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유치원에서
(10/114)
10화 유치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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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유치원에서
2022.09.04.
무료한 눈길이 둔탁하게 진동하는 휴대폰으로 향했다.
발신자를 확인한 정혁은 귀찮은 손짓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연이어 통화를 스피커폰으로 돌리자 소프라노 톤의 음성이 듣기 싫게 흘러나왔다.
『오빠! 나야 현아.』
“알아.”
『오빠, 있잖아. 현아 오늘 출근하다가 접촉사고 났지 모야?』
“근데.”
무미건조한 반응에 현아의 숨소리가 부루퉁해진다. 다치지 않았느냐 물어주는 다정함을 기대하기 어려운 남자였다.
현아는 굴하지 않고 애교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차 센터 넣었어. 그래서 말인데, 이따가 오빠가 현아 좀 데리러 와.』
“바빠. 택시 타.”
『아이참, 현아 예민해서 아무 차나 못 탄단 말이야.』
징징대는 소리에 정혁의 눈가가 껄끄럽게 굳었다.
“봐서.”
『3시에 끝나니까 시간 맞춰서 와.』
일방적으로 통보한 현아가 간드러진 웃음을 흘리는 도중 정혁은 통화를 종료해 버렸다.
시끄러운 소리가 뚝 끊기고 마침내 고요한 평화가 찾아왔다.
집안끼리 정해진 결혼. 정혁은 이런 게 아주 귀찮다.
약혼 전까지 계약 조항대로 데이트 횟수를 채워야 함은 물론, 스케줄까지 양측 합의로 이루어졌다.
어차피 비즈니스인데, 굳이 이런 귀찮은 과정을 거칠 필요가 있을까.
식장에서 신부를 처음 본대도 상관없는데.
* * *
안전모를 추어올린 다정은 엉성하게 시공된 배관과 설계도면을 심각한 표정으로 대조했다.
짜증스레 짓씹은 입술 새로 탄식이 흘렀다.
“소장님. 이건 마무리 못 해요.”
“아 글쎄, 나도 그렇게 말했지. 근데 별 차이 없다고 박박 우기는데 낸들 어째?”
현장 관리 책임자인 김 소장이 답답하다는 듯이 도리질을 쳤다.
다정은 통화 목록을 뒤져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끊기지 않는 신호음이 지루하다고 느낄 무렵 걸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게 누구야? 유 팀장이 어쩐 일이야?』
“안녕하세요, 황 이사님. 한빛이에요. 방배동 리모델링 현장 말인데요. 전면 재공사 하셔야겠어요.”
『뭐어? 아니 왜?』
황 이사가 황당하다는 듯 목소리를 키웠다.
“왜긴요? 도면대로 시공이 안 됐으니까 그렇죠.”
『이것 봐. 유 팀장. 사람이 왜 이렇게 빡빡해? 설계가 까다로우면 조금씩 바꿀 수도 있는 거지. 장사 하루 이틀 해?』
다정은 헛숨을 뱉었다.
“장사 하루 이틀 하는 거 아니라서 그래요. 설계가 까다로우면 다 이유가 있겠죠. 만수설비 마음대로 시공할 거면 애초에 설계가 왜 필요한 건데요? 정말 매번 왜 이러세요?”
공격적인 말투에 황 이사가 즉각 꼬리를 말았다.
『아, 왜에? 내가 봤을 땐 별문제 없던데 뭘? 유 팀장, 좋게 좋게 가자고. 응?』
“이러다가 물 새고 합선돼서 사람이라도 다치면 황 이사님이 책임지실 거예요?”
『나 참, 그래서 불났어? 물 샜냐고! 거래처가 한빛만 있는 것도 아니고. 더러워서, 쿠에엑 퉷!』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다.
눈을 꾹 감았다가 뜬 다정은 좀 더 차분하게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재공사 안 하실 거면 지금 확실하게 말씀하세요. 공사 기간 늦어진 건 손해배상 청구하면 되고, 이참에 만수설비하고 거래 끊으면 저희야 좋죠.”
『에잇, 진짜! 알았어, 알았다고!』
버럭 성을 내지른 황 이사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뚝 끊어 버렸다.
“황 이사 그 양반도 유 팀장 앞에선 설설 기는구먼.”
김 소장이 고소하다는 듯이 이죽거렸다.
이제 서른 초반이나 되었다는데, 젊은 건축사가 어지간히도 똑 부러졌다.
생김새와 성품은 유순하기 그지없는 여자가 일로 대들 때면 아주 당찼다. 이 바닥에서 웬만큼 잔뼈가 굵은 중년 남자들을 죄 이겨 먹는 것만 보더라도 그랬다.
“소장님. 만수 설비 늑장 부리면 독촉 좀 해 주시고, 혹시 또 임의로 시공하면 중단시키고 바로 연락 주세요.”
건물 밖으로 나서며 당부한 다정이 갑자기 방향을 틀더니 외벽 쪽으로 달려갔다.
“아이, 삼촌! 전선 이렇게 늘어놓으면 합선 위험 있고 미관상 안 좋아!”
다정이 소리치자 사다리 위에서 작업 중이던 전기 기술자가 울상을 지었다.
