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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미혼모 (14/114)


14화 미혼모
2022.09.18.


한창 작업에 몰두하던 중 시큰한 감각이 통증을 유발했다.

다정은 하던 걸 멈추고 손목을 꼭 부여잡았다. 잠잠하더니 손목이 또 말썽이었다.

컴퓨터 사용 시간이 길고 도면 작업이 일이다 보니, 손목 통증은 고질병이었다.

호전되려면 손목을 쓰지 않는 것뿐인데,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먹고살려면 별수 없었다.

욱신거리는 손목을 꾹 조이다가 책상 서랍을 열었다. 파스를 찾아 붙이고 압박 테이프까지 한 바퀴 감아주자 좀 살 것 같았다.

다시 작업을 이어 가려던 다정은 곧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젖혔다.

한번 흐름이 끊기자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머릿속이 잡념으로 가득했다. 아니, 잡념이라기에 대상이 너무 명확했다.

차정혁. 그 남자가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집요하게 물어뜯을 것처럼 굴던 모습을 떠올리자 불현듯 걱정이 차올랐다.

계속 마주치면 어쩌지?

두려웠다. 그에게 시우의 존재를 들킬까 봐.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결과적으로 좋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일로 마주치는 건 피할 수 있다. 문제는 유치원이었다.

유치원을 옮겨야 하나?

그건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한송 사립유치원을 졸업하면 재단에서 운영하는 사립 초중고 입학이 보장된다. 두말할 필요 없는 명문 학교들이었다.

추천서를 받아 어렵게 얻은 기회였다. 제 마음 편차고 시우에게 기회를 빼앗을 순 없었다.

현실적인 문제도 무시할 수 없었다.

유치원 때문에 대출까지 받아 장만한 아파트였다. 시세 변동까지 있는 마당에 손해를 감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솔이와 솔이 모친은 또 어떻고.

다정을 따라 근처로 카페를 이전하고 반찬 가게까지 개업했는데, 계속 이런 식으로 피해를 떠안길 순 없었다.

한꺼번에 밀려든 시끄러운 문제들이 자갈돌처럼 우르르 머릿속을 굴러다녔다.

직면한 문제를 다 떠나 정작 다정을 고집스레 버티게 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를 피해 달아나야 할 이유를 알지 못했다. 도망칠 까닭이 없는데.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철없는 하룻밤이었고, 아이가 생겼다. 다정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아이를 낳거나, 생명을 외면하거나.

뭐가 정답인지는 각자의 판단일 거다.

다정에겐 그 선택이 그다지 어렵거나 복잡하지 않았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대도 제 선택은 옳았다.

지금껏 아무 문제 없이 잘 지내 왔다.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었다. 그 남자가 나타나서 다 망쳐 버렸지만.

불안함에 달아나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떳떳하지 못할 게 없다는 상반된 감정이 쉴 새 없이 충돌했다.

지그시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혼란한 다툼의 여파가 지독한 두통이 되어 다정을 덮쳤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열감이 번진 이마로 차가운 손바닥이 와 닿았다.

뜨거운 이마를 감싸는 시원한 느낌이 좋았다. 가늘게 눈을 뜬 다정이 작게 웃었다.


“선배, 언제 왔어요?”

“너 열 있다. 어디 아파?”

다정의 이마와 제 이마를 동시에 짚으며 도준이 걱정스러운 투로 물었다. 다정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두통요.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요. 조금 몽롱해요.”

“어쩐지. 사 오고 싶더라니.”

딱하게 한숨을 뱉은 도준이 다정의 손에 테이크아웃 커피잔을 쥐여 주었다.

다정이 반가운 듯 웃었다. 머리가 지끈거릴 땐 커피만 한 약도 없었다.


“고마워요, 선배.”

“안 좋으면 일찍 들어가.”

“아니에요. 이따가 현장 가 봐야 해요.”

“월급쟁이가 사장보다 더 열심히 하면 어떡해?”

“열심히 해야 안 잘리죠. 선배가 나 자르면 우리 시우 어떡해요?”

갈수록 늘어 가는 능청에 도준이 실소하며 고개를 저었다.


“시우 핑계로 협박하면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데.”

“그러니까 선배 망하면 안 돼요. 시우랑 내 인생이 선배한테 달렸다고요.”

“부담스러워 죽겠네.”

탄식처럼 중얼거린 그가 다정의 책상 위에 커다란 쇼핑백을 내려놓았다.

다정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게 뭐예요?”

“시우 선물. 새로 나온 렝고 시리즈.”

놀라기도 잠시 다정은 금세 미안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매번 이렇게 받기만 해서 어떡해요. 선배도 얼른 결혼해서 아기 낳아요. 그래야 나도 빚을 갚죠.”

다시금 능청을 떤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도준의 눈빛에 아련한 색이 더해졌다.


“그러게, 난 언제 돌려받나.”

싱거운 웃음으로 얼버무린 그는 태연히 자리로 가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그러기도 잠시, 축 가라앉은 눈동자는 다시 장난감 상자를 살펴보며 천진하게 웃는 얼굴로 되돌아갔다.

