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남정애 여사 (7/114)


7화 남정애 여사
2022.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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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 웬일이야?”

정혁은 눈길도 주지 않고 어깨를 누르는 손을 무심히 떨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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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긴. 전무님 취임하시고 인사나 드리러 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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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전무 취임한 지 한 달이 넘었는데 인사 한번 안 오더라. 상무 주제에.”

방금의 건방진 행동들을 싸잡아 직급체계를 꼬집어 주자 승훈이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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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너 약혼 날짜 잡혔다며? 서른넷이면 결혼하기 딱 좋은 나이긴 하지. 우리 정혁이 이제 승승장구할 일만 남았구나.”

실실 쪼개던 승훈이 정혁의 어깨를 툭툭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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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 없는 결혼이라고 서글퍼할 거 없어. 살면서 정 붙이면 또 살아지더라. 형이 먼저 해 봐서 알잖냐.”

결혼 선배랍시고 덧붙이는 조언에 정혁은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정략결혼. 기업끼리 비일비재 다반사로 맺어지는 일종의 비즈니스일 뿐이었다.

줄 거 주고 받을 거 받는 단순한 거래에 애정입네 뭐네, 사사로운 감정을 덧댄다는 것 자체가 우스웠다.

습관처럼 귓불을 문지르던 정혁의 눈길이 설핏 올라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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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은 형수한테 영 정을 못 붙이겠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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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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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형이 회사 여직원들 자꾸 건드는 게 애정 없는 결혼이 서글퍼서 그런 게 아닌가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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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심히 찌르는 정곡에 승훈의 광대 부위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무안함에 헛기침을 쏟던 승훈이 넌지시 화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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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회장님이 결혼 선물로 통 크게 쏘셨던데. 유통 지분을 8%나 주신다지? 가만 보자. 그럼 네 지분이 20%쯤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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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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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서류에서 완전히 눈을 뗀 정혁이 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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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통 26.84%라고. 건설 15.29%, 전자 18.6%, 어패럴 13.77%, 코스메틱 32.52%. 형은 뭐 있더라? 건설 2%, 전자 1%쯤 되려나?”

승훈의 인상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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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차정혁. 너 지금 뭐 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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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면 몰라? 자랑하잖아. 배 아프다길래 더 아프라고.”

나태하게 늘어져 느긋한 눈길을 보내는 남자의 입가에 조소가 어렸다.

말문이 막힌 승훈의 어금니가 맞물렸다.

어린놈이 다이아몬드 박힌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고 오만방자해서는 거슬리기 짝이 없었다.

말대로 승훈은 배가 아팠다. 정혁의 전무 취임 소식을 듣고 실제로 병이 나 며칠 앓아눕기까지 했다.

차정혁이 명한을 위해 무얼 했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직 있는 걸 누리기만 했다.

자신은 대리부터 시작해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이 자리까지 오지 않았던가.

혈연이라도 능력검증은 필수라던 그룹 총수 박 회장의 방침 때문이었다.

그런 노인이 철옹성 같던 방침을 싹 무시하고 자기 손자를 승훈의 윗대가리로 꽂았다.

그건 차정혁이 명한그룹의 차기 경영 승계자라는 걸 만천하에 공표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도발은 제가 해 놓고 되레 흥분한 승훈이 넥타이를 신경질적으로 잡아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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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이 새끼. 그게 다 너 잘나서 네 건 줄 알아?”

느긋하게 등을 기댄 정혁의 턱이 조금 더 위로 들렸다. 위치상 내려다보는 사람은 승훈인데, 묘하게도 위에서 깔아보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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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내가 가진 특혜야. 부러우면 형도 차씨로 태어나지 그랬어? 아, 형은 무능해서 안 되나? 노인네가 젤 싫어하는 인간이 밥만 축내는 밥버러지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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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지금…… 나 들으라고 하는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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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형하고 나뿐인데 그럼 누구겠어?”

시종일관 약을 올려 대는 음성은 고저 없이 차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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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아픈 건 알겠는데,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게 단지 그 이유뿐일까? 가진 게 없는 인간들은 책임의 무게를 몰라. 형은 내가 가진 거 갖고 싶어도 감당 못 해. 무거워서 깔려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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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정혁! 적당히 해라.”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르는 승훈을 보며 정혁은 조소를 날렸다.

이렇게 같잖은 야망을 드러내는 인간들을 까뭉개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었다.

그런 인간들을 견제하고 짓밟아 주는 것 말고는 평생 보고 배운 바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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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시간에 자숙하는 척이라도 해. 홍보실 여직원 성추행 사건으로 주가 하락해서 노인네 뒷목 잡은 지 며칠 안 됐어. 한 번 더 사고 치면 그 자리도 간당간당할걸.”