“아이고. 잔소리꾼 또 납셨네. 우리 유 팀장 까다로워서 같이 일 못 해 먹겠어!”
“같이 일 못 하면 안 되지. 오늘 껍데기 쏠 테니까 일만 확실하게 해 주세요!”
“유 팀장이 웬일이야?”
“뇌물 먹이는 거죠. 드시고 힘내시라고! 파이팅.”
작게 애교를 부린 다정은 이후로도 여기저기 참견하고 다니며 설비 기술자들을 못살게 굴었다.
보다 못한 김 소장이 한소리 지껄였다.
“거참. 직원 하나 잘 둬서 권 대표 망할 일 없겠다.”
“암요. 우리 대표님 망하면 저랑 제 아들이랑 밥 굶어요.”
능청스럽게 웃어 보인 다정의 눈길이 진동하는 휴대폰으로 향했다.
『그저께 뽑은 알바가 잠수 탔어. 점심시간 끝나고 손님이 끊이질 않아.』
휴대폰 너머에서 들리는 솔이의 목소리에 짜증이 배어났다.
“걱정 마. 마침 현장에서 나오는 길이야. 미안하긴, 내가 늘 고맙지.”
통화를 마치고 시간을 보았다. 이동 시간을 생각하면 약간 빠듯하긴 했다.
다정은 분주히 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 핸들을 미끄러트렸다.
* * *
핸들을 움켜쥔 손가락이 초조하게 달싹거렸다. 그때 또다시 휴대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를 확인한 다정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선배. 마침 전화 잘했어요. 만수설비 또 임의공사 했어요.”
『안 그래도 황 이사 전화 받았어.』
다정은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능구렁이 같은 황 이사가 그새를 못 참고 도준에게 전화해 이런저런 투정을 부린 모양이었다.
다정은 재공사의 필요성과 재공사가 정당한 요구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도준에게 설명하자고 생각했다.
그런데 운을 떼기도 전에 도준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말해 뭐 해. 이번 주 안에 도면대로 정상화하라고 한 소리 질러 놨으니까, 걱정 마.』
다정의 입가에 통쾌한 웃음이 물렸다. 역시 권도준은 언제나 그녀의 편이었다.
“선배. 복귀 조금 늦을 거예요. 출발할 때 메시지 보낼게요.”
『그래. 참, 다정아.』
부드럽게 흘러나오던 음성이 숨을 골랐다. 다정은 블루투스로 흘러나오는 스피커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운전 조심해.』
무던히 건네는 안부가 좋아서 다정의 입가에 방그레 미소가 떠올랐다.
“네, 그럴게요.”
솔이와 도준. 두 사람이 곁에 없었더라면, 다정이 지금처럼 엄마와 건축사라는 두 가지 삶을 병행하는 건 불가능했을 거다.
의지할 곳 하나 없는 외로운 삶에 이토록 좋은 사람들이 머물러 준다니, 참 감사한 일이었다.
정작 엄마는 그렇지가 않은데…….
잠시 망설이던 다정이 다시 휴대폰을 만졌다. 전화를 걸자 신호음이 한참 이어지다가 끊어졌다.
“엄마, 나예요. 뭐 하셔?”
『고추밭에 댕겨 왔니라. 워쩐 일이여?』
악다구니를 쓰며 서로 한바탕 퍼부은 게 언제라고 엄마의 태도는 여상했다. 이래서 부모 자식일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머뭇거리던 다정이 지그시 깨문 입술을 놓았다.
“지난번에 잘 내려갔나 해서…….”
정애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날은 내가 미안해요. 엄마가 시우 듣는 데서 아무 말이나 하니까 너무 화가 났어.”
애써 미소를 띠던 다정의 얼굴이 서서히 굳었다. 또다시 정애에게서 해묵은 말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다정은 눈을 꾹 감고 호흡을 조절했다.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고 또 털어놓길 반복하면 언젠가는 알아줄 거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정애는 다정의 마음을 통 헤아려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저도 어쩌지 못하고 목소리가 높아졌다.
“대체 나더러 어떡하라고! 엄마까지 돌아가시고 나면 나 혼잔데, 시우라도 있어야 할 거 아냐!”
『그니께 결혼을 혀야지! 왜 애비 없는 자식을 낳느냐고!』
5년째 똑같은 언쟁.
“애비 없는 자식! 애비 없는 자식! 그 소리 언제까지 할 건데! 제발 시우 앞에서 말조심 좀 해!”
날 서게 쏘아붙인 다정은 거칠게 통화를 종료해 버렸다.
엄마 마음을 풀어 주려다가 결국 다시 언성만 높이고 말았다.
신호에 걸려 멈춰 선 다정은 핸들에 이마를 처박았다. 눈가에 모인 열기가 좀처럼 추슬러지지 않았다.
* * *
진입로 좌우로 길게 뻗은 산책로가 고즈넉한 느낌을 주었다.
이윽고 광활한 잔디 운동장이 펼쳐졌다. 아기자기한 놀이기구로 가득 채워진 대규모 놀이터도 눈에 스친다.
