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마음의 쾌락
천마의 말에 색마가 움찔했다.
“괴룡과 의형제를 맺었나?”
천마의 질문에 색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지존이시여. 아우를 만나기 전, 저는 모든 육체적 쾌락을 전부 누려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끝은 공허였습니다. 그 어떤 자극도 제게 흥분을 주지 못하고 있을 때, 저는 이철수 아우를 만났습니다.”
색마는 공손한 말투로 열변을 토했다.
“이철수 아우는 공허한 제 마음에 마음의 쾌락이라는 새로운 불을 질렀습니다. 아우 덕분에 깨달았습니다. 지금까지 저 색마가 추구했던 쾌락은 반쪽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마음의 쾌락을 알지 못한다면, 진정한 색마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런 은인인데, 어찌 의형제를 아니 맺을 수 있겠습니까?”
천마는 색마의 말을 들으면서 잠깐 고민에 빠졌다.
천마가 빈 잔을 매만지자, 색마가 공손하게 술을 따랐다.
쪼르르르.
투명한 최고급 백주(白酒)가 천마의 술잔에 따라졌다. 천마는 백주를 단숨에 마시면서 말했다.
“공허함이라. 색마, 너의 그 공허함을 이철수가 어찌 채우는지 가르쳐줬다는 말이군.”
“바로 그렇습니다.”
색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허함. 천마는 그 말을 마음속으로 곱씹었다.
방향은 다르지만, 색마 역시 그와 같이 공허함을 느낀 것이다. 천마가 너무나 뛰어난 재능 때문에 세상 자체에 질린 것처럼, 색마 역시 이 세상 모든 쾌락을 즐긴 나머지 쾌락과 여색에 질리고야 만 것이다.
천마의 시야에 색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별로 안면이 없었지만, 한 번 본 사람의 인상은 잊지 않는 천마였다.
천마는 기억 저편에서 색마의 이전 모습을 끄집어냈다.
그가 천마의 자리에 오른 직후 만난 색마의 얼굴은 확실히 지금과는 달랐다.
색마의 말대로 공허함, 허무함이 눈빛에 가득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색마는 아니었다. 눈빛에 활기가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괴룡이 네게 가르쳐줬다는 마음의 쾌락이란 어떤 것이지?”
“그건, 소인도 아직은 수행 초입이라 잘 모르겠습니다만, 괴룡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색마는 천마의 비어있는 술잔에 다시 백주를 따르면서 말했다.
“육체의 쾌락은 공허하고 의미 없는 쾌락일 뿐이다. 서로의 마음이 진정으로 통하는 상대와 함께 하는 운우지락에서야 비로소 완전한 지고의 쾌락을 누릴 수 있다고 말입니다.”
“마음이 진정으로 통하는 상대라.”
천마의 눈동자가 술잔에 담긴 백주에 비쳤다.
주지육림에서 피어오르는 주향(酒香)이 천마의 코를 찔렀다.
사파제일인 적사월 또한 사랑과 감정을 모르는 천마 본인이 가엾다고 말했다. 본인 역시 그랬다면서.
“자세한 건 소인도 잘 모릅니다. 하지만 괴룡 이철수한테 묻는다면 해답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철수.
또 그 이름인가.
천마의 머릿속에 이철수의 모습이 떠올랐다. 초절정의 경지에 현경의 편린을 담은 부자연스러운 신체.
거기에 천마조차도 그 속내를 읽어낼 수 없는 표정과 눈빛.
실로 간웅(奸雄)의 면모를 지닌 사내.
그리고 동시에 사파제일인의 연모를 받고, 색마와 의형제를 맺은 정파제일 후기지수.
“본좌도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천마가 남은 백주를 마신 뒤, 탁하고 술상 위에 술잔을 올려놓으며 일어났다.
“괴룡을 만나러 가겠다.”
“지존께서 바라는 대로 하소서.”
색마의 오체투지를 받으면서, 천마는 가볍게 정자 바닥을 박차고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어느새 조각 달이 걸린 검푸른 밤하늘을 천마의 인영이 가로질렀다.
*
색마에게서 정보를 얻은 나는 곧바로 숙소로 돌아왔다.내 기척을 기감으로 미리 감지한 모양인지, 숙소 입구에 들어가자마자 사형이 나를 맞이했다.