굴욕감에 일그러진 승훈의 얼굴로 오만한 눈빛이 날아가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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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지승훈 상무. 같잖게 기어오르지 말고 몸 사려. 상사한테 아부 떠는 법도 좀 배우고. 당신 같은 계약직 하나 까 내는 건 일도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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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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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시우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울려 퍼지는 축하 노래가 다소 요란했다.

머리에 요란한 고깔을 나눠 쓴 어른들은 오늘의 주인공 앞에서 재롱을 부리길 주저하지 않았다.

시우의 뺨이 두꺼비처럼 볼록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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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아아!!”

고작 촛불 다섯 개를 불어 껐을 뿐인데, 메달 획득이라도 한 것처럼 박수갈채와 환호가 쏟아졌다.

이어진 선물 전달식.

첫 번째 주자는 시우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솔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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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우, 이모가 생일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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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이모. 시우가 사랑해요.”

꾸뻑 배꼽 인사한 시우가 곱게 포장된 상자를 받아들며 수줍은 듯 배시시 웃었다. 애교스러운 웃음에 솔이의 눈에서 꿀물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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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도 너무너무 사랑해. 우리 시우 이모 아들 할래? 이모 아들 하자, 응?”

이모의 회유에 순진한 눈을 끔뻑이던 시우가 대번에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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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돼요. 시우 엄마 아들!”

시우가 냉큼 다정의 무릎에 올라탔다. 저를 훔쳐 가기라도 할세라 앙증맞은 두 팔이 엄마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거절당한 솔이는 금세 시무룩한 얼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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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엉? 이모 섭섭해지려고 그래.”

훌쩍이는 시늉을 하자 영악한 다섯 살은 얼른 엄마 무릎을 내려와 이모에게로 쪼로로 달려가 안겼다.

과자 냄새가 밴 작은 손이 솔이의 뺨을 살살 쓰다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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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뚝! 시우 크면 이모도 시우가 책임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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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

촉촉해진 솔이의 눈이 감동으로 회오리쳤다.

이래서 주입식 교육이 무섭다. 맨날 애 앞에서 부양 부양 노래를 하더니, 기어이 다섯 살 꼬마에게 제 노년을 책임진다는 확답을 듣고야 마는 솔이였다.

반듯하게 일어난 시우가 다시 한번 배꼽 인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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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 어…… 시우 키워 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잘 키워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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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앙! 이모 감동!”

시우를 와락 끌어안은 솔이가 뺨을 맞대고 마구 비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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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뻐 죽겠어! 우리 시우는 누굴 닮아서 이렇게 하는 짓도 예쁘고 잘생겼을까, 응?”

푼수처럼 지껄인 말에 숙희가 딸의 옆구리를 쿡 찌른다.

애교는 둘째치고, 훤한 인물만 봐선 다정을 닮지 않은 게 분명했다.

분명 제 아빠를 닮았을 텐데, 이름도 성도 모르는 남자를 떠올리게 하는 말에 분위기가 싸하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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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닮긴 누굴 닮았겠어? 엄마 닮아서 잘생겼지. 그치, 엄마 아들?”

다정이 매끄럽게 응수하며 시우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철모르던 예전과 달리 엄마가 된 다정은 한결 성숙해지고 여유가 넘쳤다.

묵직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던 도준도 분위기 환기를 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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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우 생일 축하해. 이건 삼촌 선물.”

권도준.

다정의 대학 선배이자, 다정에게 꼬박꼬박 월급을 챙겨 주는 것으로 모자의 생계를 책임지는 한빛 건축 사무소의 든든하고 고마운 대표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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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 삼촌 고맙습니다!”

시우가 꾸뻑 허리 접어 인사했다. 흐뭇하게 지켜보던 다정도 마지막으로 선물을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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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우 건강하게 자라 줘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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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사랑해요!”

와락 안겨든 시우가 다정의 뺨에 뽀뽀로 화답했다.

시우는 애교 많고 사랑스러운 아이로 자랐다. 예의가 바른 건 기본이고, 잘 웃고 잘 놀고 그늘진 곳 없이 해맑고 씩씩했다.

시우가 이대로만 무럭무럭 자라 준다면 다정은 원이 없을 것 같았다.

케이크는 잠시 미뤄두고 저녁상을 차릴 때였다. 갑자기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솔이가 미어캣처럼 목을 쭉 빼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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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또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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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더 올 사람 없는데…….”

주방에 있던 다정이 거실로 나오며 앞치마에 젖은 손의 물기를 닦았다. 약간 찌푸린 눈이 스크린을 확인했다.

다정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스크린에 떠오른 얼굴은 뜻밖의 손님이었다. 당황하기도 잠시 다정은 서둘러 현관으로 달려 나갔다.

띠릭.

