬금없게도 지상 5층에 도착해 있었다.
말없이 앞서 내린 다정이 스포츠 의류 매장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네, 물론이에요. 하지만 계약 사항을 위반한 건에 대해선 책임을 져야겠죠.”
다정의 뒤를 어슬렁어슬렁 따라가며 도준은 계속 통화를 이어 갔다.
“네, 그 부분은 변호사님께서 알아서 처리해 주세요.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
대략 10분가량의 통화를 마치고 눈길을 돌렸을 때 다정은 이미 건너편 매장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다정이 줄기차게 살펴보는 건 여성용 운동화였다.
“운동화 사려고?”
태연히 묻는 도준의 눈길이 다정의 운동화 발로 향했다. 불과 한 달 전 자신이 선물한 운동화였다.
운동화가 벌써 닳았을 리는 없고, 싫증이 났나. 아니면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생각이 많아지던 차에 진열된 운동화 하나를 고른 다정이 발을 끼워 넣으며 말했다.
“나 말고 희주 씨 거요. 뒤꿈치가 다 닳아서 볼 때마다 얼마나 안쓰러운지 몰라요.”
도준의 입가에 안도의 웃음이 번졌다.
그럼 그렇지. 운동화를 선물한 사람 보란 듯이 다정이 그럴 리가 없는데.
잠시라도 의심을 했다는 사실이 멋쩍어진 도준은 괜히 투정을 부렸다.
“월급 주는 사람 좀 그렇게 생각해 봐.”
“선배는 뭘 몰라도 너무 몰라. 이게 다 선배를 위해서라고요.”
운동화를 신고 바닥을 디뎌 보던 다정이 새침한 표정으로 받아쳤다.
“운동화는 희주한테 사 주고, 왜 생색은 나한테 내?”
“희주 씨가 낡은 운동화 신고 현장에서 못이라도 밟고 다치면 어떡해요. 이게 다 선배 걱정 덜어 주려는 건데, 내 마음을 그렇게 모르겠어요?”
“나 참, 누가 사장인지 모르겠네.”
도준의 불만이 길어지자 대번에 퉁명한 말이 쏘아졌다.
“선배는 왜 맨날 직원만 못살게 굴어요? 만수설비한텐 찍소리도 못하면서.”
호된 질타에 도준은 뜨끔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계속 들먹이는 게 한 달은 우려먹을 기세였다.
그런데 이렇게 야단을 맞는 게 싫지만은 않았다. 제 안에 변태스러운 기질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하며 도준은 씁쓸하게 웃었다.
“사람 안 다쳤으면 됐어.”
“네네, 어련하시겠어요.”
다정은 말해 뭐 하냐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속상한 마음에 볼멘소리를 퍼붓지만, 도준의 말이 옳았다.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비교적 쉬웠다. 만약 인명 피해가 났더라면 그건 수습조차 불가능했을 거다.
사람이 안 다쳤으니, 그거면 된 거다.
낙천적이고 선한 면모가 어떨 땐 불만스럽기도 했지만, 도준이 그런 사람이라서 다정은 참 좋았다.
* * *
회사로 출근한 다정이 희주의 책상 위에 쇼핑백을 살포시 내려놓았다.
“희주 씨, 선물.”
“네……? 선물요? 저한테요?”
희주의 눈이 크게 뜨였다. 상자만 보고도 내용물을 짐작한 희주는 입을 벌린 채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지난주에 한아름 아웃렛 갔다가 희주 씨 생각나서 샀어. 운동화 너무 낡았더라.”
“허엉, 팀장니임…….”
“비싼 건 아니니까 부담 갖지 말고.”
비싸지 않긴. 누구라도 아는 고급 브랜드의 운동화였다.
“혹시 사이즈 안 맞으면 말해. 바꿔다 줄게.”
“걱정 마세요. 안 맞으면 제 발을 깎아서라도 신겠습니다!”
결연하게 외친 희주가 냉큼 새 운동화를 꺼내 발을 구겨 넣었다.
“와, 딱 맞아요.”
“구두 235길래 운동화는 한 치수 크게 샀어.”
