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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애비 없는 자식 (8/114)


8화 애비 없는 자식
2022.08.28.



 
종갓집 맏며느리가 되었던 엄마의 나이 고작 열일곱이었다.

신랑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치러진 혼사였다.

한 해 제사만 열여덟 번에 문중 대소사까지. 시집이라고 와 봤더니, 손에 물 마를 날이 없었다.

윤복희가 최초로 미니스커트를 등장시켰고, 멋을 부린 신여성들이 거리를 활보하던 시절.

동시대를 살아가던 꽃다운 어린 종부는 깡시골에 처박혀 머리를 쪽지고 무일푼으로 노동착취를 당했다.

어느 날인가부터 신랑의 외박이 잦았다. 알고 보니 혼례 전부터 바깥 살림을 차려 놓은 지 한참이더란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3년이 지나도록 애가 들어서질 않으니, 하루가 멀다고 문중 어른들의 잔소리와 구박이 쏟아졌다.

세월은 흘러 엄마 나이 어느덧 서른을 훌쩍 넘겼다. 그때부터 엄마는 시집에서 도망칠 궁리만 했더란다.

그 시절을 회상하며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희한혀, 세상 물정 겨우 알 만혀서 보따리를 쌌더니, 덜컥 니가 안 들어섰냐. 워쩌. 도로 주저앉았지 뭐.’

느지막이 새 인생을 꿈꾸던 엄마의 시도는 그렇게 다정에게 발목이 잡혀 무산되고 말았다.

그 대목에서 다정은 죄책감이 들었다. 자신이 엄마의 인생을 망쳐 버린 것만 같아서.

그렇게 엄마는 16년 만에 간신히 딸 하나를 얻었다. 지은 죄도 없이 죄인처럼 살던 엄마는 그때부터 진짜 죄인이 되고 말았다.

다정이 열 살 무렵, 밖에서 병을 얻은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왔다.

다른 여자랑 실컷 살다 온 남편 뭐 예쁘다고 엄마는 대소변까지 받아 가며 지극정성 수발을 들었다.

다정이 열셋 되던 해, 과부가 된 엄마에게 문중의 핍박이 시작되었다.

표면상으론 아들이 없다는 이유였지만, 문중 재산을 노린 암투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고된 일을 부려 먹을 땐 종부로서 당연한 거라더니, 조선 시대도 아니고 칠거지악을 논하던 인간들.

음험한 속내를 감추지 못하던 그 추악한 얼굴들을 다정은 지금까지도 또렷이 기억했다.

엄마라고 태어날 때부터 이처럼 매정한 사람은 아니었다.

하나뿐인 딸이라고 다정이라면 애지중지, 온갖 유난과 극성을 아끼지 않던 속정 깊은 사람이었다.

그저 모진 세월 겪은 풍파로 단련돼 배긴 굳은살이 엄마를 고독하고 쓸쓸한 벽 안에 가뒀을 뿐.

그 생각을 하면 다정은 마음 한구석이 저렸다.

기계적으로 집안일을 마치고 시우를 목욕시켜 나올 때까지도 정애는 꺼진 TV 화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주무시고 가세요.”

“아녀, 가야지.”

고집스럽게 돌아온 한마디에 다정은 한숨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 시간이 몇 신데. 고집부리지 말고 주무시고 내일 아침에 가요. 터미널까지 모셔다드릴게.”

“허, 내 집 가는데 시간이 뭐 중허대?”

새삼 걱정하는 척 말란 투다. 그러면서도 정애는 일어나지 않고 심기 불편한 얼굴로 소파를 지켰다.

정애는 도통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두 번 다시 딸을 보지 않겠다고 수없이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며칠 있다가 손자놈 귀빠진 날에 오라는 전화를 받았을 때만 해도 꿈도 야무진 소릴 잘도 나불댄다며 코웃음을 쳤더랬다.

암만 기다려봐라. 내가 코빼기나 비추는가.

그래 놓고 늦은 오후 터덜터덜 터미널로 발길이 향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딸네 집 앞이었다.

도무지 제 발로 여길 찾아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투항하듯 백기를 흔들 요량이 아니란 걸 딸애에게 확인시키고 싶었다.

골백번도 더 후회하며 그만 여길 벗어나고 싶지만, 그러한 아집과 고집이 지금처럼 오도 가도 못 하게 정애의 발목을 붙들었다.

멀뚱히 선 시우가 침묵으로 대치하는 할머니와 엄마를 번갈아 보았다.

누구보다 할머니를 어려워했지만, 어린 게 눈치가 빤해 제 엄마 기분은 훤히 읽었다.

제가 나설 차례라 생각했는지, 시우가 용기 내어 정애에게 다가갔다.


“할머니…… 시우랑 코해요. 네?”

정애의 주름진 눈이 아래로 향했다. 덜 여문 작은 손가락이 구긴 비닐처럼 쭈글쭈글한 손을 움켜쥐는 게 보였다.

고생이 말도 못 해 몹시 거칠고 주름진 손과 달리, 손자놈 손은 고사리순처럼 보얗고 보들보들한 게 참 예쁘기도 했다.


