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악덕 고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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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악덕 고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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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악덕 고용주
2022.09.22.
휴대폰 너머에서 호들갑스레 울리는 목소리는 몹시 흥분한 상태였다.
『길 가다 시우 아버님 아니세요? 하게 생겼더라니까! 웬일이니! 나 기절하는 줄 알았잖아!』
“그랬구나…….”
다정은 무거운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 남자가 또다시 시우와 마주쳤다.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걸까. 가슴이 조이는 기분이었다.
『원장이랑 결혼한다는데 앞으로 어떡할 거야?』
“어? 결혼……?”
멍한 표정이 된 다정은 동그랗게 커진 눈만 깜빡였다.
『그렇다니까! 잘 아는 사이신가 봐요, 했더니. 원장이란 여자가 나랑 결혼할 사람이에요, 대뜸 그러더라니까!』
“…….”
『원장이랑 결혼하면 원장 남편 되는 거잖아. 그럼 유치원도 뻔질나게 드나들 테고.』
“엄마아…… 코오…….”
시우가 졸린 눈을 비비며 방을 걸어 나왔다.
“솔이야, 시우 졸린가 봐. 내일 다시 통화해.”
서둘러 통화를 마친 다정은 비틀거리는 시우를 돌려세웠다.
“우리 시우, 엄마랑 코할까?”
“네에…….”
침대에 눕히고 웅크린 어깨를 잠시 도닥여 주자 끔뻑대던 눈이 금세 감겼다. 시트에 눌린 뺨이 밀가루 반죽 같아서 웃음이 났다.
시우를 바로 눕히고 이불을 끌어 올리던 다정의 얼굴에 문득 그림자가 졌다.
시우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그 위로 어김없이 그 남자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오현아 원장과 결혼을…….
그가 누구와 결혼하든 다정과는 관계없는 얘기였다. 어쩌면 그가 서둘러 결혼하는 게 다정의 걱정을 더는 길일지도 모른다.
가정을 이루고 나면 그 밖의 것에 관심을 쏟을 여력 같은 건 없을 테니까.
그런데 기분이 왜 이렇게 착잡한지 모르겠다. 이제 저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남자인데.
* * *
백화점을 활보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늘어진 입가에선 웃음이 떠날 줄을 몰랐다.
“고마워 엄마. 현아가 사랑하는 거 알지?”
선영의 팔을 꼭 끌어안은 현아가 고양이처럼 머리를 비볐다.
그녀의 어깨에 걸린 샹델의 신상 백이 노릿한 가죽 냄새를 퍼뜨리며 광택을 발했다. 며칠 전 선영이 약속한 물건이었다.
그뿐 아니라 온갖 명품 브랜드의 로고가 새겨진 쇼핑백들도 수행 비서의 손에 주렁주렁 들려 있었다.
기분이 좋아 애교를 부리는 딸의 모습에 선영의 얼굴에도 흐뭇한 미소가 어렸다.
“우리 딸. 이깟 거에 만족하면 어떡해? 명한 안주인이 되면 이런 건 금방 시시해질 텐데.”
현아가 호기심 어린 눈을 빛냈다.
“가방보다 더 좋은 게 있어?”
“당연하지. 우리 딸 순진해서 큰일이야. 암튼 지금처럼만 해. 엄마가 뭐든 지원해 줄 테니까.”
환하게 웃던 현아의 입이 벙글 벌어졌다.
“엄마 말대로 하니까 확실히 오빠가 날 좀 다르게 보는 것 같아. 직업정신이 투철한 것 같다면서 칭찬까지 해 주던걸.”
선영이 말해 뭐 하냐는 듯이 샐쭉 웃었다.
“뭐랬어? 엄마 말만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고 했어, 안 했어?”
“참, 엄마가 추천서 써 줬던 미혼모 말이야.”
미혼모란 말이 나오자 한가롭게 거닐던 선영이 예민하게 반응하며 발을 멈춰 세웠다.
“그 여자가 왜?”
“그 여자 정혁 오빠랑 아는 사이인가 봐.”
“정혁이 한국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그런 여자를 알아?”
“진짜야. 오빠가 그랬어. 뭘 훔쳐 갔다고.”
“훔쳐? 뭘?”
현아가 고개를 붕붕 저었다.
“몰라. 오빠도 모른대.”
그나저나. 눈가를 찌푸린 선영이 관자놀이를 짚었다.
“미혼모인 줄도 모르고 추천서를 써 줬다가 제대로 코가 뀄지.”
생각하지 않을 땐 몰랐는데, 그 일을 다시 떠올리자 심기가 불편했다. 그런 선영에게 현아가 볼멘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러게 엄마는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한테 추천서는 왜 써 줘? 유치원 이미지만 나빠지게.”
정말이다. 동정 어린 충동으로 베푼 선심이 유치원의 격을 해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재단 자금 사용의 투명성을 이유로 공모 입찰을 진행하는 시늉만 했을 뿐, 애초에 유치원 건설과 시공 업체는 청탁을 받아 내정된 상태였다.
