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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넌 오빠라고 안 해도 돼 (2/114)


2화 넌 오빠라고 안 해도 돼
2022.08.07.



 
다정이 스페인으로 날아온 목적은 가우디 투어와 휴식이었다. 그래서 다른 유럽 국가를 끼워파는 패키지를 싹 무시하고 자유여행을 선택했다.

일정과 일과는 단순했다.

그날그날 가볼 장소는 잠들기 전이나 아침에 즉흥적으로 결정되었고, 어떤 날은 숙소 근처를 배회하는 정도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저녁 무렵 식당으로 내려간 다정은 주인아주머니가 소담하게 담아내는 식판을 받아들었다.


“201호 아가씨, 많이 먹어요.”

“잘 먹겠습니다.”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돌아서서 그리 넓지 않은 식당을 빠르게 훑었다.

어제처럼 그 남자와 같은 테이블에서 밥알을 세야 하는 불상사를 피하고자 자리 선택에 고심이 되었다.

역시 사람은 겉만 봐선 모르는 거다.

신은 그에게 완벽한 피지컬과 두뇌를 주셨지만, 고상한 인격과 성품까진 허락지 않으셨다.

식당 안에 사람이라곤 다정과 파란 눈의 외국인 남자가 다였다. 그는 구석진 자리에서 홀로 식사 중이었고, 가운데 테이블은 비어 있었다.

어제 그 남자와 한 식탁에서 마주친 건 아마도 주방과 가장 가까운 테이블에 착석했기 때문일 거다.

그는 안락한 자리보다 동선이 편리한 자리를 선호하는 게 틀림없었다.

분석을 끝낸 다정은 파란 눈 외국인이 있는 반대편 구석 자리로 향했다. 주방과 가장 동선이 먼 자리였다.

혹여라도 남자가 오면 어제처럼 비어 있는 가운데 테이블에 앉을 수밖에 없을 거였다.

오늘 메뉴는 카레라이스와 콩나물국, 어묵볶음과 깍두기였다. 지극히 한식답고 먹음직스러운 한상차림을 보며 숟가락을 집어 들 때였다.

드르륵, 의자 끌리는 소리에 불길함이 엄습했다.

퍼뜩 눈을 홉뜨자 206호가 대각선 자리에 식판을 내려놓고 있었다.

당황스럽게 커진 눈이 텅 빈 가운데 테이블로 향했다가 다시 번개처럼 남자의 얼굴로 되돌아왔다.

빈자리가 저렇게나 많은데 굳이?

하고 싶은 말을 혀끝에 말아 넣고 조금 어리둥절하게 바라보았다.

눈길이 너무 직접적이었던지 국그릇 숟가락을 담그다 말고 남자가 눈을 맞춰왔다.


“혼자 밥 못 먹어.”

“…….”

다정의 눈길이 반대편에 있는 파란 눈 외국인에게 향한다. 식당 안에 있는 사람은 다정만이 아니었다.

영어도 잘하면서 굳이?

콩나물국을 떠먹으려다 말고 그가 얕은 한숨을 쉬었다.


“남자랑 밥 안 먹어.”

“…….”

제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알아서 척척 대답하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의아하게 바라보던 다정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식판으로 눈길을 내렸다. 계속 쳐다봤다간 또 핥아대는 소 취급을 당할지도 몰랐다.

여하튼 성품이 생김새를 못 따라가는 남자는 자신만의 원칙이 뚜렷했다.

다정은 떨떠름하게 숟가락을 물었다. 자리에 이름을 써 놓은 것도 아니고 그렇게나 확고하다는데 할 말 없다.

여하튼 오늘도 편하게 밥 먹기는 글렀다.

빈자리를 다 제쳐두고 굳이 다정의 옆자리에서 밥을 먹으면서도 남자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러지 않으려 해도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빨리 먹고 일어나는 게 답이라는 생각에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게 부지런히 밥을 퍼 날랐다.