저 미소를 처음 본 건 신입생 환영회 때였다.

교복을 벗은 지 언제라고, 한껏 요란한 치장을 하고 어른 흉내를 내느라 바쁜 신입생들 틈에 수수하고 차분한 모습은 외려 눈길을 끌었다.

명랑하고 씩씩했다. 착하고 성실하고 웃기도 잘 웃었다. 앳되고 순한 얼굴로 눈을 깜빡일 때면 강아지처럼 어찌나 귀엽던지.

첫눈에 반했던 것 같다. 그토록 눈을 뗄 수 없었던 걸 보면.

다정이 졸업할 때까지 자신의 건축 사무소를 내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작은 사무실을 얻고 함께 활동했던 동아리 이름을 따 한빛 건축 사무소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햇살이 잘 비추는 창가에 책상을 마련하고 그 위에 잘 보이도록 명패를 놓고, 명함을 팠다.

전부 다정을 위해 준비한 것들이었다.

유능한 직원이 되어 달라고 말하려 했다. 평생 함께 우리가 꿈꾸는 튼튼하고 좋은 집을 짓자고. 그렇게 고백하려고 했다.

꽃다발을 안고 다정을 만나러 가는 동안 몇 번이고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마주친 다정은 수줍은 듯 살그머니 웃었다. 그때 지었던 미소는 신입생 환영회 때 보았던 그 미소 그대로였다.

달라진 거라곤, 얇은 실바람에 밀려난 원피스 차림 위로 볼록하게 도드라진 배였다.


‘그렇게 됐어요, 선배. 배불뚝이 돼서 좀 우습죠?’

민망한 듯 웃으며 귀 뒤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던 가냘픈 손마디의 그 부드러웠던 굴곡이 잊히지 않았다.


‘선배. 그 꽃은 뭐예요? 설마 내 건 아니죠?’

도준은 그만 허탈하게 웃어 버렸다.


‘왜 아니야. 내가 이러려고 꽃을 샀나 봐.’


‘네?’


‘임신 축하해.’

도준은 지금도 알 수 없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조금 더 빨리 고백했더라면, 조금 더 빨리 제 여자로 만들었더라면.

너와 나. 우리들의 미래는 달랐을까.


 

* * *

핸들을 부드럽게 미끄러트리는 중에도 정혁의 미간은 펴질 줄을 몰랐다.


‘오빠가 데리러 와야지. 어쩔 수 없잖아.’

오늘은 멀쩡하던 차가 갑자기 시동이 안 걸린단다. 제 손에 넣고 길을 들이겠다는 수작이다. 감히.

뻔한 수작인 걸 알면서도 정혁은 차를 몰아 유치원으로 향했다.

3시까지 10분을 남겨 두고 도착한 유치원 앞은 지난번과 다를 게 없었다.

머지않아 예상대로 시끄러운 것들이 현관으로 밀려 나왔다. 우르르 달려 나와 제 엄마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그 틈에 있던 꼬마 하나가 불쑥 경로를 이탈하더니 애먼 곳으로 달려와 꾸뻑 배꼽 인사를 한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애가 지나치다 싶을 만큼 공손했다.

정혁은 눈만 내려 한껏 목을 젖힌 꼬마를 바라보았다.

유다정, 그 여자의 아이였다.

그의 눈이 반사적으로 주변을 훑었다. 아이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눈길이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크고 까만 눈동자가 맑고 또랑또랑했다.

한 번 봤다고 아는 척을 하는데, 마주 손이라도 흔들어 주는 게 예의지 싶어 주머니 안에서 손을 움찔거리려던 그때.


“시우야!”

종종걸음쳐 달려온 솔이는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반대편으로 달려간 시우를 보고 어리둥절해 쫓아온 참이었다.

무릎을 굽힌 솔이가 시우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이모한테 안 오고 어딜 갔던 거야? 놀랐잖아.”

“아저씨한테 인사하려고요!”

“아저씨?”

솔이의 눈길이 해를 머리에 지고 있는 남자에게로 향했다. 보기 드물게 흐뭇한 남자를 보며 솔이가 슬그머니 굽힌 무릎을 일으켜 세웠다.


“시우야. 이분은 누구셔?”

“아저씨!”

시우가 만세를 하며 짹 외쳤다. 솔이의 입가에 상냥한 웃음이 물렸다.


“안녕하세요. 학부형이세요? 우리 시우랑 아는 사이인가 봐요.”

“뭐, 그냥 오다가다.”

정혁의 안색에 급격한 피로가 스쳤다. 그때 소프라노 톤의 목소리가 울렸다.


“오빠!”

껑충 뛰어 정혁의 팔짱을 낀 현아가 환하게 웃는가 싶더니, 이내 솔이와 시우를 발견하곤 곱지 않은 눈길을 보냈다.


“오늘은 엄마가 안 왔네요?”