문을 열자 모시 적삼과 치마를 정결하게 차려입은 정애가 탐탁잖은 얼굴로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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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엄마. 어서 와요. 다들 기다려.”

들어오라며 문을 넓게 벌리면서도 다정은 서먹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얼굴을 본 지도 벌써 반년이 훌쩍 지난 터라 정애가 새로 이사한 집에 오는 건 처음이었다.

아파트만 보면 어지럽다며 학을 떼는 양반이라 집을 찾는 데 애를 좀 먹었을 거다.

미리 연락을 주었더라면 터미널까지 마중을 갔을 텐데, 매번 이런 식이다.

저를 무심한 딸로 만들어 버리는 엄마의 답답한 점 때문에 다정은 다시금 마음이 불편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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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시우 할머니 오셨네!”

손뼉을 짝 마주친 숙희가 반가운 얼굴로 달려 나오지만, 정애는 무뚝뚝하게 눈인사만 건네는 게 고작이었다.

한 동네에서 이웃으로 십수 년을 알고 지낸 사이지만 정애는 그다지 살가운 성품이 아니었다.

경황이 없는 가운데 다정은 얼른 시우를 감싸 제 곁에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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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우야, 할머니 안녕하세요,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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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할머니, 안녕하세요.”

머리를 살며시 누르는 손길에 마지못해 인사를 하고서도 시우는 어색한 듯 다정의 뒤로 숨어들었다.

그런 손자에게 돌아온 거라곤 냉랭하게 스치는 눈길이 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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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상이 차려지는 동안에도 정애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무겁게 소파만 지켰다.

엄마가 왔다는 사실에 마음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론 심란한 기분을 떨치지 못한 채 다정은 미역국과 찬을 곁들여 식탁을 채워 나갔다.

* * *

둘러앉은 사람들은 먹음직스러운 식탁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침묵만 지켰다. 식사가 차려졌다는 말에도 정애가 요지부동 소파만 지키고 있는 까닭이었다.

눈치를 보던 다정이 거실로 나와 넌지시 말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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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식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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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다.”

정애는 눈길도 주지 않고 손을 내저었다.

걸음을 했기에 마음이 풀린 줄 알았건만, 찌뿌둥한 정애의 기분은 영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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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같이 잡수세요.”

손님들 앞에서 난처해진 다정을 위해 도준도 한 소리 거들었다. 그러고도 묵묵부답이자 보다 못한 숙희가 거실로 나와 정애의 손을 잡아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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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우 할머니. 그러지 말고 이리 와. 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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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됐다자녀!”

역정을 부리며 정애가 숙희의 손을 뿌리쳤다.

다정은 조용히 한숨을 삼켰다. 여간해선 감당하기 어려운 성미와 고집스러움이 답답하면서도, 한편으론 그런 엄마가 안타까웠다.

젊을 적 곱상하던 인물은 어디 가고 엄마의 얼굴엔 세월의 나이테만 무성했다.

엄마가 이토록 고리타분하고 고지식한 건 어쩌면 지금껏 겪은 모진 풍파 때문인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를수록 공기가 삭막했다.

초대를 받고 온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이 사라진 지도 오래였다.

그렇다 보니 손님들은 잘 차려진 한 끼를 먹는 둥 마는 둥, 결국 이른 시간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만 했다.

현관을 나선 도준이 미소를 머금고 시우의 뺨을 살짝 꼬집어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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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우. 다음에 만날 땐 이만큼 더 커 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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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에!”

엄마 품에 안겨 대답하는 시우의 목소리가 씩씩했다.

다정은 활짝 열린 집 안을 흘끔거렸다. 현관 밖까지 나와 손님을 배웅하는 동안에도 정애는 얼굴 한번 비추지 않고 있었다.

숙희와 솔이는 그렇다 쳐도 도준에게 이런 꼴을 보인 게 못내 미안하고 창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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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주말에 쉬지도 못하고 와 줬는데…… 미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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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긴. 초대해 줘서 내가 고맙지. 미역국 맛있더라. 애썼어.”

정애를 의식해서인지 도준은 더 말하지 않고 다정의 어깨만 가볍게 도닥였다.

10년 넘도록 알아 온 사이지만 다정에게 있어 도준은 한결같이 고맙고 좋은 사람이었다.

솔이가 시우에게 뽀뽀 고문을 하는 동안 숙희가 다시 한번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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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우 할머니 마음 잘 풀어드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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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 말고 가세요.”

손님들을 배웅하고 들어왔을 때 정애는 여전히 뚱하게 앉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다정은 과일을 깎아 말없이 정애에게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다시 주방으로 돌아와 고무장갑을 손에 끼웠다.

달그락거리는 설거지 소리만 맴도는 공간. 다정은 엄마의 침묵이 숨이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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