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4대 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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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4대 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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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4대 독자
2022.09.01.
흰색 SUV 차량이 출근길 도로를 달렸다.
“멍멍이는 멍멍멍! 야옹이도 멍멍멍! 아니, 아니, 아니야. 야옹이는 야아―옹!”
작은 발이 통통 튀어 오른다. 시우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어린이 프로의 주제곡을 신명 나게 따라불렀다.
목적지에 다다라 시동이 꺼지자 시우의 노래도 뚝 멎었다. 차창 밖을 살피던 시우가 입을 짹 벌렸다.
“엄마! 유치원 다 왔어요!”
“그러네. 엄청 빨리 왔네.”
차에서 내린 다정이 뒷좌석 문을 열었다. 카시트 안전띠를 풀자 시우가 안으라며 팔을 뻗는다.
아들을 안아 내리고 앙증맞은 가방까지 어깨에 메어 준 뒤 손을 잡았다.
한송 교육재단 부설 사립유치원.
국내 최고의 교육 퀄리티를 자랑하며 상위 0.1%의 영재만을 선발한다는 사립유치원.
그렇게 포장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재벌가나 부유층들을 상대하는 최고급 시설의 유치원이었다.
일각에선 교육을 장사로 이용한다며 비판의 목소리도 있는 모양이지만, 실상은 너도나도 자녀를 보내지 못해 안달이었다.
심지어 재단 이사장의 추천서 없이는 입학이 불가했기에 부모들의 로비가 치열하다는 후문이 들려오기도 했다.
어쨌든 수업에 참관한 결과 다정은 만족스러웠다. 시설도 시설이지만, 최고의 교육 퀄리티를 자랑한다는 건 사실이었다.
기본적으로 세 가지 외국어 조기 교육이 이루어졌고, 창의력과 집중력 발달에 모든 교육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모든 교사가 아동심리 관련 자격증을 보유한 건 물론이고, 일찍이 재능을 발견하고 체험할 수 있도록 다양한 예체능 프로그램도 갖추어져 있었다.
엄마들 치맛바람이 대단하다며 혀를 내두르지만, 다정도 엄마인지라 자식 교육이 달린 일에 욕심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건물 입구에 도착하자 각 반 선생님과 인계 요원들, 등원하는 아이들과 학부형들이 눈에 띄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시우가 공손히 인사하자 토끼 반 선생님이 방긋 웃으며 반갑게 맞아 주었다.
“시우 어린이. 좋은 아침이에요. 어머니도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선생님. 오늘도 우리 시우 잘 부탁드려요.”
선생과 인사를 나눈 뒤 다정은 무릎을 굽혀 시우와 눈높이를 맞췄다.
“우리 시우. 오늘도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친구들이랑 사이좋게 지내기.”
“네에!”
별안간 시무룩해진 다정이 우울하게 말했다.
“흐응, 우리 아들하고 헤어질 생각 하니까 엄마 너무 슬프다.”
“아이참. 속상하게.”
안쓰러운 얼굴로 한숨을 내쉰 시우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정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러곤 뺨에 쪽 뽀뽀를 했다.
“인제 댔지? 엄마 돈 많이 벌어 오세요!”
팔랑팔랑 손을 흔든 시우는 이내 친구들 무리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 모습을 보며 다정은 찌푸려 웃고 말았다.
젖 달라, 기저귀 갈아 달라 빽빽 울 줄만 알던 아기가 저렇게나 감정 표현이 풍부해졌다는 게 새삼 놀랍고 신기했다.
누굴 닮아 저리 애교가 많을까.
다정은 애교가 있는 편이 아니었다. 얼핏 아이 아빠를 떠올려 봤지만, 그쪽을 닮았을 가능성은 더 희박했다.
뺨에 닿았던 말캉한 감촉을 상기하자 피식 웃음이 났다. 이렇게 또 하루를 살아갈 힘을 얻었다.