정숙함마저 감도는 식당 안에 갑자기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밀려들었다.

몇몇 사람이 식당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아침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투숙객이었다.

남자 둘, 여자 둘. 한국말을 유창하게 떠드는 걸 보아 모두 한국인이었다.

눈이 마주친 여자 하나가 숟가락을 빨고 있는 다정에게 다가와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한국 사람이시죠?”

“네……. 안녕하세요.”

얼렁뚱땅 인사를 돌려준 다정의 눈길이 다시 식판으로 쪼로로 떨어졌다. 여자의 옷차림이 너무 민망한 탓이었다.

가슴 굴곡은 보란 듯이 드러내고 올이 풀린 짧은 핫팬츠 밑으론 둥글게 튀어나온 살이 다 보일 지경이었다.

스페인의 여름은 일교차가 커서 밤엔 얇은 카디건이라도 걸치기 마련인데, 흡사 해변에서나 볼 법한 몰골이었다.

같은 여자라지만 어디다 눈을 둬야 할지 몰라 다정은 식판만 뚫을 듯이 바라보았다.


“저랑 회사 언니는 여름휴가 왔어요. 여기 오빠들은 오늘 숙소에서 만났고요.”

“네…….”

다정은 낯을 가리고 수줍음이 많은 편이었다.

초면에 이처럼 친근하게 구는 게 불편했지만, 싫은 말 또한 잘 못 하는 성격이라 역시 내색하지 못했다.

여자 그룹은 직장 동료였고, 남자 그룹은 군대 전역 동기로 대학 복학을 앞두고 온 여행이라고 한다.

말인즉 두 그룹은 오늘 처음 만난 사이였다.


“언니, 저 여기 앉아도 되죠?”

“…….”

다정은 저도 모르게 206호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관심 없다는 듯 눈길도 주지 않고 식사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그사이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여자가 다정의 옆자리를 꿰차고 앉았다.


“전 스물넷인데, 저보다 언니 맞죠?”

“아, 네…….”

대화의 수순이 지극히 한국인답다는 생각을 하며 다정은 작게 긍정했다.

여자가 앉자 일행으로 보이는 세 사람도 자연스럽게 같은 테이블에 착석했다.


“외국에서 한국 사람 만나니까 너무 반갑다앙―!”

나이답게 앳된 여자는 화려하고 활달했는데, 애교까지 넘쳤다.

무리 안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게 명확했지만, 애교스러운 말투 때문인지 크게 두드러지지는 않았다.

여자는 종알종알 떠들어 댔고, 회사 언니라는 여자는 말없이 손에 쥔 휴대폰만 만지작거렸다.

오늘 처음 알게 된 오빠1과 2는 편의점에서 사 온 거로 보이는 맥주와 안줏거리를 늘어놓느라 분주했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여자가 철모르는 아이처럼 해맑게 손뼉을 마주 댔다.


“우리 맥주 한잔하기로 했는데, 언니도 같이 마셔요.”

“아뇨, 전…….”

다정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여자의 눈길이 오빠1에게 향했다.


“그래도 되죠? 오빠.”

“아, 그게……. 우리 마실 것밖에 안 사 왔는데…….”

순박한 인상의 오빠1이 조금 난처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다정이 급히 손사래를 쳤다.


“전 괜찮으니까 드세요.”

“오빠 쪼잔하게 왜 그래요? 혹시 맥줏값이 아까워요?”

역시나 다정의 말을 무시한 여자가 부루퉁한 얼굴로 오빠1을 면박 주었다.


“아, 아니……. 마시다가 모자라면 또 사 오면 되지.”

“역시, 오빠 최고!”

여자의 애교에 순박한 예비 복학생의 얼굴에 수줍은 웃음이 피었다.

식당을 점거한 사람들 때문에 조용하던 식당이 어수선해졌다.