공모 참여일. 이사장이랍시고 자리를 지키고 앉아 형식적이고 작위적으로 호응하면 그뿐인 자리였다.
소모적인 시간을 보내던 중 만삭의 임산부가 들어왔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힘 있는 목소리로 발표하는 모습이 선영의 눈에 제법 열성적으로 비쳤다.
그 모습에서 선영은 예전 현아를 가졌을 당시의 자신을 떠올렸고, 순간적인 감상으로 추천서까지 써 주는 과오를 저지르고 만 것이다.
시간이 흘러 그 일은 까맣게 잊혔다. 몇 년 후, 새로 입학한 원아 중에 사생아가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재단이 발칵 뒤집혔다. 부모와 집안 내력까지 까다롭게 심사하고 입학을 허용하는 절차상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한송 사립유치원에 사생아라니.
마음 같아서야 없던 일로 하고 싶지만, 이사장 체면에 한 입 갖고 두말하긴 뭐했다.
격이 달려도 한참 달린 모자가 영 껄끄러웠던 선영은 뭔가 방법이 없을까 고민했다.
잡음 없이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져 주면 좋으련만.
* * *
늦은 오전 다정은 설계도면과 필요한 자료들을 챙기라고 희주에게 지시했다. 함께 L파크 현장에 나가 볼 참이었다.
도면을 말아 화구통에 챙겨 넣던 희주가 갑자기 칭얼거렸다.
“흐잉, 배고파앙.”
“아직 점심시간 멀었는데, 뭘 했다고 벌써 배고프대?”
엄한 선배처럼 핀잔을 주자 희주의 눈이 동그래졌다.
“팀장님이 뭘 잘 모르시네. 원래 우리처럼 머리 쓰는 사람들은 가만히 멍만 때려도 에너지가 소비된다고요.”
“멍을 때려서 배고픈 게 아니라 아침을 안 먹으니까 배가 고프지.”
정확한 지적에 희주가 들켰다는 듯이 히히 웃는다. 싱거운 짓을 보며 다정도 웃었다.
“현장 가기 전에 점심부터 먹자. 먹고 싶은 거 다 말해. 오늘은 언니가 쏜다.”
“꺄! 최고 최고! 팀장님 오늘 중식 어때요?”
“그러고 보니 짜장면 땡기는데?”
“전 짬뽕요!”
정겹게 팔짱을 끼고 사무실을 나서려는데, 휴대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는 도준이었다. 다정이 휴대폰을 귀에 붙였다.
“네, 선배.”
잠잠히 듣고만 있던 다정이 눈가를 찌푸렸다. 통화를 마친 그녀가 무거운 한숨을 뱉었다.
“희주 씨. 일 생겼어. L파크는 내일 가야겠다.”
“네, 팀장님.”
희주는 즉각 수용했다. 현장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지갑에서 법인 카드를 꺼낸 다정이 그것을 희주의 손에 꼭 쥐여 주며 말했다.
“짬뽕 곱빼기로 먹어. 탕수육도.”
* * *
옥외 주차장으로 내려간 다정은 트렁크에서 운동화를 꺼냈다. 현장에 갈 때 운동화로 갈아신는 건 필수였다.
때마침 주차장으로 도준의 차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선배 빨리 왔네요.”
“미리 마셔.”
차에 올라 안전띠를 매기도 전에 다정의 코앞에 테이크아웃 커피가 불쑥 내밀어졌다.
도준을 보는 다정의 눈이 가늘어졌다.
“선배. 약았어요.”
“이럴 땐 세심하다고 해야지.”
뻔뻔한 말에 다정은 실없이 웃음을 터졌다. 신경 쓸 일이 있을 땐 카페인이 약이라는 걸 아는 도준이라 준비도 철저했다.
그의 이런 자상한 배려는 지금부터 맞닥뜨릴 문제가 엄청 골치 아플 거라는 걸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미리 약을 먹이는 거였다.
* * *
한아름 아웃렛은 일 년 전 준공된 곳이었다. 한빛이 설계했고 여러 협력 업체가 시공을 맡았다.
활발하게 운영되던 아웃렛은 이틀 전 갑작스럽게 발생한 누수 사고로 지하층 영업을 잠정 중단했다.
현장에 도착했을 때 지하층은 이미 폐쇄된 상태였다.
“따로 수리업체를 불렀는데, 이건 자기네들이 손댈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하더라고. 매장 문 다 닫고 상품도 다 침수되고. 이거 어쩔 거요?”
관리 책임자는 짜증을 감추지 않았다.
“저희가 누수 원인부터 찾아서 해결한 뒤에 배상은 적법한 논의를 거치겠습니다.”
도준이 조곤조곤 그를 달래며 다정의 머리에 살뜰히 안전모를 씌웠다.
디딘 발밑에서 찰박거리는 물소리가 울렸다. 감전 위험 때문에 전기까지 차단하자 주위가 암흑처럼 까맸다.
도면을 펼쳐 든 다정은 안전모에 부착된 랜턴 불빛에 의지해 눅눅한 공간을 탐색했다.