그 끝에 다다르자 좌우로 긴 구조의 세련된 현대식 건축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혁은 대충 내키는 위치에 차를 멈춰 세웠다. 코앞에 버젓이 주차 금지 표지판이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찌푸린 눈이 시시한 전경을 슥 훑는다. 그러고는 터덜터덜 커다란 분수를 스쳐 전면에 배치된 낮은 계단을 올랐다.
현관 앞에 삼삼오오 모여 있는 여자들이 유치원에 등장한 남자를 흘끔대기 시작했다.
어딜 가나 사심 가득한 눈빛을 끌어모을 만큼 남자는 단연 눈에 띄었다. 그 미모는 엄숙한 교육의 현장에서도 어김없이 빛을 발했다.
부담스러운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정혁은 시간을 확인했다.
3시 10분 전.
너무 일렀다. 무료한 얼굴로 한숨을 삼키며 난간에 기대어 팔짱을 꼈다.
얼마나 지났을까.
현관에서 짹짹대는 소리가 들리더니 자그마한 것들이 바퀴벌레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 기괴한 장면을 정혁은 특유의 무심한 얼굴로 지켜보았다.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가방을 메고, 하나같이 엇비슷한 괴성을 질러댄다.
각자 여자들에게 달려가 안기는 게 마치 30년 만에 가족 상봉을 보는 것처럼 절절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아이들은 여자들과 하나둘 짝을 지어 멀어져 갔다. 그렇게 다 떠나고 남자아이 하나가 덩그러니 남았다.
배웅을 나선 선생이 아이와 말을 나누다가 휴대폰을 귀에 붙였다. 그러고는 아이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말하고 급히 유치원 안으로 뛰어 들어간다.
좌우를 두리번거리던 아이가 정혁을 발견하고 또랑또랑한 눈길을 고정했다.
눈싸움? 빤히 보기에 그러자는 줄 알고 정혁도 피하지 않고 아이와 똑바로 눈을 맞췄다.
그러기도 잠시, 총총 걸어와 난간에 기대선 꼬마가 정혁을 흘끔거리더니 그와 같은 자세로 팔짱을 꼈다.
곁에 다가와 선 조막만 한 정수리를 향해 무심한 눈길이 떨어졌다.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혹시나 해서 팔짱을 풀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아니나 다를까. 흘끔거리던 꼬마가 팔짱을 풀고 어정쩡하게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는다.
피식, 어이없는 웃음이 났다.
다시 팔짱을 끼고 다리를 교차했다. 이번에도 짧은 팔다리를 엉성하게 꼬아 비틀며 흉내를 낸다.
정혁은 눈만 내려 절 따라 하는 꼬마를 한가롭게 지켜보았다.
귀여운 건 모르겠고 좀 가소로웠다.
“오빠!”
불현듯 울리는 목소리에 정혁의 눈길이 현관으로 향했다. 긴 웨이브 머리를 늘어뜨린 여자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한송 교육재단 부설 사립유치원장, 오현아.
붉은 투피스 정창 차림이 유치원에서 보기에 지나치게 선정적이고 화려했다.
현아와는 어릴 때부터 몇 번인가 마주친 적이 있는 터라, 딱히 껄끄럽거나 어색한 부분은 없었다.
양가에서 정하기로, 두 사람은 석 달 뒤 약혼하고 그로부터 육 개월 뒤 결혼 예정이었다.
대가는 한송에서 거의 손을 놓다시피 한 거대 유통 계열사를 헐값에 인수하는 조건이었다.
회사에 도움이 되는 혼맥을 형성하는 것. 명한의 후계자로서 마땅한 도리였다.
껑충 뛰어 팔짱을 낀 현아가 붉은 입술을 낭창하게 늘어뜨렸다.
“오빠, 현아 오래 기다렸어?”
“어.”
정 없이 툭 내뱉고 난간에서 몸을 떨어트렸다. 매정한 대답에도 굴하지 않고 현아는 그의 팔에 코알라처럼 들러붙었다.
“오빠. 온 김에 유치원 구경할래?”
“아니.”
고민도 않고 딱 자르자 현아의 입이 뚱하게 튀어나온다.
무안이나 면박을 듣는 게 일상이지만, 현아는 상심하지 않았다. 초조하거나 안달할 이유 또한 없었다. 어차피 제 남편이 될 남자였으니.
“그럼 밥 먹으러 가. 현아 배고파.”
현아의 재촉에 돌아서려던 정혁의 발이 멈칫거렸다. 그의 눈길이 아래로 떨어졌다.
혼자 남은 아이가 한껏 목을 꺾어 두 사람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주위를 넓게 돌아봤지만, 아이를 데리러 왔을 만한 어른은 보이지 않았다.
조금 신경이 쓰였지만 거기까지였다. 어떻게든 되겠지.
“얘, 넌 엄마 아직 안 왔니?”
다시 발길을 돌리려던 차에 현아의 신경질적인 음성이 들려왔다. 그러자 빤히 올려다보던 아이의 입이 벙긋 열렸다.
“이모 금방 올 거예요!”
“시우야!”
때마침 울리는 여자의 명랑한 외침에 아이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