“사제! 왔구나!”
아직 남장 상태라 미소년 모드인 사형이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들꽃 향기가 코 끝에 스쳤다.와락.
사형이 나를 꼬옥 끌어안은 채로 코를 킁킁거렸다.
뭐지?
“흐응. 여자 냄새는 안 나네.”
사형의 눈동자에 잠깐 초점이 없어졌다가 빠르게 돌아왔다.
사형이 살짝 웃었다.
“그런데 술 냄새는 나. 사제. 혹시 술 마셨어? 색마랑?”
사형의 눈동자가 이쪽을 향했다. 그녀가 입술을 삐죽였다.
사형과 가장 오래 지낸 나는 알았다. 지금 사형은 삐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우리가 무슨 결혼한 사이도 아니고, 이걸 왜 해명해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뭐 일단 색마랑 있던 일에 대해서는 사형에게도 말해줘야 하니까.
“그건······. 주지육림에서 색마와 만났기 때문입니다.”
“만나서 뭐 했어? 색마는 왜 사제를 부른 거야?”
꽈악.
사형이 고목나무에 붙은 매미처럼 나를 끌어안은 채로 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내게 질문을 던져댔다.
사형의 원래 성별을 알기 전이라면 기겁했을 나였지만, 지금은 뭐라고 해야 할까.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생긴 건 미소년인데, 저 내용물이 천하제일미녀 진소소라고 생각하면······.
나는 잡념을 지운 채로 사형에게 색마와 나눈 대화의 내용과 그와 의형제를 맺은 사실까지 전부 설명했다.
내 설명을 들은 사형의 표정이 살짝 미묘해졌다.
“흐응······. 그랬구나······. 의형제······.”
“네, 그건 저도 어쩔 수 없어서······.”
꽌시로 따지면 색마와 나는 슝띠(兄弟) 관계가 된 것이다. 꽌시의 최종 단계에 도달한 상황.
의형제를 맺었다는 건, 이 슝띠 관계를 공식화한 것에 가깝다.
“······의형제······. 흥. 그래도 우리는 사형제니까, 내가 색마보다 더 좋지? 그렇지?”
사형이 매달린 채로 내게 말했다.
“물론입니다.”
나는 사형의 말에 즉답했다.
남자에서 여자로 TS한 색마보다는 당연히 우리 사형이 훨씬 더 좋다. 사형은 원래부터 여자였으니까. 내가 착각했을 뿐이다.
“나도 사제가 제일 좋아.”
사형이 나를 끌어안으면서 배시시 웃었다.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래도 역시 술 냄새, 마음에 안 들어. 역시 우리 사제. 목욕시켜줘야겠어. 술 냄새가 전부 빠질 때까지.”
사형이 내 품에서 살짝 떨어지면서 말했다. 뭐?
목욕을 시켜준다고?
“물이 귀한 신강이라 욕탕이 없으면 어쩌려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우리가 머무르는 별원에 욕탕이 있더라고. 사제, 같이 목욕해. 원래 사형제끼리는 같이 목욕하면서 우애를 다지는 거라고 들었어.”
사형은 거기서 한 발 더 나가서 순진하게 웃으면서 내게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
같이 목욕하자고? 사형이 말한 사형제끼리 우애를 다지는 일이 그거였어?
사형의 말에 틀린 구석은 없었다. 사형제끼리 함께 목욕하며 우애를 다지는 건 흔한 일이었다. 원래 사내들은 목욕하면서 친해지는 법이었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사형은 사내가 아닌 여인이라는 점이었다. 사형이랑 같이 목욕이라니. 물론 싫은 건 아니지만 진도가 너무 빠른 게 아닐까.
그래도 하는 쪽이······.
얼굴이 저절로 빨개졌다. 심장이 뛰었다.
내가 당황한 그때.
사형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러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오늘은 무리 같아.”
무리 같다니?
“오고 있어.”
사형이 진지한 표정을 지으면서 기도를 해방했다.
고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검은 기파가 밤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사형의 말에 나는 기감을 퍼뜨렸다. 그리고 느꼈다.