도준도 사다리를 어깨에 짊어지고 탐지견처럼 신경을 곤두세운 다정을 바싹 뒤쫓았다.
“만수설비 지긋지긋해.”
다정이 못마땅하게 중얼거렸다.
이번에도 만수설비였다. 완벽한 설계와 시공에 만수설비만 껴 있으면 늘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이었다.
저 들으라고 하는 말이라 도준이 눈치를 보다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이번에 방배동 리모델링만 끝나면 거래 끊으려고 했어.”
찰박찰박 소리를 내며 걷던 다정이 휙 돌아섰다. 랜턴의 환한 불빛이 시야를 덮치자 도준의 눈살이 일그러졌다.
“정말이에요, 선배. 이번엔 인정에 휘둘리기 없기예요.”
“알았대도. 눈부셔. 얼른 가.”
만수설비가 사고를 칠 때마다 도준은 사정사정하는 황 이사를 야멸하게 내치지 못했다. 다 좋은데, 그런 부분에서 영 물러터진 게 단점이었다.
사다리를 밟고 올라가 천장 마감재를 밀어 올린 다정은 휴대폰 플래시까지 동원해 한참이나 어두운 공간을 살폈다.
“화장실은 아니고…… 푸드코트네요. 배관도 설계보다 규격이 작아요. 이러니 부하가 안 오고 배겨요? 어딘가 균열이 생겼거나 연결구가 터졌을 거예요. 하여간 자기네 마음대로라니까.”
만수설비의 만행을 목격한 다정은 한숨이 깊었다.
“공사 크겠어요. 배관 몇 개 교체한다고 될 일이 아니에요. 손해배상 들어올 텐데 어떡해요?”
“그런 건 대표가 알아서 하니까, 팀장님은 그만 내려오시죠.”
도준이 재촉했다. 아까부터 사다리를 붙잡고 안절부절 긴장을 늦추지 않는 그를 보자 다정은 웃음이 났다. 하여간 매번 물가에 내놓은 애 취급이었다.
다정이 한쪽 발을 아래로 내렸다. 디딤판을 잘 딛고 나머지 발을 떼는 순간, 찰박한 물기 때문인지 앞서 내려놓았던 발밑이 휙 어긋나더니 허공으로 떨어졌다.
아찔한 감각에 잠식당한 다정의 숨이 토막 난 채 멎어 버렸다. 그 순간 단단한 무언가가 다정의 등과 허리를 강하게 지지했다.
쿵! 넘어간 사다리가 일으킨 소음이 컴컴한 공산을 음산하게 공명했다.
다정은 놀란 토끼 눈을 하고 멎은 숨을 천천히 터뜨렸다. 랜턴 불빛에 드러난 도준은 수명이 십 년쯤 단축된 얼굴이었다.
허리와 등을 감싼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유다정…….”
잔뜩 무거워진 어조가 가파른 호흡과 뒤섞여 흘러나왔다. 역정을 낼 기미라 다정은 재빨리 허리를 바로 세웠다.
“미, 미안해요, 선배. 많이 놀랐어요?”
“하…… 괜찮아?”
“괘, 괜찮아요.”
도준의 인상이 잔뜩 구겨졌다.
“덜렁거리긴. 너 다치면 시우 어떡하라고.”
“그러게요. 선배 아니었으면 우리 시우 엄마 못 볼 뻔했네.”
장난스럽게 혀를 빼물지만, 도준의 경직된 얼굴은 나아지지 않았다.
“농담 아니야. 정신 차리고 다녀. 너 덜렁댈 때마다 가슴 철렁해.”
“아이참, 알겠다고요. 선배답지 않게 왜 이렇게 잔소리가 심해요?”
“걱정되니까 그렇지.”
“선배…….”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다행스럽게도 도준은 불편한 기류를 오래 끌고 가지 않았다.
“너 잘못되면 회사 멈춰. 알면서.”
“우와. 나 정년까지 일자리 보장되는 거예요?”
“백 살까지만 해.”
앞장서 걷다가 다시 한번 휙 돌아선 다정이 부루퉁한 얼굴로 입을 내밀었다.
“악덕 고용주.”
“성과급 많이 줄게.”
“얼마 줄 건데요?”
사다리를 짊어진 도준이 냉큼 다정을 뒤쫓았다.
“방금 욕망에 찌든 돈벌레 같았어.”
“어머, 그건 최고의 칭찬이에요. 내가 젤 좋아하는 게 시우. 그다음이 돈이니까.”
“나는?”
“선배는…….”
다정이 곰곰 생각하는 얼굴로 눈을 홉떴다. 도준이 선수를 쳤다.
“나 세 번째 하면 안 돼?”
“어? 솔이가 섭섭해할 텐데.”
“비밀로 해. 세 번째 할래.”
“알았어요. 선배 세 번째. 땅땅땅!”
흔쾌히 대답하며 다정이 배시시 웃는다. 그 얼굴을 마주하며 도준도 잔잔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