한창 웃고 떠들던 여자가 아무렇게나 펼쳐 놓은 과자 봉지를 보더니 뚱하게 입을 내밀고 말했다.


“안주가 너무 없네. 어쩌지?”

“어떡하긴. 오빠들이 얼른 사 오면 되지.”

여자의 말 한마디에 오빠들이 기계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오빠들 너무 멋지다. 간 김에 맥주도 더 사 와요.”

“알았어. 금방 갔다 올게.”

“아잉, 천천히 와요.”

아양을 떠는 모습에 오빠들은 수줍은 웃음을 머금고 부리나케 식당을 빠져나갔다.

다정은 빤히 보이는 여자의 행태에 못마땅한 기분이 들었다. 이래저래 오빠들을 부려먹으면서 비용 부담을 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복학 예정이라면 학생이란 소리다. 학생은 돈이 없기 마련이다. 오히려 직장인인 여자들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을 거였다.

조금 거슬렸지만 말해 봤자 주제넘다 소리만 들을 것 같아 관두기로 했다.

그때 애교스러운 여자가 다정의 한쪽 어깨에 몸을 밀착해 왔다. 눈길은 고상하게 식사 중인 206호에게 향해 있었다.


“근데 저 오빠 누구예요? 되게 잘생기셨다.”

역시 보는 눈은 다 같다. 다정조차 매 순간 감탄하는데, 어련할까. 심지어 성격이 좀 별로인 걸 아는데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언니 남친?”

조심스러운 여자의 물음에 다정은 황급히 도리질을 쳤다.


“아, 아뇨! 이분은…… 여기 투숙하는 분이세요.”

“아하, 어쩐지. 그럼 그렇죠.”

묘한 어감의 말을 남기며 여자가 입술 끝을 씰룩였다. 그런데 듣고 보니 어이가 없다.


“뭐가 그럼 그렇다는 거예요?”

다정이 정색하고 따지자 여자가 눈을 크게 키웠다.


“아니, 저 오빠 너무 잘생겼잖아요.”

“그래서요?”

순진한 척하면서 은근히 사람을 얕잡아 깔보는 태도에 기분이 확 상하고 말았다.

빠르게 분위기를 읽은 여자가 찌푸려 웃으며 다정의 팔에 애교스럽게 들러붙는다.


“아잉, 언니 왜 이렇게 예민해요? 난 그냥 언니한테 저 오빠가 아깝다는 말이었어요. 오해하지 말아요.”

“…….”

확인사살까지 해 놓고 오해란다. 혀끝에서 욕이 맴돌았지만, 한편으론 부정할 수 없어서 슬펐다.

다정의 기분이 언짢은 걸 알면서도 여자는 아무것도 몰라요, 하는 얼굴로 애교스럽게 웃었다.

차마 웃는 얼굴에 침 뱉기도 뭐하고, 다정은 불쾌한 심사를 한숨으로 대신하며 밥알만 깨작거렸다.

입맛이 뚝 떨어졌지만, 정성껏 만들어 주신 아주머니께 미안해서 남겨도 괜찮은지 고민이 되었다.

훼방꾼 같던 오빠들도 심부름을 갔겠다, 다정이 그와 아무 사이가 아니란 것도 확인했겠다, 여자의 태도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하느작대며 턱을 괸 여자가 206호를 민망할 정도도 빤히 바라보았다. 강렬하고 야릇한 눈빛만 봐선 핥는 수준이 아니라 거의 빨아 먹을 기세였다.

불길함을 느낀 다정의 눈이 여자를 힐끔거렸다.

너 그 오빠 그렇게 보면 혼날 텐데?

무언의 경고를 날려 보지만 여잔 안중에도 없었다.


“오빤 바르셀로나에 언제까지 있을 거예요?”

애교스럽게 질문을 던지지만, 남자는 대꾸는커녕 눈길조차 주지 않고 느긋하게 밥을 먹었다.

