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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연애감정 (1/114)


1화 연애감정
2022.08.04.


7월의 스페인.

작열하는 태양 아래 덥고 건조한 바람이 불었다.

손에 쥔 페트병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울린다. 큰 얼음 덩어리가 이제는 병 입구를 통과할 만큼 작아져 있었다.

겨우 한 모금 되는 물을 얼음 조각과 함께 씹어 삼킨 다정은 천재 건축가가 남긴 작품을 다시 한번 눈에 담았다.

까사 밀라.

안토니 가우디가 남긴 수많은 걸작 중 하나였다.

그의 작품을 실물로 영접하는 날이 올 줄이야.

다정은 제 인생에 이런 날이 오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세상 어디에도 없을 가치를 창조해 낸 상상력,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건물 곳곳에 녹여낸 천재성까지.

19세기에 이처럼 독창적이고 아름다운 건축물을 구상하고 실현해낼 수 있다니. 가히 환상적이라 현실감이 떨어졌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나 구엘 공원처럼 웅장한 건축물도 경이롭지만, 다정은 가우디가 설계한 집을 특히 사랑했다.

동화책에서나 볼 법한 까사 바트요의 짓궂은 신비함이 좋았고, 귀부인의 드레스 자락 같은 까사 밀라의 우아함도 사랑했다.

두 건축물이 한 거리에 있다 보니 벌써 수일 째 그라시아 거리에서 살다시피 하고 있지만, 매일 봐도 새롭고 질리지 않았다.

다정은 집이 좋았다.

사람 냄새 나고 정감 넘치는 따스한 집.

제 손에서 그런 집이 탄생하는 날이 오긴 할까. 그저 꿈같은 바람일지도 모른다.

막연한 꿈이면 또 어때서. 꿈꾸다 보면 언젠가 이루어질지도 모르지.


* * *

중년의 한인 부부가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는 시설이 낡고 구식이었다. 대신 숙박비가 저렴하고 하루 두 끼의 한식이 제공된다는 장점과 매력이 있었다.

일찌감치 숙소로 돌아온 다정은 서둘러 샤워실로 직행했다. 독실을 운영 중이지만, 샤워 시설은 공동이라 늦으면 줄을 서는 시간이 길었다.

샤워를 마치고 내려간 식당은 언제나처럼 한산했다.

보통 예약된 분만큼 조리되기 때문에 예약하지 않은 이들은 공동 주방에서 개인적으로 조리해 먹거나 외식을 했다.

외국에 오면 현지 음식을 먹어야 한다지만, 한국인 피는 어디 안 간다. 그래서 다정은 머무는 내내 숙소에서 식사를 해결하겠다고 말해둔 참이었다.

물론 주인아주머니 손맛이 좋기도 했다.

후덕한 인상의 주인아주머니가 식사가 담긴 쟁반을 건네며 인자한 미소를 띠었다.


“201호 아가씨, 맛있게 먹어요.”

“매번 감사합니다.”

다정이 해맑게 웃으며 머리를 꾸뻑 숙이자 아주머니가 손을 저었다.


“별소릴 다 해. 우리 먹는 거에 숟가락 하나만 얹으면 되는데.”

“어쨌든요. 잘 먹겠습니다.”

배시시 웃으며 다시 한번 인사한 다정이 쟁반을 들고 빈자리로 가 앉았다.

오늘의 메뉴는 맑은 된장국과 제육 덮밥이었다.

깨가 솔솔 뿌려진 제육 덮밥을 크게 한 숟가락 떠서 입으로 막 가져가려는 찰나였다.

드르륵, 의자 끌리는 소리와 함께 머리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졌다.

눈을 홉뜨자 한 남자가 대각선 자리에 쟁반을 내려놓고 있었다. 처음 보는 동양인이었다.

다정의 눈동자가 빈자리로 넘치는 식당 안을 빠르게 훑고 다시 남자의 얼굴로 원위치했다.

새로운 투숙객인 모양인데, 굳이 같은 테이블에 앉는 의중을 알 수 없었다.

그보다 다정은 제가 뭘 보고 있나 싶어 입을 다물지 못했다. 눈앞에 있는 남자의 미모에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꽃미남이라기보다 차갑고 그윽한 냉미남 과였는데, 어쨌든 보기 드물게 훌륭한 자태라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담뿍 뜬 밥숟가락을 슬며시 내려놓은 다정은 그때부터 조신하게 밥알을 세기 시작했다.

제 행동이 눈에 띄게 수줍어진 것도 모른 채 남자를 흘끔거렸다.

185? 187?

큰 키에 훌륭한 비율. 시원스럽고 깊은 눈매와 우뚝한 콧날. 그리고 예쁨과 잘생김의 경계에 머문 입술. 심지어 피부는 도자기처럼 매끈하고 윤이 났다.

별안간 남자의 휴대폰이 진동한다.

휴대폰을 귓가로 미끄러트린 남자는 유창한 영어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의식이 되다 보니 단어와 문장들이 절로 귀에 담겼다. 그는 하X드 동기들과 모임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X드?

