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왜 시비를 안 걸지?
강호 무림에서 연회는 단순한 파티가 아니다.
주최자의 세력 과시인 동시에 꽌시 관리 모임이자, 사전 탐색과 신경전이 펼쳐지는 야생의 필드였다.
용봉지회 개최 직전 열렸던 용봉지연에서 정파 명문 후기지수들이 모여서 자기들끼리 친목질을 하듯, 마교 역시 마찬가지였다.
천마무제를 앞두고 연회를 열어서 서로 전력을 가늠하고 인맥을 관리하는 것이다.
마교도 사람 사는 곳이니 말이다.
물론 그런 행사가 있다고 말만 들었지, 직접 천마지연에 참석해보는 건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서 처음이었다.
‘적진 한복판이나 마찬가지겠군.’
전생이나 현재나 마교는 적진이었다. 황궁과 마교는 태조 주원장이 마교를 신강으로 내쫓은 이후부터 서로 원수였다.
정파와 마교 관계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천마가 정사 후기지수를 초대한 지금 상황 자체가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란 것이다.
그러니 연회에서도 당연히 용봉지연처럼 서로 허허 웃으면서 즐기는 친목 도모는 꿈도 꿀 수 없을 게 뻔했다.
눈만 마주쳐도 시비를 걸어오는 건 물론, 연회장에서 비무로 실력 행사를 해야 될 가능성은 100%에 수렴할 터.
‘귀찮아지겠지만, 이만큼 좋은 기회가 또 없기는 하지.’
지금의 내 실력으로는 백천화까지는 가볍게 이길 수 있지만, 귀찮은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건 기회였다.
마교는 정파의 영원한 숙적. 그런 적의 본진에서 마교의 후기지수를 상대로 연전연승한다?
그렇다면 정파 무림에서 내 명성이 떡상할 것이다. 자연스럽게 내 마교 전설을 들은 정파 무림의 소저들은 내 일화를 마음속으로 그리면서 밤잠을 못 이루고 팬레터를 써서 공동파로 보내겠지.
완벽해.
“흐흐흐흐흐흐.”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사내다운 미소를 지으며 사형과 함께 천마지연이 열리는 연회장에 도착했다.
천마전 후원에 차려진 연회장의 식탁에는 돼지 통뼈찜을 비롯한 다양한 산해진미와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이 소협! 오셨군요!”
먼저 도착한 모양인지 연소월, 아니 적사월이 손을 흔들면서 내게 달려왔다.
“소녀, 이 소협이 보고 싶었사와요. 호호호호.”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면서 만인이 보는 앞에서 나를 와락 끌어안는 적사월.
그녀의 달콤한 향기가 내 코 끝을 찔렀다. 아니 왜 이래? 다 보는 앞에서.
황당했다. 나는 적사월을 떼어내려고 했지만, 그녀는 금나수의 묘리를 응용해서 내 허리를 휘감으면서 떨어지지 않았다.
“후후후후후. 이 소협도 소녀가 보고 싶었던 거예요?”
적사월의 적안이 이쪽을 향했다. 그녀가 요염하게 웃었다. 그래봤자 본캐가 누군지 다 알고 있는데 치명적인 척을 하니 어이가 없다.
내가 아무리 여자가 좋다지만, 본캐도 아닌 부캐로 이러는 건 좀.
황당한 내가 적사월을 품에서 떼어내려던 그때.
“오라버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흑단처럼 윤기가 흐르는 검은 단발에 반짝이는 보석 장신구가 인상적인, 몸매가 은근히 드러나는 검은 궁장을 입은 미소녀가 거기 있었다.
얼굴은 화장한 건지 평소보다 더 반짝이고 투명한 하얀 피부가 인상적이었다. 향낭을 찬 건지 은은한 향기가 그녀의 몸에서 피어올랐다. 흑사룡의 뺨이 분홍색으로 달아올랐다.
짧게 자른 단발 뒤쪽에는 꽁지처럼 묶은 모습이 보였다.
“어, 어떻습니까? 오늘의 저는 뭔가 달라 보이지 않습니까?”
스윽.
오른손으로 흑사룡이 팔짱을 끼면서 어색한 말투로 더듬더듬 내게 말했다.
확실히 달라 보이긴 한다. 원래 흑사룡은 보이시한 톰보이 미녀였는데, 지금의 흑사룡은 꾸민 톰보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왜 또 붙는 건데.
내가 흑사룡에게 대답하려고 준비하면서 그녀를 팔에서 떼어내려던 그때.
