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선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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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선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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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선물처럼
2022.08.21.
“파김치는 밖에 하루나 뒀다가 냉장고에 넣어.”
침샘을 자극하는 알싸한 냄새만 풍기고 숙희는 도로 야박하게 뚜껑을 덮어 버렸다.
“멸치볶음이랑 장조림도 해 왔으니까, 시우 챙겨 먹이고.”
입버릇처럼 당부를 읊어 대던 숙희가 별안간 눈을 세모나게 뜨고 노려본다.
“먹을 만큼만 덜어서 먹어. 지난번처럼 먹던 숟가락 담가서 죄 상해 버리지 말고. 알았어?”
“아이, 알았다니까.”
건성으로 대꾸한 다정은 깍두기 하나를 집어 날름 입에 넣고 씹었다. 들큼하고 아삭한 식감에 몸서리가 쳐졌다.
“음! 어떡해. 너무 맛있다.”
“이것아! 젓가락으로 먹어!”
철썩!
등짝에 불이 붙는 동시에 다정의 몸이 구운 오징어처럼 비틀렸다. 손맛 좋기로 유명한 숙희의 차진 손은 맵기로도 유명했다.
반찬 통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던 숙희의 눈길이 넌지시 현관 쪽으로 향했다.
“우리 시우 올 때 안 됐다니?”
“올 때 됐어요.”
감시망이 멀어진 틈을 타 다정이 장조림 속 메추리알을 쏙 낚아채 입에 물었다.
“아이고! 덜어서 먹으라고!”
철썩! 철썩!
숙희는 뒤통수에도 눈이 달린 게 틀림없었다.
뒷정리를 하는 사이 도어락 해제음이 귀에 스쳤다. 현관문이 열리는가 싶더니 가벼운 발소리가 이어졌다.
이윽고 작은 형체가 등장했다. 돌진하던 발을 끼익 멈춰 세우고 조막만 한 말간 얼굴에 천진한 눈동자가 장면을 빠르게 눈에 담는다.
“꼬뿐이 할머니!”
다섯 살 시우가 환하게 웃으며 오도도 달려 숙희의 품에 안겼다.
“아이고, 우리 강아지. 이쁜 내 강아지!”
숙희가 쪽쪽쪽 소리가 나도록 시우의 뺨에 뽀뽀를 퍼부었다. 유치원 가방을 들고 터덜터덜 뒤따라온 솔이의 눈이 가늘어진다.
“꽃분 씨. 시우한테 막 뽀뽀하면 안 된다니까.”
애칭 꽃분 씨로 불리는 최숙희 여사는 솔이의 모친이었다.
잔소리가 못마땅한 숙희가 저 잘나 큰 줄 아는 딸의 머리통을 냅다 쥐어박았다.
“악! 왜 때려?!”
“물고 빨고 키워도 니들 병 하나 안 걸리고 잘만 키웠어, 요것아! 애도 안 낳아 본 년이 번데기 앞에서 주름은!”
절대 지지 않는 숙희 여사다.
4남매를 출산해 큰 병치레 한번 없이 다들 건강하게 키웠으니, 숙희가 베테랑인 건 틀림없었다.
본전도 못 찾은 솔이가 쥐어박힌 머리를 문지르며 투덜거렸다.
“머리 좀 그만 때려! 내가 엄마 때문에 공부를 못했어!”
“허이구! 그 핑계 없었으면 어쩔 뻔했대?”
티격태격하는 모녀를 보며 다정은 깔깔 웃고 말았다. 자주 보는 장면인데 질리지 않았다.
어느샌가 다가온 시우가 저를 좀 보란 듯이 다정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보채는 손길에 눈길을 내리자 별처럼 반짝이는 똘망똘망한 두 눈이 기다리고 있었다. 환하게 웃어 보이자 시우도 활짝 웃는다.
배꼽에 두 손을 포갠 시우가 짧은 몸을 반으로 접었다.
“엄마! 시우 유치원 잘 다녀왔습니다!”
시우는 모처럼 연차 쓰고 집에서 반겨 주는 엄마에게 공손하게 인사했다. 다섯 살 꼬마는 누가 가르친 것도 아닌데 지나치게 예의가 발랐다.
“우리 아들 기특해라. 오늘도 유치원 다녀오느라 고생 많았어요.”
다정은 녹아내릴 것 같은 웃음을 머금고 찹쌀떡처럼 말랑거리는 시우의 뺨을 주물렀다.
5년 전. 뭔가에 홀린 듯 저지른 하룻밤이 초래한 결과는 머리 위로 폭탄이 떨어진 것만큼이나 충격적이었다.
충격을 받긴 했지만, 한편으론 가족이 생긴다는 사실이 얼떨떨했다. 약간 흥분되고 설렜던 것 같기도 하다.
외롭게 자란 탓에 다정은 늘 복작이는 솔이네가 부러웠었다. 그 때문에 한땐 아이를 많이 낳아 기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했더랬다.
물론 제 인생에 결혼은 없기에 막연한 생각일 뿐이었다. 그러나 세상일이 늘 그렇듯 인생은 예기치 못한 쪽으로 흘렀고, 그렇게 선물처럼 시우가 찾아왔다.
