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애인할래요 (5/114)


5화 애인할래요
2022.08.18.


제법 힘주어 노크했지만 고요하게 닫힌 문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다정은 바짝 타는 입술을 핥으며 다시 노크하려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잠잠하기만 하던 문이 휙 열렸다.

헐렁한 티셔츠와 반바지 차림의 남자가 무슨 용건이냐는 듯 빤히 눈을 맞춘다.

스치기만 해도 얼굴이 데는 기분이라 다정은 재빨리 시선을 떨구었다.


“……으러 왔어요.”

“뭐?”

“차, 찾으러 왔다고요. 잃어버린 거…….”

가만히 멈춰 있던 남자가 눈썹을 까딱거렸다.


“기다려.”

문이 닫혔다. 잠시 후 다시 방문이 열렸을 때 남자는 왜인지 더 커다래 보였다.


“여기.”

남자가 긴 손가락에 대롱대롱 걸어 뭔가를 내밀었다. 엄청난 비밀을 간직하고 있을 것만 같은 불투명한 검은색 비닐봉지였다.

슬며시 봉투를 건네받은 다정은 내용물을 확인했다.

곰돌이 얼굴이 자잘하게 들어간 유아스럽기 짝이 없는 팬티가 봉지 안에 볼품없이 담겨 있었다. 틀림없이 제가 잃어버린 게 맞았다.

새벽 일찍 샤워실로 가기 위해 세면도구를 챙기던 중 팬티가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뒤늦게야 어젯밤 샤워실 앞에서 물건을 떨어트린 일을 떠올렸지만, 어련히 아주머니가 청소하며 치워 버렸을 거로 생각했다.

잃어버린 속옷의 행방을 수소문하고 다니기 뭐해 굳이 찾아 헤매지 않았는데, 설마 이 남자 수중에 있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검은 비닐봉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다정의 손안에서 수줍게 구겨졌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립밤을 여러 번 덧칠했는데도 입술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고, 고마워요.”

“뭘.”

남자가 무심히 응수했다. 뭔가 용건이 남은 것처럼 꿈지럭대며 혀를 둘러 타는 입술을 축였다.


“할 말 남았어?”

“네?”

다정은 신음을 삼켰다. 마주쳤다 하면 네네? 거리는 저가 한심해서 미칠 노릇이었다.

당당하고 자신감 있게 말하자고 다짐했는데, 그게 생각처럼 잘되지 않았다.

내성적이긴 해도 원래부터 이렇진 않았다. 공부와 일에선 항상 자신감 있게 덤비는 그녀였다.

이 나이까지 이성을 만나 본 적이 없으니 경험 부족도 한몫할 테지만, 이 남자 앞에만 서면 미치도록 부끄러워졌다.

다정은 멍청하게 굴지 말자고 다짐하며 결연하게 대답했다.


“네!”

잠시 바라보던 남자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눈을 키웠다.

세상에. 말 안 해도 다 아는 것처럼 굴더니 이번엔 못 알아듣는 척한다. 환장할 상황에 다정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일주일! 일주일 있다가 나 여기 떠나요!”

“그래서?”

“그래서 말인데요! 우리 일주일만…….”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다정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솔이가 했던 조언들을 떠올리며 수백 번도 더 연습했는데, 그다음부터는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일주일만 뭐?”

기다리기 지루했는지 남자가 재촉했다. 다정은 질끈 깨문 입술을 벌렸다.


“애, 애인할래요!”

“…….”

남자는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표정 변화도 없었다.

한참이나 고요한 눈길로 바라보기만 하던 그가 이윽고 문을 넓게 벌리며 관대한 투로 말했다.


“들어와.”

생각보다 간단하게 흘러가는 바람에 외려 당혹스러웠지만, 다정은 조심스레 안으로 발을 들였다.

문이 닫히고 그 문으로 남자가 다정을 슬며시 밀어붙였다. 시야를 가둘 만큼 바투 붙어선 남자의 숨결이 정수리로 쏟아졌다.


“뭘 하자고?”

“애, 애인…….”

음, 목을 울려 소리를 내던 남자가 귓가로 입술을 붙였다.


“근데 너 아무거나 먹다가 탈 나.”

경고 어린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지만, 지금 다정의 귀에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나…… 어때요?”

내내 속으로 연습했던 말을 동문서답 수준으로 뱉었다. 이번에도 남자는 말이 없었다.

햇볕에 익어 발간 볼과 순한 눈을 뜯어보던 남자가 별안간 피식거렸다. 웃음 같은 숨결이 쏟아져 관자놀이 근처를 간지럽혔다.

예상은 했었다. 이런 남자가 자신처럼 수수한 여자에게 호감을 느낄 리 없을 테다.


“……아, 알아요. 남자들은 화려하고 예쁜 여자를 좋아하겠죠. 나도 내가 별로 안 예쁘다는 건 알아요. 그런데.”

“너 예쁜데.”

“네?”

말끄러미 눈을 맞추던 남자의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예쁘다고. 강아지풀 같아.”