“고맙습니다, 팀장님! 제 발 사이즈까지 아시고, 저 완전 감동이에요! 힝!”
다정을 와락 끌어안은 희주가 고양이처럼 마구 머리를 비볐다. 애교를 부리는 후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다정도 찌푸려 웃었다.
화기애애한 광경을 말없이 지켜보던 도준의 입가에도 흐뭇한 웃음이 번졌다.
정작 운동화값을 치른 사람이 따로 있다는 걸 몰라 주는 건 허탈했지만, 다정이 웃으면 그걸로 족했다.
* * *
정오를 조금 넘긴 무렵, 한송 유치원에 검은 세단 서너 대가 멈춰 섰다.
가장 선두 차량에서 내린 정혁의 눈길이 저만치 진입로로 향했다. 진입로를 미끄러져 들어 오는 또 다른 검은 세단이 보였다. 박 회장을 태운 차였다.
이맛살을 찌푸린 정혁의 눈길이 유치원의 전경을 불만스럽게 훑었다. 이깟 유치원이 뭐라고 오늘내일하는 노인네까지 불러 참 유난이다.
오늘 잡힌 일정은 한송그룹의 제안이었다. 곧 가족으로 엮일 사이끼리 단란한 오찬을 나누는 게 어떠냐는 취지였다.
그런데 굳이 오찬 전에 유치원 방문 일정까지 고집스럽게 끼워 넣었다.
꼭두각시처럼 현아를 내세우지만, 뒤에 숨어 이런 번잡한 일을 기획하는 건 언제나 강선영이었다.
한송그룹 안주인이랍시고 가진 게 재단 하나니, 내세워 자랑할 만한 것도 그것뿐일 거다.
한송 사립유치원은 선영이 재단을 맡고 처음 낸 성과였다. 그러니 유치원에 남다른 자부심과 애착을 갖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때가 탈 만큼 탄 사람들을 상대로 순수의 상징인 유치원을 배경 삼아 과시하는 건 좀 아니지 싶다.
느리게 굴러와 멈춰 선 검은 세단에서 박 회장이 비서진들의 보좌를 받으며 내려서고 있었다.
여전히 못마땅하게 그 장면을 지켜보던 정혁의 귀에 이질적인 소리가 흘러들었다.
눈길을 돌리자 체육복을 입은 작은 것들이 꽥꽥 소리를 지르며 현관을 뛰쳐나오고 있었다.
체구만 작았지 흡사 통제 불능 새끼 짐승들 같았다. 그 안에서 익숙한 얼굴 하나가 눈에 잡혔다.
구분조차 되지 않는 짐승들 틈에서도 말갛고 작은 얼굴은 유독 빛이 났다.
정혁과는 안면이 있는 꼬마였다.
“유시우!”
이름을 부른 건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그리 크지 않은 외침에도 제 이름이 귀에 딱 박혔던지, 운동장을 향해 달려가던 시우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어! 아저씨다!”
끼익 멈춰 선 발이 방향을 틀었다. 반가워하는 모양새였다. 오도도 달려온 시우가 꾸뻑 허리를 굽혔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어.”
정혁은 짧게 손을 들어 인사를 대신했다.
“유시우.”
“네에!”
그의 입술이 다시 충동적으로 움직였다.
“너 아빠 어딨어?”
“아빠? 어…….”
커다란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시우의 입이 새 부리처럼 짹 벌어졌다.
“아빠 하늘나라!”
“…….”
정혁은 호흡을 느리게 조절했다.
하늘나라. 근본 없는 동심의 언어였다. 흔히들 ‘사망’ 내지는 ‘절명’ 혹은 ‘요절’ 따위의 말로 해석해도 무방할 거다.
그때 상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시우 어린이!”
선생님의 부름에 큼직한 눈망울이 옆으로 휙 돌았다가 다시 원위치했다. 냉큼 허리를 굽힌 시우가 씩씩하게 소리쳤다.
“아저씨! 안녕히 가세요!”
정혁은 친구들에게 달려가는 시우의 뒷모습을 가만히 주시했다.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죽었다? 그래서 혼자 아이를 낳아 기르는, 뭐 그런 상투적이기 이를 데 없는 사연인가.