“두 미녀를 양 팔에 끼고 다니다니, 과연 괴룡답군.”
“정파인이지만, 경외감이 드는군.”
“매일 밤마다 정파 무림의 아가씨들을 갈아치운다더니. 소문이 틀리지 않았음이야.”
“항산파에서는 검후와 소검후, 사제관계의 미녀 둘을 동시에 품었다더군.”
“호방하기 짝이 없어. 고리타분한 정파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군!”
“우리 신교의 후기지수보다 더 사내답지 않은가?”
“색마 님과 의형제라는 소문도 있다던데?!”
귓가에 마교 후기지수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이것들이? 대체 무슨 망상을 하는 거야?
물론 색도를 설파하여 마교 미소녀들의 마음을 얻는다는 대계를 짠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확실히 문제였다.
첫 번째 문제는 내게 저런 동경의 눈빛을 보내는 건 미소녀가 아니라 사내놈들이라는 사실이요, 두 번째 문제는 호감을 품는 건 좋은데 마교 같다고 호감을 보낸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물론 마교의 호감을 얻을 생각은 있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강자존의 마교에서 정정당당하게 힘으로 후기지수들을 꺾어서 적이지만 존경스럽다는 경외감으로 마교와 정파의 소저들을 모두 홀린다.
이것이야말로 내 원래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광경은 뭔가. 어이가 없다.
아니, 난 정정당당한 백도 정파의 후기지수인데, 마교 같다고 호감을 표하다니?
이 사실이 중원으로 퍼진다면, 정파 무림의 미녀들이 나를 벌레처럼 볼 건 불 보듯 뻔했다.
그래서는 안 된다. 공동파 산문 앞에 쌓일 미소녀들의 팬레터들이 눈앞에서 불타 한 줌 재로 변해 사라지는 듯한 모습이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이것들이, 걸라는 시비는 안 걸고······!’
마교 놈들이 이렇게 배알이 없을 줄은 몰랐다.
내가 속으로 한숨을 쉬던 그때.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저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의 미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호탕한 웃음.
색마였다.
“색마 님을 뵙습니다!”
“색마 님의 행차다!”
모세의 기적처럼 갈라지는 마교 후기지수들 사이로, 색마가 사뿐사뿐 걸어왔다.
풍만한 가슴과 둔부, 잘록한 허리를 그대로 드러내는 반투명한 나삼을 입은 색마가 나를 바라보면서 웃었다.
“오랜만이군. 아우.”
아니.
왜 이 타이밍에 말을 걸지? 나는 떨떠름한 내색을 감추면서 색마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저도 오랜만입니다. 형님.”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사파 후기지수 소녀 둘의 마음을 벌써 훔친 건가? 역시 우리 아우님이야. 정사마에 상관없이 소녀를 홀리는 매력을 가졌단 말이지.”
탁탁.
색마가 양옆에 적사월과 흑사룡을 매단 내 모습을 보고 웃으면서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괴룡과 색마 님이 의형제를 맺었다는 게 사실이었을 줄이야!”
“역시 정파보다는 신교에 더 어울리는 사내답군!”
“색마 님도 괴룡을 인정했을 줄이야······!”
“괴룡보다는 색룡이 더 어울릴지도 몰라!”
“존경스러워······!!”
“확실히 대단하기는 하지만, 색룡과 어울리는 건 조금 그렇네요.”
더 소란스러워지는 마교의 후기지수들.
거기에 나와 어울리는 건 좀 그렇다는 마교의 소저들까지.
이제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이번에는 진짜로 양 옆의 흑사룡과 적사월을 떼어내려던 순간.
“아주 살 판이 났군. 괴룡.”
저 멀리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의 시선이 목소리가 울린 쪽으로 쏠렸다.
거기에는 그녀가 있었다.
반짝이는 황금을 실로 뽑은 것 같은 화려하고 샛노란 금발 포니테일이 인상적인, 자수정을 닮은 보랏빛 눈의 흑의 미소녀.
백천화였다.
“소천마 님이다!”
“소천마 님을 뵙습니다!”
백천화의 등장에 마교 후기지수들이 그대로 그 자리에서 부복하며 예를 표했다.
백천화가 그들의 예를 받으면서 내 앞에 다가왔다.
“······백도에서 나름 이름 날리는 후기지수라 해서 조금은 기대했건만, 여자들 치마폭에 감싸여 여색이나 밝히는 얼간이일 줄이야. 이제는 정파의 위선조차 벗어던진 거냐. 괴룡.”