마냥 기뻐할 상황이 아니란 것쯤은 알았다. 더럭 겁도 나고 두려웠다. 하지만 단 한 순간도 아이를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적으로 자신을 선택해 준 생명에게 허튼 생각은 엄두도 내지 않았다.
다만 걱정스러웠다.
잘할 수 있을까? 과연 이 아이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까?
그렇게 엄마가 되었다.
누군가는 손가락질하겠지만, 다정은 홀로 아이를 낳은 선택을 무책임하다고 생각지 않았다.
아이를 양육할 만한 경제력이 있었고, 그를 위해 더 열심히 일하고픈 의욕이 솟아났다.
게다가 많은 이들이 아빠의 몫까지 시우를 사랑해 주고 있으니,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하고 행복한 나날이었다.
시우의 작은 머리에 뺨을 기댔다. 연한 머리칼이 스칠 때마다 좋은 냄새가 났다.
다정이 열 달이나 제 속으로 품어 만들어 낸 가족, 제 아이의 냄새였다.
그 와중에도 모녀의 언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래서 넌 언제 시집가서 애는 언제 낳으려고?”
“아, 몰라!”
“혼자 늙어 죽을라니?”
입버릇 같은 숙희의 잔소리에 솔이가 눈을 동그랗게 치떴다.
“왜 혼자야? 시우 있잖아. 반은 내가 키웠어. 쟤 크면 나 부양할 의무 있다니까.”
“뚫린 입이라고 말이나 못 하면.”
“그럼 나도 애만 낳지 뭐!”
“허이구, 재주 있으면 제발 그래라!”
숙희의 매서운 손바닥이 연방 날아들었다.
엄마 무릎에 앉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모녀를 관찰하던 시우가 목을 뒤로 한껏 젖혔다.
“어…… 엄마. 싸우면 나쁜 어린인데…….”
이 일을 어쩌면 좋냐는 듯이 무구한 눈동자에 걱정이 차올랐다.
“아닌데. 저건 싸우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건데?”
“엄마랑 시우도 사랑하는데, 엄마는 시우 안 때리는데?”
다정은 찌푸려 웃고 말았다.
밤잠 못 자고 두 시간마다 젖을 물리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언제 이렇게 커서 또박또박 제 생각을 말하는지 마냥 신기했다.
“각자 사랑하는 방식이 달라서 그렇지. 할머니는 이모를 저렇게 사랑하고, 엄마는 시우를 이렇게 사랑하지.”
“꺄륵!”
간지럼을 태우는 손길에 시우가 자지러지며 돌고래 소리를 냈다.
석 달 전, 다정은 경기도 판교의 신축 아파트 단지로 이사했다. 집값이 만만찮은 지역이지만, 시우 교육을 위해 대출을 받고 무리를 했더랬다.
껌딱지 솔이와 그 모친도 다정을 따라 터를 옮겼다. 지난 5년간 대가도 없이 공동육아를 도맡아 해 주더니, 둘만 보내는 게 영 미덥잖았던 모양이다.
3년 전 투병 끝에 남편이 세상을 등지자 솔이 엄마는 청주 집을 정리하고 올라와 솔이와 합쳤다.
4남매 중 솔이를 제외하면 언니 오빠들은 모두 시집 장가들어 전국 각지로 흩어져 잘들 살고 있었다.
솔이는 테크노밸리와 인접한 주상복합 건물로 카페를 이전했고, 숙희는 아파트 단지 인근에 작은 반찬 가게를 열었다.
솔이를 처음 만난 건 다정이 중학교에 입학했을 무렵이었다. 같은 반 짝꿍이었고, 두 집 건너 이웃이었다.
그때부터 쌓은 인연이니 숙희에겐 다정 역시 딸이나 마찬가지였다.
“시우 애미야. 낼모레 시우 할머니는 오신다니?”
숙희의 물음에 다정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모르겠어요. 며칠 전에 전화로 말씀드리긴 했는데…….”
돌아오는 주말이 시우 생일이었다.
시우가 유치원에 입학한 기념으로 가까운 지인들을 초대해 저녁을 대접할 생각이었다.
시우가 태어나고 물심양면 도움을 준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엄마에게도 연락을 해 두었다. 작년엔 기다리지 말라는 답을 들었지만, 며칠 전엔 잘 모르겠다며 애매한 답을 돌려주었다.
“그러지 말고 전화 한 통 더 드려라. 어쨌든 시우 하나뿐인 할머니 아니니.”
“우리 시우 손자라고 생각도 안 하시는데 뭘.”
다정의 말투가 대번에 부루퉁해졌다. 시우를 한 번도 안아 준 적 없는 엄마가 못내 야속한 까닭이었다.
다정의 모친인 남정애 여사는 청주에서 홀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
7년 전 두 번째 남편이 죽고 마침내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고된 노동에서 벗어날 의지는 없는 듯했다.
두 번째 남편이 죽었을 때 정애는 죽 쒀서 개 줬다며 죽은 사람에게 욕을 퍼부었다.