 
죽을 고생으로 딸을 키웠다.

아비 없는 자식이라 손가락질받을까 긴 세월 참고 견디며 딸아이만큼은 자신처럼 살지 않길 바랐다.

그런데 앞길 창창한 딸이 아비 없는 자식을 배서 나타났다.

직장생활이 바빠 못 내려오는 줄로만 알았다. 짬을 내어 찬을 챙겨 올라가 봤더니 벌써 배가 바가지만 하게 불러 있었다.

눈이 돌았다. 언놈인지 가만 안 두겠다며 애 아비한테 앞장서라 딸을 윽박질렀다.

그랬더니 누군지도 모르는 놈과 하룻밤으로 애를 뱄다지 뭔가. 억장이 무너졌다.

당장 병원에 가자고 딸애 손을 잡아끌었지만, 딸애는 격렬히 저항하며 거부했다.

너도 어미처럼 살고 싶냐며 악다구니를 쓰고 손찌검 발길질을 서슴지 않았다.

배부른 딸을 마구 두들겨 패며 매질에 못 이겨서라도 애가 떨어져 버리길 바랐다.

제발 내 딸 인생 망치지 말고 배 속에서 죽어 버리라고 모진 악담과 저주를 퍼부었다.

그런데 질기고 질긴 게 기어이 달수를 다 채우고 나왔다. 손가락 발가락 열 개씩 멀쩡히 다 달고서.

손자 얼굴을 보고 있으면 기가 찬다. 어느 놈 씨를 도둑질했는진 몰라도 인물 하나는 혀를 내두르게 잘났다.

그래서 손자 얼굴을 보는 게 영 탐탁지가 않다. 보고 있으면 애 아비라는 놈 얼굴이 떠올라 속에서 천불이 일었다.

어미라서 그런다. 어미니까, 제 딸 팔자를 망친 놈 씨앗이 예뻐선 안 되는 거다.

살갑게 감긴 고사리손을 팩 내치자 당황한 시우가 눈치를 보며 쭈뼛거렸다. 그 순간 다정은 속이 뒤집히고 말았다.


“엄마, 이럴 거면 뭐 하러 왔어!”

“아, 오라 안 혔냐!”

“왔으면 내색이라도 하지 말든가. 엄마 때문에 다들 불편해하는 거 못 봤어?”

“썩을 X. 넌 니 애미보다 그 사람들 기분이 더 중허지?”

“그런 말이 아니잖아.”

고성이 오가자 시우가 딸꾹질을 터트렸다. 저도 어떻게 안 되겠는지 울먹이는 얼굴을 하고도 시우는 다시 한번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할머니…… 화내지 마세요.”

“저리 못 가!”

정애가 억하심정을 담아 시우를 밀쳤다. 삐쭉거리던 시우는 결국 울음을 참지 못하고 엄마 품으로 달려들었다.

서럽게 우는 아들의 모습에 다정은 목구멍으로 울분이 치받았다.


“엄마! 정말 이럴 거야? 시우가 뭘 알아? 대체 애한테까지 왜 이래?”

“내 새끼가 더 중헌께! 내 새끼 팔자를 조져 났자녀!”

아연한 다정은 얼른 시우의 귀를 틀어막고 품에 더 꼭 끌어안았다.


“엄마! 시우 있는데 제발 말 좀……!”

다정은 눈을 질끈 감았다. 엄마가 이럴 때마다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


“S대까정 나온 X이 뭐가 아쉬워서 이라고 사는겨?”

다정도 잘 알았다. 자신이 엄마에게 얼마나 자랑스러운 딸이었는지. 그런 엄마에게 다정은 이제 가장 부끄러운 치부가 되어 있었다.


“내가 니를 어뜨케 키웠는디! 아이고!”

한탄하며 가슴을 치는 엄마의 모습을 다정은 원망 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어떻게 키우긴. 몰라서 물어? 맨날 엄마 맞는 것만 보고 컸어.”

이래서 결혼이 싫었다. 엄마는 자식을 위해서 참고 살았다지만, 다정은 자식을 위해서라도 엄마처럼은 살고 싶지 않았다.


“그니께 애미처럼 안 살라믄 그라지 말았어야지!”

“어쩌라고! 우리 시우 벌써 다섯 살이야! 언제까지 이럴 건데?”

“허이구. 애비 없는 자식 낳은 게 그리도 떳떳허냐? 결혼도 못 하고 새끼만 달린 게 자랑이여? 인자 우짤겨? 새끼 달린 X을 언놈이 쳐다나 봐!”

정애가 맺힌 울화를 맹렬히 쏟아부었다.

종가를 나왔을 때 다정은 누구보다 기뻤다.

엄마가 더는 노예처럼 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마냥 좋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엄마는 곧 처지가 비슷한 남자와 재혼했다. 다정보다 다섯 살 많은 아들을 키우는 상처한 남자였다.

엄마가 재혼한 이유는 다정을 아비 없는 자식으로 키울 수 없다는 이유 하나였다.