능숙한 젓가락질로 어묵볶음을 집어 먹고 밥을 적당히 떠 입에 넣는다.

살다 살다 젓가락질이 우아해 보이긴 또 처음이지만, 어쨌든 질문을 한 상대를 민망하게 하기엔 충분한 태도였다.

대놓고 무시하는 태도에 오기가 난 여자가 다시 전의를 불태웠다.


“오빠 혹시 여자친구 있어요?”

콧소리를 내며 이번엔 상체를 앞으로 숙인다. 반쯤 드러난 가슴 위로 맞닿은 살이 볼록하게 솟았다.


“없으면?”

“네?”

남자가 얌전히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임무를 완수한 수저의 놓임이 참 반듯하고 가지런했다. 나 밥 다 먹었어, 라는 표시가 여실했다.

그와 달리 앉은 자세가 삐딱한 남자는 고까운 시선으로 헐벗은 여자를 주시했다.


“없으면. 뭐 어쩌려고.”

“아니, 그냥…….”

“자신 있어?”

“네?”

“꼬실 자신 있냐고.”

어조는 평탄한데 어딘지 살벌했다.

갑자기 싸해진 분위기에 다정의 눈동자가 좌우로 굴렀다. 왜 하필 저를 가운데 두고 이러는지 모를 일이다.


“오빠도 참.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예요.”

여자가 멋쩍게 소리 내어 웃지만, 남자는 삐딱하고 서늘한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공기가 무거워지자 당황한 여자가 허리를 배배 꼬며 아양을 떨었다.


“아잉, 오빠. 무섭게 왜 그래요? 혹시 화났어요?”

여자를 가늠하듯 주시하던 남자가 별안간 한쪽 입꼬리를 미끄러트리며 피식거렸다.


“그 정도 아닌데.”

“네? 뭐가요?”

“너 말이야. 오빠 소리에 아무나 호구 잡혀 줄 정도 아니라고.”

“…….”

말문이 막힌 여자의 얼굴이 당혹스럽게 굳었다.

206호는 웃는 얼굴에도 침을 뱉는 남자였다.

드르륵, 의자가 밀렸다. 완전히 일어선 남자는 존재감이 더 뚜렷했다.

덩달아 팔꿈치가 잡혀 덜렁 일으켜 세워진 다정은 숟가락을 든 채 어리둥절한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남자의 길고 탄탄한 팔이 다정의 어깨를 덥석 안아 제게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보란 듯이 여자를 향해 말했다.


“얘 정도면 모를까.”

 

 
귀뿌리까지 새빨갛게 붉힌 다정의 얼굴로 남자의 시선이 그윽하게 쏟아졌다.


“다 먹었지?”

“에? 아, 아뇨! 아직…….”

휘둥그레진 다정은 반도 채 먹지 못한 밥과 남자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어차피 밥맛 떨어졌잖아. 가.”

“저, 저기요…….”

“넌 오빠라고 안 해도 돼.”

“네?”

제 얼굴로 날아든 농도 짙은 눈빛에 다정의 뺨이 덴 것처럼 화끈거렸다.


“헤프게 오빠 소리 안 해도 너한텐 그냥 호구 잡혀 준다고.”

“갑자기 무슨……?”

남자는 뭐라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다정을 돌려세웠다.


“야아―악!!”

앙칼진 고함이 빽 울렸다.

거칠게 휘젓는 팔에 휩쓸려 식판과 맥주캔들이 우르르 쏟아져 흩어졌다. 난동을 부린 여자가 살쾡이처럼 사납게 치뜬 눈으로 남자를 노려보았다.


“너 지금 나한테 헤프다고 했니?! 이게 말이면 단 줄 아나!”

불덩이처럼 일그러진 여자의 얼굴로 남자의 무감한 눈길이 향했다.


“넌 너한테 호구 잡힌 X신 새끼들이랑 놀아. 네 수준에 그게 딱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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