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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책임져 (3/114)


3화 책임져
2022.08.11.



 
화창한 햇살이 창가를 점령한 지도 오래였다.

9시 45분.

이 시간까지 다정이 침대를 뭉그적거리는 건 드문 일이었다. 조식을 먹으려면 10시 전에는 내려가야 했지만 왜인지 내키지 않았다.

전날 여자의 추태와 난동은 한동안 이어진 모양이었다. 머지않아 일행의 만류로 수습은 되었다지만, 낯선 외국 땅에서 같은 민족이라는 게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어깨동무를 유지한 채 2층까지 올라온 남자는 다정을 201호 앞에 버려두고 별다른 말도 없이 자기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애초에 여자가 다정에게 접근한 건 206호 때문이었다.

수수한 다정과 비교되게끔 어린 나이를 강조하고 애교가 많은 점을 내세워 그에게 어필하려던 목적이었을 거다.

다정도 모르지 않았지만, 공연히 경쟁하는 구도를 만들어 자발적으로 희생양이 될 필요는 없다는 판단이었다.

물론 유쾌하진 않았다. 그렇다 보니 면박을 당해 펄쩍 뛰는 여자를 보았을 땐 고소하다 못해 통쾌한 기분마저 들었다.

솔직히 206호가 보인 반응은 뜻밖이었다.

어리둥절했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약간 특별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랄까. 그리고 알 수 없는 이유로 가슴이 뛰었다.

절 향해 쏟아지던 그윽한 눈빛, 어깨에 맞닿았던 성성한 근육의 감촉과 체온, 좋은 냄새.

그리고 자기중심적으로 지껄이는 말투와 어우러진 무례한 분위기.

그 모든 순간의 기억이 너무 생생해서 번지점프를 뛰기 직전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도무지 이 부끄러운 기분의 정체를 알 길이 없어 다정은 이불을 부둥켜안고 침대를 데굴데굴 뒹굴었다.

불현듯 희미한 소리가 귀에 잡혔다. 잘못 들었나 싶어 귀를 기울이자 소리가 한층 명확해졌다.

똑똑.

누군가 다정의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였다.

주인아주머니 말고는 개인적으로 방을 찾아올 사람은 없는데.

부스럭 몸을 일으켜 느릿하게 걸어가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열린 문밖을 향해 몽롱한 눈을 깜빡이던 다정은 다시 문을 쿵 닫고 돌아섰다.

세상에!

경악한 얼굴로 산발인 머리를 움켜쥐었다. 모든 사고와 신체기능이 일시에 마비된 듯했다.

어째서 206호가 문밖에 서 있는지 납득도 수긍도 되지 않았다.

똑똑.

다시 울리는 노크에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거울 앞으로 달려간 다정은 악, 소리를 지를 뻔한 입을 황급히 틀어막았다.

망나니 저리 가라 헝클어진 머리와 퉁퉁 부은 눈. 제 몰골을 보고 이렇게 놀라 보긴 또 처음이었다.

재빨리 눈두덩을 비비고 허리까지 떨어지는 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대충 훑어 내려 보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부기는 여전했고 길게 풀어헤친 머리는 타고난 반곱슬이라 어떻게 해도 금방 자다 일어난 것처럼 부스스하기만 했다.

똑똑.

재촉하는 소리가 울린다. 그저 단순한 노크였다. 문제라면 문밖에 있는 인간의 성정이 점점 포악해지는 게 피부로 여실히 와닿는다는 게 문제였다.

안절부절 서성이던 다정은 뺨을 철썩 때리고 결연하게 문을 마주했다.

크게 심호흡하고 불시에 문고리를 휙 잡아 돌리자 곧장 거만한 남자의 눈길이 떨어졌다.

이 남자는 큰 키로도 모자라 턱을 10도쯤 든 상태로 사람을 내려다보는 특징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괜히 이유도 없이 주눅이 들었다.


“무, 무슨 일…….”

“왜 밥 먹으러 안 와.”

다짜고짜 문을 두드린 용건이 그거라면 몹시 놀라웠다.


“밥은……. 그게 배가 안 고파서…….”

꼬르르륵.

타이밍도 기가 막혔다. 반사적으로 배를 움켜쥔 다정은 해탈한 얼굴로 그만 넋을 놓고 말았다.

남자의 무심한 눈길이 다정의 이마에 고정되었다. 동글동글 순한 게 딱밤을 먹이면 딱 좋지 싶었다.

해 볼까? 충동이 일지만, 제가 아무리 막무가내라도 거기까지 시도할 만큼 멍청이는 아니었다.

그나저나 뭐랬다고 죄지은 사람처럼 눈도 못 맞추는 꼴을 보자 괜히 심술이 도진다.


“책임져. 너 때문에 밥 못 먹었어.”

퉁퉁 부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게 왜 저 때문에…….”

“말했지. 혼자 밥 못 먹는다고.”