* * *
“회장님. 도련님 도착하셨답니다.”
백발 성성한 노인을 향해 보고하는 음색이 낮고 차분했다.
안 비서의 보고에 박 회장이 펼친 신문을 접었다. 돋보기안경까지 벗어 내려두고 일어나 현관으로 고상한 걸음을 옮긴다.
정혁이 중문을 밀고 들어섰을 때 박종순 회장은 열 걸음 정도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
“왔니.”
노인의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피었다.
여든이 다 된 노인은 지나치게 정정했다. 허리도 꼿꼿했고 여전히 고상한 품위와 위엄을 갖추고 있었다.
구두를 가지런히 벗은 정혁의 발이 슬리퍼를 꿰어신었다.
“할머니, 왜에.”
걸어들어오며 투덜대는 말투가 명백히 귀찮다는 투다.
퇴근 무렵 걸려 온 박 회장의 전화로 비서실이 발칵 뒤집혔다. 정혁이 휴대폰으로 걸려 온 전화를 받지 않은 탓이었다.
“왜는 녀석아. 밖에 나가 있으니 밥이나 제대로 먹고 다니는지 할미가 걱정돼서 불렀지.”
정혁은 말없이 타이를 조금 끌어내렸다.
이렇게 시시한 용건으로 불러들였을 거라 짐작은 했었다. 그래서 전화를 받지 않았더니, 노인네가 비서실을 들쑤셔 놨다.
그에 요란법석을 떨던 비서들이 애걸복걸하다시피 정혁을 본가까지 끌고 와 이렇게 던져 놓고 줄행랑을 쳐 버린 거였다.
재킷을 손수 받아든 박 회장이 손자의 등을 찬찬히 쓸어내렸다. 훤칠하게 큰 손자 얼굴을 보려면 한껏 목을 꺾어야 했지만 하나도 수고스럽지 않았다.
“여주댁한테 너 좋아하는 거로 차리라고 했으니까 씻고 내려오너라.”
체구가 작아 왜소해도 호랑이 같은 기백을 지닌 성정이었다. 누구도 쉽게 보지 않는 박 회장이지만, 손자 앞에서만큼은 껌뻑 죽었다.
별다른 말 없이 계단을 밟고 2층으로 올라간 정혁은 방문을 밀고 들어가 곧장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타이를 끄르다 말고 넓은 방을 느리게 돌아보았다. 독립해 몇 달 만에 돌아온 방이 제 것 같지 않게 낯설었다.
어차피 열여섯 살 이후로는 유학 생활을 한 터라 거의 돌아오지 않은 방이었다.
그랬음에도 박 회장이 꾸준히 관리를 지시한 덕에, 침실이며 드레스룸이며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했다.
그런 걸 보면 노인도 참 열성이다. 주인도 없는 방을 장장 20년 가까이 매일 같이 관리해 온 걸 보면.
식탁에 차려진 음식은 두 사람이 먹기에 지나치게 양이 많고 화려했다.
위생 장갑을 낀 박 회장이 손수 굴비를 발라 정혁의 밥 위에 얹어 주며 물었다.
“회사 일은 할 만한 거냐?”
“응.”
짧게 대꾸한 정혁이 밥을 넣고 씹는다. 차분하고 느긋한 성정대로 밥을 먹는 모양새도 참 얌전했다.
“할머니. 저거.”
“호박잎 싸 주랴?”
박 회장이 잘 쪄진 호박잎을 펼쳐 밥과 양념장을 얹었다. 돌돌 말아 입에 넣어 주자 제비 새끼처럼 잘도 받아먹는다.
밖에서는 까다롭기가 말도 못 할 녀석이 할미 앞에만 오면 이리 어리광이었다.
박 회장도 알고 있다. 응석을 받아 주는 게 할미의 유일한 낙이라는 걸 알고 부러 저런다는 걸.
