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다비드의 유혹 (4/114)


4화 다비드의 유혹
2022.08.14.


다정이 외출하고 돌아왔을 때 206호는 응접실 소파에 늘어져 휴대폰을 만지작대고 있었다.

그는 외출도 관광도 하지 않았다. 왜 여기 있는지 의아할 만큼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짐작되는 게 없진 않았다. 스페인어가 그리도 유창한 걸 보면 아마 수없이 와 본 곳이라 흥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권태롭게 휴대폰을 바라보던 남자가 시선을 들었다. 다정을 발견하곤 곧장 시간을 확인한다.

마치 온종일 주인 기다리던 강아지처럼 감시하고 확인이 되면 밥시간에 늦지 말라며 무언의 압박 같은 눈빛을 쏘아 날리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세상만사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한 가지 집착하는 게 있다던데.

저 남자에게 그건 ‘끼니’였다.


“201호 아가씨. 오늘은 어디 다녀왔어?”

식당으로 내려간 다정을 반겨주며 아주머니가 물었다. 이런 걸 묻고 답하는 것도 여행의 소소한 재미라면 재미였다.


“오늘은 고딕 지구에 다녀왔어요.”

주인아주머니의 눈이 댕그래졌다.


“아니, 2주 넘도록 있으면서 거길 아직 안 가 봤어?”

“아뇨. 벌써 여러 번 가 봤는데, 생각나서 다시 가 봤어요.”

“다들 대충 보고 지나치는데, 201호 아가씨도 특이하네.”

“유심히 관찰하는 걸 좋아해서요. 어머, 여기서 깻잎을 다 보네요?”

받아든 식판에 상추와 깻잎을 비롯해 쌈 채소가 수북했다. 다정이 반가워하자 아주머니가 뿌듯한 웃음을 머금었다.


“텃밭에 심었더니 잔뜩 키가 컸더라고. 쌈밥 괜찮지?”

“그럼요, 저 쌈밥 좋아해요.”

강된장과 나물, 생선구이까지 완벽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오늘은 식당 안이 바글바글했다.


“오늘은 사람이 많네요.”

“응, 아까 낮에 서너 팀이 한꺼번에 왔더라고. 방이 꽉 찼지 뭐야.”

다정은 안도가 되어 활짝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난동을 부린 일행들이 퇴실했다고 해서 아주머니께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차였다.


“돈 많이 버시겠어요.”

“그러게. 좀 있으면 빌딩도 세우겠어.”

아주머니가 좋은 기분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206호 총각도 많이 들어요.”

있는 줄도 모르게 뒤따라와 식판을 받아든 남자는 짧게 고개만 끄덕인 후 다정의 뒤를 졸졸 따라왔다.

여전히 대화도 없고 어색했지만, 이제는 한 식탁에서 밥을 먹는 게 제법 자연스러웠다.

다정이 소담하게 말아쥔 쌈을 입에 밀어 넣었다.

볼록해진 뺨을 이리저리 씰룩이자 쌈 채소 특유의 쌉싸름한 맛과 향긋한 깻잎 향이 입안에서 향긋하게 어우러졌다.

스페인에서 깻잎이라니. 아프리카 오지에서 매운 컵라면과 김치를 발견한 것만큼이나 반가웠다.

그런데 부지런히 쌈을 말아 먹는 다정과 달리 남자는 쌈에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군소리 없이 먹고는 있지만, 쌈을 싸서 먹지 않으니 별로 먹을 게 없어 보였다. 심지어 손대지 않은 생선구이는 처음 상태 그대로였다.

궁색하게 밥과 나물 정도만 먹는 게 신경 쓰여 한참을 고민하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쌈밥……싫어해요?”

“아니.”

얌전한 저작 운동을 이어가던 그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근데 왜 안 먹어요?”

“먹어 본 적 없어.”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어 다정의 눈이 커다래졌다.


“쌈을 먹어 본 적이 없다고요?”

“아니. 근데 내 손으로 싸서 먹어 본 적은 없어.”

“한 번도요?”

“응, 어떻게 하는지 몰라.”

“…….”

영어와 스페인어가 원어민 수준이고 하X드를 나온 남자가 쌈 싸는 방법을 모른단다.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세상 안에 숨겨진 바보는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정은 저도 모르게 살풋 터진 웃음을 감추고 재빨리 상추와 깻잎을 포개 쥐었다.


“어렵지 않아요. 잘 봐요.”

유치원 선생님처럼 상냥하게 말하며 밥과 강된장을 얹어 야무지게 쌈을 말아 내보였다.


“이렇게 하면 돼요. 엄청 쉽죠?”

그는 생각에 잠긴 것 같은 얼굴로 다정이 말아쥔 쌈을 바라보았다.


“어때요? 할 수 있, 아…….”

다정의 목으로 놀란 신음이 삼켜졌다. 그가 불쑥 상체를 숙여 다정의 쌈을 날름 집어삼킨 거였다.

황당하게 눈을 깜박이자 크지도 않은 쌈을 꼭꼭 씹어 삼킨 남자가 말했다.


“생선도 발라줘.”