“…….”

이상한 사람인 건 대략 짐작했지만, 이쯤이면 많이 이상했다.

남자가 팔을 들어 손목시계를 확인한다.


“밥시간 지났어. 어떡할 거야.”

“그걸 제가 뭘…….”

“우리 노인네가 맨날 하는 말이 있어. 한번 놓친 끼니는 평생 못 찾아 먹는다고.”

“그렇긴 한데…….”

“내가 손해 보고는 못 살 거든. 근데 너 때문에 한 끼 손해 봤어.”

“아…….”

논리라곤 전혀 없는데, 묘하게 미안해지는 상황이었다.

그가 의도했든 아니든, 어제 도움을 받았다는 생각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

어린애처럼 보채는 말투인데, 너무 당당하니까 다정도 덩달아 심각하게 고민이 되었다.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남자가 통보했다.


“10분.”

“네?”

“딱 10분만 기다릴 거야. 준비하고 내려와.”

“…….”

남자는 한결같이 무례했다.

그런데 왜일까. 그 무례함이 싫지만은 않았다.

* * *

준비랄 것도 없이 후다닥 세수만 하고 돌아와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서둘러 방을 나섰다.

한 끼의 소중함에 집착하는 남자를 오래 기다리게 하는 건 현명한 처사가 아니란 판단이 들었다.

바삐 계단을 내려서자 응접실을 청소 중인 아주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201호 아가씨 늦잠 잤구먼.”

“아주머니, 안녕히 주무셨어요.”

공손히 허리를 접어 인사한 다정은 현관 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문밖을 서성이는 206호의 뒷모습이 보였다.


“어젠 소란스럽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다정이 사과하자 아주머니는 대수롭지 않게 손을 저었다.


“아가씨가 뭘? 그런 사람들 종종 있으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안 그래도 바깥양반하고 얘기해서 내보내려고 했는데, 알아서 나갔어.”

“나갔다고요?”

“술 깨고 저도 창피했겠지. 같이 있던 총각들도 따라 나갔는데, 다른 데 가서 또 안 그러나 몰라. 하여간 나라 망신도 가지가지 시키지.”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찬 아주머니가 다시 비질을 하려다 말고 허리를 세웠다.


“그런데 어디 나가?”

“네, 아침 먹으려고요. 조식 못 먹어서 죄송해요…….”

“죄송은. 우린 다 돈 받는 건데 뭐. 근데…….”

갑자기 말을 줄인 아주머니가 바싹 다가서며 목소리를 낮췄다.


“206호 총각이 아까부터 기다리는 것 같던데, 같이 가는 거야?”

“네……? 네…… 뭐, 하하.”

대충 얼버무리자 아주머니가 엉큼한 눈웃음을 지었다.


“아이고, 어쩐지. 아침 내내 식당에 앉아서 밥은 안 먹고 결국 올라가더라니. 아가씨랑 같이 먹으려고 기다렸구먼. 좋을 때다 좋을 때야.”

뭘 상상하는지 흐뭇해하는 아주머니께 설명할 길이 막막해 다정은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짧은 대화를 마치고 허둥지둥 현관 밖으로 나가자 기척을 알아챈 남자가 돌아섰다.

가만히 눈을 맞추더니 그는 곧장 어딘가로 걷기 시작했다. 어련히 따라오라는 뜻인 것 같아 다정은 뒤를 졸졸 따랐다.

남자의 걸음은 빠르지 않았다. 그랬음에도 20센티 정도 키 차이가 났기 때문에 그를 바짝 따라가려면 서너 걸음마다 거의 뛰다시피 해야 했다.

5분쯤 걸었을 때 다정은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걷고 있었다.

다정의 속도에 맞춰 남자의 걸음은 한결 더 느긋해져 있었지만, 보기에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러웠다.

도착한 곳은 숙소 근처에 있는 광장 내 브런치 카페였다.

남자는 천막이 넓게 내려앉은 노천 테이블 앞에 삐딱하게 앉았다. 역시나 앉으라는 뜻인 것 같아 다정도 맞은편에 자리했다.

점원이 다가왔고 남자는 다정에게 묻지도 않고 멋대로 뭔가를 주문하기 시작했다.

걷는 속도에 맞춰주는 걸 보면 배려심이 있는 것 같다가도, 이런 걸 보면 또 제멋대로라 통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영어도 잘하더니 스페인어도 수준급이다. 다정은 스페인어를 몰랐지만, 느낌상 그랬다.

주문을 받고 점원이 돌아설 때 남자가 그의 발길을 다시 붙잡아 세웠다. 몇 마디를 덧붙이자 점원이 친절하게 웃으며 부정하는 몸짓을 해 보인다.

현지인과 막힘없이 대화하는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 다정은 속으로 감탄하고 말았다.

대체 몇 개 국어를 하는 거야?