검은 밤하늘 전체를 뒤덮을 정도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그가 있었다.
천마 백무량. 달빛이 어깨에 내려앉은 검은 장포를 입은 그가 하늘에서 서서히 별원 마당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천마는 달빛을 등진 채로 검은 밤하늘을 계단처럼 밟으며 대지로 천천히 내려왔다. 보신경의 최상승 기예인 천상제(天上梯)였다.
천마군림보. 보신경의 최상승 절학을 보유한 천마만이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기예였다.
천마.
설마 사형을 보러 온 건가.
나는 사형과 천마 사이를 가로막았다.
“공동신협. 본좌를 너무 경계할 필요 없다. 기파를 거둬라.”
“······.”
천마의 말에도 사형은 기세를 거두지 않았다.
“이 야밤에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천마 선배.”
사형이 천마를 똑바로 노려보면서 말했다.
천마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아니 갑자기 난 왜 쳐다봐.
천마가 기도를 거뒀다. 하늘을 가득 메운 막대한 존재감이 연기처럼 증발했다.
그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괴룡을 만나러 왔다.”
뭐?
날?
아니 천마는 우리 사형에게 관심 있던 거 아니었나? 전생 때도 그랬는데? 갑자기 왜?
예상 밖의 상황에 나는 살짝 당황했지만, 마음을 가라앉혔다.
혈교를 상대하려면 마교의 협력이 필수다. 생사경의 절대고수, 혈마의 전력이 나는 아직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니 일단 전력을 전부 박박 긁어모아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천마와의 독대는 기회였다. 천마와 연을 맺어야 했다. 신승의 말에 따르면 당대 천마 백무량은 혈교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으니까.
“무슨 용무입니까?”
“공동신협. 본좌가 그걸 네게 말해줄 의무는 없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약속하지. 본좌의 이름을 걸고, 괴룡한테 해를 가하지 않겠다.”
천마가 말했다. 사형은 그 말을 듣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가 기도를 갈무리했다.
“알겠습니다.”
[사제, 무슨 일 있으면 전음 보내. 내가 도와줄게.]
사형은 이제는 익숙해진 멘트를 던졌다. 나는 전음으로 알았다고 답했다.
“천마 선배께서 무림말학인 저 검룡 이철수를 무슨 일로 찾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손님은 대접하는 것이 예의. 천마 선배님과의 만남을 수락하겠습니다.”
나는 유려한 멘트와 함께 포권지례를 취하면서 천마에게 고개를 숙였다.
내 말을 들은 천마가 무감각한 눈동자로 나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괴룡, 허례허식은 필요 없다. 응접실로 가지. 독대를 원한다.”
“알겠습니다.”
나는 사형을 뒤로 한채, 천마와 함께 별원 응접실로 향했다.
*
응접실.
비싼 자기로 장식된, 창살 사이로 달빛이 들어오는 이곳에서 나는 천마와 마주 앉았다.
나는 찻주전자에서 엽차를 천마의 잔에 따르면서 말했다.
“그래서. 이 검룡 후배를 찾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천마 선배.”
나는 검룡이라는 말에 힘줘서 강조하면서 말했다.
아니 왜 자꾸 다들 괴룡이라고 부르는지 모르겠다. 난 무림맹 공인 검룡이라고.후루룩.
천마는 차를 한 모금 마신 뒤에 내게 말했다.
“본좌는 연소월, 색마와 독대했다.”
뒤이어 천마는 본인이 독대한 대화 내용을 내게 간략히 설명했다. 물론 연소월이 적사월이라는 이야기는 천마도 하지 않았다. 천마 정도라면 눈치 챘을 텐데 일부러 숨기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튼 둘 다 내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특히 연소월은 사랑을 모르는 천마가 불쌍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사랑을 모르는 천마가 불쌍해?
내가 아는 적사월이 맞나? 부캐 컨셉에 본캐가 잠식당한 건지 알 수 없었다.
“······괴룡.”
천마가 나를 바라봤다. 그의 공허한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색마가 말하더군, 마음의 쾌락을 가르쳐줘서 공허함을 메워준 것이 괴룡 너라고. 그래서 묻겠다. 마음의 쾌락이라는 것이 대체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