처음엔 묘하게 거슬리던 눈빛과 행동들을 막연히 기분 나쁘다고 해석해 버렸다. 그런데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보고 있으면 강아지풀로 간질이는 것처럼 이상야릇하달까. 그 낯설고 간지러운 기분이 싫지만은 않았다.

그럴 일 없을 거라 믿었던 여자가 뻔히 수작을 걸어오는 걸 알면서도 넘어가 주고 싶을 만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다정은 입술을 말아 물었다.

사람한테 강아지풀 같다는 표현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호르몬이 반응한다는 건 바로 지금 같은 순간을 두고 하는 말이라는 것을.

긴 손가락이 부스스하게 늘어진 머리카락을 느슨하게 감아쥐었다.


“예뻐. 너.”

“그럼…… 애인해요. 남은 일주일 동안만…….”

“말했지. 탈 난다고.”

“피차 각자의 삶을 책임질 수 있는 성인이니까.”

다정이 씩씩하게 말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딱 일주일만요. 데이트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또…….”

말을 끝내기도 전에 남자가 피식거렸다.


“좋네.”

“그죠?”

반응이 긍정적이자 경직된 분위기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근데 난 애인하고 일주일 내내 이 방에만 있을 예정이라.”

귓가를 농염하게 핥아오는 목소리에 호르몬이 거세게 반응했다. 다정은 남자의 고요한 눈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꿀떡 삼켰다.


“……그것도 좋고요.”

커다란 손이 다정의 허리를 감아 당긴 동시에 그의 입술이 관자놀이와 눈두덩 위로 스치듯 미끄러졌다.

살갗을 간지럽히는 관능적인 숨결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 느낌이 생소하고 낯설면서도 싫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설레고 심장이 터질 것처럼 폭주했다.

부드러운 손길이 목덜미를 감싸 쥐었을 때 다정은 숨을 멎고 말았다. 맥동하는 여린 피부를 문지르는 감촉에 야릇한 열기가 들끓었다.

이윽고 아찔한 숨결이 입술을 집어삼킨 순간 다정의 눈이 질끈 감겼다.


 

* * *

눈가를 짚으며 잠에서 깼을 때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나른하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침대를 벗어난 남자는 허물처럼 벗어 놓은 옷가지들을 지르밟고 나아갔다.

테이블 위에 있던 지갑을 벌려 확인한 그의 눈썹이 살짝 들렸다.

여권과 시계, 지갑 안 지폐도 그대로였다. 여자를 제외하면 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대충 옷을 걸치고 카운터로 내려갔다.

호스트와 몇 마디 말을 주고받은 뒤 밖으로 나가 햇살에 눈가를 찌푸리며 담배를 물었다.


“내뺐네.”

일주일이라더니 여자는 하룻밤 만에 내뺐다.

한동안 피우지 않던 담배를 물자 눈앞이 핑 돌았다.

몽롱한 의식을 유지한 채 손바닥으로 목덜미를 느릿하게 문질렀다. 여자의 입술이 스쳤을 때의 감각이 희미하게 되살아났다.

여자와 밤을 보낸 건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하는 짓이 영 어설퍼서 유혹 비슷한 장난을 친 건 맞았다. 수작질에 넘어가 준 것도 사실이고.

미련 따윈 없다. 육체는 탐닉해도 감정은 소모하지 않는다. 지금껏 어겨 본 적 없는 철칙이었다.

다만 의아할 뿐이다. 아무것도 훔치지 않았는데, 왜 말도 없이 사라졌나 하는.

대개 여행지에서 이런 식으로 사라지는 여자들은 하나같이 같았다. 돈이나 금품. 달라고 하면 기꺼이 줄 텐데, 보통은 훔친다.

물론 순진해 보이고 정직한 여자가 그럴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얼마 되지도 않는 밥값에 목숨을 걸듯이 정색했던 것만 봐도 그쪽은 아니었다.

아닌가. 순수하고 순진해 보였는데, 알맹이는 영 딴판인가.


“뭘까…….”

연기를 길게 뱉어내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데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진동했다.

물끄러미 화면을 보다가 통화 버튼을 누르고 딱딱한 물체를 귀에 붙였다.


“왜?”

『이 녀석, 며칠째 전화도 안 받고 할미 속을 어지간히도 썩이지!』

노인의 목소리가 카랑카랑했다. 작게 한숨을 쉰 남자는 옹알이처럼 중얼거렸다.


“졸려, 끊어.”

『공항에서 한 실장은 왜 따돌린 거냐? 멀쩡히 잡아 놓은 호텔은 내버려 두고 대체 어디에 처박혀 있는 게야! 세 끼 꼬박꼬박 잘 챙겨 먹고 다니는 거야?』

남자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한 실장은 귀찮아서 따돌렸고, 조용한데 처박혀 있고, 하루 세끼 꼬박꼬박 챙겨 먹었고.”

뭘 기대했더라. 순진하든 약아 빠지든 여자는 여자다. 애초에 여자는 믿을 만한 족속이 못 되었다.


“할머니.”

『……?』

“계약을 하나 했는데.”