 

 

* * *

차근차근 디지털카메라 액정을 넘겨 보던 다정은 탄식을 뱉고 말았다.

고딕 지구에서 찍어온 사진이 백 수십 장에 달하는데, 건질 만한 게 별로 없었다.

고딕 지구는 시가지 전체가 중세유럽의 분위기를 띠었다. 거리의 느낌이 좋아 마구잡이로 찍다 보니, 정작 건축물 사진은 몇 없고 실속 없이 길거리 사진만 수두룩했다.

아무래도 내일 행선지 역시 고딕 지구가 될 것 같았다.

아쉬운 듯 한숨을 쉬면서도 다시 한번 고풍스러운 거리의 모습을 눈에 담으려 액정을 넘겼다.

그러던 중 사진 하나에 눈길이 고정되었다. 사진 속 건물의 담벼락 아래로 잘 가꿔진 화단이 눈길을 끌었다.

자세히 보기 위해 화단 부분을 확대해 보았다. 이름 모를 화초의 초록 잎사귀가 싱그럽게 느껴졌다.

그렇게 싱그러운 잎사귀를 보는데, 왜 저녁 식사 때 보았던 상추와 깻잎이 떠오르는지 모를 일이다.

입술을 감쳐문 다정의 손끝이 살며시 말려 들어갔다. 언뜻 남자의 숨결이 스쳤던 손끝이 저린 기분이었다.

그러기도 잠시, 갑자기 쿡 웃음이 터진다.

말이 없을 때면 차갑고 냉소적이기 이를 데 없는 남자가 말을 섞다 보면 어딘지 모르게 허당기가 다분해서 생각할수록 웃음이 났다.

문득 시간을 확인한 다정은 여행용 세면도구와 필요한 것들을 주섬주섬 챙겼다.

남녀 각각 두 칸뿐인 샤워실은 늘 만원이지만, 지금 시간이라면 느긋한 샤워가 가능할 거였다.

방을 나서 복도 중간에 있는 샤워실로 향했다. 예상대로 샤워실 앞은 고요했다.

무심코 다가가 문고리를 쥐고 돌린 순간, 다정의 손에 든 물건들이 우르르 떨어져 내렸다.

열린 문으로 서늘한 기운이 밀려 나왔다. 공기는 축축했고, 막 잠긴 샤워기 끝에 맺힌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가 선명했다.

넓지도 않은 공간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남자가 돌아섰다. 습윤한 윤기를 머금은 근육이 생동감 있게 수축하는 장면에 숨이 막혔다.

외설스럽기보다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아담처럼 신선한 생명감이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매끄러운 어깨와 가슴을 훑고 떨어진 다정의 눈길이 올록볼록 신기한 복부에 머물렀다. 허리에 댄 수건의 하얀 색감 때문인지 음영 진 굴곡이 더욱 도드라졌다.

역동적이고 세밀한 묘사가 특징인 다비드상도 이와 비슷한 느낌을 자아냈던 거로 기억한다.


“너 그 눈.”

공간을 울리는 목소리에 멍한 표정으로 굳어 있던 다정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또 핥네.”

“네?”

반사적으로 반문하는 얼굴은 완전 넋이 나간 채였다. 또다시 소 혓바닥 취급을 받고 있었지만, 그것을 의식할 겨를은 없었다.

보란 듯이 골반에 손을 얹은 남자가 삐딱하게 눈길을 주었다. 태도는 몹시 당당했다.


“뭐 해?”

“네?”

젖은 머리카락을 느릿하게 쓸어 넘기는 동작 아래로 불만 가득한 표정이 드러났다.


“계속 볼 거면 들어와서 보든가.”

“네? 아……. 네!”

남자의 노골적인 표현은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뒤늦게야 상황을 인지한 다정은 허둥지둥 떨어진 소지품을 주워 돌아섰다.

쾅 닫힌 문을 주시하던 남자가 눈썹을 까딱였다.

한 번씩 쳐다보는 눈빛이 묘하게 거슬리는 여자였다. 눈빛만이 아니었다. 표정도, 하는 행동도 마찬가지였다.

남자는 허리를 짚고 서서 잠시 고민했다. 완벽히 샤워를 끝낸 참인데 어딘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고민을 끝낸 그는 다시 샤워기 꼭지를 돌리고, 손바닥에 바디워시를 듬뿍 짰다.

한편 눈도 깜빡이지 않고 닫힌 문을 빤히 바라보며 다정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도리질을 쳤다.

보고 또 보고, 다시 봐도 문에 걸린 표지판은 명백히 남자 샤워실 표지판이었다.

미쳤어!

뺨을 철썩 때린 다정은 정신없이 방으로 달려와 머리끝까지 폭 뒤집어쓴 이불을 다시 휙 걷어냈다.


“아니! 왜 문도 안 잠그고……!”

순전히 제 잘못만은 아니지 싶어 꿍얼대는데, 뒤늦게야 얼굴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

벗은 몸을 들킨 건 그 남자인데, 왜 제가 부끄러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다시 이불을 뒤집어쓰고 이어진 처절한 발길질은 그렇게 한동안 멈출 줄을 몰랐다.

