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회차 환관이 남성을 되찾음-163화 (163/171)

163화 핑계

천마의 한 마디가 적사월의 심장에 송곳처럼 박혔다.

그 어떤 신공절학이나 절초보다 더 강렬한 일격에 적사월은 몸이 휘청이려는 걸 간신히 막아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적사월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녀의 얼굴에 피가 몰리며 뜨거워졌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대체.

어떻게.

왜 그 이야기가 천마의 입에서 나온단 말인가?

적사월의 머리가 하얗게 물들었다. 연모한다니? 누가? 내가?

그런 건 아니다.

아직.

아직 적사월의 마음은 그에게 주지 않았다. 아직이다. 능월향, 연소월의 마음을 줬을 뿐이다.

그래, 그걸로 된 거다.

이제 와서 누군가를 진심으로 믿고,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나뿐인 피붙이였던 어머니는 그녀를 버렸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의 도리로서, 아버지처럼 섬겨야 했던 사부는 그녀를 범하려 들었다.

부모와 스승과의 인연은 하늘이 내린 인연이다. 하지만 적사월은 천륜(天倫)에게 배반당했다.

이 저주받은 미모 때문이었다. 천륜마저 끊어낼 정도의 미모다. 다른 사람과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러니 누군가를 믿을 수도, 마음에 둘 수도 없다.

그런데.

그런데 어째서.

적사월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 그건······.”

적사월의 말끝이 흐려졌다.

아니다.

그렇게 답하면 된다. 하지만 그렇게 답할 수 없었다. 적사월의 손이 떨렸다.

“······이철수도 천지회의 일원이다. 그래서 내가 보호하려던 것······. 뿐이다······. 그리고 연모는······. 연기일 뿐이다. 사파 후기지수 연소월로서······. 그를 보호하려면 연모한다는 쪽이 붙어있기 자연스러우니 말이다. 이제 되었느냐? 흥.”

적사월이 더듬더듬 핑계를 댔다. 연모하지 않는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지금 그런 말을 하면, 왠지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르는 것만 같아서.

그래서였다.

“호오. 그렇군.”

팔짱을 낀 천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사파제일인과 괴룡 둘 다 천지회의 일원이라면, 적사월의 발언은 당연히 일리가 있었다.

천지회의 후기지수를 천지회 중진이 보호하는 거니까 말이다.

하지만 말의 내용과는 별개로 적사월의 얼굴 표정은 달랐다.

천마신안의 안법을 굳이 사용할 필요도 없다. 누가 봐도 지금의 적사월은 얼굴이 잔뜩 붉어진, 사랑에 빠진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파제일인이 후기지수를 연모하다니······.’

염왕 적사월의 체면을 생각해도, 그동안 그녀가 천하제일미인으로 보인 행보를 생각해도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인 적사월의 얼굴이 지금 천마의 앞에 있었다.

누가 봐도 사랑에 푹 빠진, 양갓집 규수 같은 모습이 거기 있었다.

올해로 진갑(進甲)인 적사월이었지만, 지금만큼은 과년(瓜年)의 소녀와도 같이 사랑을 꿈꾸고 있었다.

‘······연모라······.’

천마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그 누구도 연모해본 적 없던 천마였다. 천마의 자리에 오른 이후, 신교를 다스리기 위해 정략결혼으로 칠대마종에서 바친 일곱 처녀와 동시에 혼인해서 부인을 일곱 둔 천마였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부인들에게 연모의 감정을 느낀 적 없었다. 그가 만든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감정을 느끼는 대상은 오로지 흥미가 동하는, 그와 같은 경지의 고수거나 그만한 잠재력이 있는 천무지체나 괴룡 같은 상대들 말고는 거의 없었다.

그의 피를 이은 자식조차, 천마의 눈에 차지 않았다.

그런데.

천마인 그와 같은 반열에 오른 고수인 염왕이, 한참 어린 후기지수를 진심으로 연모하다니.

‘진짜 미친 건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천마는 이해할 수 없었다.