『너 이 녀석! 할미가 아무 데나 사인하면 안 된다고 했냐 안 했냐!』

잃어버린 건 아무것도 없었다. 뭘 훔친 게 아니라면 왜 말도 없이 달아났을까.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약속했던 기한도 어기고 메모 한 장 남기지 않은 채 사라져야 할 만한 이유가 뭘까.

막상 하룻밤을 보내고 보니 실망스러웠나? 기대만큼 만족스럽지가 않았던 건가?

별안간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샌다.

그럴 리가. 그런 의심을 했다는 사실에 짜증이 끓어올랐다.

실망이나 만족을 운운하기에 여자는 경험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키스조차 서툴러서 제멋대로 해도 되는 건지 내적 고민을 해야 할 정도였다.


“일주일이랬는데, 하루 만에 내뺐네.”

『내빼? 누가?』

“이러면 계약 위반인데. 고소라도 해야 하나.”

『할미가 처리할 테니까 뭐 하는 놈인지 이름만 대!』

“몰라. 그래서 짜증 나.”

진심이다. 누구라도 하나 붙잡고 만신창이로 만들어 버리고 싶을 만큼 짜증이 끓었다.


『녀석, 당최 무슨 말을 하는지 원.』

“끊어.”

나른하게 마무리를 짓고 종료 버튼을 누른 남자는 묵직한 물체를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산란하는 햇살에 눈살을 찌푸렸다.

「YOO」

여자에 대해 아는 거라곤, 숙박부에 남은 그 이름이 전부였다.

* * *

한가한 카페 안에 잔잔한 발라드 가요가 흘렀다.

다섯 개나 되는 테이블이 텅 비어 있었지만, 다정은 침착하게 앉아 있지 못하고 안절부절 홀을 서성였다.

초조한 시간을 견디던 중 딸랑 울리는 도어벨 소리가 지나치게 요란하게 느껴졌다.

헐레벌떡 문을 밀고 들어온 솔이가 다정의 손을 잡고 화장실로 끌고 갔다.


“혹시 몰라서 종류별로 세 개 사 왔어.”

솔이가 앞치마 주머니에서 바스락대는 봉지를 꺼냈다. 그걸 은밀히 전달하며 다정의 등을 화장실로 떠밀었다.


“빨리, 빨리!”

“어떡해? 나 어떡하지?”

다정은 사지로 내몰리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스페인에서 돌아오고 한 달이 조금 넘은 시점, 매달 보여야 할 것이 보이지 않고 있었다.

솔이가 말했던 것처럼 스페인에서의 일은 까마득한 추억으로 묻어 두면 그뿐이라고, 그렇게 믿었다.

대체 무슨 용기로 그랬을까. 그날 밤은 제가 미쳤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까무룩 잠에 빠졌다 새벽녘 눈을 떴을 때 곁에서 잠든 남자를 발견하고 경악했다.

몸 곳곳에 남아 있는 이질적인 감각들은 지난밤의 기억이 꿈이 아니라는 걸 말해 주고 있었다.

다정은 뭔가에 단단히 홀린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마치 발정기에 접어든 암컷이 강한 유전자를 지닌 수컷을 유혹해 댄 것처럼, 오직 본능에만 이끌려 동물적으로 저질러 버리고 말았다.

남자가 잠에서 깼을 때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도저히 나지 않았다.

뒤늦게야 정신을 수습하고 도망치듯 자신의 방으로 달려와 무작정 짐을 꾸려 공항으로 내달렸다.

다신 만날 일 없으니, 다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일단 확인부터 해 봐.”

다정을 화장실로 들여보내자마자 솔이는 문에 찰싹 달라붙었다.


“어때? 유다정! 뭐라고 말 좀 해 봐. 네 친구 숨넘어간다. 어?”

얼마 후 굳게 닫힌 화장실 문이 열렸다.

세 개의 임신 테스트기를 손에 꼭 쥐고 나타난 다정이 창백한 이마를 짚으며 휘청거렸다.


“어때? 어떻게 됐어?”

대답을 듣자니 숨이 넘어갈 지경이라 솔이가 잽싸게 스틱을 낚아챘다. 세 개의 스틱을 차례대로 확인한 솔이의 입이 쩍 벌어졌다.


“야, 유다정. 너…….”

“이게 다 너 때문이야. 힝!”

동물적으로 일을 친 건 저면서 다정은 애먼 솔이를 원망했다. 솔이가 황당하게 눈을 치떴다.


“이 기집애 말하는 거 좀 봐. 내가 연애를 하랬지, 교배를 하랬냐? 이 짐승아! 넌 피임이라는 게 왜 있는 줄도 모르지?”

“흑, 아니야! 아니란 말이야…….”

다정은 털썩 주저앉아 버둥거렸다. 정말 억울해서 울고 싶었다.

그럴 리가 없다. 제아무리 욕구에 충실했다 하나 사전 준비 또한 잊지 않았다. 그 부분에 있어선 외려 그 남자 쪽에서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었다.

분명 알고 있는 모든 지식 선에서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방비는 완벽했다.

그런데 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