* * *

푸르스름한 동이 내려앉은 창가로 청량한 새소리가 밀려들었다.

이불을 휙 걷어낸 다정의 눈이 멍하니 천장을 향했다. 피부는 푸석했고 푸른 물감이 번진 것처럼 눈 밑은 퀭했다.

완벽히 균형 잡힌 살아 있는 다비드상이 밤새 눈앞에 어른거려 결국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말았다.


“하…….”

적막이 내린 방 안에 깊은 탄식만 흘렀다.

조식 시간이 되어 방을 나선 다정은 살금살금 계단을 내려가 식당 안을 기웃거렸다. 혹여나 마주쳐선 안 될 남자와 마주칠까 염탐하는 중이었다.


“뭐 해?”

난데없이 울리는 모국어에 화들짝 놀라 돌아서자 남자의 무감한 얼굴이 잡혔다.

이번에도 부끄러움은 다정의 몫이다. 퍼뜩 눈을 피하자 남자의 고개가 삐딱해진다.


“길 막지 말고 비켜.”

“……네? 네!”

어젯밤 벗은 몸을 들켜 놓고도 그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태연하기만 했다.

신속히 벽 쪽으로 몸을 붙이자 206호가 쌩하니 스쳐 간다.

멎은 숨을 천천히 뱉으며 다정은 고개를 저었다. 저 남자와 마주 보고 밥을 먹었다간 십중팔구 체할 게 분명했다.

일단 후퇴.

숨을 죽이고 슬그머니 돌아서려는데, 정수리 위에 묵직한 무언가가 턱 내려앉았다.

남자의 커다란 손이 농구공 잡듯 다정의 머리를 붙잡아 돌려세웠다.

꽤 치욕적인 순간인데 화를 내긴커녕, 다정은 놀란 토끼 눈이 되어 제 머리를 공 취급하는 남자를 어이없게 바라보았다.


“밥 안 먹고 어디가?”

“아, 생각이…….”

“생각 없으면 그냥 앉아라도 있어. 고소당하기 싫으면.”

“…….”

또다시 식사 들러리로 강제 동원된 다정은 혼이 반쯤 나간 채 기계적으로 밥을 퍼 나르는 동작만 반복했다.

어찌어찌 한 끼를 해치우고 도망치듯 앞서 계단을 오르는데 등 뒤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참, 잃어버린 거 없어?”

“네?”

반사적으로 돌아선 다리가 휘청거렸다. 물끄러미 눈을 맞추던 남자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잃어버린 거.”

“……어, 없는데요.”

“있을 텐데.”

다정의 얼굴에 빤히 들러붙어 있던 남자의 눈길이 수직으로 낙하했다. 배꼽 아래를 집요하게 주시하던 눈길이 다시 다정의 얼굴로 원위치했다.


“원래 안 입어?”

“네?”

“나한테 있어. 잃어버린 거.”

계단을 올라온 남자가 다정을 향해 상체를 굽혔다. 서서히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다정은 궁지에 몰린 생쥐처럼 벽과 더 친밀해져 갔다.

귓가로 다가온 입술이 숨결을 불어냈다.


“찾고 싶으면 내 방으로 오든가.”

바람 소리처럼 낮게 속삭이고 떨어진 그는 방향을 틀어 유유히 계단을 올라갔다.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채 조각상처럼 굳어버린 다정은 귀뿌리가 확 뜨거워지고 말았다.


 

* * *

고딕 지구는커녕 외출도 하지 못한 채 다정은 침대에 작게 몸을 웅크렸다.

여행도, 가우디도 더는 다정의 의식을 지배하지 못했다.


‘내 방으로 오든가.’

남자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귓전을 울렸다.

무심하면서도 야릇한 유혹.

혼자만의 착각이라도 상관없다. 하나 확실한 건 다정이 그에게 설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저녁 식탁에서 탄탄한 팔과 가슴으로 어깨를 감싸 온 순간이었을까.

아니면 제 속도에 맞춰 걸음을 늦춰주던 그때? 그도 아니면 귓가로 다가와 야릇하게 속삭이고 멀어진 그 순간일까.

매 순간 처음 느껴 보는 기분이라 언제인지를 특정하는 건 어려웠다.

째깍째깍, 시계 초침 소리가 이상하리만치 크게 의식되었다. 충동적인 기분이 밀려들수록 알 수 없는 강박과 초조함이 동반되어 다정을 압박했다.

해가 기울 무렵 결심을 굳힌 다정은 침대를 빠져나와 트렁크를 헤집기 시작했다.

가진 거라곤 여행지에서 활동하기 편한 반바지와 티셔츠가 다였다. 고민 끝에 가장 짧은 바지와 타이트한 티셔츠로 갈아입었다.

납작한 파우치 안에 화장품이라 봤자 연한 다홍빛이 도는 립밤이 전부였다. 여러 번 덧바르자 그나마 입술에 생기가 돌았다.

준비를 마치고 방을 나와 기역 자로 꺾인 복도를 걸어 206호 앞에 멈춰 섰다.

작게 말아쥔 주먹이 과감하게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