내 딸 결혼할 때 손은 누가 잡아 주냐며, 오직 그 하나만을 위해 모진 세월 참고 산 사람처럼 억울해하면서.
그런 정애에게 다정의 임신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을 거다.
솔이와 그 가족이 다정의 결정을 응원해 준 것과 달리 정애는 임신한 딸을 마구 때렸다.
엄마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시우가 다섯 살이 될 때까지 여전히 데면데면하기만 한 엄마가 못내 서운한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진통이 시작됐을 땐 엄마가 제일 보고 싶었더랬다.
다신 안 볼 것처럼 굴던 정애는 소식을 듣자마자 한달음에 달려와 다정의 손을 꼭 잡아 주었었다.
그때 색이 다른 엄마의 신발을 보며 다정은 그만 눈물을 펑펑 쏟고 말았다.
신을 짝짝이로 신은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달려왔을 엄마가 너무 가슴 아프고 또 미안해서 진통을 느끼는 중에도 눈물이 멈추질 않았더랬다.
그렇게 모녀간의 앙금이 풀어지나 했더니, 막상 갓 난 시우를 본 정애는 뒤도 보지 않고 다시 청주로 내려가 버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갓난아기를 자기 딸 인생을 망친 원수처럼 쏘아보던 엄마의 눈빛은 지금도 잊히질 않았다.
“그래도 애미들 속은 안 그래. 나야 한 다리 건너 이해한다지만, 솔이가 너처럼 애비 없이 자식만 낳아 기른다면 나라도 왜 안 그러겠니.”
시우가 들을세라 숙희가 소곤소곤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지 말고 꼭 오시라고 전화 한 통 더 드려라, 응?”
“알았어요. 알아서 할게.”
마지못해 대답하면서도 다정은 마음이 착잡했다.
시우가 자랄수록 엄마 생각이 더 간절했지만, 엄마는 여전히 시우를 못마땅하게만 여겼다.
이미 엎질러진 물. 언제까지 같은 싸움을 되풀이해야 하는지 답답하기만 했다.
* * *
“말씀하신 내용은 기존 경영 체계에는 적용된 사례가 없는지라…….”
말을 맺기도 전에 퉁명하게 날아드는 눈초리에 민 실장은 흠칫 시선을 피했다.
8년 동안 임원 비서실에 근무하며 중진들을 많이 상대해 온 민 실장이지만, 새로운 전무는 호락호락한 인사가 아니었다.
처음엔 낙하산처럼 기용된 인사라며 말들이 많았다. 유학을 핑계로 외국에서 실컷 놀다 온 날라리일 거라는 수군거림과 출처가 불분명한 소문들도 떠돌았다.
그런데 막상 겪어 보니 그게 아니다. 새로운 전무는 젊은 나이에 비해 신중하고 치밀했으며 전체적으로 아주 까다로웠다.
성격도 별로고 까칠하기가 말도 못 해 어지간한 담력이 아니고서야 눈을 똑바로 보고 말을 섞는 것조차 몹시 불편했다.
“지금껏 일을 이딴 식으로 했습니까. 놀고 처먹느라 바빴겠네.”
나쁜 감정을 드러내는 데엔 거침이 없고, 비꼬기도 잘한다.
젊은 사람이 참 오만불손하고 안하무인이라며 수군거리다가도 눈 밖에 날세라 하나같이 몸을 사렸다.
차정혁.
명한전자 상무로 기용된 지 6개월 만에 지주사인 명한유통 전무로 취임했다.
대표이사직에 앉은 이가 허울뿐인 인사라 현재로선 실질적인 최고 결정권자라도 과언이 아니었다.
듣기론 아이비리그에서 경영과 정치학 석사 과정을 순조롭게 밟은 수재라는데, 사회생활에 어울리는 공감 능력은 영 부족해 보였다.
하긴, 일평생 누군가에게 저자세를 취할 필요가 없는 태생이다 보니, 애초에 그런 것들을 습득할 이유가 없었을 거다.
“과거 5년 동안 경영 회계보고서, 팀장 이상 실적성과기록 다 모아옵시다. 20분 주죠.”
“그걸 다…… 말입니까?”
민 실장을 향해 날아드는 눈빛엔 감정이 없었다. 그저 눈으로 욕을 퍼부을 뿐.
“19분 45초 남았는데 안 뛰어도 되나?”
“……네? 네!”
상명하복이 원칙인 군인처럼 민 실장은 꽁지가 빠지게 날아갔다.
그 모습을 주시하며 정혁은 한숨을 뱉었다. 취임하고 한 달이나 지났는데, 여전히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그때 민 실장과 바통 터치라도 한 것처럼 미처 닫히지 않은 문으로 한 남자가 들어섰다.
“이야, 차 전무 방 좋네.”
남자가 넓은 방을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두툼한 손으로 가죽 소파의 표면을 슥 훑고는 책상 중앙의 크리스털 명패를 톡 건드린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던 손길이 종국엔 정혁의 어깨 위로 툭 내려앉았다.
“우리 정혁이 많이 바쁜가 봐?”
지승훈
명한유통 상무이자 정혁에겐 6촌 고종 형제쯤 되는 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