백천화가 나를 응시하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말에 나는 씨익 웃었다.
드디어.
마침내. 내게 시비를 걸어주는 마교 후기지수가 등장했다. 그것도 어중이떠중이가 아닌 소천마 백천화가 말이다.
백천화는 소교주의 위에 오르기 전부터 마교의 모든 후기지수를 제패하여 소천마라는 별호를 얻은 마교의 신성.
그녀가 시비를 걸어주다니, 이렇게 좋을 수가 또 없었다. 울고 싶은데 뺨을 왕복으로 때려준 꼴이라고 해야 할까.
후후.
이제 남은 건 백천화를 꺾어서 정파와 마교 양쪽 소저들의 마음을 모두 훔치는 것만 남았다.
눈앞에 찬란한 미래가 펼쳐졌다.
공동파 산문 앞에 두 배로 쌓인 정파와 마교의 소저들이 보인 팬 레터의 모습이.
오늘.
나는 백천화를 제물 삼아 강호제일 아이돌로 거듭날 것이다. 적사월과 흑사룡의 손에 붙잡힌 양팔을 빼내면서 나는 말했다.
“여색이나 밝히는 얼간이라니. 백천화. 이 검룡 이철수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다니. 소천마의 영명이 아까운 안목이로군.”
나는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검룡은 무슨. 괴룡, 아니 색룡이겠지. 네놈의 문란함은 이 신강 땅에까지 파다하게 소문이 퍼졌음이라. 주색잡기를 즐기는 위선자 정파 주제에 검룡을 자처하다니. 어불성설(語不成說)이 따로 없군.”
백천화의 말에 나는 분한 척 연기하면서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감히 이 검룡을 모욕하다니, 참을 수 없군. 소천마······. 좋다. 너희 마교의 야만적인 규율대로······.”
내가 결투 신청을 하려던 그때.
“잠깐! 아줌마. 뭐 돼요? 우리 오빠 왜 괴롭히는 거예요?!”
“마, 맞아. 소천마······. 우, 우리 오라버니 괴롭히지 마······!”
스윽.
연소월이 나와 백천화 사이에 끼어들면서 말했다. 뒤이어 흑사룡도 뒤에서 소심하게 한 마디 덧붙였다.
백천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 아줌마?”
지금까지 여유 넘치는 모습과는 완전히 반대인 모습.
나는 어이가 없었다.
아니, 적사월 이 누나는 나이가 얼만데 누가 누굴 보고 아줌마라고 하는 건지.
그것보다 방금까지 백천화랑 분위기 좋았는데, 끼어들어서 이렇게 산통을 깰 줄은 나도 몰랐다.
나는 식어가는 분위기를 되살리기 위해 나가려고 했다.
“그래. 아줌마! 소월이는 꽃다운 열다섯 과년인데, 아줌마는 열여섯이니까! 흥. 우리 이 소협을 모욕하다니, 용서할 수 없어요! 이 소협을 향한 모욕은 곧 소녀를 모욕한 것과 같으니, 소녀가 아줌마를 상대하겠어요!”
스윽.
연소월이 품에서 쇠몽둥이처럼 생긴 둔기인 철편(鐵鞭)을 꺼냈다.
“어이가 없군. 사파의 천한 기녀 주제에 감히 본녀를 아줌마라고 모욕하다니······. 감히······.”
백천화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가 분노로 가득 차올랐다.
스르릉.
백천화가 검을 뽑았다. 묵빛 칼날이 인상적인 검이 흑광을 뿌렸다.
“내 오늘 너한테 신교의 위대함을 알려주리라.”
“흥. 뚫린 입이라고 말은 잘하는군요.”
휘리릭. 연소월이 철편을 휘두르면서 자신 넘치게 웃었다.
내 손도 마찬가지로 부르르 떨렸다.
아니, 다 된 밥에 재를 뿌려도 유분수지. 조금만 더 있으면 백천화랑 맞짱 뜰 수 있었는데 적사월이 이렇게 말아먹을 줄은 몰랐다.
내가 다시 한 번 난장판을 수습하기 위해 입을 열려던 그때.
“둘 다 그쯤 하도록 하라.”
묵직한 목소리가 연회장 전체를 울렸다.
연회장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그가 있었다.
흑발이 인상적인 미남자.
천마(天魔)가 마침내 등장했다.
여기서 갑자기 천마라고?
아니, 이거 뭐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