신기해서 빤히 쳐다보자 발목을 다리에 얹고 까딱거리던 남자가 눈을 맞춰왔다.


“땅콩 알레르기 있어.”

“…….”

참 뜬금도 없다.

유창한 스페인어에 놀란 것뿐인데, 무슨 대화를 한 건지 궁금해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광장 중앙에 설치된 예술 작품 같은 분수가 시원하게 물줄기를 뿜어냈다.

다정은 이쯤에서 강단 있게 할 말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저기, 근데 자꾸 반말을…….”

분수와 지나치는 사람들을 무료하게 바라보던 남자가 눈길을 돌렸다. 그러고는 삐딱하게 허리를 늘이며 턱을 괸다.


“나보다 어려 보이는데.”

“그걸 어떻게 알아요?”

“서른 넘었어?”

다정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남자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 다시 거리로 눈길을 되돌렸다.

자기 나이가 대략 서른쯤이라는 결론인데, 왜인지 굴복하기 싫어서 한마디를 보탰다.


“그래도 초면이나 잘 모르는 사람끼리는…….”

“억울하면 너도 해.”

“…….”

강적이다.

다정은 입술을 굳히고 더 말하지 않았다. 똑같이 반말을 지껄여주고 싶었지만, 성격상 쉽지 않았다.

보통 세 번이나 같이 식사를 했으면 이름이라도 물어볼 법한데,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래서 다정도 묻지 않으려고 했는데, 너무 궁금했던 나머지 저도 모르게 입술이 움직였다.


“그런데…… 정말 혼자 밥 못 먹어요?”

“응.”

곧장 대답한 동시에 눈길을 돌린 남자가 입꼬리를 말아 웃는다. 그나마 웃으니 좀 인간적으로 보였다.

그렇구나, 하며 작게 고개를 주억거린 다정의 얼굴에 안쓰러움이 묻어났다.

같이 밥 먹을 사람이 없으면 굶는 걸까. 배고플 텐데.

불쌍하다는 듯이 흘끔거리는 얼굴을 스치고 다시 거리로 눈길을 돌린 남자의 잇새로 실소가 흘렀다.

순진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설마 그 말을 저렇게 진지하게 믿을 줄은 몰랐다.

혼자 먹는 밥을 극도로 싫어하는 건 사실이지만, 혼자라 밥을 쫄쫄 굶는 일 또한 없었다.

그저 차갑고 외로운 식탁에 혼자 앉는 게 싫을 뿐이니까.

외국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외로움을 느끼는 건 다반사였다. 남자에겐 익숙한 일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혼자 앉는 식탁만은 적응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눈앞의 여자를 선택했다.

뭣보다 같은 한국인이란 이유가 크게 작용했지만, 유순한 생김새와 말이 많지 않은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쓸데없이 수작을 걸어올 타입이 아니란 것 역시 그랬다.


 
얼마 후 샌드위치와 샐러드 같은 부담스럽지 않은 메뉴들이 나왔다.

식사하는 동안에도 늘 그렇듯 남자는 말이 없었다.

그는 행동이 민첩하지 않고 매사에 느긋했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차분한 상태를 유지했다. 다르게 표현하면 감정 관리가 능숙해 보였다. 혹은 서툴거나.

식사, 공부, 일. 모든 면에서 빨리빨리 움직여야 한다는 강박이 몸에 밴 다정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식사가 끝났을 때 다정이 늦지 않게 입을 열었다.


“제가 계산할게요.”

아까부터 꼭 쥐고 있던 지갑을 벌리자 남자가 의아한 얼굴로 눈을 맞췄다.


“왜?”

“그야…….”

막상 이유를 물으니 대답이 궁했다.


“내가 내.”

“그쪽이 왜요? 그런 건 싫어요.”

다정이 반발하자 남자가 또다시 눈을 빤히 맞춘다. 너무 정색했나 싶어 다정은 재빨리 누그러진 투로 말했다.


“그럼 반씩 내요.”

“그래 그럼.”

남자는 토 달지 않고 선선히 물러났다.

지나친 고집스러움으로 비쳤을지 알지만, 다정은 기어이 제가 먹은 분만큼 계산을 치렀다.

서로 내겠다며 옥신각신하는 게 한국인의 정이라지만,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에게 밥을 얻어먹고 싶진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도 남자는 다정의 보폭에 맞춰 느린 속도로 걸었다. 대화 한마디 없이 누군가와 시간을 보낸다는 건 어색하면서도 불편한 일이었다.

숙소로 돌아와 남자와 거리를 두고 계단을 오르려던 순간 앞서 오르던 남자가 돌아섰다.


“밥시간 잘 지켜. 너 때문에 끼니 놓치면 고소할 거야.”

“…….”

다정은 황당한 표정이 되어 눈만 깜빡였다.

이상한 사람 보듯 하는 얼굴을 뒤로하고 계단을 오르는 남자의 입가에 엷은 웃음이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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