어후, 다정은 내심 감탄했다.

이 정도면 천재 건축가 가우디의 작품에 버금갈 완벽한 피조물이었다. 여기다 성격과 인성까지 좋으면 완전 사기였다.

의식하는 눈길을 알아챘는지 남자가 은연중에 빤히 눈을 맞춰 온다. 이윽고 통화를 마친 남자가 휴대폰을 툭 내려놓았다.


“왜? 맛있어 보여?”

다짜고짜 반말이다. 아니, 그보다 한국 사람이라 조금 놀라고 말았다.

무심한 듯 노골적으로 쏘아지는 눈빛에 다정은 얼굴이 데일 것만 같았다.


“먹고 싶냐고.”

다정의 눈이 동그래졌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가 좌우를 휙휙 돌아보았다.

남자가 말을 붙인 상대가 아무래도 저이지 싶은데, 생판 모르는 언어를 들은 것처럼 말의 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당황스러워 도리도리 고갯짓을 해 보인 뒤 재빨리 접시로 시선을 내렸다.

어쩐지 너무 완벽하더라니. 아무래도 성격에 하자가 있어 보였다.

생각 중에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난 또 먹고 싶은 줄 알았네.”

“……네?”

“아니, 눈으로 자꾸 핥길래.”

“핥, 뭘……?”

영문 모를 말에 빤히 쳐다보자 휴대폰에 박혀 있던 남자의 눈길이 다시 올라섰다. 약간 찌푸린 눈에 불쾌감이 실렸다.


“그만 핥아. 기분 나빠지려고 하니까.”

* * *

방으로 돌아온 다정은 열 오른 얼굴에 연신 손부채를 부쳤다.

주인아주머니가 ‘206호 총각’이라고 하는 걸 봐선 206호에 새로 들어온 투숙객인 모양이었다.

흘끔거린 게 불쾌할 순 있다. 예뻐서 저도 모르게 계속 쳐다본 건 사실이니까.

그래도 그렇지.


“핥긴 누가 핥았다고…….”

불만스럽게 꿍얼대다가 죄 많은 안구 대신 애먼 눈두덩을 꼬집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눈으로 핥을 수 있는지 의문이지만, 악의 없이 맑고 순수한 제 눈을 되새김질이나 하는 소 혓바닥 취급이라니.

결과적으로 ‘죄송합니다…….’하고 꼬리를 말긴 했는데, 제 실수라는 걸 알면서도 되레 기분이 나쁜 건 무슨 경우인지 모르겠다.

덕분에 먹는 둥 마는 둥 식사도 제대로 못 하고 쫓기듯 올라온 게 못내 억울했다.

뒤숭숭한 심사를 달래고 이런저런 생각 중에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신호음이 제법 길게 이어졌다.


『……기집애가 외국 있다고 티 내나. 꼭두새벽부터 전화질이야.』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반가웠다.


“너 일어날 시간 됐잖아. 모닝콜.”

『하여간 배려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년. 성지 순례하니까 좋냐?』

솔이의 비아냥에 다정은 피식 웃고 말았다. 성지 순례는 안토니 가우디 투어를 비꼬는 말이었다.


“어, 좋아. 부럽지?”

『부럽긴 개뿔. 스페인까지 갔으면 남자를 만나야지. 땡볕 맞고 건물 사진이나 찍으러 다닐 게 뻔한데, 부럽겠냐?』

배솔이. 다정과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서로에게 둘도 없는 단짝이었다.


“같이 오자니까.”

『나 망하라고 고사를 지내라. 한 달이나 가게 문 닫고 가긴 어딜 가?』

“그렇네.”

대학에 진학해 건축을 전공한 다정과 달리 솔이는 대학 진학을 과감히 포기했다.

슬하에 2남 2녀를 둔 솔이 부모님은 앞선 자식들 뒷바라지를 하느라 공부에 딱히 흥미가 없는 막내딸의 대학 진학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다.

일찌감치 생활전선에 뛰어든 솔이는 알뜰하게 모으고 대출도 받아 몇 달 전 서울 변두리에 작은 카페를 창업했다.


『참, 대현건설 첫 출근은 언제야? 한가하게 여행이나 다녀도 되는 거야?』

“대현건설? 그거 거절했는데. 나 벌써 도준 선배랑 계약했어. 선배한테 월급 받으면서 가늘고 길게 꿀 빨 거야.”

예상도 못 했다는 듯 놀란 숨소리가 터졌다.


『미쳤어, 얘가! 대기업을? 어떻게 대기업을 마다해? 네가 뭔데?』

타박하는 말에 다정은 찌푸려 웃고 말았다.


“나도 좀 놀자. 그동안 숨도 못 쉬고 살았어.”

정말이다. 하루하루 쫓기듯이 살았다.

형편이 여의치 않은 탓에 다정은 올해야 간신히 대학을 졸업했다. 스물일곱의 늦깎이 졸업생이었다.