불현듯 안타까운 마음이 스쳐 밥을 먹는 손자의 머리를 애틋하게 어루만졌다.
가엾기도 하지.
차씨 집안은 대대로 손이 귀했다. 그 집안의 귀하디귀한 4대 독자가 정혁이었다.
시부가 일으킨 회사를 독자인 남편이 물려받았지만, 안타깝게도 젊은 나이에 사고로 세상을 등지고 만다.
종순이 갓 서른을 넘긴 때였다.
다행스럽게도 아들이 하나 있었지만, 나이가 어려 종순이 총수직을 승계했다. 아들이 자랄 때까지 잘 지켰다가 가업을 잇게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하나뿐인 아들이 집을 나가 버렸다. 자신은 경영에 뜻이 없고 다른 일을 하고 싶다면서.
붙잡아 와 달래도 보고 호되게 을러도 봤지만, 통 말을 듣지 않았다.
종국엔 감시까지 붙여 방에 가뒀더니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갖은 수를 써도 방도가 없었다.
아들은 서서히 시들어 갔다. 딱 죽지 싶었다. 그래서 놓아주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라고.
포기했다. 아들을 죽게 둘 순 없으니.
남편에 이어 아들까지 잃고 종순은 더 강단 있게 변모했다. 시간을 초 단위로 쪼개 쓰고 더욱 회사 일에만 매진했다.
그렇게 두어 개뿐이던 계열사를 십수 개로 늘려 명한을 재계 순위 1위의 기업으로 우뚝 성장시킨 이가 지금의 박 회장이었다.
7년쯤 지났을까. 소식을 끊은 아들이 폐인 같은 행색이 되어 나타났다. 이 어린 것의 손을 잡고.
제게 맡겨진 손자를 끔찍이도 애지중지 키웠다.
불쌍한 것. 가엾은 것. 측은한 마음을 감추고 명한의 후계자로 길러내기 위해 무던히도 엄격한 할미 노릇을 했다.
그런데 어린 게 어찌나 넉살이 좋은지, 엄하게 꾸짖어도 들러붙어 변죽 좋게 어리광을 부리고 애교를 떨어 댄다. 그럴 때면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생긴 건 쏙 뺐는데, 속은 아비랑 딴판이었다. 이렇게 응석을 부리지만 단 한 번도 박 회장의 기대를 벗어나거나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공부도 잘했고 성적도 우수했다. 마땅히 명한을 책임져야 한다는 사명감도 가지고 있었다.
“오늘 자고 가거라. 응?”
할머니의 말에 정혁은 무심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 손자가 대견해 흐뭇하게 웃음 짓던 박 회장의 눈가가 달아올랐다.
제 아비를 쏙 닮아 아들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때면 이렇게 금세 눈시울이 뜨끈해지곤 했다.
* * *
어두컴컴한 지하 주차장으로 검은 세단이 미끄러져 들어갔다.
“도착했습니다. 이사장님.”
기사의 목소리가 나긋하게 차내를 울렸다. 차에서 내린 여자는 도도하게 걸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강선영.
한송그룹 오철중 회장의 부인이자 한송 교육재단 이사장이었다.
남편은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아직 40대 후반인 선영은 여전히 젊음과 미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펜트하우스 층에 도착한 선영이 카드키를 꺼내 출입구에 갖다 댔다. 입구가 열리자마자 여기저기 허물처럼 벗어 놓은 옷가지들이 눈에 담긴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걸어가 침실 문을 열어젖히고 침대 앞에 멈춰 섰다.
대기를 떠도는 술 냄새와 엉망으로 뒤엉킨 침대 몰골을 보자 절로 한숨이 흘렀다.
“오현아. 일어나.”
이름을 부르지만 엎어져 잠든 채 미동도 없다. 선영의 눈썹이 날카롭게 일어섰다.
“오현아!”
목소리를 높이자 부스럭대며 겨우 반응이 보였다.