동시에 강렬한 호기심을 느꼈다.

천마의 눈동자에 호기심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러는 동안에도 적사월은 변명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 그렇다. 그러니 오해하지 말도록. 천마. 본녀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 따위한테 지, 진심을 줄 리가 없지 않느냐?”

적사월이 흠흠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그래.

아직 진심을 주지 않았다. 아직은 아니다. 아직은 이르다.

아직은······.

하지만 계속 그녀의 눈앞에 이철수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적사월이 입술을 깨물었다.

뛰는 심장은 야속하게도 멈추지 않았다. 계속 얼굴이 화끈거렸다.

적사월의 머릿속이 혼란에 빠진 그때.

“염왕.”

천마의 차가운 목소리가 그녀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네 핑계는 잘 들었다.”

“피, 핑계라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더냐? 본녀는 이철수한테 아무런 사심도 없느니라!”

천마의 말에 적사월이 화들짝 놀라 반박했다.

핑계라니?

지금 말이 어디를 봐서 핑계란 말인가? 사심 없이 이철수를 감쌀 타당하고 합리적인 이유를 전부 대지 않았던가?

적사월의 내력이 담긴 목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에서 염부시왕공의 진기가 뻗어 나왔다. 염부와 지옥을 연상시키는 붉은 기파가 넘실거렸다.

순식간에 대전 내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공간이 휘어지듯 일그러지는 환영이 떠올랐다. 적사월의 적안에서 요사스러운 적광이 번쩍였다.

왜소한 미소녀의 몸에서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대한 기도.

현경의 고수, 염왕 적사월의 전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을 본 천마가 천마신공을 일으켰다. 파천, 하늘을 부술 정도로 압도적인 힘이 실린 흑색 기도가 적사월의 붉은 기파에 맞섰다.

고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두 절세고수의 기파가 부딪히자 대전이 흔들렸다. 그 상태로 천마가 말했다.

“염왕. 네 말은 틀리지 않았다. 확실히 합리적인 이유였지. 하지만 네 말과는 별개로, 네 얼굴이, 네 심장 박동이······. 진실을 말해주고 있다. 네가 말한 이유는 그저 핑계일 뿐이다. 연모하는 소년을 따라 신교로 오기 위한 핑계 말이다. 너는 이철수를 연모하고 있다. 대체 왜 부정하는 거지?”

천마가 적사월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스스로 마음을 부정하는 적사월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40년도 더 연하인 소년을 진심으로 연모한다는 사실이 수치스럽고, 주책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감정을 전부 읽힌 상태에서 스스로 부정해봤자 남는 건 없었다.

누가 봐도.

지금의 염왕 적사월은 천지회를 핑계로 소년 이철수를 따라왔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리고 동시에 궁금했다.

대체 왜, 현경의 고수가 소년에게 연심을 품게 되었는지 말이다.

이철수가 잠재력이 뛰어난 후기지수란 점은 천마도 인정했다. 그는 하늘이 내린 재능을 보유한 천마 본인조차 이해할 수 없는 내력 수발을 보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염왕이 보이는 이철수에 대한 감정은 그런 호기심이 아니었다. 연심이었다.

쿠웅.

천마가 일보를 내딛었다. 압도적인 천마신공의 기파가 사방팔방 비산했다. 고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신강의 바람이 천마를 중심으로 휘몰아쳤다. 천마가 말했다.

“진심을 말해라. 염왕 적사월.”

“으윽?!”

적사월이 뒷걸음쳤다. 같은 현경의 고수지만, 적사월은 천마보다 한 수 위의 고수. 종잇장 같은 차이지만, 동시에 천지와 같은 차이였다. 고수 사이의 대결에서는 한 끗의 차이가 승패를 가르는 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지금의 적사월은 천마를 당해낼 수 없었다.

‘왜지?’

적사월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내력을 일으켰다. 하지만 의념이 불안정했다.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주저하고 있었다.

‘대체 왜?’

적사월의 머릿속에 천마가 했던 말이 계속 맴돌았다.