퍼즐을 맞춰보고 있을 무렵, 박 회장이 곁으로 다가왔다. 노인을 힐끗 돌아본 정혁의 눈썹이 살짝 들린다.
저야 안면이 있어 그런다지만, 노인의 눈길이 처음 보는 아이의 뒷모습에 길게 머무는 게 의아했다.
“노인네, 뭘 그렇게 봐?”
무심히 던지자 박 회장이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뭐 저리 빼다 박았누?”
“누굴?”
“뉘 집 자식인지, 네 녀석 어릴 때랑 빼다 박았구나.”
너무 황당해서 정혁은 웃음도 안 나왔다.
“노인네가 노망이 났나.”
“말본새하고는!!”
말버릇 고약한 손자에게 버럭 성을 낸 박 회장이 재차 혀를 찼다.
“옛말도 틀린 게지. 씨도둑질은 못 한다더니, 그도 아닌 걸 보면.”
“…….”
멍하니 굳은 정혁은 가만히 호흡을 멎었다.
도둑질. 왜인지 친근하기까지 한 단어가 귀로 날아와 꽂힌 순간 뇌의 기능도 멈춰 버린 듯했다.
“그만 들어가자꾸나.”
박 회장이 발끝을 돌려세웠다. 그때 선영과 현아가 현관으로 뛰어나왔다.
“할머니이!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
철없는 어린애처럼 깡충 뛰어든 현아가 박 회장의 팔짱을 끼고 아양을 떨었다.
선영도 언제보다 만족스러운 웃음을 띤 채 예의를 갖춰 정숙하게 허리를 숙였다.
“회장님 오시느라 힘들지는 않으셨어요?”
“차가 실어다 주는데 힘들긴.”
박 회장이 손사래를 쳤다.
“어서 들어가세요. 회장님 오신다고 재단 관계자들 모두 기다리고 있습니다.”
선영의 재촉에 걸음을 떼려던 박 회장의 눈길이 손자에게 향했다. 약간 넋이 나간 것 같은 얼굴을 보며 박 회장이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왜 그러니?”
“……아니. 들어가.”
그러고도 정혁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이끌리듯 그의 눈길이 운동장으로 향했다. 괴성을 내지르며 활개 치는 새끼 짐승들 틈에서 그 아이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노인네, 눈썰미하고는.”
서늘하게 늘어진 입술이 낮게 읊조렸다.
이제야 감이 왔다. 그 여자가 제게서 뭘 훔쳐 갔는지.
확신에 찬 의심이란 결론에 도달하자 일순 머릿속이 개운해진 기분이 들었다.
어두운 공간을 헤매다가 스위치를 발견하고 불을 탁 밝힌 것처럼.
마른 섶에 불을 댕기듯 발동된 호기심이 정혁의 내부에 불길처럼 번져 갔다.
지금 드는 의심이 사실이라면, 유다정 그 여자는 제정신이 아닌 거다.
박 회장의 모습이 현관 안으로 완전히 사라졌을 때 정혁의 눈길이 민 실장에게 날아가 꽂혔다.
“민 실장. 일 하나 합시다.”
* * *
이른 아침 시우의 등원 준비로 분주하던 다정은 의아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평소와 달리 시우의 알림장에 선생님의 개별 메시지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응? 시우야.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우리 시우 칫솔이 사라졌대.”
꼼지락거리며 스스로 양말을 신던 시우가 그제야 뭔가를 떠올리고 다정에게 달려왔다.
“어, 맞다. 엄마. 선생님이 치카 친구 새 걸로 가지고 오랬어요.”
“이상하네. 우리 시우 치카 친구가 어디로 갔을까?”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다정은 대수롭지 않게 욕실로 들어가 수납장을 열었다. 다행히 여분의 어린이용 칫솔이 남아 있었다.
새 칫솔을 유치원 가방에 넣어 주며 다정이 당부했다.
“시우야. 유치원 가면 선생님 드리고 이름 써 주세요, 해. 알았죠?”
“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