붉게 염색된 긴 머리를 산발로 풀어헤친 현아가 찌푸린 눈꺼풀을 가늘게 밀어 올렸다.
“으음, 엄마……? 언제 왔어?”
“넌 누구니?”
선영의 눈길이 현아의 옆자리로 향했다.
“아, 전…… 그러니까.”
현아와 밤새 침대를 뒹군 거로 추정되는 남자는 아연하게 질려 발가벗은 몸을 가리기 급급했다.
“김영준…… 그만 가 봐.”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웅얼대며 현아가 그만 나가 보라 손짓했다. 그러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남자는 고민이 많은 얼굴이었다.
두리번거리던 그는 궁여지책 끝에 쿠션으로 중요 부위를 가리고 후다닥 침실 밖으로 달아났다.
줄행랑치는 남자를 주시하던 선영이 침대 끝에 앉아 딸을 추궁하기 시작했다.
“쟤 누구냐니까?”
“어……? 그게…… 유치원…… 체육 선생.”
선영의 눈썹이 꼿꼿하게 일어섰다.
“처음 보는 앤데?”
“그냥…… 부탁받고 꽂았어…….”
더 묻지 말란 듯이 현아가 말꼬리를 늘였다. 선영은 더 안 들어도 알겠다는 듯이 한숨을 삼켰다.
“잘 들어. 오현아. 너 얼마 안 있으면 결혼해. 괜히 흠 잡히지 말고 빨리 정리해.”
“정리하려고 했어. 그냥 좀 데리고 노는 거야…….”
굳은 표정을 한결 누그러트린 선영이 사랑스러운 딸의 머리칼을 다정하게 쓸어 넘겼다.
“오늘 스케줄 있는 거 몰라? 일찍 일어나서 머리도 하고 피부관리도 받아야 할 거 아냐?
다그치던 말투가 누그러지자 현아가 배시시 웃으며 선영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엄마, 현아 오빠랑 데이트할 때 들 가방이 없어.”
“네 옷방에 잔뜩 쌓여 있는 건 뭔데?”
현아의 표정이 부루퉁해진다.
“그건 유행 지나서 못 들어. 샹델에서 신상 나왔대.”
“카드 있잖아.”
눈을 피하는 모습에 선영은 다시 한숨을 삼켰다. 물어 뭐하랴. 보나 마나 한도 초과겠지.
“오늘 정혁이랑 데이트 잘하고 오는 거 봐서 사 줄게. 정혁이는 우리 유치원 와 봤니?”
“아니.”
“뭐어?!”
선영이 눈을 커다랗게 뜨며 정색했다.
“오현아. 너도 정혁이한테 프로페셔널하게 어필해야 할 거 아냐? 정혁이가 널 대접해 줘야 너한테 하나라도 더 떨어져. 네 아버지 재산 네 오빠들한테 다 뺏길 거야?”
“난 재단 받을 거잖아.”
“재단 그까짓 거 얼마나 된다고. 엄마가 어떻게 한송 안주인이 됐는지 알지?”
알지. 잘 안다.
일개 계약직 사원이 유부남이던 오철중 회장을 유혹했던 파란만장한 신분 상승기는 현아가 말귀를 알아먹을 때부터 귀가 닳도록 들어온 얘기였다.
세컨드로 살다가 안방을 차지한 지 불과 10년.
전처의 자식들이 선영 또래였으니, 여기저기서 견제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곰곰 생각하던 선영이 코치를 시작했다.
“이따 정혁이더러 유치원에 오라고 해.”
“R호텔 라운지에서 만나기로 했어.”
“이 맹추야. 차 없다고 데리러 오라고 하면 되지. 정혁이 불러서 네 능력을 보여 주란 말이야.”
선영이 지겨운 얼굴을 하는 현아의 얼굴을 감싸 쥐고 눈을 맞췄다.
“명심해, 오현아.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야. 알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