이철수를 연모한다.

네 진심을 말해라.

진심.

적사월의 얼굴이 붉어졌다. 심장이 다시 뛰었다.

이철수에 대한 진심.

지금까지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주제다. 그녀는 누군가를 마음에 둘 수 없다. 인간 관계에서 언제나 상처 받기만 했다. 그래서 가면을 썼다.

신승.

그 빌어먹을 땡중의 조언이 떠올랐다.

신승은 그녀에게 솔직해지라 말했다. 그리고 웃었다.

‘솔직해지라니, 대체 어떻게.’

적사월이 한 걸음, 더 뒤로 물러섰다. 대전을 가득 메운 천마신공의 기파가 그녀를 향해 쏟아졌다.

의념이 흔들리자 내력 수발도 흐트러졌다.

“평정심을 잃었군. 염왕. 아직도 진심을 마주하지 못했나?”

천마의 차가운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

적사월은 입술을 깨물었다. 분했다. 천마의 말대로 그녀는 평정심을 잃고 있었다.

“지금의 네 태도는 이미 진심을 말해주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설마 모르는 건 아니겠지? 진갑의 나이를 먹은 노강호 주제에 약관도 안 된 무림말학처럼 굴 텐가?”

천마의 시야에 적사월이 담겼다.

이토록 쉽게 주도권을 내줄 정도라니.

연모의 감정이라는 게 대체 뭐길래 사파제일인을 흔드는 것인가?

천마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진실을 듣고 싶었다.

적사월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의 눈앞에 지금까지 이철수와 함께였던 모든 일이 주마등처럼 펼쳐졌다.

처음.

화면호검으로 이철수와 대면했던 기억. 화면호검의 시험을 통과한 것도 모자라, 운우지락을 운운하며 하물을 세웠던 이철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다음.

공동산에서 하산한 이철수와 능월향으로 만났던 기억이, 미염공에도 끄떡 없던 기억이 떠올랐다.

향기 없는 모란꽃이라는 이철수의 말은 그녀의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는 낙인으로 남아 있었다.

서문세가와의 대결, 이철수와 능월향이 통정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가, 그가 자신을 외면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의 일은 다시는 떠올리기 싫을 정도로 끔찍했다.

그가 오지 않는다. 외면한다. 감히 나를? 외면해?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 이후 후회했다. 왜 그랬을까. 그가 보고 싶었다.

이철수.

그가.

보고 싶었다. 함께 하고 싶었다. 용봉지회에서도 그랬다. 맨얼굴을 보고도 이철수는 흔들리지 않았다.

천하제일미, 저주받은 미모 때문에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맺을 수 없었던 적사월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비로소, 미모와 상관없이 그녀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생긴 것이다. 저주받은, 괴력난신의 영역에 오른 천하제일미의 영향을 받지 않는.

‘어쩌면 본녀는······.’

그날.

적사월의 모습으로 달마동에서 그와 만났을 때 그에게 연심을 품었던 걸지도 몰랐다.

아니.

그 이전, 능월향으로 만났을 때.

아니.

그 이전.

화면호검의 모습으로 이철수와 처음 대면했을 때부터······. 반했······.

화악.

거기까지 생각한 적사월의 얼굴이 저녁노을처럼 새빨갛게 물들었다.

이제야, 적사월은 비로소 깨달았다.

그녀는 첫 만남부터 이미······. 이철수, 그에게 반해버렸다는 사실을. 지금까지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래 천마의 말처럼, 신승의 말처럼.

지금까지는 그랬다.

“보, 본녀는······.”

적사월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시야에 천마가 보였다.

그녀는 맥동치는 심장을 안고, 잔뜩 붉어진 얼굴로 천마를 향해 선언했다.

“그래! 본녀는 이철수를 진심으로 연모한다! 그게 무, 무슨 문제라도 되는 것이냐!? 본녀는 천하제일미다! 본녀의 마음을 받는 이철수가 오히려 영광을 느껴야 할 처지란 말이다!”

0