“네, 시우 이모예요. 그런데 원장님. 왜 이렇게 예뻐지셨어요? 입학식 때 뵀는데, 그새 더 예뻐지셨네요.”

“네? 아…… 뭐.”

“세상에. 어쩜 피부가 깐 달걀처럼 매끄러운 게. 정말 눈부셔요.”

장사꾼 아니랄까 봐 아부에 능한 솔이었다. 현아의 안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까칠함도 어느새 희석되어 사라지고 없었다.

솔이의 눈이 팔짱 낀 남녀를 빠르게 탐색했다.


“그런데 두 분 아는 사이신가 봐요.”

“나랑 결혼할 사람이에요.”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양 현아의 만면에 뿌듯한 웃음이 번졌다.


“아항, 그러시구나.”

그럴 것 같더라니. 고개를 주억거리던 솔이의 안색이 별안간 서서히 굳어지기 시작했다.

경직된 눈이 정혁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아래로 휙 떨어져 시우의 얼굴을 스치고 다시 그의 얼굴로 휙 되돌아갔다.

놀란 숨을 꿀떡 삼킨 솔이가 냉큼 손뼉을 부딪쳤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가게를 너무 오래 비웠네. 그럼 또 뵐게요. 시우야 인사해야지.”

“선생님 안녕히 가세요! 아저씨 빠빠이!”

시우를 잽싸게 돌려세운 솔이는 도망치듯 걸음을 서둘렀다. 입술이 바짝 마르고 목이 타들어 갔다.

세상에나!

저 남자네. 저 남자야!

* * *

고요한 차내에 콧노래가 흘렀다.

칭찬을 듣고 기분이 한껏 치솟은 현아는 손에서 거울을 놓지 못했다.


“오빠. 현아 정말 깐 달걀 같아?”

“어.”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흘러나오는 대답은 무성의했다.

무관심과 귀찮음에서 기인한 대답이라도 듣기 나쁘지 않아 현아는 입꼬리가 흡족하게 올라섰다.

현아가 자아도취에 빠져 있는 사이 생각에 잠긴 듯 정면만 주시하던 정혁이 불쑥 입을 열었다.


“아까 그 꼬마 말인데.”

“누구? 유시우?”

차에 올라 정혁의 눈길이 처음으로 현아에게 향했다.


“유……시우야?”

“응, 왜?”

“아니.”

고개를 내저은 정혁이 핸들을 부드럽게 꺾었다.

유다정, 그리고 유시우.

아이가 엄마랑 성이 같다. 생각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정혁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그 꼬마 엄마 말이야.”

“유다정?”

정혁이 의외라는 듯 다시 현아를 보았다.


“원래 부모들 이름을 다 외워?”

“왜?”

“아니, 직업적 사명감이 투철한 것 같아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소리에 현아는 으쓱한 기분이 들었다. 절 바라보는 정혁의 눈빛이 왜인지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선영이 어째서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현아가 줄곧 손에서 놓지 않던 콤팩트를 탁 덮어 핸드백에 찔러 넣었다.


“그 여자 특별 전형이거든. 오빠도 알지? 우리 유치원 아무나 못 들어오는 거.”

똑딱똑딱. 방향지시등 소리가 차내에 낮게 깔렸다.


“애 엄마가 건축사야. 유치원 지을 때 그 여자네 회사에서도 참여했거든. 배는 잔뜩 불러서 엄마의 마음으로 설계했다나 뭐라나.”

말끝에 현아가 무겁게 한숨을 쉬었다.


“우리 엄마 마음 여리잖아. 만삭인 여자가 그러고 있으니까 또 안쓰러운 마음에 추천서를 써 준 거야. 애 태어나면 입학시키라고. 나중엔 엄청 후회했지만.”

정혁의 눈길이 다시 현아에게 향했다. 그 대목쯤 되자 현아는 짜증을 감추지 못했다.


“뒤통수 맞았지 뭐. 사생아인 줄 알았으면 미쳤다고 추천서를 써 줘?”

“사생아?”

“애 아빠가 없어. 미혼모거든.”

 

 
정혁은 작게 헛숨을 뱉었다.

미혼모.

결혼했다더니. 남편 있다고 그렇게 큰소리를 치더니, 그조차도 거짓말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진실이 있긴 한 건가.

문득 정혁의 머릿속에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스쳤다.

단지 미혼모라는 이유 때문만은 아닐 거다. 자신을 경계하던 여자의 수상쩍은 모습과 태도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설마.

예상치 못한 밤이었다. 분위기는 달아올랐고, 충동질 당한 본능은 쉬이 통제되지 않았다.

그래도 그렇지. 아무리 눈이 뒤집혀도 제가 막무가내로 저지르고 보는 멍청이는 아니었다.

물론 흔히들 사용하는 그 방법이 15%의 실패율을 보인다 하니, 아주 가능성이 없는 얘긴 아니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희박한 건, 그 여자가 그런 터무니 없는 짓을 벌일 가능성이었다.

하룻밤 인연에 그런 선택을 할 리 없지. 미치지 않고서야.

정혁은 피식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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