교복을 입고 대문 앞에 쪼그려 앉아 귀를 막는 건 일과였다. 하루가 멀다고 물건 깨지는 소리와 욕설이 담장을 넘었다.

엄마의 비명과 악다구니가 들리지만, 들어가 말릴 수조차 없었다. 그랬다간 다정을 때리려는 남편을 막느라 엄마만 더 맞을 게 뻔하니까.

엄마의 두 번째 남편은 매일 술에 취해 들어와 엄마를 때렸다. 그런 날이면 다정은 어김없이 솔이네 집으로 피신해야 했다.

엄마의 두 번째 남편도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호강시켜 준다는 달콤한 말로 엄마에게 구애하고 다정에게 둘도 없이 자상한 아버지처럼 행세했다. 하지만 그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본색을 드러냈다.

다 같진 않을 거다. 솔이 아버지처럼 40년을 한결같이 꽃분이라는 다정한 애칭으로 아내를 부르는 남자도 분명 존재할 거였다.

하지만 다정이 눈앞에서 목도한 것들은 그 반대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고등학교 입학에 맞춰 경기도 안산에 있는 이모네로 보내진 다정은 그곳에서도 같은 현실을 목격했다.

이모부는 가부장적인 남자였다. 물리력은 행사하지 않았지만, 이모를 몸종처럼 부리고 온갖 언어폭력을 서슴지 않았다.

마치 가장의 당연한 권리와 특권이나 되는 듯이.


‘제발 이혼해! 엄마도 이모도 왜 이렇게밖에 못 살아?’

다정이 화를 내면 이모는 넋두리처럼 중얼거렸다.


‘몬 배워 그려. 우리 때 여자들일랑 다 그려. 덜컥 이혼했다가 새끼들 밥이라도 굶기면 워쩌. 니 애미 미워하지 마러. 다 니 하나 잘되라고 참고 사는 거니께.’

그 말이 진실이라면 엄마는 어리석다. 진정으로 자식을 위하는 방법이 뭔지 모르는 무지렁이가 분명했다.

엄마의 삶을 들여다보며 다정이 배운 건 오직 하나였다. 스스로 자립해 자기 삶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

결혼 따윈 필요 없었다.


“니 새끼도 애비 없이 키울 겨?”

“엄마, 제발 말 좀 가려 해! 대체 엄마가 바라는 게 뭐야?!”

“나도 모른다. 나도 몰러. 에이고.”

한바탕 쏟아낸 정애는 기어이 눈시울을 찍어내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쾅!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다정은 속상한 마음에 눈물부터 쏟았다. 화도 나고 어린 아들한테 미안해서 마음이 너무 아팠다.

소리 없이 들썩이는 가슴에 머리를 꼭 붙이고 있던 시우가 귀를 틀어막은 손을 끌어내렸다.

그러곤 복잡한 감정에 쉴 새 없이 눈물을 쏟는 엄마의 목을 위로하듯 꼭 끌어안았다.


“엄마, 시우가 잘못했어요…….”

“응? 시우가 왜?”

코 먹은 소리가 애써 덤덤히 물었다.


“시우 때문에 할머니 화났어요.”

다정은 방긋 웃으며 도리질을 쳤다.


“아니, 아니에요. 시우 때문이 아니라 엄마 때문에 화나신 거야.”

“엄마 울지 마요. 뚝.”

“응? 엄마 우는 거 아닌데?”

다정은 급히 눈가를 쓸어내고 더 활짝 웃었다. 그러자 작은 손가락이 눈가를 더듬었다.


“눈물. 거짓말…….”

“이건 좋아서 나는 눈물인데? 엄마가 시우 처음 만났을 때 너무 기뻐서 울었거든. 그런데 우리 시우가 벌써 다섯 살 된 게 너무 기특해서 또 눈물이 났지 뭐예요?”

힉, 놀란 숨소리를 낸 시우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시우 때문이에요?”

울먹울먹하던 시우가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흐아아아앙. 시우가 잘못해쪄여어어엉!”

다정은 웃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제 아들이 귀여워서 어쩌지 못하고 웃음이 났다.


“엄마 괜찮아요. 그러니까 시우도 뚝.”

다정은 아들을 꼭 안고 엉덩이를 토닥였다.

결혼. 결혼. 결혼.

엄마의 바람이 뭔지 안다. 좋은 학교를 나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그에 걸맞은 남자와 결혼하는 것.

오직 인생의 목적이 그것뿐이라는 듯 고리타분한 고집을 부리지만, 엄마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을 거다.

결혼이 여자의 인생을 얼마나 황폐하고 무용하게 만드는지는 엄마의 고단한 삶을 비추어 보더라도 명확했다.

그 긴 세월 동안 엄마는 자신을 위해 살았던 적이 단 한 순간도 없었다. 그렇게 살지 않기 위해 선택한 삶이었다. 엄마처럼 살지 않기 위해서.

하지만 아이는 다른 얘기였다. 시우는 다정에게 삶의 양분이고 다정을 살게 하는 이유였다. 다정이 엄마에게 그러했듯.

시우만 있으면 되었다. 이대로 시우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히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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