휴학 중에는 실무 경력을 쌓고 학비를 버느라 눈코 뜰 새 없이 현장을 뛰어다녔다. 덕분에 대학 시절 누구나 간다는 배낭여행 한번 가보지 못했더랬다.

그런데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했던가. 졸업을 앞두고 경험 삼아 도전한 공모전에서 다정은 당당히 대상으로 입상하는 행운을 거머쥐었다.

대현건설에서 주최한 행사였는데, 주최사가 대기업이라 상금도 후했다.

부상으로 대현건설 입사 기회가 주어졌지만, 단칼에 거절했다. 그리고 상금을 받아 제일 처음 한 일이 꿈에 그리던 스페인으로 날아온 거였다.

다 부질없다는 듯 솔이가 한숨을 쉬었다.


『됐고. 스페인에 느끼하고 잘생긴 남자 없디?』

“잘생긴 남자?”

저녁 식탁에서 다정의 심사를 어지럽혔던 남자가 다시금 떠올랐다.


조금 내키지 않으면서도 인정할 건 인정하자 싶어 입을 열었다.


“느끼한 건 모르겠고……. 엄청 잘생긴 남자를 보긴 했어.”

『어머, 혼자야? 스페인 남자?』

“아니, 한국 사람. 근데 좀 이상해.”

『잘됐다! 꼬셔 봐.』

이 정도면 뒷말은 아예 듣지 않은 게 분명했다.


“이상하다니까. 성격장애 있는 것 같아.”

『잘생겼는데 무슨 상관이야? 꼬셔, 꼬셔!』

누가 얼빠 아니랄까 봐 들이대는 논리가 솔이다웠다.

솔이의 목소리에 흥분이 뒤섞였다.


『여행지에서 만난 낯선 남자와의 뜨거운 하룻밤. 이름도 몰라, 사는 곳도 몰라. 너무 낭만적이지 않니? 추억 쌓는다고 생각하고 남은 기간 연애하자고 말이라도 해 봐.』

“미쳤어. 나 결혼 안 한다니까.”

『얘가 자다가 남의 다리 긁네. 누가 너랑 결혼이나 해 준대? 그냥 연애만 해, 연애만!』

다정은 공연히 화끈거리는 뺨을 긁적였다.

그렇지. 누가 결혼하자고 한 것도 아닌데, 남의 다리를 심하게 긁은 것 같긴 했다.

연애 소리만 나와도 다정이 발작하듯 경계하는 이유는 그녀가 바로 비혼주의이기 때문이었다.

다정이 비혼주의가 되기까지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는 다름 아닌 엄마였다.

엄마가 겪은 두 번의 결혼생활을 지켜보며 깨달았다. 자신을 학대하는 최고의 선택이 있다면 그건 바로 결혼이라는 것.

그래서인지 단순히 연애라는 말에도 다정은 이렇게 방어적으로 몸을 사리고야 만다.

솔이는 그렇게 인생 허비하는 친구가 영 갑갑하기만 한 모양이었다.


『결혼은 둘째 치고, 솔직히 그 나이까지 남자랑 뽀뽀도 한번 안 해 본 건 문제 있는 거 아니니? 죽기 전에 연애감정이 뭔지는 알고 죽어야 할 거 아냐?』

“연애는 무슨.”

다정이 철벽을 쳤다. 그러자 너머에서 혀 차는 소리가 들린다.


『차라리 소를 붙잡고 말하지. 두고 봐. 네가 임자를 못 만나서 그런 소릴 하지, 임자만 나와 봐라. 호르몬이 절로 반응할걸?』

“너도 참.”

민망한 말에 다정의 뺨이 확 달아올랐다.

솔이의 말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엄연히 결혼과 연애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는 문제였다.

결혼이란 제도에 거부감이 있을 뿐, 특별히 이성을 혐오하거나 거부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정도 신체 건강한 여자였기에 멋진 이성을 보면 절로 감탄이 나오고, 저녁 식탁에서 그랬던 것처럼 미모의 이성에게 눈길이 향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비혼’이라는 목표를 세웠기 때문일까. 다정에겐 결혼과 연애가 별개로 와닿지 않았다.

남녀의 만남, 그리고 연애. 그 끝은 결국 결혼과 상처, 둘 중 하나로 끝나기 마련이니까.

어느 쪽도 다정이 원하는 결과는 아니었다.

함께한 시간 동안의 추억이나 의리 때문에 제 발목에 결혼이란 족쇄를 채우는 어리석은 선택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끝이 정해진 연애로 상처를 주고받는 건 과연 바람직한가. 아니.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감정 낭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인생 즐겨, 바보야.』

입버릇 같은 솔이의 잔소리에 다정은 한숨 섞인 웃음을 흘렸다.


“심심하면 발 닦고 자.”

『싫은데. 내 발 냄새 보관했다가 너 오면 선물로 줄 건데?』

유치한 말장난을 끝으로 싱거운 통화는 마무리가 되었다.

침대에 늘어진 다정은 천장에서 빙글빙글 회전하는 실링 팬을 눈에 담았다.

연애감정…….

솔직히 궁금하긴 했다. 이성에게 설렌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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